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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향기—샤넬 No.5와 레드 모스크바일상/book 2024. 1. 1. 19:11
후각을 통해 역사의 격변기를 들어다본다는 건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는 보고 싶지 않은 것으로 시선을 돌릴 수는 있지만, 알고 싶지 않은 냄새를 피하기 위해 숨을 쉬지 않을 수는 없다. 때문에 때로 후각은 시각보다도 많은 것을 전달한다. 역사와 사회에 관한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말하듯이 후각은 "비본질적으로 인식되어 합리성의 세계에서 추방되었(p.45)"고, 사회과학적 텍스트에서 냄새는 깔끔히 표백되었다.
이 책은 그렇게 도외시되었던 후각에 기반하여 크게 두 축의 이야기를 대칭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세계사를 새로운 렌즈로 바라보도록 이끈다. 한 축에는 자유주의의 세계가, 다른 한 축에는 공산주의의 세계가 있다. 한 축에는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라는 조향사가, 다른 한 축에는 오귀스트 미셸(August Michel)이라는 조향사가 있다. 그리고 전자의 세계에는 코코 샤넬이라는 패션계의 거물이 존재하고, 후자의 세계에는 젬추지나 몰로토바라는 검약한 국가공무원이 존재한다. 전자의 세계는 화려하고 매혹적인 향을 발산하지만, 후자의 세계에는 일체의 장식성이 배제된 실용적 향취가 배어든다.
그리고 대비되는 두 세계는 샤넬 No.5와 레드 모스크바(크라스나야 모스크바)라고 하는, 실은 하나의 기원을 공유하는 향수에 기반하고 있다. 로마노프 왕조 치하의 러시아에서 프랑스인 조향사로 활동하던 에르네스트 보와 오귀스트 미셸이 내린 각기 다른 결정은, 샤넬 No.5와 레드 모스크바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향으로 귀결된다. 물론 향수라 함은 무엇이든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샤넬 No.5는 파리의 메트로폴리탄적 분위기 속에서, 레드 모스크바는 크렘린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다. 그만큼 이 두 향수가 함축하는 서사는 다르다.
코코 샤넬은 파리 상류사회의 사치스런 취향과 시류를 익히며,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고 감각을 자극하는 세계적 히트작을 창안했다. 그녀는 사업적 수완도 뛰어나, 독일 치하 파리에서 나치에 협력했고 향수라는 사치품을 대중화할 수 있는 화학적 장치를 고안해 냈다. 본문에서 "앙드레 말로가 20세기 프랑스의 국제적 이미지가 세 명의 인물(피카소, 샤넬, 드골)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말했듯이(p.42), 샤넬은 프랑스의 전후 재건 과정에서 서방 자유주의 세계의 새로운 삶의 방식과 취향을 표상한다.
이와 달리 유대인인 젬추지나 몰로토바는 일찍이 적군(赤軍)의 편에 서서 스탈린주의에 투신했으며, 혁명 러시아의 2인자인 몰로토프의 부인으로 계획경제의 여러 사업활동에 관여했다. 그녀의 경력은 러시아 공산주의의 성쇠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예좁시나 시대(1937~1938년 대숙성 시기)에도 권세를 누리던 그녀는 스탈린 정권 말기 반계몽주의의 흐름 속에서 유배지로 쓸려나가고, 페레스트로이카가 도래할 때쯤 삶을 마감한다.
책의 종반부는 어쩐지 개운하지 않다. 유대인 수용소를 가득 메웠던 화학 가스의 비인격적 냄새와 살이 타들어가는 누린내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의 상점가를 점령한 서방세계의 짝퉁 향수들에 대한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하나는 전쟁의 참상을 후각적으로 묘사하고, 다른 하나는 정치질서의 변화와 혼란상을 향수로써 비유한다. 소련 붕괴 이후 레드 모스크바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노스탤지어는 고급 향수로 대표되는 서방세계에 대한 동경과 충돌한다.
오늘날 우리 세계에는 "코를 킁킁댄다면(p.45)" 과연 어떤 향을 맡을 수 있을까? 세상의 어느 한구석에는 양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소를 가든 메운 피비린내에 못지 않은 비인간적 냄새가 여전히 풍기고 있을 것이다. 국경을 넘으려는 어느 난민촌에서는 20세기 초 게토에서나 맡을 법한 불쾌한 악취가 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어느 미식가는 푸른 지중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5성급 호텔에서 입과 코를 즐겁게 하는 산해진미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벵골만의 어느 소도시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최저임금도 안 되는 헐값에 옷을 염색하기 위해 인공적 화학성분이 코를 찌르는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을 것이다. 후각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상과 그만큼이나 밀접하다. [fin]
후각은 감각의 계급에서 맨 밑이다. 후각은 비의식적인 것, 무의식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 비이성적인 것, 억제할 수 없는 것, 진부한 것, 위험한 것 등을 상징한다. 계몽주의는 후각을 추방했다. “오늘날의 역사는 냄새가 제거되어 있다.” (로이 포터) 시각은 “모든 감각 중에서 가장 이성적인 감각”으로 여겨진다. “후각은 자연과학의 세계에서 ‘비본질적인’ 것이 됐지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서 새로운 설명이 필요한 영역에 이르는 입구를 여는 데 잠재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가볍게 말하면, 우리는 조금 더 역사의 주변을 “코를 킁킁거리며 다닐” 필요가 있다.
