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영양(英陽)이었냐고 묻는다면 그저 목적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목적지가 없어도 어딘가에는 늘 도착해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그곳이 영양군, 그 안에서도 수비면, 그 안에서도 죽파리였을 뿐이다. 죽파(竹波),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눈앞에서 대숲이 너울댈 것만 같은 이 마을로 나를 이끈 것은 바로 자작나무 숲이었다.
겨울이 되고 오래 전부터 설경을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영양으로 오게 되었을 때 설국을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번 여정에서 나는 안동과 영양, 울진, 영덕을 차례로 들렀는데 이 중 영양에서만 산등성이의 북사면마다 눈이 녹지 않았다. 영양의 둥그런 산머리마다 밀가루를 체로 걸러낸 것처럼 고운 입자가 내려앉았고, 늠름한 솔가지에도 두텁떡 같은 눈덩이가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안동에서 영양, 영양에서 울진을 드나들 때마다 설국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곤 했다.
눈 내린 자작나무숲은 어떤 풍경일까. 그러한 궁금증은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던가. '눈(雪)'은 어린 마음을 설레게 해놓고, 앞으로 향하는 걸음은 자꾸만 더디 한다. 죽파리 자작나무숲은 입구로부터 5킬로미터가 조금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어 적당한 걸음으로 걸어도 편도 1시간 반 정도는 소요되니, 눈길을 그만큼씩 걷는다는 건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묵중한 눈과 함께 사위는 고요함에 잠겼고 눈이 발걸음을 견뎌내는 처연한 속삭임만이 일정한 박자로 귀를 메운다. 가끔 짐승의 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면, 기둥과 가지에 들러붙은 눈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혼비백산 흩어지는 소리다. 그렇게 얼어붙은 개울가의 사방댐을 몇 번이나 지나쳤을까, 오르막길이 왼쪽으로 휘어지는 지점에 오른편으로 자작나무숲이 펼쳐진다.
눈표범, 자작나무숲을 보고 처음 떠오른 낱말.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후반부에서 사진작가 숀은 설산을 내려오는 눈표범을 피사체로 포착하고도 이내 카메라의 렌즈를 거둔다. 카메라로 고정되는 찰나와 우리의 눈과 감각이 받아들이는 찰나는 결코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자작나무숲을 보며 도처에서 눈표범을 발견한 건, 아마도 설산에서 위장술을 부리는 일군의 자작나무의 교란 아닌 교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옹이와 우듬지는 눈표범의 검은 얼룩처럼 현명하게 보호색을 띠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하얀 직선과 직선이 포개어졌다가 나뉘었고, 그럴 때마다 옹이의 짙은 얼룩은 시시각각 산란(散亂)했다. 그 얼룩은 때로는 포개어져 맹수의 눈이 되었고, 때로는 흩어져 가죽 위 점이 되었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햇살을 인 검마산 자락은 그렇게 깊은 잠에 빠진 눈표범의 숨결을 아늑하게 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