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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 (feat. 프란츠 카프카를 위한 오마주)주제 있는 글/Théâtre。 2021. 2. 22. 15:31
누군가의 기준이 되려고 살지마
네가 틀린 게 아니라, 네가 틀린 세상에 태어난 거야작년 한 해는 공연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쉽지 않았다. 몇 해째 해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 상연되는 작품들도 찾아보곤 했지만 작년만큼은 걸음을 하지 못했다. 여느해보다도 규모가 축소되어 개최되었지만, 예매가 한창 시작되던 8월 즈음 2차 유행이 커지면서 극장을 찾는다는 생각 자체를 하기 어려웠다. 때마침 퇴사 준비를 하면서 연극을 관람한다는 게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뮤지컬 <호프>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작년 11월말, 그러니까 겨울로 접어드는 늦가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작년 겨울 다시 한 번 팬데믹 유행이 커지고, 퇴사 이후의 일들을 준비하면서 공연장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호프>를 보러 간 것이 뮤지컬이 막을 내리기 사흘 전의 일이다. 금요일 저녁 종로5가의 어느 공연장, 2층 관람석의 가장자리에 미어캣처럼 앉아 연극을 관람했다. 아마 국내 창작 뮤지컬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거의 7~8년 전쯤 홍대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적이 있는데, 이 역시 창작극은 아니었다.)
결핍. 프란츠 카프카의 유작 반환 소송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주제는 이것이 아닐까 싶다. 발을 딛고 살아가는 땅으로부터 박해받는 유대인.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인. 모정을 애걸하지만 엄마로부터 외면받기 일쑤였던 한 꼬마아이. 멸시와 홀대에 길들여진 주인공 호프에게 남은 것은 K라는 유대계 작가가 남긴 미발표 원고뿐이다. 호프는 원고의 내용이나 가치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온갖 수모 속에서 건져낸 이 원고 안에 아주 단단한 자신만의 누에고치를 짓기 시작한다.
K의 원고는 그녀에게 뼈저린 불행을 가져다준 원흉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그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강박적으로 집착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 돈과 명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신감을 박탈해 간 K의 원고이지만, 호프는 그 원고를 벗어나서는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다. 어느 순간 호프는 동네에서 ‘미친 여자’로 통하게 되었고, 그 젋은 시절 ‘빛나던’ 모습은 온데간데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너무나도 늙고 추레해진 그녀에게 지금이라도 누에고치에서 나오라고, 그리고 그녀 자신을 되찾으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녀는 병들었고 지쳤고, 무엇보다도 절망 속에서 안온함을 느낀다. 그런 그녀가 누에고치의 뒤엉킨 실타래를 헤치고 ‘변신(metamorphosis)’해 나가는 이야기가 이 뮤지컬의 뼈대를 이룬다. 아주 달콤한 변명거리가 되어주었고 시덥잖은 핑곗거리가 되어주었던 K의 원고라는 실체적 허상으로부터 그녀는 반드시 해방되어야만 한다.
관객 앞에 선 배우라는 직업은 참 멋져 보인다. 배에서 스멀스멀 올라와 목청껏 흘러나오는 운율과 가사. 분위기를 압도하는 시선과 동작. 동료 배우들과 이어지는 매끄러운 호흡들과 울림. 감정의 지배와 전달력. 관객을 장악하는 카리스마. 겨울이 다 가기 전 멋진 공연을 보아 다행스럽다. [2021.1.20 봄바람이 올라오는 늦은 밤, 영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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