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How to do nothing)일상/book 2024. 2. 7. 11:39
기억을 돌이켜 생각해보라.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은 것을 삶에서 빼앗겼는지, 쓸모없는 슬픔과 어리석은 기쁨, 탐욕스러운 욕망, 사회의 유혹에 얼마나 많은 것을 소진했는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자신의 계절이 오기도 전에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p.16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절반은 우리의 관심을 도구화하는 디지털 세계의 관심경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나머지 절반은 다른 무언가에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그 ‘다른 무언가’는 다름 아닌 실제 세계의 시간과 공간이며, 시공간에 다시 연결되는 것은 우리가 그곳에서 서로 관심을 가지고 만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온라인상의 최적화된 삶의 장소 상실에 반대하며, 역사적인 것(이곳에서 있었던 일)과 생태적인 것(이곳에서 살거나 살았던 것)에 대한 감수성과 책임감을 낳는 새로운 ‘장소인식placefulness’을 주창하고 싶다
―p.28
베라르디는 이탈리아의 현재와 1970년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비교하며, 현재 정권은 “반대 의견을 억압하거나 침묵을 강요하는 방법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정권은 잡담의 확산, 부적절한 방식으로 형성된 담론과 의견에 의지하며 개인의 생각과 반대 의견, 비판을 시시하고 터무니 없는 것으로 만드는 데 몰두한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막대한 정보의 과부하나 관심의 포위 문제와 비교하면 정부 검열은 오히려 미미한 문제”라고 말한다.
―p.59
결국 무언가를 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과도한 자극이 어ᄍᅠᆯ 수 없는 현실이 된 지금, 나는 #FOMO(the fear of missing out, 기회를 놓쳐야 것에 대한 두려움)를 #NOMO(the necessity of missing out, 기회를 놓쳐야 할 필요성)로, 마음이 영 불편하다면 #NOSMO(the necessity of sometimes missing out, 가끔은 기회를 놓쳐야 할 필요성)로 다시 상상할 것은 제안한다.
―p.66
자연의 음향 풍경을 기록하는 음향 생태학자 고든 햄튼은 이렇게 말했다. “정적은 무언가의 부재가 아니라 모든 것의 존재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끊임없이 관심경제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나를 포함한) 우리 중 다수가 이 능력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터버블의 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우리가 서로 의사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플랫폼들은 듣기를 장려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고함과 지나치게 단순한 반응, 제물 한 줄을 읽고 판단하는 행위를 장려한다.
―p.67
죽음의 본능과 삶의 본능:
죽음의 본능: 분리, 개별성, 탁월한 아방가르드,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 역동적인 변화
삶의 본능: 통합, 영원회귀, 종족의 영속화와 유지, 생존을 위한 체제와 활동, 평정
―p.71
제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내 의도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본질에 직면하고 싶어서, 그것이 가르치는 바를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제대로 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싶지 않아서였다. (...) 나는 삶에 깊이 빠져들어 인생의 정수를 남김없이 빨아들이고 싶었다. 스파르타인처럼 강인하게 살아가며 삶이 아닌 것을 깡그리 파괴하고, 깨끗하게 길을 내어 인생을 궁지에 몰아넣고, 최소한의 조건만 남기려 했다. 그리하여 만약 인생이 하찮은 것으로 드러나면 그 순수한 비참함을 받아들여 세상에 알리고, 만약 인생이 숭고한 것이라면 직접 경험한 뒤 다음 여행에서 그 숭고함을 제대로 설명해내고 싶었다.
―p.143~144
개인에게 있어서 집중하거나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곧 정렬을 의미한다. 정신과 몸을 하나로 모아 같은 곳을 지향하는 것. 어느 하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나머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위해 저항하는 것과 같다.
―p.153
관심의 맥락에서 나는 이러한 두려움이 청년들에게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는다고 생각한다. 원자화된 경쟁적 환경이 개인의 광심을 방해하는 이유는, 안정성을 두고 다투는 끔찍하고 근시안적인 전쟁에서는 안정성을 제외한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p.165
모든 사람이 ‘전속력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 거부에 나서지 못하는 이 시기에, 관심이야말로 우리가 철회할 수 있는 마지막 자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윤만 좇는 플랫폼과 전반적인 경제적 불안정이 관심의 장소를 없애는 악순환에서 우리가 그 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공간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뿐일지 모른다.
