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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현대사 : 1871년 독일제국 수립부터 현재까지일상/book 2020. 2. 25. 14:50
Continued.
19세기 초 결국 ‘독일’이 된 영토는 1871년 수립된 독일제국과도 달랐고,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독일연방공화국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 19세기 대부분의 시기에 독일은 당대의 한 정치가가 말한 것처럼 “지리적 표현”에 불과했다. 독일은 국가 통일을 이룩한 유럽 강대국 중 막내였다. 유럽의 중심에 위치한 이 나라의 지리적 조건이 통일의 길에서 자산이기보다 장애였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이유 때문에 그리된 것이었다.
독일의 지형은 동일인들에게 나라 안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북부, 동부, 서부의 국경에서도 어떠한 물리적인 장벽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여행뿐 아니라 팽창과 침공도 쉽다는 것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었다. 오직 남쪽으로만 산맥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있을 뿐이다 .라인Rhein, 베저Weser, 엘베Elbe, 도나우Donau 등 평원을 가르는 4개의 주요한 강은 국내 교역을 용이하게 했으며, 국제무역로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라인, 베저, 엘베강은 대부분의 구간에서 배로 항해할 만했으며, 북해는 비어 있어서, 독일은 대서양 무역로로 접근하기도 용이했다. 그에 비해 도나우강은 상업적으로 별반 유용하지 않았다. 항해하기에 어려운 강이었고, 대서양도 아닌 지중해와 연결된 동유럽 수역의 흑해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통일 이전에 독일의 정치적, 헌정적 구조는 사실상 독립된 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였다. 1806년까지 독일은 300여 개의 크고 작은 국가들로 나뉘어 있었고, ‘독일 민족의 신성한 로마제국Heileges Römisches Reigh’(신성로마제국)이라는 허구적인 이름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서명으로 이 구조가 폐지되고, 독일 제후국의 국경 대부분은 재조정되었다. 빈Wien회의(1814~1815년)에서 강대국들은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Metternich 공의 주도하에 나폴레옹의 수정안에 가필했다. 그 결과 39개의 제후국과 자유도시로 구성된 독일연방Deutscher Bund이 등장했다. 이 그룹 가운데 다섯 국가만이 연방 일에 주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바덴,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이렇게 세 개의 남부국가와 연방에서 가장 큰 두 정치체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그 다섯 나라였다.
―p. 13~15
프로이센이 보수주의 진영의 선두 주자로서 스스로 부여한 역할에 만족스러워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혁명적인 소요의 독성에 놀란 프로이센 왕과 지배 엘리트, 융커라고 알려진 토지 소유 귀족들은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인 프로이센에서 정치적 보수주의가 영구히 지배적일 수 있도록 보장하는 헌법을 제정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노력의 핵심 요소로 소위 ‘삼계급 선거권 제도Dreiklassewahlrecht’라고 불리는 선거 조항을 꼽을 수 있다. 이 억압적인 조항은 1918년까지 효력을 유지했고, 프로이센의 정치적 후진성의 혐오스러운 상징이 되었다. 제도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했다. 프로이센의 유권자, 즉 25세 이상 남성들은 각자가 지불하는 직접세의 규모에 따라 세 계급으로 나뉘었다. 직접세란 사실 재산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프로이센은 소득세를 걷지 않았다. 한 선거구의 직접 세수 가운데 1/3을 납부하던 첫 번째 계급의 유권자들은, 그 수에 관계없이 선거구 의회 구성원의 1/3을 선출하는 선거인단을 선택할 권리를 얻었다. 두 번째 계급은 해당 선거구에서 직접세의 그 다음 1/3을 납부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마지막 계급은 세수의 나머지 1/3을 납부하는 유권자들과 직접세를 전혀 납부하지 않는 유권자들로 구성되었다.
그 결과는 극단적인 형태의 정치적 차별이었다. 극소수 유권자가 속한 첫 번째 계급, 그보다는 다소 많은 유권자들이 속한 두 번째 계급, 그리고 대다수 유권자들이 속한 세 번째 계급이 각각 동일한 의석수로 대표되었던 것이다. 이 제도는 실제로 그럴 의도를 갖고 있기도 했거니와, 농촌과 도시의 부유층에게 유리하도록 정치권력을 극도로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p. 16~17
북독일연방은 무엇보다도 두 가지 이유로 기억된다. 하나는 생겨난지 5년도 되지 않아 독일제국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이센 자유주의자들이 비스마르크와 융커들에게 완전히 항복했다는 것이다. 수년 동안 역사가들은 첫 번째 사실을 바탕으로 비스마르크가 북독일연방을 머지 않은 미래에 통일독일에 의해 대체되어야 할 일시적인 정치체로 간주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사실은,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줏대가 없었고, 프로이센 정치체제에서 의회를 강화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스마르크가 총리가 된 지 4년 후 프로이센은 대부분의 북부 독일 지역을 병합했던 반면, 프로이센의 자유주의자들은 프로이센 의회에서 소위 ‘면책 예산Indemnity Bill’을 신속히 통과시켰다. 돌이켜보건대 1862년 이래로 행정명령에 의한 행정부 주도의 통치를 의회가 승인한 셈이었다.
―p. 24
……1871년 초 독일인들에게 미래에 대한 공포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 중요한 일은 이 나라가 마침내 통일되었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군대에 대한 초기 승리 이후 남부 독일 국가들도 독일 2제국이라고 알려진 것을 구성하는 데 가담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부 국가의 지도자들은 프로이센 왕 및 그 동맹자들과 협의하여 독일제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제후들의 연합체를 구성하고자 했다. 1871년 제국과 184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려진 무언가와의 중요한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새로운 제국은 비스마르크와 제후들의 작품이었고, 독일인들은 독일제국 수립의 조건을 결정하는 데 작은 부분밖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독일 제후들은 프로이센 왕과 그의 계승자들이 독일 황제의 지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또한 1866년 프로이센이 획득한 영토도 건드리지 않았다. 남부 국가들은 프로이센이 북부 독일에서 가지는 정치적, 영토적 헤게모니에 도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 제국은 프로이센 반혁명 세력의 궁극적인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p. 28~29
안정이 중앙당의 첫째가는 특징이었다면, 사민당의 발전은 폭발적인 성장으로 특징지어진다. 사민당은 1863년에 창설된 범독일노동자협회Allgemeiner Deutscher Arbeiterverein와 1869년에 만들어진 사회민주주의노동당Sozialdemokratische Arbeiterpartei, SDAP이 1875년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비록 두 조직 모두 자신들이 초기 산업노동자들의 대표라고 보았지만, 원래 이 둘은 독일 사회 노동계급의 정치적 미래에 대해 완전히 다른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범독일노동자협회를 설림한 페르디난트 라산Ferdinand Lassalle은 사기업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소독일 노선의 민족주의 및 국가 권력과의 협조를 지지했지만, 사회민주주의노동당은 협소한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부르주아 국가를 자본가 지배의 하녀로 본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를 추종했다(독일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형태의 민족주의도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주아적 ‘상부구조’의 일부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 결과 그들은 소독일이건 대독일이건 국가 통일에 대해 반색하는 대열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정치혁명만이 자본주의의 억압과 민족주의라는 망상에서 프롤레타리아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새로운 사민당에서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과 그 이상이 곧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다. 1975년 고타 창립총회에서, 사민당은 라살이 일찌감치 선포했던 원칙들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1891년에는 고타 강령Gothaer Programm과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자법에 대한 마르크스의 격렬한 비판의 영향으로, 사민당 공약은 마르크스주의 정통파의 교리를 따르게 되었다. 1891년 이후 당은 계급 갈등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거한 혁명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었다. 사민당은 노동과 자본의 이해관계는 양립 불가능하며, 19세기 사회경제 조직의 자본주의 통제를 대신하게 될, 인간 사회의 궁극적이고 최고 형태인 사회주의(더 나아가 공산주의)로 대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달성할 도구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혁명 행위라고 보았다. 이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정치적으로 사민당으로 조직되어야 하고, 경제적으로는 노동조합을 통해 조직되어야 했다. 이론적으로 두 노동자 조직은 서로 보완관계였다. 당이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라면, 노동조합은 현재 상태에서의 물적 조건의 개선을 가져와야 했다.
……독일 유권자의 압도적 다수는 방금 언급한 네 그룹, 즉 보수주의, 자유주의, 가톨릭, 사회주의 중 하나를 지지했다. 건국세대의 20년 동안 가장 강력한 정당은 민족자유당과 중앙당이었다. 다양한 보수주의 정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점차 감소했고, 독일진보당에 대한 지지는 요동치고 있었다. 가장 성공적인 스토리는 사민당의 것이었다. 마스마르크 시기 초기에 사민당은 제국의회에 한 명의 대표자를 보냈다. 비스마르크 총리가 퇴임할 때, 그 수는 35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제국의 법적 구조는 역사가들이 ‘비스마르크 타협Bismarck Compromise’이라고 불렀던 것을 제도화했다. 그것은 세 가지 근본적인 원칙을 체현했다. 먼저, 비스마르크 개인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보수적인 전제주의적 정치 이상과 자유주의적인 경제적 수칙들을 결합하는 것이 두 번째였다. 세 번째는 두 번째 원칙에 대한 당연한 귀결로서, 비스마르크는 타협이 이루어지고 난 뒤 정치적으로 중요해진 그룹들, 무엇보다도 가톨릭과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인 몫에 대한 요구를 ‘헌법에 위배되는’ 요구라며 거부했다. 1871년 헌법은 주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에게 유리했다. 이 문서는 1871년 이후의 역동성에 대해서는 여지를 두지 않고, 1871년의 합의를 영원한 것으로 동결하고자 했다.
―p. 40~43
헌법은 한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삶의 골격이다. 이상적으로 볼 때, 이 문서는 그것이 제정된 시대에 잘 들어맞아야 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정치적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수정의 가능성도 허용해야 한다. 1871년 비스마르크 헌법은 이 두 관점에서 모두 실패했다. 그것은 처음부터 단점이 많았고, 미래를 위한 유연성도 사실상 없었다. 두드러지는 단점은 비스마르크가 이를 무엇보다도 자신의 개인적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고안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헌법은 정치적 생활이 발전되도록 고안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권력을 유지하도록 고안되었다.
―p. 45
……비스마르크와 그의 동맹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란 맹아적인 형태일망정 세 개의 전선에서 실제적인 위협을 의미했다. 먼저, 사회주의자들인 개인적 테러를 행하거나 암살에 나서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전복에서 집단적인 폭력을 배제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운동이었다. 사민당은 1875년 강령에서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활용하여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두 번째로 사민당은 자본주의에 맞서는 투쟁에서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단결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한 가운데, 다른 나라 노동자 조직과의 연계를 자랑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독일 정부 지도자들은 모둔 사회주의 사상가를 하나로 묶는 경향이 있었다.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국제 테러 음모의 일환으로 유럽 사회의 정치경제적 기본 구조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혁명을 선동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비스마르크는 통일 과정에서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대독일주의 노선’을 표방했던 점을 용서한 적이 없었다.
―p. 63
비스마르크는 독일 유권자들의 심리를 정확히 판단하고 있었다. 거의 대중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짧은 선거운동 기간 이후, 유권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독일 사회의 안정에 위협이라는 비스마르크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로 가득 찬 제국의회를 선출했다. 새로운 제국의회는 반사회주의자법을 통과시켰다. 사회주의 정당 및 그와 연관된 조직들의 해산을 명령할 수 있는 법이었다. 또한 경찰의 판단만으로 사회주의 교의를 지지하는 인쇄물이나 모임을 금지할 수 있었다. 이를 어기거나 경찰이 ‘사회주의 범죄자’로 의심하는 경우에는 누구에게는 범죄를 저지른 도시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내부 추방’뿐 아니라 징역형과 벌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이 법안에는 제국의회조차 승인하기를 거부한 내용도 일부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의회가 사회주의자 의원들을 추방하고, 향후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사민당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못하도록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제국의회 다수는 구성원을 선택할 의회의 근본적인 권리가 경각에 달려 있다고 느끼고, 법안의 그 부분은 부결했다. 그러나 이 법안의 나머지는 통과되었는데, 원래는 3년간 유효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법안에 찬성했던 제국의회 다수파의 수가 계속해서 줄었음에도 1890년대까지 주기적으로 갱신되었다.
