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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색 꽃잎을 남김없이 떨운 벚나무가 말라붙은 피처럼 거무죽죽한 꽃받침을 앙상하게 드러내며 초봄의 황망한 인사를 마쳤다. 내게 아른아른 물결치던 벚꽃의 가녀린 손길이 아쉬워질 즈음, 무언가가 내 코 끝을 그윽하게 간질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옆에는 아직 만개하지 않은 라일락이 작고 아담한 포도 송이처럼 내 곁에서 숨죽이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달라는 듯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하지만 꽃잎을 틔우기 전일지언정 4월의 꽃향기는 꽁꽁 여민 꽃잎을 보란듯이 비집고 나왔다.
라일락 나무도 이렇게 클 수 있구나 싶을 만큼 높다랗게 자랐다. 햇빛에 어깃장을 놓으며 배배 휘감아 올라가는 나무 줄기를 보니, 꽃이 진 뒤에 본다면 등나무와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다. 가까이서 본 라일락 꽃송이에는 화사하게 꽃을 틔운 것들도 있는 반면, 양분이 충분히 미치지 못했는지 꽃송이 끝에는 아직 망울로 남아 있는 녀석들도 있다. 꽃을 틔우기 전까지 망울은 자줏빛을 흠뻑 머금었다가, 일단 꽃을 틔우면 꽃잎마다 팔레트의 물감을 고루 발라 연보랏빛으로 변모한다. 이 꽃망울을 언뜻 보면 생물 시간에 배웠던 난할(卵割) 과정을 거치는 세포 같기도 하다. 하도 오랫동안 라일락을 들여다보니 이제는 스페이드 꼴의 라일락 잎사귀까지도 익숙해진다.
낙화(落花)는 자연의 순리이지만 그럼에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순간이기도 해서, 라일락이 내 곁을 비우면 그 뒤에는 무엇이 내 마음을 메우려나 헤아려본다. 벚꽃보다 먼저 핀 개나리는 아직 한창이고, 진달래꽃의 선명했던 빛깔은 점점 시들시들 희미해져간다. 이를 대신해 철쭉이 치고 올라오지만 진달래만큼 운치는 없고, 가만보니 저 멀리 배롱나무의 표독스런 꽃망울이 시야에 들어온다. 배롱나무의 꽃이 만개할 즈음이면 초여름의 뙤약볕이 땅의 수분을 앗아가기도 하고 장마와 매미 울음소리가 더위를 달래기도 하겠지. 시간 안에서 뼈에 사무치게 느끼는 것은 늘 무상(無常)함, 무상함, 그리고 무상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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