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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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질 무렵주제 없는 글/印 2021. 4. 12. 00:54
유백색 꽃잎을 남김없이 떨운 벚나무가 말라붙은 피처럼 거무죽죽한 꽃받침을 앙상하게 드러내며 초봄의 황망한 인사를 마쳤다. 내게 아른아른 물결치던 벚꽃의 가녀린 손길이 아쉬워질 즈음, 무언가가 내 코 끝을 그윽하게 간질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옆에는 아직 만개하지 않은 라일락이 작고 아담한 포도 송이처럼 내 곁에서 숨죽이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달라는 듯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하지만 꽃잎을 틔우기 전일지언정 4월의 꽃향기는 꽁꽁 여민 꽃잎을 보란듯이 비집고 나왔다. 라일락 나무도 이렇게 클 수 있구나 싶을 만큼 높다랗게 자랐다. 햇빛에 어깃장을 놓으며 배배 휘감아 올라가는 나무 줄기를 보니, 꽃이 진 뒤에 본다면 등나무와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다. 가까이서 본 라일락 꽃송이에는 화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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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에서 노들까지주제 없는 글/印 2021. 1. 22. 01:35
흑석동의 재개발 소식이 들려왔다. 부동산 시장의 여러 지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고, 그에 발맞춰 정부의 부동산 정책도 숨가쁘게 쏟아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간에게 정주(定住)의 역사가 시작된지도 수만 수천 년에 이르는데, 정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당장 잠잘 곳이 없는 게 아닌데도 어딜가나 부동산은 핫이슈다. ‘강남불패’라는 말이 적나라하게 암시하듯 부동산은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문제다. 이제 ‘집’은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승부를 가려야 하는 ‘것’이 되었다. 흑석동은 교통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대학 시절 두어 번 흑석동에 사진을 찍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 적이 있다. 그러고선 마지막으로 흑석동을 찾았던 게 언제였는지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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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일기—눈 온 뒤 낙산에서주제 없는 글/印 2021. 1. 20. 22:55
초승달이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진 밤이다. 대한(大寒)을 넘기고 있는 이번 1월, 서울에는 세 번 눈이 내렸다. 낙산에서 찍은 이 사진들은 올해 들어 처음으로 눈이 내린 다음날에 찍은 사진이다. 혜화동이 아닌 창신동에서부터 낙산공원에 올랐는데, 매섭도록 추운 날씨였다. 그날 저녁 뉴스에는 한강에 얼음이 얼어붙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장갑을 끼고 나왔는데도 손이 꽁꽁 얼어서 셔터를 간신히 누를 수 있었고, 배터리 충전을 깜박했는지 카메라가 방전되었을 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내려오는 길은 동대문에서 끝났다. 아쉬운 대로 낙산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갈무리해본다. # 사진일기: 2021년 1월 20일의 주제; 인생에서 가장 흔한 것 또는 그런 것 중의 하나 실패. 살면서 성공이라 부를 만한 것도 있었지만, 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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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일기—성수동 야경주제 없는 글/印 2021. 1. 5. 00:05
어릴 적 그림일기를 쓰던 생각을 떠올리면서 “사진 일기”라는 포맷을 떠올랐다. 사진은 벌써 햇수로는 작년이 되어버린 며칠 전에 찍은 것이다. 원래는 일몰 전에 미리 가 있다가 사진을 찍으려고 생각을 했는데, 낮에 이런저런 행정처리가 생각보다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해가 진 뒤에야 사진 찍으려고 마음먹은 장소에 도착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석양이 남아 있는 틈을 타서 조금 급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집에 와서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잠실 방면으로 찍었던 사진의 노이즈가 너무 심했다. 셔터스피드라도 좀 더 열어놔여 했던 건데... 잠실 방면으로 보이는 한강과 마천루 조합도 볼 만했는데 아쉽지만 건질 수 있는 사진이 단 하나도 없다...=_= # 질투(enviada) “”(「사랑에 빠지기」(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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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행(with. 불곡산)주제 없는 글/印 2020. 12. 25. 00:39