―p. 65
1883~1889년에 정부는 세 가지 주요한 개혁 법안을 내놓았다. 결국 이 법안들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경기변동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고안된 ‘사회적 안전망’의 시발점이 되었다. 첫 번째 법안은 국민건강보험제도의 개시를 알렸다. 고용인과 피고용인 모두가 납입하는 방식으로 포괄적인 건강 보호 시스템의 서막이 만들어졌다. 1년 후인 1884년의 국민산재보험법Unfallbersicherung은 산재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1889년 최고의 업적인 독일 사회보장제도가 만들어졌다. 이 법 조항에 따르면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노동자만이 65세 퇴직 연령에 도달했을 때 매우 적은 금액의 연금을 보장받았다.
반사회주의자법과 사회개혁 법안은 함께 작용하도록 고안되었고, 정부가 기대했던 것과 같은 방식은 아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실제로 함께 작용했다. 사회입법은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설득하여 마르크스주의를 버리도록 하는 원래의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12년 전 49만 3,000명이던 사민당 지지자는 1890년 140만 명으로 증가했다.
―p. 67~68
사실, 국제관계와 관련해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은 비스마르크가 만들어낸 단어와 개념들로 가득 차 있다. ‘현실정치Realpolitik’, ‘정직한 주재자honest broker’ 같은 개념들이 우리 언어에 일상적으로 등장했고, 다수의 현대 정치가들도 의식적으로 철혈 재상의 정책을 모델로 하여 그들의 정책을 만들었다.
……이 시기 독일의 외교관계에 대해 더 자세히 논하기 전에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에서 우선순위 문제가 논의될 필요가 있다. 총리의 외교정책 목표는 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의해 결정되었는가, 혹은 일차적으로 국내에서 전제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독일 외교관계의 조정이 기획되었는가? 비스마르크는 자신과 1945년 이전에 저술했던 대부분의 독일 역사가들은 ‘외정 우위Primat der Aussenpolitik’ 태제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복수에 대한 프랑스의 갈망에 맞서, 독일제국은 거대한 대규모 군사 설비를 유지하고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을 유지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동시에 지속적인 외국의 위협으로 독일은 주요한 국내 정치적 개혁에 착수할 수가 없었다. 내정 개혁에 착수했다가 국내의 안정성이 위협받고 제국의 임전 태세가 약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8년 제국 붕괴 이후 에카르트 케르Eckart Kehr가 주도한 일군의 젊은 역사학자들은 자신의 대외정책이 독일의 지위치로 인해 결정되었다는 비스마르크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이 비스마르크와 그의 지지자들이 독일 여론을 호도하고자 의도적으로 꾸며낸 신화라고 주장했다. 이 새로운 학파는 ‘내정 우위Primat der Innenpolitik’가 독일의 외교정책을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독일 내부에서 권위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민주화를 막기 위해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발명해냈고, 신생 독일제국으로 하여금 유럽 강대국들 중 가장 반동적인 내정 체계를 지닌 국가였던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와 동맹을 맺도록 했다는 것이다.
―p. 70~71
비스마르크는 그의 지도력하에서 독일의 외교정책이 간단하고 변함없는 일련의 원칙들에 근거한다는 입장을 지치지 않고 밝혔다. 먼저, 독일은 1871년 획득한 것 이상의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했다. 제국은 ‘만족스러운’ 국가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1871년의 군사적인 승리가 중부 유럽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할 권리를 독일에 안겨주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중부 유럽 평원에서 두 번째 강대국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비스마르크는 (매우 잘못되게도) 보수주의적이고 군주제적인 체제가 민주적이고 공화정적인 국가들보다 국제관계에서 본질적으로 더 안정적인 요소라고 평가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프랑스를 강대국들 중 가장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운 나라로 고립시키면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라는 세 보수주의 제국 간의 동맹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했다. ‘민주주의란 불안정’이라는 그의 원칙에 대한 유일한 예외는 영국으로, 총리는 영국을 국제적인 세력 관계에서 항구적인 안정성의 요소로 받아들였다. 비스마르크의 세 축은 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도록 했다. 대륙에서 권위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협조해야만 하며,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영국과 협조해야 한다. 또한 대륙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우며 강력한 국가인 독일은 강대국들 간의 분쟁을 중재하고 그들 사이에 평화를 유지하는 ‘정직한 중개자’의 역할을 담당한 자격이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비스마르크의 이러한 가설들은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총리는 1871년 국제적인 세력균형을 재조정한 것이 영속될 수 있는 본질적으로 정적이고 영원한 일련의 관계들을 만들어냈다고 확신했다. 그는 독일과 다른 강대국들의 국내적 압력으로 인해 강대국들 사이의 균형이 계속 변화하리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했다.
유럽의 세력균형을 안정화하기 위해 비스마르크가 선택한 동맹관계는 그의 가정이 오류임을 보여주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라고 여겼지만 이 두 나라는 내정이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결과적으로 안정의 보루가 되기는커녕 내정적 어려움으로 호전적이고 위험한 외교정책을 추구했다. 비스마르크에게 있어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서로 희생해야만 대외정책적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특히 불행한 일이었다.
―p. 71~72
비스마르크의 동맹 체제 구성은, 충분히 논리적이게도, 총리가 1871년 이후 세력균형의 기반이 되길 희망했던 것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것은 세 보수적인 제국의 우호 협력 조약들이었다. 제국 수립 2년 후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의 지배자들은 삼제동맹Three Emperors’ Alliance을 체결했다. 이는 외교관계를 처리하는 데 군주제적인 원칙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비스마르크의 신념의 발현이었다. 동맹은 군주 개인들의 인격적인 협약이라는 것이었다.
남동유럽의 미래를 둘러싸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화해할 수 없는 차이들이 머지않아 동맹관계를 대립과 불신으로 전환시켜버렸다. 러시아는 발칸반도에 있는 슬라브 국가들이 오스만제국에 맞서 영토적, 정치적 야심을 실현할 수 있도록 지원했던 반면, 오스트리아는 범슬라브주의가 합스부르크제국의 안정성에 대한 위협이라고 보았다. 독일은 남동유럽 지역에 직접적인 이해관계 없이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만성적이고 점차 고조되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긴장으로 인해 1871년 이후 유럽 내 세력균형의 중재자라는, 제국이 스스로 부여했던 역할을 하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을 느꼈다.
―p. 74~75
사민당의 문제는 투표함에서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의 이데올로기적, 전략적 방향의 미래와 관련하여 내적인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었던 데 있다. 1895년경에 이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모두 사망하고, 따라서 당은 사상적 조상의 지도 없이 갈 길을 찾아야만 했다. 불황의 끝과 반사회주의자법의 시효 소멸은 사민당에 모순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으로 사민당 유권자와 당원 수, 사회주의 노동조합의 힘은 점차 강해졌다. 동시에 1897년 이후의 호황기는 자본주의의 몰락이 임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사민당은 본질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 시대에 대중의 힘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베른슈타인 논의의 요지는 사회주의로 가는 길은 혁명적이기보다는 점진적이리라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사민당은 자본주의 맥락 안에서 노동자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증오를 받는 체제가 요절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노동조합은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해야 하고, 당은 더 큰 정치적 민주주의를 낳을 개혁을 위해 일해야 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베른슈타인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선거권을 활용하고 보다 개혁적인 부르주아 분파들과 결탁함으로써 의회주의의 전략적 가능성을 이용하도록 사민당에 촉구했다.
―p. 100~102
1차대전만큼 인간사의 경로를 심대하게 바꾼 사건도 드물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적개심은 대부분의 유럽인과 미국인뿐만 아니라 모든 독일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과 유럽에 있던 구질서의 대부분이 사라졌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혁명은 차르의 지배를 종식시켰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몇 개의 신생 민족국가로 분리되었다. 독일에서는 프로이센-독일 전제주의가 전복되었으며, 이 나라는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빌헬름 2세는 퇴위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그는 1941년 사망할 때까지 거기서 살았으며, 다시는 독일을 방문하지 못했다.
전쟁이 입힌 인명 피해는 충격적이었다. 1차대전은 최초의 총력전이었다. 점차 진화된 (그리고 파괴적인) 무기들과 기계화된 전쟁은 전선에서 인명을 손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내 전선’에서도 전례 없는 경제적, 인적 자원의 동원을 필요로 했다. 그 결과 엄청난 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심각한 사회적 파국을 몰고 왔다. 독일은 600만 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하고, 실종되었다. 이에 더해 75만 명이 전쟁으로 말미암은 영양 부족과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p. 169~170
전시 독일에서 정치는 4대 주요 집단 사이의 상호작용과 관련 있었다. 먼저 황제가 이끄는 제국과 프로이센 행정부가 있었다. 1914년 제국과 프로이센 내각은 1909년 이후 총리였던 베트만홀베크에 의해 주도되었다. 두 번째로, 전쟁 수행 노력을 재정 지원할 예산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정부가 돈을 빌릴 권한을 갖기 위해 빈번히 의회로 향했을 때, 제국의회는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독일 군부 지도자들은 독일의 정치적 상호작용 과정에서 세 번째 집단을 형성했다. 마지막으로 국내와 전선에서의 어려움이 점차 나라를 양분했을 때, 새로운 의회 밖 압력집단들이 정치적 스펙트럼의 좌우 양측에서 등장했다.
베트만홀베크는 그가 ‘대각선 정치’라고 부른 것을 추구하기 위해 국가의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총리는 전쟁이 국내 정치에서 현 상태를 유지하고 해외에서 제국의 권한을 증가시키기 위해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과, 국가적 차원의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국민에 대해 더 많은 지는 정치적 구조로의 의미 있는 변화를 요구한다고 주장하는 ‘개혁가들’ 사이에 ‘대각선으로’ 놓인 어떤 경로를 지향함을 의미했다. 베트만홀베크는 상당한 역량으로 조정 활동을 거의 3년간 지속했지만 종래 고립되었고,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해 실패를 인정해야만 했다.
전시 정치는 세 가지 주요 이슈에 집중되었다. 먼저 ‘전시 채권’ 문제로, 전쟁을 재정 지원할 채권을 발행할 권한을 정부에 부여함을 의미했다. 두 번째 이슈는 프로이센의 선거제도를 바꾸고 제국과 프로이센 내각이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제도를 도입하는 헌정 개혁과 관련되었다. 마지막으로 독일의 전쟁 목표를 구체화하는 일은 점차 분열적인 이슈가 되었다.
―p. 188~189
베르사유조약에서, 유럽의 세력균형에서 독일의 역할을 변화시키려는 목표는 주로 독일의 영토와 인구를 축소시키고, 군사력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실현되었다. 독일은 전전 영토와 인구의 1/10을 잃었다. 비록 모든 경우에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조약이 명령한 영토 변화의 대부분은 문제가 되는 지역 주민들이 독일에 남을지 이웃 국가의 시민이 될지를 표결에 붙임으로써 야기되었다. 과거 오데르Oder 강 동쪽 프로이센 지역들은 신생 폴란드공화국에 포함되었다. 알자스-로렌이 프랑스로, 보다 더 작은 영토와 인구를 덴마크와 벨기에로 넘겨주는 방식으로 국경이 변경되었다. 영토 변경이 주로 거주자들의 희망에 따른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 새로운 국경들은 때로 사법권이 겹치는 기묘한 패치워크 상태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독일에 남기로 결정한 동프로이센 지역은 소위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으로 불리는 거대한 폴란드 영토로 인해 독일의 나머지 지역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독일은 식민지도 잃었다. 이 식민지들은 형식상 국제연맹에 넘겨졌지만, 실제로는 연맹의 ‘명령Mandates’에 따라 개개 연합국의 행정 지도를 받았다.
명목상으로는 전 세계적인 군비 축소의 서막이었으나(새로운 도덕시대의 신호로서) 실제로는 독일의 군사력을 축소하기 위해, 조약은 독일의 군사력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심대한 제한을 두었다. 독일군은 10만 명으로 축소되었다(전전 독일군은 75만 명에 달했다). 게다가 독일은 보편적인 징병제를 지속할 수 없었고, 항공기, 잠수함, 1만 톤 이상의 해군 전함을 건조하거나, 공격적인 지상군 무기를 소유하는 것을 금지당했다. 본질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부문은 독일이 국내 질서를 유지하는 데는 충분하지만 연합군의 상대가 되지는 못할 정도의 군대만을 허용하도록 고안되었다. 또한 조약은 연합국의 군대로 하여금 라인강 좌안 지역을 15년간 점령할 수 있도록 했다.
