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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빈(Fin-de-siècle Vienna)일상/book 2020. 1. 16. 00:01
사놓은지 매우 오래된 책이다. 군대에 복무하던 5~6년 전쯤 샀을까. 무슨 취향에서였는지 이런 유(?)의 하드커버지로 된 인문학 서적을 한동안 사들인 적이 있다. 먼지도 먹지 않은 채 잠자코 책장에 들어앉아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를 이 책을,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를 읽고난 뒤에야 비로소 떠올렸다. 처음에는 읽기 버거운 책도 어느새 슉슉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인물을 중심으로 세기말 오스트리아의 예술, 건축, 문학, 음악을 아울러 서술하는 이 책은 읽으면 읽을 수록 흥미로웠다. 사실 익숙한 오스트리아 인물이라 해봐야 프로이트 정도인데, 그마저도 (어처구니 없게도) 해당 파트가 20 페이지 정도가 분실되어 있어서 정작 프로이트에 관한 내용은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환불을 받기에는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서야 책을 꺼내본 나를 탓할 수밖에……) 그래도 전화위복(?)이었던 것이 프로이트의 내용을 잃은 대신 생소했던 오스트리아의 예술가들―호프만슈탈, 오토 바그너, 쇤베르크, 오스카어 코코슈카 등등―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고, 막연하게 알고 있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몰입할 수 있었다. 사실 각 장이 거의 독립적으로 다뤄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장(章)을 놓친다고 해서 책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는 않다. 조금 독특한 구성이라 한다면 마지막 두 장(章)이 정원(庭園)이라는 테마 안에서 하나의 서사(敍事)처럼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책을 읽다보면 18세기말 오스트리아의 독특하고 촘촘한 사회적 지층과 경제상황, 정치적 지형을 발견하게 된다. 근대화의 도정(道程)에서 제각각 아이덴티티를 여실히 드러냈던 다른 유럽 열강들―특히 영국, 프랑스, 여기에 더한다면 독일까지―과 달리 합스부르크 왕국(오스트리아) 영토나 국력 면에서 이들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사회문화적 경로에서는 (대단히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뒤처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금 더 다듬어서 말하자면) 18세기말 비엔나에는 여러 시대가 혼재했다. 신흥 부유층이 부르주아로 진입하는 한편, 요제프 왕가에 향수(鄕愁)를 느끼는 옛 귀족계층이 있었고, 전위적인 예술적 시도가 꾸준히 사회의 창(窓)을 집요하게 두드렸지만, 반동적인 지식인들의 예술적 잣대에 무력감을 겪어야만 했다. 사실 세기말 오스트리아의 특수성을 이루는 가장 큰 부분집합은 민족문제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헝가리와의 어색한 공생, 그 안에서 꿈틀대는 반유대주의, 범슬라브 민족주의, 체코와 폴란드에서 지식인의 성장, 보불전쟁, 끝으로 게르만족의 무서운 통합을 향한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오스트리아는 근본에서부터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다. 바로 이러한 극도의 불안정 안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태동할 수 있었고, 클림트의 금빛 색채가 발현될 수 있었고, 빈 구도심을 에워싼 링슈트라세가 구축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베르토 무질이라는 작가가 내게 숨겨진 보석이었던 것처럼, 오스트리아는 외부인들에게 익히 알려지지 않았을 뿐 소중한 글과 소중한 소리, 소중한 색깔을 간직한 나라―지금은 게르만 색채가 강한 나라이지만 그들의 독특한 역사경로를 볼 때 과연 ‘나라’라 부를 수 있을까―인 것 같다. 덕분에 일주일 정도 해외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을 준 책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부르주아가 사회적으로 곧장 귀족계급에 동화되는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귀족 작위를 획득한 사람도 독일에서처럼 황실 궁정생활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와 다른 더 개방적인 길, 즉 문화를 통한 동화의 길이 열려 있었다. 물론 여기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오스트리아 귀족계급의 전통문화는 법치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부르주아나 유대인 문화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귀족계급은 속속들이 가톨릭적이고 관능적이며 감수성을 중시하는 문화였다. 전통적인 부르주아 문화는 자연을, 신성한 법칙에 따르는 질서를 부과하여 장악해야 할 어떤 것으로 본 반면 전통적인 오스트리아 귀족 문화는 그것을 즐거움의 무대, 예술로 찬미되어야 할 신성한 은총의 현현으로 보았다. 전통적인 오스트리아 문화는 북독일같이 도덕적, 철학적,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미적인 것이었다. 그 가장 큰 업적은 건축, 연극, 음악 등의 응용예술과 공연예술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이성과 법률의 자유주의적 문화에 뿌리를 둔 오스트리아 부르주아는 따라서 관능적 감정과 우아함을 위주로 하는 구귀족 문화가 맞섰다, 앞으로 슈니츨러에게서 보게 되겠지만, 이 두 요소가 합쳐질 때 생길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불안정한 혼합물뿐이다.
