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印
-
파주, 여의도, 신림주제 없는 글/印 2023. 4. 25. 19:22
# 필름 카메라를 집어든 동기는 뚜렷하지 않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인터넷으로 필름 카메라를 찾아보던 중, 30년도 훌쩍 넘은 아버지의 니콘 카메라가 떠올랐다. 나는 보는 즉시 그 카메라가 마음에 들었고, 필름 두 개를 주문했다. 필름 하나에 이만 원 돈이라니 필름 카메라를 쓰던 시절 삼천 원이면 충분히 필름을 구하던 때와 비교하면 비현실적인 가격이다. 하지만 나는 카메라를 찍는 동안 이 카메라가 더 좋아졌는데, 셔터스피드와 조리개, 줌을 하나하나 조절하고 필름을 아껴가며 사진을 남기는 맛이 있었다. 최고와 최대만을 눈여겨보며 숨가쁘게 살아온 내가 다른 호흡 방법을 찾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나는 36장 필름에 파주와 여의도, 신림에서 사진을 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살아남은 필..
-
목련은 피고 지고주제 없는 글/印 2023. 4. 11. 03:13
올 봄에는 목련보다도 벚꽃이 더 빨리 폈다. 그래서인지 땅바닥에 어수선하게 떨어진 두꺼운 목련잎이 더욱 처연해 보인다. 자신을 채 내보이기도 전에 주위의 변화에 휩쓸려버린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이 탐스럽고 도타운 꽃잎은 다른 나무에서 떨어진 것들보다도 목직해 보이는 까닭에 이 세상의 중력을 더 많이 감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슷썬 생감자를 닮기도 한 새하얀 목련잎에서 향기와 함께 알싸한 냄새가 올라온다. 커다란 꽃잎이 빨아들인 봄의 피. 낙화함으로써 생채기가 난 것처럼 선혈 냄새같은 것이 올라온다. 이 한 송이 목련 잎은 가장자리부터 피딱지처럼 메말라감으로써 이제는 여름으로 아물어 갈 것이다.
-
나의 작은 호수주제 없는 글/印 2022. 12. 26. 22:02
# 한번은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호수같은 친구였다고. 바다같이 넓은 마음, 바람처럼 변덕스런 마음, 해바라기처럼 한결같은 마음 등등 귀에 익을 법한 하고많은 표현을 제쳐두고 나를 '호수'에 빗댄 친구의 말을 들으면 속으로 조금 비웃었던 것 같다. 호수라는 낱말 뒤에 친구가 붙인 형용사는 고요함, 흔들리지 않음, 늘 그 자리에 있음 따위의 것들이었고, 나는 다시 한번 속으로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호수같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 안에는 항상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오리가 있었다. 그 회오리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거셌고 내 마음을 아프게도 했다. 그래도 그가 보기에 내가 호수같았다면, 어느 누군가에게는 콩코드 호수가 되어주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 올해는 가을이 길어진 만큼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