조약의 경제 부문은 조항 중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었다. 연합국은 그들이 전쟁에 지불한 것으로 추정되는 1,505억 달러라는 충격적인 금액 중 적어도 일부를 독일이 배상하기를 원했다. 조약은 금액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독일은 조약을 받아들이면서 아직 특정되지 않은 금액의 약속어음에 사인하는 데 동의했다. 다른 경제적 조건들은 연합국의 사업이 독일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가질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베르사유조약과 독일의 전시 동맹국들을 대상으로 하는 쌍둥이 조약들에서 가장 혁신적인 면은 향후 국제관계에서 도덕성을 엄격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중심적인 원칙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시했다. 그는 민족자결의 원칙이 과거 유럽에 전쟁을 낳은 민족 갈등 중 태반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p. 246~247
독일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전후 딜레마를 다루고자 노력했다. 하나는 즉각적인 효과를 낳지는 않았지만 시간의 시험을 통과했고, 다른 하나는 매우 파국적인 장단기 결과만을 낳았다. 장기적으로 유용했던 해결책은 새로운 세수 체계를 포함하고 있었다.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국민의회는 매우 절실했던 독일의 세금과 세수 할당 체계의 재구성을 수용했다.
…….무수하고 복합적인 이유로 경제 회복은 나타나지 않았다. 확실히 독일의 경제적 불안정성이 그 주요 요소였다. 게다가 전통적인 교역 패턴을 회복하기도 어려웠다. 미국 같은 몇몇 파트너와 경쟁자들은 국제시장에서 독일의 부재로 이익을 보고 있었다. 아주 일반적으로 볼 때, 독일의 무역 파트너들은 관세 법안을 통해서 국내시장을 방어하고 있었고, 독일은 근시안적으로 대규모 덤핑 관행에 참여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그와 같은 보복 조치를 장려하는 꼴이었다.
……독일인들은 확실히 문제를 인지했지만, 1923년 가을까지 대체로 이 문제를 무시했다. 주요한 이유는 인플레이션과 경제적 난국의 희생양으로 배상이라는 요인을 손쉽게 지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연합국은 독일에 부과된 배상이 단순한 재정적 거래가 되어, 전후 비용의 일부를 현금과 상품의 형태로 승자들에게 배상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실제로 상황은 훨씬 더 복잡했다.
……연합국은 궁핍에 대한 독일의 아우성에 별반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 ……비록 연합국이 배상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을 향해 단합된 태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독일에서 빚을 회수하기에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갈렸다. 일반적으로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는 매파를 이루었던 반면, 영국은 좀 더 비둘기적인 태도를 취했다. 영국이 좀 다른 태도를 보였던 것은 독일의 빈곤함을 더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국제무역이 회복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영국은 점차 독일 경제의 회복 없이는 유럽이 전쟁 이전의 호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하게도, 독일인들은 영국이 다른 연합국과 의견을 달리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따라서 영국이 이 논의를 ‘중재’해주리라는 비현실적인 희망을 품었다.
―p. 255~259
소극적인 저항은 점령군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었지만, 점령군들이 겪은 어려움은 독일인들이 스스로 감내해야 했던 것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었다. 쿠노 정부는 독일 산업계의 심장부 주민들에게 연방 차원에서 현금으로 보조금을 지불했다. 결과적으로 소극적인 저항은 무차별적인 화폐 발행을 통해 재원적 뒷받침을 받고 있었다. 결국 통제불가능한 인플레이션의 수문이 열렸다. 1923년 1월 초부터 11월 15일 인플레이션이 최종적으로 잡히기까지 미국 달러 대비 마르크화 환율은 전례 없는 수준이던 1만 8,000마르크에서 천문학적 수준인 4조 2,000억 마르크까지 치솟았다. 국가가 지지한 꼴이 된 인플레이션의 사회경제적 결과는 막대하고도 파국적이었다. 과세(와 정부 예산)는 돈이 매 시간 그 가치를 잃어감에 따라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 더 나빴던 것은 경제활동이 물물교환 수준으로 떨어지는 사이 한평생 쌓은 저축이 하룻밤 사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p. 261
특히 바이에른 지역에서 다수의 원原민족적인völkisch 정치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비록 그중 한 그룹인 나치당이 결국 그 라이벌들을 모두 제거했지만, 원래 나치당은 1919년 초 뮌헨에서 활동하던 40여 개의 원민족적인 반혁명 조직 중 하나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 다양한 집단들은 서로 잘 구분되지도 않았다. 모두가 본질적으로 안티의 총합인 이데올로기를 표방했다. 즉 그들은 모두 비민주적이고, 반마르크스주의적이며, 반의회주의에, 반유대주의자들이었다. 반유대주의는 마지막 프로그램의 특징은 독일의 패전뿐만 아니라 이후의 혁명과 다른 모든 좌파 혁명들에 유대인들의 국제적인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파시스트들의 신념이 반영된 결과였다.
―p. 266
독일은 프랑스가 1871년 그랬던 것과 아주 유사하게 베르사유조약이 부과한 외교적인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현실적으로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었다. 연합국 가운데 하나 혹은 그 이상과 강화조약을 맺는 것이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국제관계에서 다른 떠돌이인 소비에트와 협약을 맺는 것이었다. 두 시나리오는 상당한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서구와의 협약은 독일이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라면, 특히 프랑스가 독일을 국가들의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굴욕적으로 서구와 협약이 체결된다면 반혁명적인 우파에 추가적인 자극을 줄 우려가 있었다. 또한 소비에트와의 강화조약은 그 공식 목표가 전 세계적 혁명 확산인 세력과의 동맹관계를 의미했다.
―p. 279
독일의 정치적 문제에서 불안을 조성하는 또 다른 징후는 공화국의 황금기에조차 여전히 존재하던 무수한 준군사 조직이었다. 이들은 모든 정치적 분파를 대변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극우를 지지했다. 참전용사 협회의 모습으로 행진하는 가운데, 우파 준군사 조직의 구성원과 지도자들은 민주주의를 경멸했고, 독일은 패전의 정치적 결과를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고 확신했다. 대신 그들은 권위주의의 복귀 혹은 ‘민족주의 혁명’의 승리를 희구했다. 표면적으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참전 용사 단체는 ‘철모단전선병사동맹Stahlhelm-Bund der Frotsoldaten’이었다.
……노령화된 참전 용사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은 전쟁의 잔여효과로 설명될 수 있지만, 공화국이 독일의 많은 고등학생과 대학생으로부터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던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바이마르공화국은 학생들 사이에 자리한 우파 극단주의라는 만성적인 문제로 시달렸다. 많은 학생들이 준군사 조직에서 활동했고, 1927년 초 독일총학생협회German National Student Organization는, 오스트리아의 유사 조직 예를 따라, 유대인들을 구성원에서 배제하는 내규를 결의했다.
―p. 299~300
공화주의 당국자들은 안정적인 통화를 만들기 위해 즉각 움직였지만, 중요한 것은, 파괴적인 인플레이션의 결과로 인한 문제를 풀어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제는 가치 없는 마르크 체계에서 통용되었던 장기적인 상법상의 채무, 저축, 채권 등을 ‘재평가’하기 위한 어떤 공정한 방식이 발견되어야만 했다. 이 이슈가 주요한 정치적 쟁점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연금 생활자, 채권자, 저축 소유자들은 그들의 자산이 보호되기를 희망했던 반면, 채무자들은 ‘1마르크는 1마르크’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통화 붕괴로 인한 값싼 채무obligations 탕감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마침내 독일 대법원과 의회는 어느 쪽도 만족시키기 어려운 결론에 도달했다. 부동산은 그 가치를 다 인정받은 반면, 유동자산은 원래 가치의 15퍼센트 정도에서 ‘재평가’되었다. 이 결정은 부동산 소유주에게 상대적으로 이익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공공 주택을 건설하기 위해 배정된 목적세는 주택 소유주에게 부과되었다. 하지만 이를 재산에 대한 부당한 부담으로 간주하고 분노한 부동산 소유주들은 앞서 언급한, 반공화국적 정당인 경제당을 창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p. 304~305
이 모든 절충주의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의 예술 활동은 시각적이고 수공업적인 다양한 예술 양식을 묶어 모더니즘의 기능성과 미학 모두를 표현하는 하나의 일관성 있는 진술로 융합해내려는 몇몇 시도로도 주목받을 만했다.
―p. 311
슈트레제만의 전반적인 외교정책 목표는 베르사유조약의 결과를 ‘수정’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독일의 외교적 고립을 끝내고, 독일 영토에 주둔한 외국 군대와 독일의 군비축소를 통제하는 연합국통제위원회Allied Control Commission를 철수시키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위해 슈트레제만은 ‘로카르노 대가’를 지를 용의가 있었다. 로카르노조약은 1920년대 후반 독일 외교관계에서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1925년 초 독일 정부는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인 다비농D’Abernon 경의 제안에 따라, 연합군이 예정된 1935년보다 일찍 독일 땅에서 철수하고, 독일을 동등한 입장에서 국제사회에 편입시켜준다면, 독일 서부 국경의 정당성을 인정한 용의가 있다고 영국과 프랑스에 제안했다.
슈트레제만의 외교정책은 ‘로카르노 방식’의 유용성과 한계 모두를 보여주었다. 이 협약은 독일과 과거의 적들 간에 존재하던 상호 의구심의 일부를 제거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동시에 ‘로카르노 방식’은 상호 신뢰에 기반한 참된 평화의 시기를 가져다줄 수 없었다. 연합국도, 독일도 국가 정책과 국가 간 경쟁 관계라는 범주에서 사고하기를 피할 수 없었다. 슈트레제만은 독일의 강대국 지위를 되찾기 위해 로카르노조약을 활용하고자 했다. 반면 프랑스는 독일의 동기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심을 가졌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생산적 보장’을 포기하는 것을 꺼려했다.
―p. 319, 321
의회민주주의 체제는 1930년 3월 종식되었다. 향후 3년간 독일은 의회의 통제 없이 통치하는 세력들이 주도했다. 공무원 조직과 군대, 그리고 약간 덜한 정도로 주요 산업과 농업 집단들이 그들이었다. 정치적으로 이들 세력들은 더 나은 이름이 없기 때문에 ‘신보수주의’라고 명명될 아이디어들을 지지했고, 행정적으로 대통령의 권위와 카리스마에 의존했다.
바이마르공화국 최후 몇 년간 독일 정치의 스펙트럼은 현저하게 변모했다. 자유주의와 전통적인 보수주의 정당들은 독일 유권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고, 정치 지형에서 거의 사라졌다. 정치적 가톨릭주의와 두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지지자들의 충성을 유지하는 데 훨씬 능했지만, 상호 반목으로 효과적인 공조는 불가능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민주의자들을 ‘사회 파시스트’ 조직이라고 보았고, 1928년 선출된 중앙당 지도자 루트비히 카스Ludwig Kass는 정치적 가톨릭주의는 모든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와의 공조에 반대하는 우파 민족주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독일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나치의 처방은 어느 면에서 공산주의적 경로의 거울상이었다.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나치는 독일이 나치즘과 공산주의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을 뿐이라는 데 동의했다. 따라서 양측은 모두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했으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호소와는 반대로, 히틀러의 운동은 계급 갈등을 넘어서서 경제적 풍요와 민족적 영광을 향유할 참된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를 창조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치는 먼저 민주주의를 파괴할 것,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 독일을 망가뜨려온 집단―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등―을 권력에서 배제하고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로 대체할 것을 요구했다.
―p. 336~337
이 세 명의 총리는 독일의 정치적, 사회적 미래에 대해 공통의 전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1930년대 초의 대공황과 정치적 마비가 독일에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 무능력, 그리고 그들이 국가의 ‘헌정적 비상사태’라고 이름 붙였던 것을 해소할 유일무이한 기회를 안겨주었다는 신념이 그들이 가진 정치 전략의 핵심이었다. 정치적 양극화라는 현실과 사회적 분열의 위협은, 그들로 하여금 독일의 헌정 구조를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바꾸는 것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연합국들로 하여금 국제 협력에서 완전히 대등한 지위를 독일에 복원하도록 강제할 터였다. 이들의 내각은, 브뤼닝의 말에 따르면, ‘지각 없는 의회민주주의 형태’를 ‘건강하고 제한적인 민주주의’로 대신하는 데 ‘헌정적 위기’를 활용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구체적으로 신보수주의자들의 내정 계획은 행정부를 강화하고, 의회 권한을 현저히 축소하며, 독일의 연방 구조를 개선하여 각 주의 남은 권한을 축소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개혁 프로그램을 실현하는 데 핵심적인 것은 '자신의' 총리에 대한 대통령의 흔들림 없는 지지, ‘천부적’ 엘리트들 사이의 단합, 그리고 민주 세력의 지속적인 마비였다.