―p.171
우리는 한 번에 모든 것을 보지 않고 각 부분을 따로따로 일별한다. 그러고 나서 이것들을 우리의 연속적인 경험으로 쌓아 올리는 것이다. (...) 시간 속에 백 개가 넘는 별개의 시선이 존재하며, 나는 이 시선을 종합해 당신에 대한 생생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아주 멋진 일이다.
―p.179~180
그냥 내버려 두면 새로운 것을 찾아 이동하는 것이 관심의 속성이다. 그 대상에 흥미를 잃는 순간,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관심은 다른 쪽으로 이동한다. 만약 같은 대상에 관심을 묶어두고 싶다면, 다른 강렬한 인상이 우리를 잡아당기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 대상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점을 찾아야만 한다.
―p.201~202
우리는 관심경제의 외부 효과를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아주 조금씩 경험하기 때문에, 이 상황을 ‘거슬린다’거나 ‘산만하다’처럼 가벼운 곤혹스러움을 나타내는 단어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관심경제의 특성을 심각하게 오해한 것이다. 우리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것들은 단기적으로는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이 시간이 점점 축적되면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을 통제하고 성찰할 능력을 잃게 된다. 결과적으로 해리 프랑크푸르트의 말처럼 ‘우리가 원하고 싶은 것을 원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유와 안위, 심지어 온전한 자아에 대한 깊은 윤리적 함의가 숨어 있다.
―p.204
‘우리는 모두 이곳에 함께 있으며, 그 이유는 모른다 (We’re all here together, AND WE DON’T KNOW WHY)’
―p.227
버스 안에서 낯선 사람들은 고속도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현실감을 갖는다. 우리가 서로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 밀폐된 공간에 있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만큼 사람들은 대개 정중하게 행동하고, 필요할 때 말 그대로 타인을 위해 공간을 내어준다.
.......루이 알튀세르는 『만남의 철학』에서 사회가 일종의 공간적 제약을 요구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알튀세르는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움직이고 만남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종의 원시적 숲인 장 자크 루소의 이상적인 ‘자연 상태’와 도시를 비교한다.
―p.230
자신을 독립적이고 방어 가능하며 ‘효율적’인 무엇으로 여기는 마음이 특히 비극적인 이유는 그러한 마음이 매우 지겨운 사람을 낳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타인을 포함한 이 세상과 분리된 존재라는 생각이 완벽한 착오이기 때문에 이 마음은 더욱 비극적이다. 물론 이것은 안정감과 차별성을 갈구하는 매우 인간적인 갈망의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이 욕망이 아이러니하게도 변화에 대한 두려움, 시간과 가치를 평가하는 자본주의적 개념, 안전게는 죽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능력 같은, 상상 속 자아의 안팎에 있는 여러 힘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온다고 본다. 그리고 이 욕망은 통제 욕구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아가 온전히 타인에게 달려 있으며, 나의 본질이 아닌 타인과 나의 관계로 결정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정체성 개념과 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인 존재 개념까지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과의 교류에서 나오는 유동적 산물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느냐 마느냐다.
―p.242~243
사회운동에 전략적인 개방과 폐쇄가 필요하듯 아이디어를 형성하려면 프라이버시와 공유의 결합이 필요하다. 그러나 상업적인 소셜미디어에서는 이러한 통제가 쉽지 않다. 플랫폼의 설득적 디자인이 우리의 생각을 지금 바로 공유해야 한다고 단정함으로써, 더 나아가 우리의 생각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정리해야 한다고 단정함으로써 사고 과정 속의 맥락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p.293~294
권력의 유일한 한계는 타인의 존재다. 이 한계는 우연이 아니다. 인간의 권력은 애초에 다원성이라는 조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권력은 분리되면서도 줄어들지 않을 수 있으며, 심지어 견제와 균형을 통한 권력의 상호작용은 그것이 활발하고 교착상태에 빠지지 않는 한 오히려 더 큰 권력을 낳을 수 있다.
―p.198~199
'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0) 2024.02.13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0) 2024.02.10 기나긴 혁명(The long revolution) (0) 2024.01.20 달의 뒷면을 본 여자들 (0) 2024.01.06 전도서·아가 (0) 2024.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