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의 이런 적극적 행동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레지스탕스의 냄새를 맡게 된다. 알제리전쟁이 발발한 시점은 대독항쟁으로부터 10년도 안 된 시기였고 저항의 정신은 부식되지 않았었다. 프랑스인 다수가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것은 아닐지라도 대독저항이 프랑스 현대사와 지식인의 사고에 미친 영향은 심대하다. 이는 레지스탕스를 도운 민중이 매우 적었다는 사실로도 희석되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제리전쟁에 대한 프랑스 교회의 비판은 알제리 자체가 그 원천이었다. 오랫동안 식민지와의 깊은 연관으로 갖가지 경험의 보고(寶庫)가 된 식민지는 교회의 존재를 새삼 되새기게 했다. 전대미문의 세계전쟁 직후에 가톨릭의 신자나 의례가 퇴조하는 상황이 되자 교회는 오히려 민중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식민지인은 민중 중의 민중이었다. ―p. 97~98
로마 식민지였던 골(Gaule)이 라틴의 멍에를 감수하지 않으려 한 그날 프랑스의 운명은 시작되었다. 그 프랑스가 20세기 복판에서 자기 운명을 결정한 다른 민족을 거부하는 광경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프랑스가 지금껏 원해왔던 합병 방식의 식민지화는 총과 칼, 경찰에 의한 고문, 온갖 형태의 정치적 위선일 뿐이다. 1789년 이래 자유의 길을 개척했다고 주장하는 이 민족은 이것이 개탄스럽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 공화국의 가치를 공공연히 부정함으로써 모멸을 겪게 되었다. ―p. 103~104
카뮈는 사회경제적 문제가 결국 정치적 요구를 낳게 된다는 명확한 인식을 가졌다. ‘인간 이하의 인간(Untermenschen)’으로 우리가 매몰되어 있다는 것은 그에게 새롭지 않았다. 그것은 카빌리의 가난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며 새로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마주한 궁핍한 사람들의 얼굴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p. 131
시민은 국가가 하는 일에 무조건 복종할 것이 아니라 부당한 권력이 행사되면 따르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근대의 저항권 사상을 체현했던 것일까? 그때 국가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도덕성이며 그것은 나한테 소중하면 남한테도 소중하다는 상호호혜의 가치에 기초한다.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이 고통을 겪든 약탈을 당하든 내 알 바 아니란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 철학자 장송으로서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이들의 이런 직관을 당연히 더 밀고 나가야 했다. 장송의 논리적 출발은 알제리가 프랑스 땅이라고 믿는 공식 견해의 프랑스가 이 나라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p. 233~234
장송망 사건은 무의식적으로 사법정신의 정착, 국가가 보일 수 있는 유연성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이들은 심한 말을 듣고 모욕을 당하고 때로는 맞기도 했지만 심문 과정에서 상식에 어긋난 가혹행위를 겪지는 않았다. 장송이 그토록 알제리인 보호에 골몰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알제리인은 잡혀가면 고문을 당하지만 프랑스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자신이 법을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없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항쟁에 나선 사람을 법적으로 지원하고 싶었지만 법은 늘 체제만 편들었다. 그 때문에 장송에게 법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프랑스 국민의 공동체가 존재해야 법이 존재하는 것인데 ‘고문과 바주카포와 수용소의 공동체’를 국민의 공동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배신을 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런 일을 하고도 언제나 말을 바꾸는 그들”이었다. 더구나 무법자라고 경멸받는 반란자의 세계는 법을 지킬 수 없도록 이미 짜여 있었다. 장송은 그 행동이 정당하다고까지 말하지 않고 그들에게 필요하다고만 했다. —p. 234~235
알제리전쟁이 프랑스 사회에 보기보다 깊이 오래 남게 된것은 1956년에 40만 명 이상, 전쟁기 전체로는 약 170만 명이 투입된 대규모의 징집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전쟁 세대는 그 이전과 이후의 두 세대와 사뭇 달랐다. 대독 레지스탕스는 정치적, 사회적, 문학적으로 번듯하게 얼굴을 드러냈고 또 68세대는 마치 “발언하는 것이 존재의 양식인 듯” 살았지만, 알제리전쟁에 투입된 징집자들은 발언은커녕 보고 들은 것을 속으로만 삭여야 했다. —p. 240