―p. 338~339
이러한 경제적 혼란의 구조적 징후들은 충분히 현실적이었으나, 평균적인 독일인들은 불황의 즉각적인 사회적 결과들에 대해 더 우려했다. 실직과 실업에 대한 두려움, 생활수준의 하락이 그것이었다. 실업은 경제적 어려움의 가장 가시적이고 즉각적인 표현이었다. 일자리 부족은 바이마르 시기의 소위 황금기에조차 많은 사람들에게 만성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대공황 시기에 실업률은 재난적인 수준으로 올라갔다. 1930년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실업자는 31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1932년 여름의 이 수치는 620만 명으로 늘어났다. 노동력의 1/3이 실직 상태인 셈이었다. 실업자는 주로 블루칼라와 이제 막 취업 전선에 뛰어든 사회 초년생들이었다.
늘어나는 실업률은 자리를 지키는 데 성공한 운 좋은 사람들에게도 부작용을 가져왔다. 반복적인 임금 삭감과 수당 미지급은 거의 모든 노동자에게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현실이었다. 게다가 화이트칼라, 전문직, 관리자 수준의 피고용인들은 심리적인 ‘공포 효과’에 특히 민감했다. 적어도 일시해고가 익숙한 경험이었던 블루칼라와 달리 봉급생활자들은 실업에 익숙하지 않았고, 실업을 생활수준의 하락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나쁜 신분 상실로 여겼다.
우리가 보게 되듯이 당시 내각은 불황의 사회적, 경제적 결과들에 대해 특히 무지했다. 증가하는 고통지수Misery Index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브뤼닝과 그의 후임자들은 사회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려는 노력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역효과를 낳는다고 확신했다. 독일 대부분의 전문가들과 마찬가지로, 신보수주의자들은 경제 불황을 과잉활동hyperactivity으로 야기된 불균형 이후에 시장이 스스로 활기를 되찾는 ‘정화를 위한 위기cleaning crisis’라고 보았다.
주목할 만하게도, 심지어 정치적으로 신보수주의에 반대하는 정치가와 노조 지도자들도 실업자들에게 직업을 찾아주는 것에 최우선순위를 두지 않았다. 심지어 많은 노조 지도자도 재정적 통설fiscal orthodoxy과 균형예산을 경제적 신조로 삼고 있었다.
―p. 340~341
기실,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는 훨씬 더 따분한 요소들이 작동했다. 그중 일부는 독일사 자체였다. 나치는 경고 없이 독일의 정치적 장면에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깊고도 제대로 감춰지지도 않았던 독일의 반유대주의, 반근대주의, 반의회주의라는 사회 흐름의 상속자이자 수혜자였다. 그것은 1890년대 이래 원민족주의적 운동을 키워낸 기름진 토양이었다. 패전과 더불어 많은 독일인이 바이마르공화국의 밋밋한 성과에 대해 느꼈던 실망은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1928년 선거에서 나치는 아직 득표율이 3퍼센트 미만이었다.
국가사회주의를 비주류에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변모시키기 위해서는 경기 불황이 필요했다. 경제적 참사의 정치적 효과―의회 체제의 마비, 정부가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경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 것, 공산당의 상승세―는 많은 독일인들에게 히틀러와 그의 당만이 미래를 위한 희망과 볼셰비즘의 승리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나치는 1929년 프로이센주 선거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고, 경제지표들의 지속적인 하락과 대략 평행을 이루며, 불황의 저점에서 독일 유권자의 37퍼센트가 히틀러 운동에 지지를 보낼 때까지 지속적으로 승리를 구가했다.
불황이 당에 떠안겨준 당원 및 유권자의 유입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나치당은 세 가지 병렬적인 조직 구조 체계를 활용했고, 각각은 분리되었지만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담당했다. 먼저 당은 가우Gau라고 불린 지역 단위로 나뉘었고, 각 가우위원장Gauleiter이 이끌었다.
……두 번째로, 농민에서 뮌헨 석탄 판매자들의 국가사회주의협회National Socialist Association of Munich Coal Dealers에 이르기까지 나치 동조자들이 경제적, 직업적 이익집단들에서 조직된 계열을 이루었다. 이들의 목표는 다양한 경제적 이익집단들 사이에서 나치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가능하다면 그들을 나치 이념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모아내는 단체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당은 농민, 소매업자, 대학생, 의사들을 조직해내는 데 특히 효과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나치당의 가장 눈에 잘 띄는 요소인 준군사 조직들, 특히 돌격대가 있었다. 바이마르공화국 최후 수년 동안, 1932년 말 40만 명을 기록한 돌격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나치 정치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돌격대는 포스터를 붙였고, 라이벌들이 당 집회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적대자와 무고한 방관자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돌격대는 나치의 호전성과 잔혹성을 효과적으로 상징했다.
―p. 350~351
누가 나치당에 가담하고 나치를 지지했는가의 문제는 오랫동안 역사가들을 사로잡아왔다. 몇 년간 나치가 하층 중간계급에서 지지의 대부분을 얻었다는 것이 자명한 일처럼 받아들여졌지만, 최근 연구들은 그들이 독일 사회 모든 부문에 상당한 정도로 침투했음을 보여주었다. 여전히 차이는 있었다. 하층 중간계급은 인구 구성상의 비율보다 훨씬 더 많이 당원과 활동가로 참여했다. 반대로 블루칼라는, 특히 대도시에 거주하는 경우라면 참여율이 낮았다. 유권자와 관련해서는, 가톨릭이 프로테스탄트보다 나치당에 덜 투표했다. 소규모 도시와 농촌 거주자들은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보다 나치당을 지지할 가능성이 더 컸다. 직업과 사회 계급의 관점에서라면, 소득 및 사회적 지위와 나치 지지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었다. 말하자면, 나치 지지는 부유층에서 가장 강력했고, 구중간계급(소상인, 중소기업, 공무원, 학자)은 가장 높은 비율로 나치에 투표했다.
―p. 352~353
히틀러의 외교정책의 목표는 반대되는 경험적 증거들과 모든 차질에도 불구하고 그가 외골수로 추구했던 두 가지 강박관념에 근거했다. 나치 지도자의 세계관Weltanshcauung은 인종과 공간이라는 두 가지 토대에 근거했다. 히틀러의 ‘인종 문제 해결’은 독일과 유럽에서 유대인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비록 1933년에는 그것이 강제 이주를 의미하는지 혹은 물리적 말살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심지어 히틀러 자신에게도―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공간’이 독일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광대한 생존공간Lebensraum을 획득하기 위해 러시아와 동유럽을 정복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p. 358~359
권력을 잡기 오래전에 나치는 자신들의 통제하에 독일의 문화적, 예술적 활동은 새로운 창의성의 분출을 경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민족Folk과 관련된’, ‘인종 의식을 가진’ 예술과 문헌들이 ‘유대적 데카당스’와 ‘자유주의적 속물 근성’의 자리를 대신할 터였다. 간단히 말해 나치의 문화적 프로그램은 모더니즘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들의 시도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나치는 창조보다는 파괴에 훨씬 더 능했다. 문화적 번성의 새 시기는, 아주 적절하게도, 블랙리스트 작성 및 분서갱유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1933년 5월 많은 독일 도시들의 대학생들은 괴벨스와 다른 지도자들의 완전한 찬동을 얻어 수도와 다른 도시들에서 아우토다페Autodafe를 조직하여, 소위 퇴폐적인 유대적, 자유주의적 과거의 문학적 상징들을 불태웠다. 많은 책들 가운데는 하인리히 하이네와 만 형제,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작들도 있었다. 이들 저자들은 제3제국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그들의 저서들은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사라졌다.
―p. 376
……민족공동체의 평균적 구성원들의 일상생활은 어땠을까? 그것은 정상성, 두려움, 순응이 결부된 것이었다. 나치는 독일에서 ‘전체주의적’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 착수했고, 대체로 성공했다. 정치적 자유의 결여, 모든 형태의 공적 생활에 대한 완벽한 통제가 정치적, 지적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무겁게 드리우는 하나의 멍에를 이루었다. 그러나 제3제국의 다른 측면도 존재했다. 많은 독일인들에게 나치하의 생활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이전에 그들이 누리던 생활과 그리 많이 다르지 않았다. 평균적이고 비정치적인 독일인에게 기대되었던 것은 생활 방식의 완전한 변화가 아니라 협상과 순응이었다. 게슈타포와 당 간부들은 불복종에 대한 징후들을 주의 깊게 듣고 보았다. 누군가 국경일에 하켄크로이츠Hakencreuz를 거는 걸 잊었는가? 국민 동지Volksgenosse 하나가 지속적으로 ‘히틀러 만세Heil Hitler’를 거부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그들의 속내를 가족과 믿을 만한 친구에게만 털어놓는 법을 금세 익혔다. 많은 나치 기념일에 나치 깃발을 내걸고, 무수한 당 모금행사에 돈을 기부하는 것은 대체로 자신이 민족공동체의 좋은 구성원임을 보여주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 아주 실제적인 의미에서, 사회는 전통적인 많은 엘리트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과거에 그래 왔던 것처럼 직무를 수행해갔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체제의 일부 반대 세력들도 일단 그들이 정치활동을 삼가는 데 동의하자 상당 기간 상대적으로 방해받지 않고 살아가도록 허용되었다.
―p. 380~381
이 장에서 다룰 짧은 기간 동안 독일은 영토 확장의 정점에 도달했지만, 독일인들은 전례 없는 패배와 절망의 구렁텅이를 경험했다. 나치 독재자는 “독일이 세계 패권국이 되거나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공표하면서, 평화적 수정주의의 가면을 벗고 2차대전을 도발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히틀러의 예언의 두 번째 부분이 실현되었다. 모든 실제적인 목표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아무것도 아닌 상태였다. 1945년 독일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Andreas Hillgduber가 논평했던 것과 같이 1939년 혹은 1914년 수준에 있기보다는 사회정치적 발전 측면에서 1815년에 더 근접했다. 히틀러의 통치는 독일사를 150년 뒤로 돌려놓았다.
세 가지 서로 연결되는 주제가 이 중대한 시기에 압축되었다. 첫 번째는 전체주의와 테러가 독일을 급속히 장악했다. 제3제국 첫 5년간 자율성을 유지했던 집단들은 점점 더 통제와 침해를 받았다. 유럽 전역을 정복하려는 나치의 시도,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유럽에서 유대인과 소위 열등한 인종들을 물리적으로 절멸하려는 노력이 두 번째 주제이다. 당시 홀로코스트Holocost는 전쟁 동원의 부수적인 부분이기보다는 히틀러 정복 전쟁의 주요 주제이자 핵심이었다. 마지막으로 제국의 해체는 이번 장의 세 번째 주제를 구성한다. 히틀러는 세계 정복을 위한 도박에 실패했음을 깨달았을 때, 독일을 사회적 해체의 절벽으로 이끈 자멸 과정을 시작했다.
―p. 401~402
유화정책이라는 용어는 언제나 이 정책을 가장 열정적으로 지지하고 실천했던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이자 총리였던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nerlain의 이름과 결부된다. 체임벌린에게 유화정책은 1차대전 후 국제적 세력균형을 수정하려는 나치 독일의 ‘정당한’ 요구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의 이익을 지키려는 방책이었다. 유화정책이라는 외교 전략은, 당시에 명백했어야 옳았을, 근본적으로 잘못된 두 전제에 근거해 있었다. 하나는 히틀러가 연합국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계대전을 피하고자 애쓴다고 가정했고, 다른 하나는 세력균형을 변화시키려는 나치 지도자의 갈망이 주로 소비에트 공산주의 확대를 막으려는 동기를 갖고 있다고 상정했다. 말하자면, 유화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그들과 아톨프 히틀러를 가치동맹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로부터 공산주의 팽창에 맞서는 서구 문명의 주요 방어막으로서 나치 독일이 베르사유 체제의 조건들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p. 414.
나치-소비에트 협정은 폴란드에 대한 영불의 보증을 효과적으로 무력화했고, 히틀러는 아무런 위험 없이 자유롭게 동쪽 이웃을 공격할 수 있다고 느꼈다. 유럽 전역에 걸친 전투에 대한 무솔리니의 열정이 결여되어 있고,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일부 나치 지도자가 꺼림칙해했음에도, 총통은 9월 1일 새벽 폴란드에 대한 전면적 침공을 명령했다.