―p. 53
이제, 1890년대에 수렴하게 되는 문화와 정치적 발전의 개별적인 가닥들을 한데 모아보자. 교육받은 부르주아들은 기존 귀족계급의 우아함의 문화 속으로 동화되려고 노력하면서 귀족계급이 가졌던 심미안과 관능적 감수성을 도용했지만 그것은 세속화되고 왜곡되었으며 고도로 개인화된 형태였다. 나르시시즘 및 감각의 삶이 보이는 이상비대 현상은 그 결과였다. 정치적 대중운동의 위험은 그들 특유의 유산이던 합리성과 도덕률과 진보에 대한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확신을 약화시킴으로써 이미 나타나 있던 이러한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장식물이던 예술이 본질로 변했고, 가치의 표현이던 것이 가치의 근원이 되었다. 자유주의의 몰락이라는 재앙은 더 나아가서 미의 유산을 감각적인 신경의 문화, 불안한 쾌락주의, 직설적인 불안감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복잡한 사태에 부채질하듯이, 오스트리아의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그들 전통의 초기 노선이자 도덕주의적·과학적인 성격을 지닌 법의 문화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들은 예술과 감각의 삶을 긍정하자니 죄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불구가 되었다. 이 불안의 정치적 근원은 나르키수스의 사원에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양심의 존재를 통해 작동하는 각자의 프시케였다.
―p. 56~57
호프만슈탈과 슈니츨러 두 사람은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즉 고전적 자유주의적 인간관이 무자비한 오스트리아의 현대 정치 앞에서 해체되는 상황이 그것이다. 둘 다 낡은 문화의 폐허에서 심리적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했다. 슈니츨러가 이 문제에 접근한 방향은 빈 자유주의 전통의 도덕적, 과학적인 측면이었다. 사회에 대한 그의 직관은 호프만슈탈의 것보다 더 탁월했지만, 죽어가는 문화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는 가을 같은 분위기의 염세주의에 빠져 비극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호프만슈탈 역시 슈니츨러가 심미적 문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던 방황으로 마비 상태에 빠져 고통스러워 했지만, 여기서 벗어났다. 슈니츨러만큼이나 심리적 인간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예술 원리를 정치에 적용했다. 그는 감정의 비합리적 힘을 억누르기보다는 물꼬를 틔워주는 형식을 찾으려 했다. 전체의 제의에 참여한다는 그의 정치학은 시대착오적이었고, 그 때문에 그를 비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적 권리뿐만 아니라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정치적 사고와 실천의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증언은 포스트-자유주의 시대post-liberal era의 중심 이슈가 되었다. 호프만슈탈은 한때 현대 시인의 행동은 “필연성의 포고령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마치 그들 모두가 죽은 왕이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신의 흉물스러운 거주지인 피라미드를 건설하고 있기나 한 듯이 말이다”라고 주장했다. 합스부르크적 전통의 보유자이면서도 새로운 승화의 정치학을 과감하게 찾아나가는 호프만슈탈은 두 가지를 모두 해내려는 듯하다.
―p. 73~74
정치적 변화의 결과로 안쪽의 구시가지와 링 지역 간의 대비는 더욱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안쪽 도시는 건축학적으로 제1신분과 제2신분의 상징이 지배했다. 황제의 주거인 바로크식 호프부르크, 귀족들의 우아한 저택, 고딕식 성 슈테판 성당, 그보다 작은 여러 교회가 좁은 거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반면 링슈트라세의 신개발 지역에는 제3신분이 헌법적 권리가 제국적인 힘에 대해, 세속적 문화가 종교적 신앙에 대해 거둔 승리를 건축물을 통해 축하하고 있었다. 저택이나 수비대, 교회가 아니라 입헌정부와 고급문화의 센터가 링 지역을 지배했다. 구시가에서는 귀족적 장엄함과 교회 조직의 허세를 표현하기 위해 쓰이던 건축 기술이 이제 일반 시민의 공동체적 자산이 되어 일련의 소위 ‘호화 건축물Pracht-bauten’로써 부르주아 문화의 이상이 지닌 다양한 면모를 표현하고 있다.
