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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간쑤성 일대를 여행하면서 눈에 담았던 풍경을 떠올리면서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박완서의 글은 언제 읽어도 좋고, 아낌없이 담긴 티베트의 풍경사진은 활자를 읽는 것만큼이나 공들여 한 페이지를 묵시하게 만든다. 이 책은 원래부터 읽어두려고 일찍이 온라인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인데, 최근 S 누나의 추천을 받아 마침내 결제를 했다. S 누나가 읽고 싶으면 빌려줄 테니 언제든 말하라고 했지만, 늘 그렇듯 내 책 한 권을 소장하는 게 더 좋다.
노령으로 티베트에 여행을 가 고산증세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여행기를 남긴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느껴지는데, 그 글이 따뜻하고 다감해서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모독(冒瀆)'은 그 사전적 의미가 '말이나 행동으로 더럽혀 욕되게 함'이다. 박완서가 거대한 황야와 설산 앞에서 목격한 건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모독의 현장이었다. 이 영적인 공간은 척박함 속에서도 생명을 품고, 그러나 그 생명들은 곧잘 짓밟히고 유린된다. 자연은 그저 주어졌을 뿐인데 인간의 정치라는 것이, 경제라는 것이 티베트의 순환세계를 삐걱거리게 만든다.
이 글이 쓰인지도 벌써 사반세기가 지났으니, 그 당시 티베트의 풍경은 지금과는 또 다를 것이다. 외부세계의 집요한 모독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티베트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산성이나 영성만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이 세상의 한 조각을 발견하는 듯하다.하나같이 무욕하고 겸손하고 착해 보이기만 하는 이곳 사람들을 바라보며 문득 혼란스러워졌다. 부처와 인간, 성(聖)과 속(俗)이 헷갈렸다. 내가 보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저 사람들이 바로 부처로 보이고 절 안의 부처가 훨씬 더 인간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저들이 부처에게 그리도 열렬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갈구하는 건 무엇일까? 우리가 인간적인 욕망을 초극하려고 몸부림치듯이 저들은 저절로 주어진 성자 같은 조건을 돌파하려고 몸부림치는 게 아닐까 하고.
-p.53
사람의 영혼까지 빨아들일 것처럼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자로 그은 듯 땅을 향해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사선으로 내리꽂힌 능선에 홀연 나타난 양 떼와 양치기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인가, 문명인의 잠재의식 저 깊은 심연에서 부상한 태곳적 기억인가? 어쩐지 현실 같지가 않다. 만약 현실이라면 저들도 먹어야 살 텐데 무얼 먹고 사나.
-p.111
공기 중에 흔들어댈 불순물조차 없어 조금도 굴절되지 않은 바람의 정직한 목소리를 누가 들어보았는가. 수많은 신을 만들어낸 이곳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허공에 모습을 드러냄 없이, 어떤 거대한 힘을 과시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바람의 신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바람 소리는 바람의 신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고, 어떤 바람은 바람의 신이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는 소리로 들린다.
-p.209
우리가 초모랑마(에베레스트)에 대해 외경심을 갖는 것은 세계의 최고봉이기 때문이지만 인도나 티베트, 네팔 등 힌두 불교 문화권에서는 카일라스 산을 창조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일생에 한 번이라도 순례하기를 열렬하게 소망한다. 순례의 길이 고통스러울수록 죄가 정화된다고 믿어 고통보다는 법열을 느낀다고 한다. 그들처럼 최소한의 소유로 단순 소박하게 사는 민족도 없다 싶은데 이런 엄청난 죄의 대가를 지불하려 들다니, 그들이 느끼고 있는 죄의식이 어떤 것인지 우리 같은 죄 많고 욕심 많은 인간에겐 상상조차 미치지 않는 영역일 듯싶다.
-p.213
작년에 이어 올해도 또 네팔을 다녀왔다. 별 볼일 없는 나라에 무엇하러 그렇게 자주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더러 있다. 나는 농담처럼 보약 먹는 대신 가는 여행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아마 진정한 휴식을 위해서일 것이다. 실상 온통 약탈한 것투성이인 세계 유수의 박물관이나 신자 없는 장려한 성당, 그림 엽서하고 똑같이 가꾸어놓은 전원 풍경에 실컷 질리고 감동하고, 그런 문화를 가진 민족이니 뭐라도 배워야 할 것 같은 압박감으로 그들의 일상적인 언행까지를 흘금흘금 관찰하게 되는 유럽이나 미국 여행이란 얼마나 피곤한가. 그렇다고 1만 불 시대의 부를 마음껏 으스대며 남을 마구 얕보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으면 무절제한 쇼핑과 환락을 일삼는 동포들과 하루 몇 번씩 부딪혀야 하는 동남아나 중국 여행이 덜 피곤한 것도 아니다. 무시당할까 봐 전전긍긍하거나 무시하기에 급급하거나 피차 편안치 못한 관계이긴 마찬가지다.
-p.354'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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