폴란드 침공은 2차대전에 나치 작전의 특징이 된 두 가지 새로운 요소를 전쟁에 도입했다. 하나는 전격전Blitzkrieg이었다. 독일은 군비에서의 기술적 향상을 활용하여 전투기, 대규모 전차 공격, 신속하게 움직이는 보병들의 물결을 통한 엄청난 규모의 합동 공격으로 폴란드와 다른 적들을 연이어 정복했다. 폴란드인들은 용맹하게 저항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개전 한 달도 안 돼 폴란드는 항복했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전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폴란드 침공은 세계관 전쟁Weltanschauungskrieg(나치의 목표가 군사적 승리뿐 아니라 전체 인구의 절멸 혹은 종속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가치라는 점에서)이기도 했다.
―p. 421~422
당시 금세 분명해졌던 것은 4강이 독일에서 점령군의 역할에 대해 매우 다른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시 모스크바의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한 매우 통찰력 있는 미국 외교관 조지 케넌George Kennan은 1945년 여름이 되자마자 소비에트군과 더불어 조화롭게 독일을 통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평가했다. 다음해 봄 윈스턴 처칠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처칠은 1946년 3월 미주리 풀턴Fulton에서 행한 연설에서 소비에트는 유럽을 분리하기 위해 발트해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철의 장막’을 칠 것이라고 언급했다. 알다시피 프랑스인들은 독일에서 다른 연합국이 무엇을 하든지 별반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독일의 미래에 대한 많은 의문들이 답을 얻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연합국으로 뭉쳐서 제2제국을 패퇴시킨 지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대연합Grand Alliance의 구성원들은 이제 공동 책임이 된 독일에 대해 단일한 정책에 합의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p. 481
초기의 정책은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미국의 경제정책은 분명한 정치적 목표와 함께 점증하는 실용주의로 특징지어졌다. 러시아인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경제 입안자들도 원래는 독일의 호전적인 잠재성을 제거하려고 결심했다.
……1946년 5월 이러한 의문들에도 불구하고 소위 ‘산업 수준 계획Level of Industry Plan’은 강경 노선을 지지했다. 이 문서는 독일의 미래 산업 생산을 매우 낮은 수준에서 유지하려는 목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거의 즉각적으로 초기 독일 행정부와 미국 측 입안자들의 심각한 비판에 직면했다. 비판자들은 1946년 미국 점령지역의 수출은 2,800만 달러로 추산된 반면 수입은 대부분 식료품, 비료, 종자 등의 형태로 3억 달러라는 점을 지적했다. 결국, 독일 일부를 점령한 특권은 미국인 납세자들에게 2억 7,200만 달러의 비용을 지불하게 했던 것이다.
……동독의 농업 생산 감소와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냉전으로 인해 4개 점령지역을 하나의 ‘경제단위’로 다루려는 목표는 점점 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 결과, 산업 수준 계획은 본질적으로 보류되었고, 해체 계획은 조용히 버려졌다.
……그보다 훨씬 전에 미국 경제정책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1946년 봄까지 미국인들은 서독의 경제적 재원 없이는 서유럽 국가들뿐만 아니라 서방 점령지역도 공산주의적 전복,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소비에트 통제의 손쉬운 먹이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통일된 독일 유지, 그리고 소비에트와 우호 관계 유지라는 목표에 별반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다. 미국의 우선적인 목표는 서유럽 경제로 통합된 서독에서 잘 기능하는 시장경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p. 486~487
모스크바회담은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로 하여금 소비에트의 경제정책은 독일 전역, 그리고 실제로는 유럽 전역을 러시아 통제하에 두려는 더 큰 규모의 계획의 일부라는 그들의 신념을 확고히 하게 해주었다. 미국인들은 이처럼 인식된 서방을 둘러싼 위험에 맞서면서, 두 가지 새로운 정책을 공표했다. 먼저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그리스와 터키에 제공하여 이들이 공산주의 위협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는 트루먼독트린Truman Doctrine을 제시했다. 두 번째로, 더 중요한, 독일을 포함한 유럽의 경제 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1947년 6월 야심 찬 계획인 마셜플랜Marchall Plan을 도입했다. 마셜플랜의 공식 명칭인 유럽 부흥 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을 통해 1948년부터 1952년 사이 미국은 140억 달러(2010년 가치로 환산하면 1,080억 달러)를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로 제공했다. 마셜플랜은 서유럽과 서독의 부흥에 중요했지만, 미국의 원조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조건들 없이 오지는 않았다. 미국은 분명 유럽에서 자유기업을 지원하기를 원했다. 또한 미국 경제의 강점을 고려할 때, 마셜플랜은 미국달러를 기축통화로 세울 터였다. 게다가 독일에 관한 한, 마셜플랜은 3개의 서방 점령지역이 서구 경제체제에 통합되었음을 의미했다.
―p. 489~490
연합국 사이에서 탈나치가 ‘4D’ 중 가장 중요하다는 데는 하등 의심이 없었다. 나치즘이 독일 사회에서 뿌리 뽑히지 않는 한 탈군국주의, 탈중앙집권, 민주화는 착시일 뿐이었다. 연합국과 대부분의 반나치 독일인들은 탈나치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데 동의했다. 제3제국 시기 동안 개별 나치가 저지른 범죄를 처벌하는 것, 그리고 독일인과 독일의 기관들로부터 파시스트와 원형적인 파시스트적 태도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후자의 과정은 나치즘의 온상으로서 국가의 전체주의적인 유산을 분석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포함하여, 독일인들 스스로에 대한 비판적인 자기 검열과 관련되어야 했다. 정직한 자기비판의 사인들은 일찍 왔다. 예를 들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지도자들은 1945년 여름에 자신들이 민주적인 전통을 거부한 것이 나치즘이 권력을 잡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p. 492~493
놀라울 것도 없이, 각각의 연합국은 미디어와 관련하여 자신들의 체제가 최선이라고 확신했다. 라디오와 관련해 영국은 BBC, 즉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공영 라디오 조직의 독일판을 제안했다. 그에 비해 미국인들은 탈중앙집권화되고, 상업적으로 재정적 기반을 얻는 민영 라디오 체제를 선호했던 반면, 프랑스인들은 중앙집권화되었으나 정치적으로 균형 잡힌 체제를 고집했다. 러시아인들은 국가가 통제하는 독점적인 체제를 세웠다. 독일인들은 바이마르의 중앙집권화 모델, 즉 중앙집권화되어 있으나 청취자들로부터 강제적인 수신료를 받아 재정을 충당하는 비정치적 체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마침내 등장한 것은 독일과 연합국이 낸 아이디어의 총합이었다. 적어도 서쪽 지역에서는 그랬다. 독일인들은 방송 전파의 상업화를 거부했으나 라디오 네트워크의 탈중앙집권화를 받아들였다. 또한 프로그램 내용에 대한 통제와 관련해서는, BBC의 자율적인 이사회 모델을 채택했지만, 프랑스처럼 공영 라디오 방송국을 통제하는 ‘이해관계들의 균형위원회’에 정당을 포함시킬 것을 고집했다.
―p. 502
제헌의회는 베를린봉쇄가 정점에 가깝던 1948년 9월 초 심의를 시작했다. 8개우러 후인 1949년 5월, 소비에트 봉쇄정책을 포기했을때, 제헌의회는 비준을 위해 기본법을 주의회들에 제출했다. 최종 문서는 여러 면에서 바이마르헌법보다 개선된 버전이었다. 특히분명한 세 가지 주요한 변화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선거와 국가의 대표인 연방 대통령의 권한과 관련되었다. 두 번째로 기본법을 기초한 사람들은 바이마르 시기의 특징이던 반복적인 내각 위기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마지막은 연방의회의 제2의회인 참의원을 구성하는 문제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주정부에 의해 통제되던 이 기구의 권력은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지속적인 갈등을 낳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새 헌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연방의회의 선거뿐만 아니라, 연방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관계의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바이마르 연방의회와 마찬가지로 서독의 연방의회도 최소 4년마다 선출되었다. 하지만 바이마르 의회 같은 극단적인 비례대표 체제와 달리 서독의 연방의회인 분데스탁Bundestag은 비례대표와 지역구에서 선출된 대표로 구성되었다. 연방의회 구성원의 절반은 지역구에서 선출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정당 리스트’에서 비례대표로 선출되었다. 마찬가지로 중요했던 것은 이후의 선거법들이 소수 정당의 연방의회 의석 획득을 어렵게 하는 데 효과적인 조항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연방의회에서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서 한 정당은 주 단위에서 5퍼센트 이상의 지지를 얻거나 적어도 하나의 선거구에서 과반수를 확보해야만 했다.
제헌의회 대표들은 내각 위기의 가능성도 줄이려고 했다. 의회민주주의에서 입법부는 내각을 선출할 권력과 내각을 해산할 권력을 쥐었다. 공산주의자들과 나치가 정부를 연이어 전복하려고 힘을 모았기 때문에, 바이마르공화국 말기에 내각 위기는 매우 잦고 길었다. 이와 같은 상태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본법은 ‘건설적 불신임 제도’를 제시했다. 이 제도의 실질적 의미는 야당이 해임하고자 하는 정부를 대신할 새로운 내각 구성에 미리 합의하지 않으면 ‘불신임투표’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권리와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장치도 바이마르 모델을 수정해서 만들어졌다. 새로운 헌법은 고전적인 시민권을 나열함과동시에, 나치가 이러한 권리를 악용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혹은 민주 정부 전복 등을 지지하는 개인이나 조직이이러한 권리를 이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의원들은 일련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기본법에 포함시키자는 사민당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정이나 교회 같은 제도를 위한 공적 부조가 헌법상의 의무임을 재확인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독일의 최초 시도, 즉 바이마르공화국의 중요한 상징적 연결 고리는 검정, 빨강, 노랑의 삼색기를 서독의 국기로 다시금 제도화한 것이었다.
……독일의 헌법 실행에서 흥미로운 혁신은 연방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의 설립이었다. 미국 대법원에 모델을 둔 이법원은 행정 행위와 국제조약뿐 아니라 연방, 주, 지방 차원의 법안의 합헌성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 근원적이고 최종적인사법권을 가졌다. 이 법원의 판사들은 종신직이 아니라 연방의회와 주의회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에 의해 12년 임기로 선출되었다. 헌법적인 문제에 대한 신속한 결정이 내려질 수 있도록, 헌법과 관련된 쟁점들은 상소 절차를 통하지 않고 바로 법원에 보내질 수있도록 했다. 사건이 지나치게 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연방정부는 사안들을 따로 청문하는 두 개의 실 실室 구조를 갖도록 했다.
—p.531~533
한 연구자는 재건에 필요한 자본과 물자의 7퍼센트 정도만 미국에서 나왔고, 나머지는 유럽인들에 의해 제공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동시에 전쟁으로 할퀴어진 대륙에 끼친 미국 원조의 심리적인 효과도 과소평가될 일은 아닐 것이다. 1차 세계대전 후의 상황과 달리 마셜플랜은 미국이 유럽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을 것임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 모든 긍정적인 요인들로는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 하나는 독일의 생산력을 자극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무엇이건 채택된 경제정책의 사회적 함의와 관련된 것이다. 1949년 서독의 사회고통지수Social Misery Index는 매우 높았으며, 그마저도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있었다. 자유시장경제의 힘이 풀려났을 때, 번영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궁핍하게둔 채 소수에게만 가게 될 위험은 없는가? 그러한 시나리오는 정치 불안정과 더불어 바이마르의 조건으로 돌아가리라는 우려를 낳았다.
에르하르트와 사민주의자들은 서독의 경제 회복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계획을 제시했다. 공동통치지구의 경제문제 담당 최고행정관이자 후일 연방 내각에서 계속해서 경제부 장관을 지낸 에르하르트는 상대적으로 제어받지 않은 시장 세력들이 많은 서독인들에게 최대의 번영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시장체제가 빈부 격차를 늘리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유로운 기회들로 가능케 된 국민총생산의 급격한 증가가 사회고통지수를 감소시키기에 충분한 재원들을 마련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익은 상대적인 조건에서는 매우 차별적으로 분산되지만, 절대적인 측면에서는 모두가 잘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사민당은 에르하르트의 부흥 계획이 서독에서 자본주의 지배를 영속화하고 빈부 격차를 증대시킬 것으로 보고 격렬히 저항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사민주의자들은 민주적으로 통제되고, 중앙에서 계획되며, 기초산업과 천연자원에 대한 공적 소유를 동반하는 경제를 옹호했다. 가족 기업과 중소기업은 민간 소유로 남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고소득에 중과세를 부과하여 공정한 소득분배를 가능케 하고자 했다.