링 지역의 규모와 장대함은 바로크가 끈질기게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암시하지만, 그것의 설계에 영감을 불어넣은 공간 개념은 독창적이고 새로운 것이었다. 바로크식 도시계획가들은 보는 사람의 눈길이 한곳의 중심에 집중되도록 공간을 조직했다. 공간은 그곳을 둘러싸거나 지배하는 건물을 돋보이게 해주는 무대장치 역할을 했다. 반면 링슈트라세의 설계자들은 건물을 활용해 수평적 공간을 확대함으로써 이러한 바로크식 방식을 사실상 완전히 뒤집었다. 그들은 모든 구성 요소를 건축학적인 확장억제책이나 가시적인 방향성 없이 중심에 있는 넓은 대로avenue나 코르소corso와의 관련 위에서 조직했다. 다각형 형태로 뚫린 도로는 이 광대한 복합체에서 다른 공간적 실체에 종속됨 없이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문자 그대로 유일한 요소다.
―p. 85~86
전체적으로 링슈트라세의 기념비적 건물들은 주류 자유주의 문화가 내세우는 최고 가치를 훌륭하게 표현했다. 자유주의의 열성적 지지자들은 연병장의 폐허에서 입헌국가의 정치적 제도를 양성해냈고, 자유 시민의 엘리트를 교육할 학교를 세웠으며, ‘신인간novi homines’들을 그 저열한 출신 성분으로부터 구원해낼 모든 문화를 한데 모을 박물관과 극장을 지었다. 족보 있는 구귀족계급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은 얻기 힘들겠지만, 정신의 귀족계급이 되는 길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새로운 문화 기관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다. 그 기관들은 옛 문화와 제국적 전통과의 연결을 강화하고 때로는 ‘메자닌mezzanine중 2층, 즉 1층과 2층의 중간층’이라 불리는 ‘이차 사회’를 보강하는 데 기여하는데, 상승하는 부르주아들은 그곳에서 사회적, 경제적 권력의 새로운 형태를 기꺼이 수용하고자 하는 귀족계급과 만난다. 그곳은 승리와 패배가 사회적 타협과 문화적 종합으로 변형되는 메자닌이다.
―p. 102~103
지테의 민중 개념은 바그너의 개념을 정확하게 뒤따르고 있다. 즉 ‘민중Volk’은 보수적이고 속물주의에 빠지기 쉽지만 또한 천재의 호소에 부응할 수 있고 가장 심오한 가치를 깨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테는 뉘렌베르크의 명가수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의 시민들에게서 “완전히 발전한” 민중의 사례를 보게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수공업자 전통의 규범에 따라 정상적으로 살아가면서도 오페라의 주인공이 가진 새로운 예술,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호소에 근거한 예술에 반응한다. 하지만 바그너와 지테에게서 민중은 프랑스 혁명 이론가들이나 마르크스에게서처럼 정치에서의 능동적 요소가 아니다. 그들은 수동적이고 보수적이며, 현대적이고 파괴적인 하향식 전복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과학자와 상인 모험가가 그린 전복자다. 구원자인 파우스트처럼 보수적(산업 시대 이전의) 민중을 무자비하게 파괴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과 연대함으로써 진보를 이뤄낼 것이다. 그들은 ‘새롭게 건설된 현대 생활’의 극장을 창조해 ‘그 문화의 가장 내면적인 동기’에 부응할 것이다. 지테는 지그프리트의 창조란 곧 미래를, 새로운 독일인을 만드는 것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것은 음악극 작가뿐만 아니라 조형예술의 임무이기도 했다.
