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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면을 본 여자들일상/book 2024. 1. 6. 20:51
자주 찾는 카페에서 감사하게도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달의 뒷면을 본 여자들』. 표지에 묘령(妙齡)의 그림이 그려진 이 책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림이 글을 닮아가고 글이 그림을 닮아가는, 글과 그림 사이에서 새로운 창작행위를 모색하는 형태의 작품이다. 정오가 넘도록 늦잠을 잔 어느날,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상태에 만족스러워하며 무얼 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책을 들고 집앞 카페를 찾았다.
"보도블록의 요철을 디딜 때마다 전해지는 발바닥의 울렁거림 틈 안쪽 어딘가 새겨지는 굴곡" (p.44 <달 정류장> 중)
작품에서 가장 먼저 발견하는 특징은 글 안에 마침표가 없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호흡에 변화를 주는 것은 고작해야 쉼표 정도다. 마침표가 없다고 해서 독서가 숨가쁜 것은 아니다. 종결어미로 끝난 앞문장은 다음 문장의 첫 낱말과 이어지면서 청초하게 그러나 꿋꿋하게 글을 이어나간다.
불안으로 가득 찬 마음도 도려낸다
마음이 없으니 마음 비울 일 없을까
마음 없는 마음에 마음 줄 일도 없을까
(p.91 <치통> 중)
화자는 대체로 여자인 듯하고 글에 담긴 감상도 섬세하고 우아하지만, 글쓴이가 해설에 밝히고 있듯이 화자를 딱히 여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남자인 것도 아니되, '나'를 밝히면서도 '나'가 아닌 '너'를 염두에 두고 있다. 글쓴이가 관찰하고자 하는 것은 '사이(間)'다. '나'와 '너'의 사이를 메우는 부유하는 것들. 멈추지 않는 것들, 그러나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하여.
털과 수염과 발톱
발톱 끝에 붙은 뾰족함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풀밭
마당과 토끼집
몸에 부딪는 눈 비 바람 먼지 햇살
점프와 허공
검은 밤에 박힌 달과 은하수
(p.136 <토끼는 부사를 좋아해> 중)
하나의 글에는 하나의 그림이 따라붙는데, 가장 마음에 드는 일러스트는 단연 <고양이 여자>와 짝을 이루고 있는 그림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포옹하고 입을 맞추며 공중에 떠오르는 광경, 마찬가지로 이들을 에워싸며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고양의들의 모습은 환상적이고 아기자기한 느낌이 있다.
그림이나 사진이 있는 글을 참 좋아하는데, 심지어 글에 대한 착상을 그림에서 얻었다고 하니, 시인과 그림작가가 상호 작업을 어떻게 했을지도 자못 궁금해진다. 포근했던 낮을 뒤로 하고 오늘 밤은 눈이 내린다. 그렇게 낮과 밤 사이에 한 권의 독서가 있는 하루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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