—p. 44~45
”분명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팔딱거리는 것은 그 맛과 연결되어 맛의 뒤를 따라 내게까지 올라오려고 애쓰는 이미지, 시각적인 추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멀리서 너무나 희미하게 몸부림치고 있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휘저어 놓은 색채들의 포착할 수 없는 소용돌이가 뒤섞인, 어렴풋한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형태를 분간할 수 없는 나는 그 그림자를 향해, 마치 유일한 번역가에게라도 말하듯이, 그것과 동시에 태어나 그것과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인 미각이 들려주는 증언은 번역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으며, 그것이 내 지나간 과거의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어떤 시기와 관련 있는지 알려 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한층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더 집요하고 더욱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p. 50~51
무너진 것은 정치질서와 국가질서뿐만이 아니었다. 삶의 방식 전체가 무너졌다. 전쟁과 혁명은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하기 오래전부터 일어날 기미를 보였던 모든 과정을 파괴하도록 부추겼던 파멸의 기폭제였다. 그 사건들은 이미 벨 에포크의 품 안에서 숙성했던, 러시아의 경우에는 개혁을 넘어서 포괄적인 삶의 혁명을 초래했던 생활 개선 프로젝트들이었다. 지역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황을 준비하는 것은 전후 유럽에서 기본적인 작업이었다. 세부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가 중요했다. 새로운 인간상, 여성의 변화된 역할과 젠더 관계, 권위와 권력의 위계질서, 노동과 여가에 대한 변화된 관계, 몸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중요했다.
—p. 83~84
향수를 포함한 패션은 더 이상 자발적이고 예견할 수 없는 ‘미래의 예측’(발터 벤야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시장의 무정부 상태가 아닌, 과학적 접근에 기초한 장기적으로 유효한 디자인의 실행이었다. 계획경제의 과정은 패션과 모순됐다. “엄격하며 위계적으로 조직되고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통해 산업을 지배하는 스탈린주의 아래에서 확립된 강력한 관료주의는 사회주의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패션 영역의 기능을 결정했다. 위계적 원칙을 준수한 행동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의 섬유 공장들은 소비자들의 요구를 따르지 않았고,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금을 공급하고 생산 목표를 정해주는 상관들의 요구를 따랐다.”
—p. 134
비누는 기본적인 청결의 상징이며 강제수용소 안에서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인내와 규율을 표시하는 상징이었다. 양파는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고 몸의 쇠약을 피하기 위한 투쟁을 표시했다. 마지막으로 종이는 오직 마르크스주의 고전 작가들의 작품에서 발췌한 문장을 적고 스탈린의 ‘속성 과정’의 가르침을 흡수함으로써 지적인 건강함을 유지하고 정신적 실재와 인식의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투쟁을 표시했다.
—p. 171
두 여성은 시대의 흐름을 따랐다. 하지만 그들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다. 그들은 기회를 이용했고,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약점을 확인했으며 남성들로부터 성장을 위한 힘을 끌어냈다. 그들은 상류사회가 제공해야만 했던 것을 취했지만 상류 사회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들의 출신 배경은 아주 달랐다. 한 사람은 소시민으로 가톨릭 신자였고, 다른 사람은 소시민으로 유대교 신자였다. 그들은 출신 배경을 뛰어넘기를 원했다. 그들은 세계사적 사건들의 혼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계사적 사건들의 혼란은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지만, 또한 전쟁 전의 확고하게 질서가 잡힌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던 기회와 직업 전망을 제공했다. 그들은 주변 출신이지만, 중심으로 진출했다. 그들은 질서의 붕괴에서 이득을 얻었다.
그들은 성질이 아주 비슷했다. 그들은 결연히 각자의 계획을 밀고 나갔다. 한 여성은 재봉점, 부티크와 성공을 거둔 제품들로 시작한 자수성가한 여성으로, 다른 여성은 ‘위대한 스탈린의 대의’에 열정적으로, 심지어 광신적으로 헌신한 조직자, 경영ㅈ, 공무원으로. 이 두 여성은 워크홀릭이었다. 한 여성은 세계 최상급의 개인 기업을 세웠고, 다른 여성은 미래 초강대국의 국가 트러스트를 이끌었다. 샤넬은 부, 사치 그리고 여가의 세계에서 살았고, 젬추지나는 조금 더 금욕적이고 엄격한 환경에서 살았다. 코코 샤넬은 자택, 호화 저택, ‘리츠’ 호텔의 스위트룸을 소유했고, 반면 폴리나 젬추지나는 자신에게 할당된 숙소에서, 하지만 권력의 중심에서, 크렘린에서, 정부 청사에서, 정부 소유의 다차(주말농장)에서 살았다.
—p. 172~173
수용소에서는 몸이 마음에 대한 우세를 되찾고, 생존에 필요한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 생존 투쟁은 지각, 본능, 그리고 후각을 예민하게 만든다. 문명, 문화의 냄새들, 이 모든 것은 콜리마의 죄수들이 뒤에 남겼던, 그 의미를 상실했던 세계에 속했다. 과거의 삶은 ‘꿈, 허구’로 보인다.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p.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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