바그너는 건축이 목적Zweck에 솔직하게 부합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쓸모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한편, 건축가도 예술가라는 생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건축가를 쓸모와 대립되는 아름다움의 옹호자로 본 지테와 달리, 바그너는 쓸모를 선(善)으로 여기고 그에 헌신함으로써 건축의 미적 기능을 되살리는 방향을 추구했다. 취임 연설에서 그는 현대 생활 그 자체가 건축가에게 ‘우리를 대표할 고유한 스타일’을 찾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첫 단계로 건축가는 역사에 대한 노예 상태, ‘스타일-건축Stilarchitektur’의 전통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
―p. 150~151
카밀로 지테와 오토 바그너, 낭만적 건축가와 합리적 기능주의자인 두 사람은 링슈트라세 유산에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구성 요소를 나눠 가졌다. 전통 수공업자 출신인 지테는 건물로 둘러싸인 광장을 미래를 위한 모델로 삼고 공동체적 도시를 복원한다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하기 위해 링슈트라세 역사주의를 끌어안았다. 현대적 기술을 긍정하는 부르주아 출신인 바그너는 지테가 링슈트라세에서 가장 혐오하는 것, 즉 도로의 일차적인 역동성을 본질로 받아들였다. 시간의 힘을 두려워하는 보수주의자 지테는 도시에 대한 희망을 아늑한 공간, 인간, 광장의 사교적인 범위에 걸었다. 바그너는 그전에 있었던 링슈트라세의 진보주의자들보다 더 심하게 도시를 시간의 위력에 복종시켰다. 따라서 도로가 왕이었고, 움직이는 인간의 대동맥이었다. 그가 볼 때 광장은 기껏해야 사용자들에게 방향과 목적지를 제공해주는 도로의 목표 지점일 뿐이었다. 스타일, 지형 등 지테가 현대적인 아노미에 대항해 투쟁을 벌이면서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썼던 모든 요소를 바그너는 본질적으로 도로와 그 시간적 궤적의 위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사용했다.
링슈트라세의 역사주의적 아름다움과 현대적 쓸모의 불편한 종합에 대해서 두 이론가 모두 방식은 달랐고 똑같이 반대했지만, 자유주의 부르주아인 도시 건설자들이 보유하는 핵심적인 가치 한 가지, 즉 기념비적 장대함에 대한 충성심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공통되게 나타났다. 지테는 거대한 공공건물을 더욱 커 보이게 하는 공간 설정인 광장의 설계를 통해 자신의 링슈트라세 개혁안을 발전시킬 구체적인 방법을 찾았다. 바그너는 예술가로서의 도시 계획자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획일성을 기념비적인 장대함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능력에 있다고 보았다.
―p. 172~173
그 프로그램의 이런 모든 측면에서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더 우월하고 역사적으로는 선배인 세력과 투쟁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아래에서 전진하는 세력을 이끌어 위에서 후퇴하는 세력과 맞서 싸우는 존재로 여겼다. 평민들은 매번 이해해주지는 않았으므로 아직은 신뢰할 만한 존재가 아니지만, 합리주의 문화가 전파되다보면 언젠가는 폭넓은 민주주의 질서를 위한 전제 조건이 마련될 것이다. 대중적 권력은 합리적 책임감의 기능으로 작동할 때만 커진다.
오스트리아 사회는 질서와 진보라는 이 같은 자유주의적 좌표를 따라가지 못했다.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자유주의자들이 상류계급에 대항하여 고안해낸 프로그램이 낳은 결과는 하층계급의 폭발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저항 에너지는 그들의 숙적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향해 폭발했다. 그들이 위쪽에 있는 적을 겨냥하여 쏠 때마다 아래로부터 적대적인 폭격이 가해졌다. 귀족 계급의 국제주의에 맞서기 위해 게르만 민족주의를 고안했지만, 그들에게는 슬라브 애국주의자들의 자치권 요구라는 응답이 돌아왔다. 자유주의자들이 다민족 국가에 유리하도록 게르만주의의 어조를 누그러뜨리자 반자유주의적인 게르만계 프티부르주아들은 그들을 민족주의에 대한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경제를 과거의 족쇄로부터 풀어놓기 위해 고안된 자유방임주의는 미래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을 불러들였다. 귀족계급 압제의 시녀라는 죄목으로 학교와 법정에서 발본색원되었던 가톨릭교는 농민과 장인들의 이데올로기라는 모습으로 복귀했는데, 이들이 볼 때 자유주의는 곧 자본주의였고 자본주의란 유대인을 의미했다. 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덕분에 해방되고 기회를 얻으며 현대성에 동화될 수 있었던 유대인들조차 은인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유주의가 실패하자 유대인들은 희생양이 되었고, 그 희생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민족의 고향으로의 도피라는 시오니즘의 제안이었다. 