영양에서 울진으로 넘어온 이튿날, 후포항에는 비가 내렸다. 여인숙의 흐린 창문이 포개져 창밖 풍경은 마치 희미해진 과거의 영상을 보는 듯했다. 밖으로 나섰을 때는 바닷바람으로 날씨가 쌀쌀한데도 눈이 아닌 비가 오는 것이 의아했다. 험상궂은 날씨와 달리 울진의 바다는 잠잠했고, 쾌청한 날씨에 거칠게 파도가 일던 지난 7번 국도 여행이 생각났다. 울진에서는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새하얗던 그 많은 산등성이는 보이지 않았다. 후포항의 모든 건물들은 자석에 달라붙은 철가루처럼 오로지 해안선에 의지해 삐뚤빼뚤 열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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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떠 향한 곳은 월송정. 빠른 길을 버리고 부러 국도를 따라 해안가를 운전한다. 언젠가 삼상사(三上思)에 관한 구절을 들은 적이 있다. 송대 시인 구양수에 따르면 사람은 크게 세 가지 경우에 좋은 생각을 얻는다. 침상(寢上), 측상(厠上), 마상(馬上)이 그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이 세 가지 중 마상(馬上)에서 얻는 마음의 편안함이 가장 큰 것 같다. 말(馬)을 대신해 오늘날 차(車)를 탄다면, 나는 운전하는 동안 앞유리로 스쳐지나가는 풍경 속에 생각을 흘려보내는 것이 좋다.
월송정이라면 이미 서너 번 들른 적이 있는 해안가의 고즈넉한 정각이다. 마음의 무게를 턱 내려놓고 싶을 때마다 찾는 곳이다. 서울의 여느 조용한 장소들과 달리, 월송정은 이 탁트인 공간을 나 혼자 점유하고 있다는 내밀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월송정 주차장에 도착한 시점에 장마처럼 굵어져 있었고, 나는 빗줄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주차장 옆 카페에서 주인이 기르는 강아지와 해찰을 부렸다가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월송정의 솔숲은 언제 걸어도 기분이 좋다. 걸으면서 생각을 가라앉히기에 과히 넓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숲, 커튼처럼 드리워진 솔숲을 양옆에 걸쳐두고 펼쳐진 에메랄드빛 동해 바다. 금강송에 낀 회녹색의 이끼들은 마치 한낮의 반딧불처럼 고요한 풍경에 신묘함을 더한다. 이 침엽수림에는 빗방울이 잎사귀에 실리는 마찰음도 없이, 저 멀리에서 파도가 잔잔하게 부서지는 소리만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땅에 떨어져 빛바랜 솔가지와 솔방울들 위로 저걱저걱 걷는 나의 발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