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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는 작가의 인터뷰를 담은 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다. <파친코>는 다큐멘터리를 접하기 전부터 서점 매대에서 눈에 띄는 자리에 진열된 책이었지만, 제목이 지닌 부정적인 어감 때문에 읽기가 꺼려졌다. 내가 아는 그 파칭코라면 과연 그걸 소재로 어떻게 장편 소설을 풀어나가겠느냐는 의구심도 없지 않았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너무 피상적인 나머지, 소설의 전개를 그려볼 상상력이 빈곤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속 카리스마 넘치는 작가의 모습을 보며, 어쩐지 저런 작가의 글이라면 한번 읽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것만 다섯 세대가 등장하기 때문에 조각 같은 에피소드가 방대한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파친코나 재일 교포에 관한 이야기라고 일축하기 어렵다. 야쿠자라든가 파친코 사업, 자이니치라든가 하는 레이블링(labeling)을 걷어내고 보면, 이 책은 그저 사회의 주변부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사회의 주류로 편입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 삶의 가능성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평범한 모습에서 벗어나 있지만, 가족과 친구, 연인과 같이 삶의 바닥을 이루는 관계 안에서 무너진 삶을 다시금 구축해나간다.
소설 속에서 일본 사회의 주류라고 부를 만한 등장인물은 거의 소개되지 않는다. 소설의 종반부에 투자은행에서일하게 된 솔로몬의 상사로 가즈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정도인데, 그가 내뱉는 대사의 한 구절은 역겨울 만큼 의미심장하다. “제다이, 잘 알아두게.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다는 걸 아는 것보다 더 엿 같은 건 없어.(p.311)” 일본 사회에서 전형적인 성공 방식에 따라 출세한 가즈는, 일본 사회를 구성하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삶의 경계로 자신을 내모는 대신, 다수의 동질성 안에서 안주하려는 세태를 일갈한다. 일본 사회에서 전형적인 성공 방식으로는 절대 출세할 수 없었던 솔로몬에게, 하지만 마침내 출세의 문턱에 다다른 솔로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그는 대단히 기만적이다. 사회의 절대 다수에게는 ’보통인 것‘이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대놓고 비웃기라도 하듯이.
모든 사회에는 그 안에서 구별짓기가 있고, 아래가 없으면 위가 있을 수 없듯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재일 교포와 같이 사회로부터 낙인찍힌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사회의 저층부를 이루는 사람들의 삶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회의 중심부를 이루는 집단의 강력한 척력을 견뎌내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끼리 나름의 인력을 만들며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삶의 바닥에서 오늘과 내일을 치열하게 이기고 이겨내는 그들의 삶은 그래서 더욱 적나라하다. 그들이 삶의 돌파구를 찾아가는 경로에는 숱한 차별과 멸시, 조롱이 끼어든다. 지워지지 않는 낙인의 더께 위에서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누구도 도전해보지 않은 개인적 가능성이자 역사적 가능성이다. "그들의 삶은 반드시 기록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인터뷰에는 더 이상의 부연이 필요 없다.
요셉은 아이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이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한 번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남자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무엇이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고, 용서 없이 사는 것은 숨을 쉬고 움직이기만 할 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p. 114~115
그들은 모두 가능성과 두려움, 외로움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매일 아침, 모자수와 직원들은 당첨 결과를 조작하려고 기계를 살짝 손봐서 돈을 따는 사람은 적고 잃는 사람은 많게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자신이 행운아일 거라는 희망을 품고 게임을 계속했다. 어떻게 성공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겠는가. 에쓰코는 이 중요한 면에서 실패했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이길지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믿어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파친코는 바보 같은 게임이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았다.
—p. 253~254
노아는 규칙을 모두 지키면서 최선을 다하면 적대적인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다. 노아의 죽음은 그런 잔인한 이상을 믿게 내버려둔 선자의 잘못일지도 몰랐다.
—p.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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