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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화랑로로 사진을 찍으러 다녀왔다. 화랑로는 서울에서 걷기 좋은 길로 꼽히는 명소이기도 하지만, 도시 외곽에 위치하다보니 경치에 비해 사람의 발걸음이 적은 곳이다. 화랑로라는 이름은 아마도 인접한 육군사관학교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 이 일대는 정부에서 주택공급안을 발표하면서 언론의 보도를 타기도 했던 지역인데, 아름드리 나무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지역의 제반 여건(특히 교통여건)을 고려했을 때 이 지역에 대규모 주택을 공급한다는 건 지역 사정에 어두운 결정이 아니었나 싶다. 여하간 화랑로의 오른편으로는 몇 년 전 철길을 공원화한 경춘선 숲길이 있었지만, 나는 일렬 종대로 선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고 싶어 화랑로를 따라 걸었다.
사실 이날 들고 나오려던 카메라는 작년 여름 중고로 마련한 라이카X였는데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모처럼만에 캐논 500D를 집어들었다. 지금은 사라진 명동의 어느 카메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샀던 캐논 500D. 그 때도 마침 여름이었다. 작년에 마련한 카메라로 사진을 자주 찍으러 다녔던 건 아니지만 막상 500D를 쓰려고 보니 너무 어색했다. 일단은 풀프레임에서 크롭바디로 넘어오다보니 화각이 좁아진 문제가 있었고, 한동안 단렌즈에 익숙해져서 줌 조절하는 것을 깜박하곤 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이어서 500D로 계속 사진을 찍다보니 아직까지도 쓸 만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9년에 마련한 카메라인데 휴대하기에 조금 무겁다는 점만 제외하면 원하는 사진을 찍겠다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 걸 보면 기기 욕심을 내는 것도 조금 허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랑로로 급작스럽게 사진을 찍으러 나선 데에는 물론 바람을 쐬고 싶다는 것도 있었지만, 더 단풍을 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번 주 이렇게 추운 비가 내렸으니 단풍잎도 많이 떨어졌을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날씨는 꽤 맑은 편이었고 되돌아오는 길에는 날씨가 조금 흐려져 있었다. 맞은편 경춘선 숲길에는 불긋한 단풍나무도 있고 바로 옆 태릉선수촌 일대에는 푸른 빛의 소나무숲도 있지만 정면으로 보이는 것은 높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들뿐이다. 개나리, 쑥, 감, 밤, 고사리 색깔들이 나무마다 제멋대로 뒤엉켜 있다. 단풍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정성스레 선별된 화초로 만든 꽃다발 같기도 하다.
화랑로는 꽤 긴 길이다. 대학 입구, 태릉, 태릉선수촌, 강릉, 또 다른 대학 입구를 스쳐지나가며 남양주에 가까워지는 지점까지 계속 걸었다. 한낮에 내리쬐던 부드러운 햇빛도 자취를 감추고,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기는 싫어서 강릉으로 들어갔다. 태릉과 강릉은 숲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산길을 따라 걸으면 다시 시작지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단풍의 끝자락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이 보인다. 은평 한옥마을에 머무르며 잠시 들렀던 서오릉의 서어나무길을 떠올려 보았다. 이 길에서 한 그루의 서어나무를 발견할 것 빼곤 대부분이 소나무 아니면 참나무들, 때때로 군락을 이루지 못한 억새풀 몇 포기가 앙증맞게 오솔길을 장식한다.
이날 쉬지 않고 걸은 킬로수만 6킬로를 넘어섰는데, 아주 오래 전 제주 올레길 한 코스를 주파하는 데 얼마를 걸었던가 가늠해보면 그리 긴 거리라 할 수 없는데도 급작스럽게 피로가 몰려왔다. 날씨도 반기지 않아서 아직 해가 지기까지 시간이 남았는데도 거리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졌다. '어떤 순간'을 담아보려던 이날의 여정은 태릉을 나서는 길에 마침표를 찍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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