사실 프랑스 법정신의 발현은 제2제정을 타파한 제3공화정의 원칙이었다. ……법치주의 정착은 권력을 위한 도구인 것이 아니라 근대 자유주의의 큰 결실이었다. 정치적, 사회적 특권의 폐지를 목적으로 한 1789년 대혁명은 법적 평등의 실현을 국민에게 호소했다는 점에서 법적 혁명이라 부를 만했다. 그러나 인민의 동의로 권위를 확보한 의회주의 국가는 동시에 정치적 정복으로 권위를 획득한 식민지 국가가 되었다. 국민주권, 인민주권, 합법화된 인종주의 간의 작동 간격을 어느 정도 조화시켜야 했다. 이에 따라 정치구성체는 하나였지만 권위주의적 식민지의 요소들은 의회주의 공화정의 요소들과 상호 연관되었다. —p. 276~277
알제리인을 지원하는 프랑스 변호사의 입장은 어떻게 보면 단순했다. 법과 폭력은 양립하지 않는다는 사회원리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OAS는 폭력 외의 방법으로는 법에 대한 희망과 욕구를 꺾을 수 없다는 독단이 있었던 걸까? 그래서 선제적 폭력을 행사해야 했을까? 답은 어렵지만 OAS 같은 폭력은 어떻든 법과 펜을 혐오하는 것이었음이 부인되진 않는다. 그런 폭력은 어떻게 보아도 비열했다. 식민지전쟁이 아닌 다른 국가전쟁에서도 그런 폭력이 기획되고 실행될 수 있는 일이었을지 자못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식민지인들의 해방의 대의와 이를 지원하려는 법적 프락시스는 이 점에서 서구에서 선포한 인간권리의 개념을 따르면서도 그 선을 넘고 있었다. —p. 299
외세는 지원이나 방해를 할 순 있어도 민족운동을 세울 순 없다. 무엇보다 민족정신으로 내부를 결집할, 서구문명의 침략에 패하기만 한 과거 지도력과 다른 지도력이 요구되었다. 종교와 교육의 물적 기반이 체계적으로 붕괴된 이상 민족정신이 저절로 자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랜 무기력은 오히려 변화를 기대하게 했고 북아프리카인이 동원된 제1차 세계대전은 그 계기였다. ……1930년대 이슬람은 개혁운동을 창도하며 나라 찾기를 위한 평화적 지원세력이 되었다. 1920년대와 30년대의 민족운동은 가문과 종교 중심의 19세기 엘리트층이 이끌지 않았다. 민족의식을 구축하고 전파하는 이들은 새로운 유형의 청년들이었다. —p. 304~305
세티프-겔마-케라타로 번진 이 사태는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세티프 사건을 겪고 나서 알제리인들은 반대의사를 평화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렸다고 느꼈다.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자들이 지적한 대로 포스트식민사회의 정치적 폭력의 상당 부분이 과거 식민지배의 조직과 탄압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세티프 사건은 평화의 의지를 꺾고 폭력의 집단심성을 형성시켰던 것은 아닐까. —p. 316
20세기 알제리인의 이민은 줄곧 프랑스만 바라봤다. 이민의 본격적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고 종전 후 이 추세는 더 확고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알제리인은 17만 3,000명, 그중 2만 5,000명이 전사했다. 1912년 4,000명에서 5,000명이던 이민자가 1914년 1만 3,000명으로 늘었는데, 이때부터 위험한 ‘하층프롤레타리아‘의 이미지가 생겼다. —p. 327
두 가지 중대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군사에 대한 정치의 우선권, 국외에 대한 국내의 우선권이었다. ……숨맘 강령은 “우리의 준거, 우리의 지침”이었다. 그러나 이 강령에 이슬람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민족혼이고 민족주의의 바탕이 이슬람이었지만 전통 울라마 지도자가 전쟁기에 알제리를 떠나는 등 1950년대 울라마는 전체적으로 활력을 잃었다. 민족운동은 울라마에 크게 빚졌지만 숨맘 강령은 이슬람을 내세우지 않았다. 숨맘 강령은 민족이론을 집대성하고 새로운 혁명이론을 제창해야 할 목전의 필요에 부응했다. 그러나 특정 지도자가 민족을 대변하지 않았다. 이 원칙에 따라 알제리 혁명전쟁은 1인의 정치지도자를 두지 않고 전쟁 끝까지 집단지도체제 형식을 띠게 된다. —p. 359
1958년까지만 해도 법학자나 정치평론가들은 흔히 ‘알제리는 프랑스다’라는 공식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이에 비해 몇몇 서방 언론의 보도는 시대를 앞서갔다. 그러나 이들로부터 아무리 격려를 받을지라도 식민지 비판은 식민지를 겪고 있는 이들의 문제였다. 식민체제가 사라져도 그것이 남긴 깊은 흔적이 식민지인의 미성숙을 가져온다면 누구보다 이를 뼈저리게 겪어야 할 사람은 식민지인 자신이었다. <엘 무자히드>의 논설은 식민지인의 사고체계가 행여 그런 미성숙으로 보일 만한 여지를 주지 않으려 했다. 동시에 이 신문은 유럽적인 사유방식과 문필에 감동을 주고 싶어했다. 식민지를 지배하는 측의 매체가 압도적으로 전쟁을 해석하고 있기에 서방 독자들 사이에 균열을 내려면 알제리전쟁의 현실을 사실대로 알려야 했고, 그것은 평범하지만 가장 실효성 있는 방안이었다. —p. 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