—p. 544~545
요동치는 세계의 이러한 배경은 서독의 외교정책 기득권층의 분열을 낳았다. 서독 건국 이래 서독의 모든 책임 있는 지도자들은 서독이동맹국과 독립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는 강대국이 아니며,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특히1960년대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상당한 견해차가 나타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먼저 아데나워처럼 독미 관계가 서독안전의 기반이라고 느끼는 ‘대서양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비록 독불 관계를 상당히 냉각시키더라도 미국의 입장을 긴밀하게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를 가장 유명한 대변인으로 하는 ‘독일 드골주의자’들의 의견은 매우 달랐다. 그들은 드골이 옳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이해가 미국의 그것과 반드시 같지는 않으며, 유럽은 미국이 아니라 유럽의 통제하에 있는핵무장 타격부대 창설을 포함하여 유럽의 우선순위에 따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대서양주의자’와 ‘독일 드골주의자’는 독일 외교정책 세력 가운데 소수파였다. 대부분의 정책 결정자들은 자신을 ‘새로운현실주의자’라고 보았다. 확실히 브란트와 셸을 포함한 이 세 번째 그룹은 서독의 서방 지향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서방 진영에 대한 서독의 의심할 여지 없는 충성이야말로 소비에트 및 동유럽 국가들과의 데탕트 가능성을 시험해볼 수 있게 한다고느꼈다. 동서 관계의 개선을 꾀하고, 서베를린의 정치적, 종교적 안정을 이루며, 동독과 서독의 ‘인도주의적’ 접촉을 증가시키는 것이동방정책의 전반적인 목표였다. 이에 대한 대가로 서독은 할슈타인 독트린을 포기하고, 소비에트의 동의 없이는 1945년 이후 변경된동유럽 국경이 다시금 변경될 수 없다는 러시아의 입장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동방정책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에르하르트 내각에서, 외무부 장관 게르트 슈뢰더는 소비에트 블록과의 관계에해빙기르 ㄹ가져올 ‘작은 걸음 정책Politik der kleinen Schritte’을 따랐다. 그러나 슈뢰더의 계획은 기민련/기사련의 우파가 이 모든노력을 깊은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민-자민 정부에서, 이러한 장애물은 존재하지않았다. 빌리 브란트와 발터 셸은 동방정책의 이상을 발전시키기 위해 긴밀하게 공조했다. 게다가 이 장막의 배후는 총리가 서베를린시장이던 시대 이래로 브란트의 비밀 조언가였던 튀링겐 출신의 에곤 바르Egon Bahr였다.
바르는 수년간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왔다. 그는 재통일되고 재무장된 독일에 대한 소비에트의 깊은 두려움을 인정했다. 그는 동유럽과 동독에 대한 러시아의 통제를 인정하는 선에서 러시아의 정당한 안보 요구를 맞춰줄 수 있다고 느꼈다. 1963년 별반 주목받지못했던 한 연설에서 그는 동독이나 소비에트가 서방 측 압력의 결과로 그들의 억압적인 성격을 변화시킬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무용한 일이라고 제안했다.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äherung’가 훨씬 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동방정책은 서독과 소비에트, 서독과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동서독 간에 체결된 일련의 양자 협약을 그 구체적인 결과로 상정한 하나의 과정이자 목표였다. 명목상의 이유와 실제적인 이유로 소비에트와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1970년 1월 에곤 바르는 러시아 외무부 장관 안드레이 그로미고Andrei Gromyko와 회담에 착수했다. 8개월 후 협약이 체결되었다. 실제 조건들은 그다지 극적이지 않았다. 서독은 ‘유럽의 지도’를 인정했고, 이는 소비에트가 병합한 동프로이센 지역을 포함해 2차대전 시기에 있었던 독일의 영토 상실을 인정함을 의미했다. 또한 서독은 동서독이 모두 참여하는 가운데 유럽의 현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한 국제회담을 개최하려는 러시아의 요구를 지지하는 데도 동의했다. 서독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서독과의 협정을 위한 협상에 나서도록 동독에 압력을 넣는 데 소비에트가 동의한 사실이다.
……두 독일 간의 협정이 특별한 난관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동독과의 기본조약Grundlagnevertrag은 동방정책에서 가장 어려운부분이었다. 동독은 완전하고 명백한 인정을 원했다. 서독은 동독을 인정된 국경을 가진 주권국가라고 인정했지만, 외국으로 간주할 의사는 없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서독은 기본조약 비준 수단 가운데 일부는, 서독 정부가 제시한 것처럼, 모든 독일인이 자유선거를 통해 자결권을 가진다는 점을 반복해서 말하는 내용을 포함할 것을 고집했다.
서베를린 문제도 동방정책의 난제였다. 서독과 동유럽 국가들의 협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였지만, 서방 연합국은 과거 독일의 수도이던 베를린의 서방 측 영역에 대한 주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를린 문제에 대한 어떠한 조정도 4강 회담을 필요로 했다. 1972년격렬한 회담이 있은 지 몇 달 후 4강은 협약에 착수했다. 서구 3강은 동독을 인정했고, 그 대가로 러시아와 동독은 서베를린과 서독 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연대를 존중하는 데 동의했다. 베를린에서 서독의 정치적 존재감이 감소된 대신, 동독은 서베를린의 육해공상 접근에 개입하지 않는 데 동의했다.
동방정책은 성공적이었는가? 세계 여론은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1971년 빌리 브란트는 대체로 동서 데탕트의 이상을 진전시킨것에 대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브란트는 슈트레제만 이후 이 상을 받은 첫 번째 독일 정치가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논란의여지도 안고 있었다. ‘독일 드골주의자’들이 주도한 반대파는 브란트와 셸이 동방정책이라는 망상을 좇는 가운데 서방과의 협조를 등한시하는 한편 독일의 권리와 영토를 “내주었다”고 공격했다.
—p. 572~576
동독의 잘못된 경제정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결과는 동독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새로운 국면이었다. 동독 시민들은 “발로 투표했다”. 1949년에서 1961년 사이 베를린시의 열린 국경을 통해, 250만 명의 동독인이 영구적으로 서독으로 이주했다. 게다가 체제지도자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난민 중 거의 절반은 25세 미만으로, 이로 인해 동독은 경제적으로 가장 생산적인 인구의 주된 부분을계속해서 잃었다.
광범위한 불만족의 징후에 대한 사통당의 반응은 경제적 방향을 재고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 속도를 높이고 더 나사를 조이는 것이었다. 1952년 7월 당중앙위원회는 ‘사회주의 건설의 가속화’를 결의했다. 소비재 산업을 희생하고 중공업 분야를 더욱더 강조했다. 신계획의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생산 규율과 노동시간을 더 늘렸다. 그러나 식량 배급은 낮은 수준에서 변화하지 않았다.
—p. 616
예술가들과 작가들에 대한 동독의 태도는 수년간 변화했다. 비록 그 변화가 1951년 당이 결정한 기본 원칙의 변형이었을지라도 말이다. 1945년부터 1949년 사이 점령 기간의 문화적 활동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1951년 3월 상황은 급변했다. 사통당 중앙위원회는 ‘예술과 문학에서 형식주의에 맞서서: 진보적인 독일 문화를 위하여’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1934년 이래 러시아에서 활용되던 문화정책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동독의 ‘문화 생산자들’을 위한 공식 지침으로 삼았다. 러시아와 소비에트의 모든 것의 우월성을 강조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순수한 스탈린주의 형태는 스탈리 사후에 약화되었지만, 예술과 문학이 ‘당성, 전형성, 낙관주의’를 보여야만 한다는 도그마는 남았다.
사통당은 동독의 예술 활동을 통제하고 예술을 프로파간다로 만들기 위해 사회주의 리얼리즘 개념을 활용했다. 작가들은 동독에서의 삶을 “그것이 미래를 향해 진보하고 있는 듯 사실적으로” 그릴 것을 요구받았다. 이는 예술가들로 하여금 현재가 설령 이러한 이상화된 그림에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미래에는 당이 선언한 것이 ‘실재’하는 삶이 된다는 걸 그려내야 함을 의미했다. ‘전형성’ 역시 특별한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예컨대 예술가들은 노동자들을 묘사하면서 동독에서 자본주의 철폐가 ‘인간의 자기실현’을 낳았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림에서 노동자의 얼굴, 소설에서 남녀 노동자들의 활동은 노동자가 동독에서 ‘생산자이자 소유주이며, 정치권력 보유자’라는 것을 반영해야만 했다.
—p. 640~641
1970년대 동독은 감춰지기는 했을망정 처음으로 상당한 인플레이션의 결과들을 경험했다. 서독에서는 인상된 비용이 대체로소비자들에게 전가되었지만, 동독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고려들이 이러한 진행 경로를 막았다. 기본적인 식료품, 주택, 지역 수송이 매우 많은 보조금에 의존했다. 비용과 가격의 간극을 좁히고자 동독은 다양한 전략을 썼다. 부분적으로 동독은 기본적이지 않은 소비재생산을 줄였다. 두 번째 전략은 부채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재원으로는 기술 진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독은 다른 동유럽 국가들처럼 서독 은행에 엄청난 규모의 누적 채무를 졌다. 울브리히트 시기 동안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던 동독의 외채는 1981년 말 114억 달러, 1989년 266억 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게다가 외채의 절반 정도는 문자 그대로 먹어치운상태였다. 서구 국가들로부터의 필수적인 식량 수입 비용이었던 것이다. 동독이 1989년 몰락했을 때 서구 수출로 얻은 경화 소득은동독이 서구 은행에 빚진 이자의 2/3 정도만 감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지도자들은 정산을 미루는 방법을 찾아냈다. 동독과 서독의 복잡한 재정적 얽힘은 경제문제를 다루는 동독의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독은 서독과의 무역 관계에서 상당한 정도의 무이자 신용대출 제도에 기댈 수 잇었다. 게다가서독인들이 서베를린으로 왕복하는 여행과 결부되어 매년 수백만 도이치마르크를 우편, 철도, 도로 서비스 이용료의 형태로 지불받았다. 또한 동독 정치법들을 서독으로 석방하는 것에 대해서도 ‘보상’받았다. 동독은 서독 개인들이 동독 여행이 자유화된1972년 이후 추가적으로 수백만 마르크를 벌어들였다. ……게다가 개별 동독인은 서독 친구와 친척을 방문을 받을 때마다 500마르크까지 받을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러한 경화 흐름의 결과로 동독의 소비재 시장에서는 이중 체계가 형성되었다. 개인 손에 들어간 경화가 암시장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국가는 인터숍Intershop이라고 불린 특별 경화 통용 상점을 차렸다. 국가소매업조합이 운영했는데, 다른 보통상점들에서는 얻을 수 없는 다양한 상품들을 제공했다. 또한 다른 류의 상점 체인, 즉 희소한 소비재 상품을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보다 훨씬 더 비싼 동독마르크 가격에 판매하는 엑스퀴지트 상점Exquisit-Laden도 열였다. 이러한 전략은 공식적으로 설정된 가격으로구할 수 있는 소비재 부족에 대한 대중적인 불만을 봉쇄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잘 작동하는 사회주의 경제의 상징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동독의 국내총생산이 다른 소비에트 블록 국가들보다 1/3 이상 높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기술적으로 볼 때 동독 경제는 코메콘국가들 가운데 가장 발전했고, 한동안 소규모 컴퓨터 같은 하이테크 산물들을 서구에 수출하기도 했다.
……호네커 체제하에서 동독은 경제가 약화되었던 반면, 외교정책에서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할슈타인 독트린은 과거의기억이고, 동독은 세계에서 인정받는 구성원이 되었다. 동독은 미국과 나토 국가들을 포함하여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과 완전한 외교적관계를 유지했다. 동독과 서독 모두에게, 국제적 인정을 획득하는 데 외교적 이정표가 된 것은 1973년 유엔 동시 가입, 그리고 1975년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CSCE에 주권국가로 참여한일이었다. 에리히 호네커 이상으로 동독의 국제적 인정을 즐긴 사람은 없었다.
—p. 650~652
조직 윗선에서 보인 마비와 무능력, 그리고 기층의 불만족의 결합은 동독의 극적인 변화 과정을 이끌었다. 오스트리아와 국경 요새를 해체하기로 한 헝가리의 결정을 이용하여, 7월과 8월 헝가리에서 휴가를 보내던 수만 명의 동독인이 동독으로 돌아가는 대신오스트리아로, 그리고 거기서 서독으로 도주하기로 결정했다. 수천 명 이상이 프라하와 바르샤바에 있는 서독 대사관에 난민 신청을했다. 동독 당국자들은 결국 이들이 서구로 여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89년 말 40만 명 정도의 동독인이 동독을 떠났고, 이는 베를린장벽 건설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탈출이었다.
