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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일상/film 2024. 12. 28. 11:08
많이 늦은 영화 리뷰, 미망.친구가 광화문을 좋아하는 나에게 추천해준 영화로, 모처럼 동행인이 있던 영화관람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극중 내내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자리한 광화문을 맴돌기는 하지만, 첫 장면은 옛 서울극장이 자리한 종로3가 일대에서부터 출발한다. 나중에 서울아트시네마로 이름을 바꾸었던 서울극장의 텅빈 관람석에 대한 아늑한 기억과 함께, 비좁은 골목길 철물점의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 무심하게 주고 받는 남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계절은 여름에서 겨울로 건너가고, 인물들은 광화문과 종로 사이 어딘가를 배회하고, 누군가를 만났다가 헤어지고, 잊었다가 다시 떠올린다.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迷妄),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未忘), 멀리 넓게 바라보다(彌望),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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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의 수수께끼일상/book 2024. 11. 11. 10:56
…증여는 유력한 두 대리인(시장과 국가)에게 장악되었다. 시장(직업 시장, 재화와 서비스 시장)은 이해타산, 회계, 계산의 장이며, 국가는 법을 존중하고 법에 복종하는 비인격적 관계의 장이다.—p. 18 모스는 분명히 왜 어떤 사회에서는 “증여가 경제와 도덕을 지배하게 되는지”를 자문했다. 그가 내놓은 대답은 몇몇 조건이 충족될 때 그런 사회가 출현한다는 것이었다. 그 조건이란 천째, 사회의 기틀을 이루는 사회적 관계를 생산하는 데 인격적 관계가 중요한 역할, 아니 오히려 지배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스는 이것이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보았다. 인격적 관계가 지배적인 역할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을, 자신들의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 있어 온갖 이해관계가 얽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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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Crowd)주제 있는 글/Théâtre。 2024. 10. 30. 12:50
쓰레기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흙바닥 위로 15명의 인물이 슬로모션으로 차례차례 입장한다. 청바지를 입은 사람, 하이힐을 신은 사람, 모자를 눌러쓴 사람, 가방을 메고 있는 사람, 생김새도 인상도 서로 모두 다르다. 이들의 동작은 너무 느려서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다가, 마치 터널 안에서 암적응을 하는 것처럼 점점 이들의 리듬 속에 흡수되어 간다. 어떤 이는 흡연을 하고, 어떤 이는 바닥에 쓰러지고, 어떤 이는 입을 맞춘다. 이들의 느린 동작은 어느 순간 튕겨나온 것처럼 발작적인 동작을 취한다. 하나의 동작이 완결되기도 전에 다른 동작이 시작되고, 서로의 교감은 완성도 미완성도 아닌 채로 남는다. 이 무언극에서 침묵을 가끔씩 깨뜨리는 외마디 비명은 무대 위에 올라선 15명의 군상이 빚어내는 마찰음이다.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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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에 관하여주제 있는 글/<Portada> 2024. 10. 29. 22:21
La peur du déclassement, moteur de l’ascension des populismesContrairement à ses concurrents « chute » ou « déchéance », le « déclassement » est un objet sociologique identifié dès les années 1960. Mais les passions que le mot suscite se déchaînent depuis une quinzaine d’années dans le débat public.Par Marion Dupont Publié le 02 octobre 2024 à 14h30계급 하락에 대한 두려움, 포퓰리즘 득세의 동력이 되다'추락' 또는 '타락'과 대비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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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4호선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4. 10. 27. 12:08
납덩이 같은 피로함을 느꼈던 하루, 저작권법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간선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목젖이 보일 만큼 고개를 젖히고 잠이 든 줄도 몰랐던 하루, 잠에 취해 있다가도 내려야 할 정류장에 가까워지면 정신이 번쩍 드는 나의 귀소본능은 가끔씩 놀랍기까지 하다. 몇 주간 전 직장의 동기, 군대 동기, 대학 후배까지 평소에 없는 저녁 약속까지 잡고, 심지어는 휴가를 걸어놓고 나와서 일을 하는 나를 보면서, 나 자신에게 너무 많은 당위(Sollen)를 뒤집어 씌우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어느덧 내 몸은 이런 당위를 견디지 못하고 종종 깊은 휴면에 빠진다. 시청 앞에서 남대문 시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가을치고는 따듯한 햇살이 충일했다. 오래된 카메라 가게들과, 이곳의 명물이 된 호떡집을 지나 내가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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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المتحـــف)주제 있는 글/Théâtre。 2024. 10. 26. 10:21
우리나라에서 팔레스타인 출신 감독의 현대극을 관람할 수 있는 귀한 기회가 있었다. 예년처럼 SPAF 연극의 리스트를 살피다가 뒤늦게 눈에 들어온 작품, . 우리나라에 거의 소개된 적 없는 아랍권에서 연극이 들어왔다는 점, 사형수와 형사간의 심리극을 그리고 있다는 점, 그러한 난해한 주제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연극을 예매하게 되었다. 연극에서 맨처음 나를 사로잡은 건 무대 위에서 카랑카랑하게 울려퍼지는 아랍어 대사였다. 미디어에서도 접하기 힘든 이들의 언어는, 마치 살면서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박자와 운율을 들은 것처럼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실험적인 도구들이었다. 삼각대 위의 카메라는 인물을 클로즈업하고 여러 각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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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거짓된 삶일상/book 2024. 10. 7. 13:24
어른들의 세상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분별력 있는 그들의 머릿속과 지식으로 가득한 그들의 몸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무엇이 그들을 파충류보다도 못한 믿을 수 없는 동물로 만들어버린 걸까.―p. 185~186 그날 로베르토는 꽃잎으로 사랑 점을 칠 때처럼 한 단어를 수없이 반복해서 말했는데 그것은 바로 ‘죄책감’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기억만은 확실하다. 로베르토의 말을 들으니 그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로베르토는 죄책감의 의미를 바로잡고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죄책감이 흐트러진 존재의 조각들을 꿰어줄 바늘이라고 했다. 로베르토는 죄책감이 자기 스스로에 대한 날선 경각심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했다.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