다른 민족들은 혼란이라는 무기로 오스트리아 국가를 위협했지만 시오니스트들의 무기는 분리하겠다는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들은 위쪽에 있는 옛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대중을 다시 불러 모으기는커녕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전반적인 해체의 힘을 불러낸 것이다. 자유주의는 낡은 정치질서를 해체하기에는 힘이 충분했지만, 그 해체 덕분에 풀려난, 관대하지만 융통성 없는 자유주의의 후원 하에서 새로운 분리주의적 운동을 만들어내는 사회 세력들을 장악할 능력은 없었다. 새로운 반자유주의적 대중운동―체코 민족주의, 범독일주의, 기독교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시오니즘―은 아래로부터 솟아올라, 교육받은 중산계급의 신탁통치권에 도전해 그 저이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역사의 합리적 구조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p. 190
그리하여 1887년에 뤼거는 쇠네러가 5년 전에 거친 것과 동일한 진화 과정을 완성했다.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시작해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을 거쳐 반유대주의로 나아간 것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뤼거는 빈의 정치인이며, 따라서 제국의 수도인 그 도시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국에 대한 근본적인 충성심을 지녔고, 따라서 쇠네러가 가진 무한한 증오심의 실체, 적극적이고 유동적인 실체인 게르만 민족주의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뤼거는 자신의 이념을 통합하는 이데올로기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 했다.
뤼거가 하층 중산계급과 장인 집단이라는 지지자에 의해 쇠네러 편으로 밀려가던 중에도 이보다는 덜 민족주의적인 대중정치가 전혀 예상치 못한 구역인 가톨릭 공동체에서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가톨릭은 뤼거에게 민주주의, 사회 개혁, 반유대주의, 합스부르크 충성심이라는 제각기 상반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던 서로 이질적인 반자유주의 요소들을 통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반대로, 뤼거는 그 산산이 부서진 구성 요소들을 한데 끌어 모아 현대의 세속세계에서 제 갈 길을 찾을 만큼 강력한 조직으로 만들어낼 정치적 지도력을 가톨릭교에 줄 수 있었다.
뤼거의 기독교 사회당이 1889년경에 등장하기 전, 오스트리아 가톨릭교는 시대착오로 인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시들어가고 있었다. 지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가톨릭교의 지도력은 자유주의 주도권이 영원히 파괴해버린 어떤 질서에 매여 있었다. 가톨릭교의 주요 정치적 지도자들은 연방주의자인 보헤미아 귀족들과 알프스 지역 출신의 지방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의회 클럽은 유명 인사들의 의회 내 소그룹Honoratiorenparteien이었다. 그들은 현대성과 현대적 작품 및 그 허세에 경각심을 느꼈다. 그들은 토지 소유 귀족이 지배하던 시절, 종교가 존경스러운 사회의 토대가 되어주던 사라진 나날을 그리워하며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현재에 보호 받기 위해 그들은 요제프 황제의 방식대로 황제에게 의지했다. 1860년 이후에는 황제 자신이 자유주의자들의 포로가 되었음이 명백한데도 말이다.
―p. 220~221
대중은 위험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또한 변덕스러울뿐더러 정해진 성격도 없으며 암시에 걸리기도 쉽다. 1893년의 선거전에서 헤르츨은 마술적인 선동이 단결과 정치적 상식을 누르고 승리하는 광경을 보도했다. 계몽되지 않은 선거권자를 한 번도 강력하게 신뢰해본 적이 없는 여느 오스트리아 지식인 자유주의자들처럼 헤르츨도 ‘민중the people’을 ‘대중mass’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는 대중의 지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지면서 절망했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조언을 구해야 할까?” 헤르츨이 나중에 시오니스트로 정치적 진화를 하게 되는 연원은 프랑스에서의 민주화 과정에 대한 이 같은 환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1896년에 쓴 최초의 위대한 시오니스트 조약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디에서나 민중은 몸집만 큰 어린아이다. 그들을 교육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여건이 아무리 좋다 해도 이 교육에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 자기 방식대로 해나가게 된다.”