……난민 탈출은 동독 당국에 당황스러운 정도였지만, 10월에 시작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는 체제의 존재 자체를 위협했다. 라이프치히에서 10만 명 이상이 거리를 점거했고, 이는 매주 ‘월요일 밤’ 시위가 되었다. 집회들은 즉흥적인 모임이거나 과거생태주의와 평화주의 단체에서 생겨난 다수의 정치적 개혁 운동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들—신포럼Neues Forum, 민주적 각성Demokratischer Aufbruch, 민주주의 지금Demokratie jetzt—은 동독에 개방과 민주주의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를 내보이고 있었다. 이 시기에 어떤 단체들도 동독 사회주의 체제 철폐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개혁을 요구했고, 그들의 영웅은 고르바초프였다.
사통당의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1953년 6월을 연상시켰지만, 이번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러시아는 동독이 자력갱생해야 함을 분명히 했다. 동독에 주둔한 소비에트 부대는 체제와 국민의 갈등에 개입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장치에만 의존했을 때, 사통당이 증폭되는 위기를 다루는 데 매우 무능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슈타지는 ‘믿을 만하고 계급의식 있는’ 노동자들을 시위에 잠입시키려고 노력했으나, 그러한 시도는 별반 효과가 없었다. 당 지도자들은 당원 숙청의 은어인 유서 깊은 ‘당 문서들의 교환’ 역시 고려했지만, 매일 수만 명의 사통당 동지들이 자신들의 당원 수첩을 반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역시도 뭉툭한 몽둥이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p. 661~663
‘젊은’ 크렌츠는 동독인들에게 그가 진정한 ‘전환Wende’을 대변한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 서구 정치인 스타일로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한 명의 새로운 지도자 선택으로는 충분치가 않았고, 더 근본적인 변화들이 뒤를 이었다. 1989년 11월 첫 주에정치국과 동독 내각 전체가 사퇴했다. 새로운 총리는 사통당의 드레스덴 지방 수장이던 한스 모도로프Hans Modrow였다. 그는오랫동안 경제적, 정치적 개혁을 옹호해왔고, 바로 그 때문에 호네커는 정치국과 국가 권력의 회랑에서 그를 배제시켜왔다.
정권은 경제를 탈중앙집권화할 계획들을 발표했고, 더 중요하게는 여행 제한을 완화했다. 그러나 다시금 이는 너무 늦고, 너무 제한적인 변화일 뿐이었다. 정치국은 동독 시민들이 국가 밖으로 여행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을 고려했다. 그러나 여행은 1년에 30일로 제한되었고, 동독인들은 신청서가 슈타지 파일 캐비넷에 수년간 머무른 경험을 오랫동안 해온 바 있다. 정치국은 어중간한 조치들에 대한 불만의 징후들이 늘어간다고 보고, 실제로 언제 그럴지는 불분명했지만 국경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은 1989년 11월9일, 역사상 유명해진 15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귄터 샤보프스키에 의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내려졌다. 동베를린 사통당의 수장이자 중앙위원회의 신임 정보및홍보담당 비서이던 샤보프스키는 정치국의 결정을 언론에 설명할 것을 요청받았다. 언제 국경이 개방될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그는 사전에 주어진 자료에서 아무런 특별한 관련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지연 없이, 즉각”이라고중얼거렸다.
그 결과 정권은 베를린장벽을 열어젖혔다. 수만 명이 동서 베를린의 국경 교차 지점으로 달려갔다. 급증하는 군중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지침도 없이 남겨진 수비대는 결국 문을 열어젖혔다. 베를린 장벽은 여전히 흉물스럽기는 하지만 구멍이 많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동독의 흥분한 국민들을 달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사통당이 기대했다면, 그 희망은 머지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새롭게 자유로워진 동독 언론에 실린 엘리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폭로가 인적 변화와 정책 변화를 한층 더 끌고 나갔다. 에리히 호네커와 그의 동료들은 수년간 평등주의적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근검함을 설교했지만, 근검은 당 지도부가 아니라 국민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정치국 위원들은 서독의 기준에 따르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평균적인 동독인들이 꿈만 꾸는 정도의 특권은 누리고 있었다. 사통당의 상층부는 별개의 주택단지를 갖고 있었고, 그들의 수렵장을 소유했으며, 서구의 상품들이 가득 찬 특별한 상점에서 쇼핑을 했고, 몇몇은 스위스 은행에 비밀 계좌를 갖고 있었다.
—p. 666~667
특히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가 독일의 통일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녀는 미국 대통령 부시와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을 설득하여 서구연합이 두 독일의 정치적 통합을 막을 조치를 취하도록 활발한 캠페인을 전개했다. 프랑스 대통령은 대처만큼 요란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처의 입장에 동조적이었고, 독일 통일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1989년 12월 말 그는 동베를린으로 가서 사통당의 신임 대표인 그레고어 기지를 비롯한 몇몇 동독 지도자들 만났다. 미테랑은 독립적이고 주권적인 동독에 대한 프랑스의 계속적인 지원의 기지에게 보장했다. 반대로 부시 대통령은 독일 통일의 가장 중요한 지지로서 재통일이 되었을 때 통일된 독일이 나토 회원으로 남을 필요가있다는 점만 강조했다. 헬무트 콜과 그의 내각은 여전히 통일된 독일에 대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대처와 미테랑만은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인지했다.
……동구로부터의 저항과 서구로부터의 조심스러운 성명에 직면에서, 서독은 후퇴했다. 바이츠제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지도자들은 “통일을 서둘러 진행하려는 노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조심스러운 청사진보다 사건들이 빨랐다. 결정적인 촉매제는 동독 경제의 급속한 붕괴였다. 검열과 ‘낙관적 전형성’을 보도해야 한다는 강제에서 풀려나면서, 동독 언론은 자신들이 엄청난 빚더미에 앉아 있으며, 시대에 뒤처지고 비효율적인 경제체제를 갖고 있음을 폭로했다. 또한 공산주의 체제는 무슨수를 써서라도 생산을 늘리려는 추진력의 여파로 충격적인 환경문제를 남겼다.
—p. 670~671
1990년 10월 2일 밤, 동서독의 정치 지도자들은 복원된 베를린의 독일의회 건물에 모여 중대한 사건을 축하했다. 0시 1분, 독일은 다시금 통일된 나라가 되었다. 열광하는 대규모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정치가들은 몇 가지 공통된 주제를 강조했다. 분리가 아니라 통일이 역사의 이치였다. 그 밤의 주된 주제는 사민당 지도자 빌리 브란트가 1년 전 베를린에서 행한 다른 연설에서 제시된 바 있었다. “한데 속한 것은 함께 모인다.”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통일은 새로은 독일적 쇼비니즘의 표현이 아니라 자유와 자결에 대한 열망의 결과임을 강조했다. 동시에 연설자들은 1989년 가을 이후 벌어진 사건 경로에 대한 공식적 해석이라 불릴 만한 것을 제시했다. 동독의 붕괴는 시민들의 작품이고, 재통일은 특히 러시아와 미국 등 4대 열강의 원조와 격려를 받아 동서독이 함께 노력한 결과라는 것이었다.
최근 과거의 전개에 대한 어떤 방어적 언급이 있었다면, 그것은 통일이 일어난 방식과 속도에 관한 것이었다. 완전한 연합은 준비를 위한 오랜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비판에 대해, 집권 연합의 대변인들은 반복해서 1990년 7월 경제적, 사회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100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이동했으리라는 점을 지적했다. 재통일의 정치적 차원에 대해, 정치 지도자들은 옛 동독이 본질적으로 서독에 병합되었다는 사실을 축소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래 병합이라는 단어는 독일의 정치용어에서 불쾌한 함의를 갖고 있었지만, 독일의 통일은 실제로 구동독에 대한 서독의 평화롭고도 인기 있는 병합의 일종이었다. 새로운 국가는 동서로 나뉘었던 베를린을 포함하여 16개 연방주로 구성되었다.
연방의회는 베를린을 다시 중앙정부의 수도로 정할지를 두고 표결했다. 독일의 수도를 본에서 베를린으로 옮기는 일은 엄청난 상징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별로 이목을 끌지 못했다. 1999년 9월 연방의회는 새롭게 디자인하여 복구된 독일 의회 건물에서 첫 번째공식 회기를 시작했다. 민주적인 투명성의 상징으로서, 연방의회 의사당 프로젝트를 맡은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 경은 건물에 엄청난 규모의 유리로 된 둥근 지붕을 덧붙였다. 이곳은 관광객들의 방문을 허용하여, 연설회장을 바로 내려다볼 수 있도록 했다. 이 새로운 형상은 베를린의 가장 가시적이고 알아보기 쉬운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p. 681
독일이 경제의 불길을 재점화하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전문가들로 한정되지 않았다. 콜 정부는 공급 측의 경제학이 제시한 이유들을 언급했다. 다시 경쟁력을 얻기 위해서 독일은 생산성을 높이고, 노동비용을 낮추며, 민간투자를 유치할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높은 임금, 넉넉한 휴가, 사회복지 패키지, 상대적으로 낮은 평균 주당 노동시간 등을 언급하며, 총리는독일이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의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유원지’가 되어갈 위험에 처해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정부는 또한 환경에 대한 우려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너무 많은 규제가 신규 건설과 투자를 막는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통령이던 로만 헤어초크는 시장경제의 위험과 기회를 껴안도록 동포들을 반복해서 설득하는 데 대통령 연단을 활용했다.
말할 것 없이 공급 측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자들은 이러한 제안을 거부했다. 전통적으로 경제의 강력한 부문인 독일 노동조합은단체협야그이 유대를 완화하는 데 당연히 반대했고, 다른 대변인들 역시 거의 50년간 독일을 파업이 거의 없는 나라이자 전반적으로조화로운 노사 관계의 나라로 만들어온 신조합주의 모델을 버리는 데 대해 제재를 가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노조와 사민당도 ‘여느때와 다를 바 없이’는 답이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 경제의 단기적인 조정과 장기적인 재구조화가 필요했다. 단기간 동안, 폭스바겐 대표가 제시한 아이디어였던 주 4일 노동(그에 상응하는 임금 삭감을 동반하는) 같은 극단적인 제단도 일거에 기각되지는 않았다.
……정부의 경제적 계산을 복잡하게 만든 특수요한 요소는 2002년 1월 1일 새로운 유럽 통화인 유로Euro 도입에 합의한 결과였다. 유로 클럽 회원국 자격을 얻기 위해 참가국들은 1997년 중반에 물가상승률은 1.2퍼센트를 넘지 않고, 연간 예산 적자는 3퍼센트보다 작으며, 총 국가 부채는 연간 GDP의 66퍼센트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했다. 기준이 충족되기로 한 날, 독일도 비록 물가상승률은 낮았지만, 적자와 부채 기준을 충족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재무부 장관 테오도어 바이겔은 유럽연합 내 그의 파트너들과 더불어 매우 상상력이 풍부한 장부 작성에 참여했다. 주요한 어려움은 실업수당 비용이 국가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커져가는 상황에서 경기 조정형 조치를 재정 지원할 정부 역량이 유로 클럽의 기준으로 인해 심각하게 제한되었다는 것이다.
콜 정부는 몇 가지 주요한 개혁을 밀어붙였다. 다소 뒤늦게 거대한 공공기업의 시대가 끝났음을 깨닫고, 독일 정부는 우편과 전화서비스, 연방철도를 민영화했고, 국적기인 루프트한자의 정부 몫을 민간투자자에게 팔았다. 불행하게도 정부의 재정적 이익은 처음에보였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 비록 정부가 자산 매각으로부터 수익을 얻었을지라도, 민영화된 회사들이 민간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공기업들의 부채도 떠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p. 725~726
……경제적 난관의 가장 두드러진 징후는 지속적인 고실업이었다. 2005년 3월 전반적인 실업률은 9.8퍼센트에 달했지만, 동독노동자들과 55세 이상 피고용인들의 실업률은 18퍼센트에 달했다. 절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 슈뢰더 정부가 1998년 취임했을 때 380만 명의 실업자가 있었다. 7년 후 이 수치는 500만 명으로 늘어났다. 무수한 분석가들이 “독일 모델”이라고 불려온 것이 이제는“유럽의 환자”가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무엇이 이러한 상태를 낳았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의 윤곽은 지난 10년간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적 좌파는 서둘러서 빠른 투자 이윤을 강조하는 미국 스타일의 ‘주주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프란츠 뮌터페링이 헤지펀드를 두고미래에 대한 고려 없이 자산을 먹어치우는 메뚜기로 묘사한 것은 이러한 태도의 한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다. 이 주제에 대한 한 변형은 높은 실업률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임금을 삭감하기보다 올리는 것이라는 표면적으로 모순적인 제안이었다. 이 주장은 독일의 수출을 지속시키기 위한 일방적인 추구 때문에 경영자들이 국내시장을 외면하고 있다고 상정했다. 그로 인해 직장과 수당을 잃을 것을 우려하는 피고용인들은 소비자로서 지출을 줄이고, 국내시장을 침체시킨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정반대의 주장을 폈다. 세계화시기에 독일은 좀 더 미국 스타일의 자본주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필요 이상의 경력을 가진 고령의 노동력과 과도한 사회적 비용및 관료적 통제로 방해를 받는 경제를 가진 독일은 경쟁자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동독 지역에 대한 보조금이라는 재정적 블랙홀은, 복잡하고 번거로운 독일 세제와 마찬가지로, 특히 서독에서 인기 있는 희생양으로 남았다.
