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하라의 구시가지는 ‘오래된 동네’라고는 하지만 관광지로 재정비가 되어서 실상은 오히려 옛스러움을 느끼기 어렵다. 관광이 용이하도록 방부 처리된 공간에 가깝다. 오히려 큰길에서 떨어진 시장(bazaar)과 학교(madrasasi), 골목골목을 통해 옛 풍경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이곳의 유적지를 다니다보면 19세기~20세기 초에 찍은 흑백 기록사진이 꽤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는데, 1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곳들도 있다. 가령 부하라 아르크가 그렇다.
** 이제 알고 지낸지도 9년이 넘어가는 J는 내게 부하라의 야경을 반드시 챙겨보라고 했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인 법. 혼자 여행하는 자에게 일용할 양식은 귀중하다. 우즈베키스탄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신축인 게 분명한 건물에 입점한 카페에서 차가운 음료로 갈증을 해소했다. 42,000솜, 한화로 4,200원이니까 관광지의 물가는 웬만한 한국물가에 뒤지지 않는 셈이다. 그렇다고 맛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그래도 얼음이 들어간 음료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에 감지덕지다.
내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초로의 일본인은 두 번째 맥주를 시킨다. 단정하게 콧수염을 기른, 역시나 19세기 흑백사진 안에서 튀어나온 듯한 외모다. 맥주가 어떤 초대의 시그널이 된 것일까, 테라스에 마련된 테이블이 부족해지자 한 독일인 남성이 이 일본인에게 합석을 청한다. 이 독일인 남성에게는 사실 일행이 있었던 모양인지, 내가 자리를 일어설 때쯤엔 독일인 두 명이 더 합류했고 다같이 쨍그랑 맥주잔을 부딪치며 여행 기분을 한껏 내기 시작했다.
***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이른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라비 하우즈(Labihavz), 부하라에 대한 첫 인상은 중세 건축물로 에워싸인 이 검은 연못이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광지로서 다분히 상업적인 분위기가 넘치고, 재력 있는 서구의 중장년 여행객들과 더러 무모한 젊은 배낭여행객이 혼재된 이곳. 양고기와 닭고기, 채소로 된 샤슬릭을 두세 개, 삼사에 생맥주까지 기분을 내본다.
연못 한가운데 시원하게 물을 내뿜는 분수는 마치 유원지에 온 듯한 분위기를 주었고, 내가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쿠켈다쉬 마드라사(Ko’kaldosh Madrasasi)가 아니었다면 이곳이 중세 교역로로서 번창을 누린 오래된 무슬림 도시라는 걸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등학생 쯤 되었을까 아무리 보아도 미성년자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내어온다. 이 정도 정신없는 장사라면 ‘생존 영어’를 익힐 법도 하건만 기본적인 영어는 되지 않고, 이곳에 와서 금강산 식후경하겠다고 먹을 것과 술을 주문하는 내가 어른으로서 채신머리 없어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내 테이블을 맡아주었던 어린 학생에게 20,000솜인가 팁을 주었다. 이런 꽁돈으로나마 아이의 생계의 보탬이 되었으면 했다기보다는, 나의 복잡한 마음을 털어내기 위한 일종의 의식(儀式)이었다. 그만큼 소년의 얼굴은 때묻지 않았다.
****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집집마다 전깃불을 켜고 거리에는 전등이 들어올 시각이 되었다. 나는 필름 카메라를 두고 이번에는 디지털 카메라를 집어들었다. 특정 여행지를 잘 추천하지 않는 J가 거듭 추천한 야경이어서 내심 기대했지만, 칼란 미나렛 앞에서는 가설무대가 설치되어 패션쇼 같은 걸 진행하면서 한창 행사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어 내부로 진입하기 어려웠다. 맞은편 건물의 루프탑에 올라가 건물을 조망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입장료를 요구했다. 50,000솜(한화 5천 원), 터무니 없는 가격이었다.
그럼에도 부하라에서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밤인지라 속는 셈치고 지폐로 지불을 하려고 했으나, 현금이 모자랐다. 더 노력을 기울여 이번에는 인근 ATM기에서 현금을 인출하려고 했지만, 무슨 까닭에서인지 계속 오류가 발생했다. 미국달러 단돈 250달러만 현금으로 챙겨온 나로서는 현금을 더 인출하고 싶었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다. 이곳에서는 ATM기에 현금이 부족해서 인출이 안 되는 경우도 심심찮지만, 아무리봐도 내가 사용하는 카드의 문제였다.
통신사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이 있던 직후라 해외결제 설정을 바꾸는 것도 염려되었고, 들고 온 카드도 직불카드는 없고 신용카드뿐이어서 현금 인출에 제약이 있었다. 이런 현금난(?)은 사마르칸트에서 한번 더 큰 문제가 되었으니, 이 역시 준비 부족으로 외지에서 겪어야 하는 고초였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어쩌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