민중에 대한 헤르츨의 신뢰 상실에 대해 이해하려면 그 신뢰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측면, 그러니까 민중의 지배자에 대한 신뢰 상실이라는 맥락에서 알아보는 편이 제일 좋다. 여기서는 프랑스 의회주의가 파산했다는 증언이라 할 파나마 스캔들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수천 명의 인명과 수백만 프랑을 집어삼킨 대운하 프로젝트의 거대한 부실 운영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정치적 뇌물과 공금 횡령 사실이 낱낱이 드러났다. 부패로 인해 법의 통치의 토대가 훼손되었고 비합리적인 대중의 힘이 족쇄에서 풀려났다. 마지막으로 공화국의 최근의 적인 반유대주의가 표면에 떠올랐다. 헤르츨은 전체 정치 시스템이 폭발하고, 프랑스 사회에서 들끓고 있던 내적 긴장들이 법과 도덕의 존엄한 굴레를 깨뜨리며 터져나오는 극적인 과정을 지켜보았다.
기자 헤르츨, 위협받는 법 문화의 자식인 헤르츨은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자들에게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부패와 공격 그 어느 것에도 이토록 취약한 의회 정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p. 242~243
헤르츨은 대중에 대한 호소에서, 그보다 앞서 쇠네러와 뤼거가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고전적 요소와 미래적 요소를 혼합했다. 세 지도자 모두 사회 정의라는 명분을 지지했고, 그것을 자유주의의 실패에 대한 자신들의 비판의 핵심으로 설정했다. 세 사람 모두 이 현대적 열망을 고풍스러운 공동체적 전통에 결부시켰다. 쇠네러는 독일 부족의 전통에, 뤼거는 중세 가톨릭의 사회적 질서에, 헤르츨은 디아스포라 이전의 이스라엘 왕국에 결부시킨 것이다. 세 사람 모두 각자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전진’과 ‘후진’을, 기억과 희망을 연결시켰고, 그럼으로써 불만족스러운 현재가 산업자본주의의 희생자인 추종자들, 수공업자와 야채 상인, 게토 거주자들과 행상인들을 삼켜버리기 전에 그 현재를 포위해버렸다.
―p. 259
만약 동화된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들이 협력했더라면 그의 과업이 상당히 쉬워졌겠지만, 그들은 헤르츨이 자유주의자 유대인들의 꿈에 제기한 도전에 대해 그 어떤 이교도보다도 더 심하게 원망하고 저항했다. 따라서 그들은 당연히 그가 품은 공격적 환상의 과녁이 되었다. 새로운 조성으로 진행되는 정치에서의 개척자는 모두 자신들이 출현한 자유주의적 매트릭스에 반대하는 반란자이므로, 자신들이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 명분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유주의자를 각자의 특별한 원수로 삼는다. 쇠네러에게는 게르만 민족주의 자유주의자들이 독일인 가운데 가장 심한 배신자이며 자유주의자 가운데 가장 위험한 족속이었다. 뤼거에게는 무기력하지만 기반은 든든한 자유주의 가톨릭교도가 가톨릭-사회주의적 쇄신을 가장 강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헤르츨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계몽된’ 자유주의자 유대인들은 한편으로는 그 자신도 속했던 지적·사회적 계급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유대인으로서 그들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기를 맹목적으로 거부했다. 자유주의, 그것이 바로 적이었다! 세 지도자는 각각 그 세 공동체의 대중을 조직하기를 원했지만, 그곳의 지도자 집단 내에서는 자유주의가 계속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 세 공동체가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에서 가장 큰 문제였다. 쇠네러는 무엇보다도 먼저 게르만계 자유주의자를 무너뜨려야 했고, 뤼거는 가톨릭 자유주의자를 무너뜨려야 했다. 마찬가지로 헤르츨은 제일 먼저 유대인 자유주의자들과 싸웠다. 하지만 각 경우에, 새로운 급진파는 일단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각각의 공동체 내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위 있는 인물을 내세워 자유주의 지도자를 끌어내리려고 했다. 쇠네러는 비스마르크의 지원을 받고자 했다. 뤼거는 교황의 도움을 청했다. 헤르츨은 히르시와 파리의 로트실트에게 갔다. 세 사람 모두 실패했다. 세 사람 모두 자유주의자들이 공동체 속에 여전히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호소했던 최고의 외적 권위의 지지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했다.