해결을 위한 제안은 주로 세 영역에서 왔다.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계획, 제도적이고 개인적인 보조금에 대한 국가 시스템을 간소화하는 방식을 포함한 세제 개혁, 자발적 비즈니스를 방해하는 전 정부 차원의 미로 같은 규제를 줄이기 위한 제안, 특히 자민당은 고용과해고를 지배하는 무수한 법과 규제에 집중했다. 그들은 이들 대부분을 철폐하고, 미국에 좀 더 근접한 시스템으로 바꾸기를 희망했다.
—p. 729
통일은 예상치 못한 경제문제들을 야기했지만, 독일 외교관계에서도 심대한 결과들을 낳았다. 통일된 국가는 세계적 차원의 세력관계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이는 매우 어려운 균형 잡기였다. 전직 미 국무부 장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말했듯, 통일된 독일은 “세계 강국이 되기에는 너무 작고, 유럽 강국이 되기에는 너무 컸다.”
통일 이후 독일은 새로운 독일에 대한 해외의 염려를 가라앉히고자 집중적인 캠페인에 착수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세 가지 우선순위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모든 남아 있는 국경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통일독일은 오데르나이세 라인을 독일의 영원한 동쪽 국경으로 인정했다. 두 번째 강조점은 독일이 국제관계에서 새롭게 특수한 길에 나서지 않을 것에 대한 보장으로서 본-파리 동맹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통일독일을 통합된 유럽에 포함시키는 것은 콜 정부가 절대적으로 우선시했던 일로서, 콜 총리는 이로인해 ‘최후의 위대한 유럽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p. 738
두 독일의 지속적인 차이와 긴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전문가들은 통일이 정치의 실재 속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음과 심장에서 일어났다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서독인들이 일상적으로 말하는 서독 출신 ‘베시Wessi’와 동독 출신 ‘오시Ossi’간의 차이와상호 분노는 통일된 독일에서 ‘통일’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동독과 서독의 분리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옛 동독 지역에서 통일에대한 환호는 느린 경제 회복 속도와 서독인들의 거만함에 대한 불평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구동독에서 공무에 종사하던 거의 모든사람이 도처에 편재하던 슈타지와 접촉했다는 지속적인 폭로들로 인해 무수한 동독 ‘태생’ 정치가들이 강제로 내쫓겼다. 그들의 자리가 서독 출신의 ‘뜨내기Carpetbagger’로 대체되기 일쑤여서, 베시들에 대한 분노를 더욱더 강화했다.
……동독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공산주의적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더 나은 민주적 미래였다. 그들은 확실히 모든 경제적 지표들이 서독에서보다 동독에서 더 낮다는 것에 염려했고, 다수의 서독인이 동독인들을 후진한 사촌처럼 대하는 것에 분노했다. 일부 동독인들은 서독의 ‘경쟁사회Ellbogengesellschaft’와 다르게 구동독을 특징지어온 것으로 간주된 공동체적 감각의 상실을 안타까워했다. 또한 ‘오시’들은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서독 기준에 적응해야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러나 ‘베시’들 역시 정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점차 동독이 점점 더 많은 재원을 삼키고 서독의 생활수준을 낮출 위험을 제공하는 밑빠진 독이라고 보았다.
……독일인들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두 번째 노력은 1945년 이후 탈나치화의 어려움을 연상시키는 문제에 직면했다. 한 가지 익숙한 상황은 하급 공산당 관료는 처벌하면서도 구동독 체제의 실질적인 지도자들은 내버려두는 경향이었다. ‘전환’ 이전 사통당 최후의지도자이던 에리히 호네커는 원래 러시아로 망명할 수 있었다.
—p. 751~753
비대칭의 예는 매우 많다. 1871년 통일 이후 급속한 경제적 발전은 동시에 본질적으로 전근대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현실과 대조를 이루었다. 통일이 제국-연방 구성국 간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연방 구성국의 권리는 강하게 남았고, 이는 실제로프로이센이 독일제국의 문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동 인구에 대한 선거권 유예는 유럽에서 가장 앞선 산업국이 되어가는 나라에서 통증이 심한 종기가 되었다. 나치 등장 이전에 유럽에서 가장 번성하고 동화된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 잡은현실에서 반유대주의 전통도 지속되었다. 근대화라는 포장의 전반적인 결과는 사회 내부의 긴장이었고, 이는 합의적인 다원주의가 굳건하게 자리 잡는 것을 막았다.
독일의 지도자들은 비대칭적인 근대화가 야기한 문제점들을 모르지 않았지만, 1945년 이전에 그들은 이 문제점들을 직접적으로다루기보다 국내의 현 상태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외국에서의 성공을 반복적으로 이용했다. 승리한 전쟁에 뒤이은 통일의 대가이자 필연적인 결과로서 비스마르크 타협을 광범위하고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독일의 뒤이은 지도자들로 하여금 위험이 점차 커져감에도 반복해서 도박을 하라고 설득했다. 국내 정치의 우위는 1차대전에서 독일의 참여가 국제적인 세력균형을 영구히 변화시키기 위한 절박한 도박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세력균형을 지속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였음을 의미했다.
……짧은 기간 동안 바이마르공화국이 불신받아온 권위주의 대신 이식하고자 했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다원주의는 독일 땅에서 그뿌리를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구엘리트층을 포함한 많은 독일인이 자신들의 축소된 지위와 영향력, 전쟁에서의 패배, 강대국으로서 독일의 지위 상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만성적인 경제적, 재정적 문제를 정치적 근대화 탓으로 돌렸다. 게다가 바이마르공화국의 아버지들은 자신들의 신념에 대한 용기가 부족했다. 공적 활동의 많은 영역에서 그들은 구세력이 실제 권력을 잡도록내버려두었다. 일부 지도자들의 진지한 노력과 실제로 이룬 경제적, 사회적 진보, 문화생활의 의심할 나위 없는 광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모순의 희생자가 되었다. 결국 공화국은 새로운 형태의 니힐리즘 세력의 공격에 맞서기에는 너무적은 것은 너무 짧게 제시했을 뿐이다.
나치즘은 반유대주의와 원민족적 통합에 대한 갈망을 위시하여 몇몇 오래 지속된 독일 전통에 그 뿌리는 두고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대공황이 이미 마모된 사회의 가치 합의 구조를 붕괴시켰기 때문에 성공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심복들이 수백만 독일인들에게 구제를 약속했기 때문에 권좌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결국, 히틀러가 총리가 된 것은 신보수주의자들이 그릇되게도 자신들과 협력하게 나치가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시기의 과거 영광을 회복시킬 것이며, 당연하게도 구엘리트층을 그들에게 익숙한 권력과 명망의 자리로 되돌려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제3제국은 근대화에 이르는 독일의 비대칭적 경로의 정점이면서 사장 나쁜 결과를 나타냈다. 히틀러는 비스마르크 시기의 권위주의체제로 복귀할 의사가 없었다. 독재자의 목표는 전면적인 전체주의 사회의 건설이었다. 나치 반유대주의는 19세기에 전형적이었던 상대적으로 과장된 편견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비극적으로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 살해를 낳았던 적의에 찬 인종주의의 일종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제국 독일의 지도자들은 ‘제국의 적들’로 정의했던 그룹들을 권력에서 배제하고자 노력했을 뿐이지만, 나치들은 법치국가의 모든 흔적을 없애고, 수천 명의 나치 적대자에 대한 수년간의 감금, 육체적 학대, 처형을 의미하는테러와 강제수용소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1945년 제3제국의 완전한 패배는 최종적으로 사실상 모든 독일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최근 과거와 직면하고, 그로부터 적합한 교훈들을 얻어내도록 했다. 그 결과는 향후 독일의 정치와 가치가 철저한 궤도 수정을 해야 한다는 데 대한 때로는 암묵적이고, 때로는 공개적인 인정이었다. 그것은 근현대사 대부분의 시기에 독일이 너무나 ‘내부 지향적’이었다는 인식이었다. 국내문제에서, 독일 사회의 다양한 그룹들은 사회 다른 그룹에 미칠 결과들과 무관하게 자신들의 협소한 세계관이 독일 전체에 부여되지 않는다면 역사는 그의미를 잃을 것이라고 고집했다. 외교관계에서 ‘내부 지향성’은 독일 지도자들로 하여금 국가의 권력과 위상이 국제적 세력균형을 유지하도록 돕는 수단이기보다는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1945년 이후, 이 실패한 ‘내부 지향성’을 마찬가지로 전면적인 ‘타자 지향성’으로 바꾸어온 이해할 만한 경향이 보인다. 엘베강의 동쪽과 서쪽 모두에서 독일인은 1945년 이전 독일사의 굴레를 벗어던지기를 원했고, ‘0시’에서 다시 새로 시작하고자 했다. 실패한 독일사의 과거가 아니라 ‘타자’, 즉 승리한 연합국, 특히 두 새 강대국인 미국과 소비에트의 가치들에 근거하여 새롭게 출발하기 위한 가치 토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유혹이 있었다.
운 좋게도 적어도 독일의 서쪽 절반에서는 지도자들과 국민들이 타자 지향성의 무용성과 비역사적 속성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동독을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역사적 결정론이라는 구속을 동독에 부과하려고 고집했던 반면, 서독의 개방적 다원주의 사회는, 지속적인 국가적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모든 독일인이 과거의 총체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서독에서 ‘다른’ 독일의 요소—자유주의, 다원주의, 민주적 마르크스주의 전통—들은 해방되었고, 마침내 독일 사회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다.
—p. 786~789
1990년 10월의 사건들 이후 역사는 원점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1990년대 통일의 국제적, 국내적 맥락은1870년대를 지배하던 상황과 완전히 달랐다. 1871년 독일은 무력으로 통일되었고, 새로운 국가는 세계적 초강대국이 되었으며, 유럽대륙의 심장을 지배할 수 있었다. 1990년 통일은 평화로운 과정이었고, 새로운 국가는 나머지 서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주권국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초강대국은 더구나 아니었다. 유럽연합에 통합된 가운데, 독일과 그 파트너들은 다수의 중요한 권리를 브뤼셀의 유럽위원회와 슈트라스부르크의 유럽의회에 이미 넘긴 상태였다. 영토적 차원과 군사적 기량의 측면에서, 2001년의 독일은1871년의 독일보다 훨씬 작다. 통일독일의 연방군은 서독과 동독이 통일 전에 가졌던 병사 수의 절반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독일 정치 생활에서의 변화이다. 새로운 독일은 소수의 프로이센 봉건 지주와 군대 장교층이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다. 권위적인 정치체제가 아니라 국가 엘리트와 국민 모두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의회민주주의를 갖고 있다. 비스마르크타협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오랫동안 독일을 괴롭혀온 문제점들은, 최종적으로, 해소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측면에서 1990년은 1871년을 상기시키는 요소를 갖고 있다. 19세기 말 대부분의 독일인은 통일이 그들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통일에 대해 환호했다. 그와 같은 감정이 1990년 짧은 기간 지배적이었다가, 매우 과대평가된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삽시간에 바뀌었다. 그러나—중요한 것은 ‘그러나’이다—1990년 통일의 여파 속에서 책임 있는지도자도, 압도적 다수의 독일 국민도 비대칭적 근대화 패턴으로 회귀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을 추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정치적 민주주의, 자유기업 경제체제, 국제적인 협조에 전념했다. 이것은 확실히 우리가 독일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볼 이유가 된다.
—p. 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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