코로나로 인해 일상에 제약도 많고 바깥 활동을 정상적으로 할 수가 없다보니 답답한 마음도 커지고 하루는 아버지와 겨울산을 다녀왔다. 서울에 있는 산은 웬만큼 다녀보았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산을 가기보다는 서울 근교의 산을 가기로 했다. 온도가 조금 오른 날씨를 골라서 오랜만에 양주를 다녀왔다. 불곡산(佛谷山). 경기도가 넓은 지역이고 이름 모를 크고 작은 산이 많은데, 불곡산이라는 산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전에 이 일대에서는 고대산과 사패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TMI. 구글맵에는 '불국산'으로 나오는데 계곡 곡 자를 써서 불곡산이 맞다) 소요산행 열차를 타고 양주역에서 하차. 양주역에서 북쪽으로 20~30분 정도 걸으면 주내 우체국이 나오고 이어서 양주시청이 나온다. 양주시청 왼편으로 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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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하동으로부터주제 없는 글/印 2020. 11. 12. 00:57
지난 번 종묘 출사에 이어 이번에는 인왕산 출사다. 출사라는 말을 붙이기도 좀 그런 게, 꼭 장비를 여러 가지 갖추지 않더라도 적어도 부지런은 떨었어야 했는데 오후 느즈막이 되어서야 인왕산 자락길에 올랐다. 지난 여름 카메라를 사두고 무료수리 보증기간이 끝나기 전에 카메라에 이상은 없는지 한 번 확인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중고로 카메라를 구입했던 가게에 잠시 들르는 겸사 가볍게 출사에 나선 것도 있고.. 올해 가을에 꼭 단풍을 보겠다고 지역별 명산의 단풍 예보도 샅샅이 살폈었는데, 결국 개인적인 사유로 인해 단풍이 무르익은 시기에 구경을 나설 수가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야외활동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여하간 그러디보니 짬을 내어 지난번 종묘에 갔을 때에는 아무래도 단풍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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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종묘주제 없는 글/印 2020. 11. 1. 01:20
올해 단풍을 구경하기 위해 속리산에 가려고 했다. 보은 방면에서 속리산을 오르면 천년고찰인 법주사도 둘러볼 수 있다. 그래서 지역별로 단풍 시즌이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검색을 해보다가 결국은 가을철 산행 생각을 접었다. 서울에서 보은까지 직선거리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지만, 보은, 그 안에서도 속리산을가기 위해서는 편도로 적어도 세 시간 정도가 걸린다. 코로나 유행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는 단풍 구경을 가더라도 영 찝찝할 것 같았다. 가는 방법도 문제이고, 머무르는 것 역시 문제다. 안동을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코로나가 잘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늦여름에는 남해 독일마을을 가볼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하루이틀 바쁘게 일상이 흘러가던 중 2차 파동까지 겹치면서 좀 더 지켜보자며 가을로 여행을 미루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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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틀 사흘주제 없는 글/印 2020. 9. 19. 21:09
# 별 볼 일 없는 사진들이지만 따로 시간을 내어 사진을 담았다보니 어쨌든 포스팅으로 묶어본다. 하루에 다 찍은 사진은 아니고 이틀에 걸쳐 쏘다니며 찍은 사진들이다. 그중 하루는 ‘제비다방’에 갔다. 아마 이 카페를 눈여겨 봐둔지는 몇 년이 된 것 같다. 밤이 되면 라이브 공연이 이루어지는 카페인데, 그런 카페의 특성상 낮에는 사람이 많지 않고 오는 사람들도 대체로 테이크아웃을 하는 단골인 것 같다. 카페 안의 스케줄을 보면 대체로 밴드 음악인데 꽤 스케줄이 가득하다. 내가 간 시간은 낮 시간대. 손님은 나말곤 아무도 없었다. 따듯한 카페라떼를 주문한 뒤 들고 온 책 『창백한 불꽃』을 읽었다. 뭐 이런 책이 다 있나 생각하다가 점점 재미있게 읽었다. 본문에다 각주까지 페이지를 뒤적이면서 봐야 하는데,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