―p. 262
우리가 여기서 오이디푸스 전설이 프로이트의 사상이나 『꿈의 해석』의 구조에 대해 갖는 의미를 다룰 수는 없다. 다만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를 다룬 특이한 방식이 정치를 중화시키는 문제와 관련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가 왕이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다. 니체 및 다른 현대 철학자들이 그랬듯이 프로이트도 오이디푸스의 모색을 도덕적이고 지적인 것으로 보았다. 즉 운명에서 도망치고 자기 인식을 달성하는 것이다. 반면 그리스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소포클레스의 희곡인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은 공화국이라는 무대가 없다면, 즉 그 제왕적인 주인공이 테베에서 재앙을 물리친다는 정치적 임무의식에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구상할 수 없는 작품이다. 오이디푸스의 죄책감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죄를 찾아내고 자기 자신을 처벌하려는 노력은 공적인 문제이며 공화국의 질서를 재건할 책임에서 나온 것이다. 그에 비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그 의미를 모색하는 사색가다. 정치를 해체해 개인의 정신적 범주로 들어감으로써 그는 개인적 질서를 재건하지만 공적인 질서에는 손대지 않는다. 프로이트 박사는 헝가리 꿈에서 죽은 아버지의 유령을 왕으로까지 승격시켰지만, 여전히 정치라는 재앙으로 괴로워하는 테베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p. 298~299
또 한니발이 한 서약의 주문도 깨졌다. 그의 이론적 저작과 자기 분석은 『꿈의 해석』에서 완수되었고, 프로이트는 아버지가 죽은 지 거의 5년 만인 1901년에, 영원의 도시에 실제로 입성했다. 그것은 ‘로마인들에게 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적 순례자이자 정신의 고고학자로서, 빙켈만의 발걸음을 따른 길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게는 압도적인 경험이었고, 당신도 알다시피 오랫동안 간직한 소원의 실현이었다. (또한)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세 가지 로마에 대한 자신의 각각 상이한 반응을 이렇게 묘사했다. 세 번째인 근대 로마는 “희망적이고 좋아할 만하다.” 두 번째인 가톨릭 로마는 “구원이라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서 “마음이 불편해지고, 나 자신의 비참함과 그 존재 사실을 나도 알고 있는 타인들의 비참함에 대해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그에게 깊은 열정을 불러일으킨 것은 첫 번째인 고대 로마뿐이다. “나는 미네르바 신전의 온통 훼손된 소박한 폐허도 충분히 숭배했을 것이다.”
―p. 302
원래의 분리파가 내세운 목표를 전부 열거하려면 앞서 말한 오이디푸스적 반란과 정치성 질문 외에 한 가지 이념을 더해야 한다. 그것은 예술이 현대 인간에게 현대의 무거운 삶으로부터 도피해 휴식을 취하는 요양소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리파 전시관은 이 이념에 따라 구상되었다. 그것을 지은 건축가인 요제프 울브리히가 품었던 중심 발상은 “예술 애호가에게 조용하고 우아한 피신처를 제공해줄 예술의 신전을 세우는 것”이었다. 19세기의 박물관이 대개 르네상스와 귀족적 메세나의 부르주아적 모방이며 궁궐을 모델로 삼아 세워진 데 반해, 분리파의 건축물은 이교도의 신전에서 영감을 었었다. “신선하고 정숙하며 희고 빛나는 벽이 있어야 한다. (그것들은) 미완성으로 남은 세게스타Segesta의 성소 앞에 혼자 섰을 때 나를 꿰뚫고 지나갔던 것 같은 전율……순수한 존엄성의 표현일 것이다. 분리파 전시관 현관과 계단실에서 느껴지는 특징은 거의 무덤 같은 엄숙함이다. 입구는 예술의 신전으로 들어가는 계단실로 인도한다. 하지만 실내 공간 자체는 예술가들에게 일임되었다. 마치 클림트의 「누다 베리타스」에 나오는 텅 빈 거울과도 같다. 현대 예술과 디자인을 전시하려면 공간을 어떻게 운영해야 좋을지 누가 미리 알 수 있을까? 분리파 미술관의 공간은 가변형 공간 분할법의 개척자였다. 한 비평가가 관찰했듯이 전시 공간은 변동 가능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변동성이 바로 “서두르고, 부산스러우며 정신없은 현대적 삶의 본성,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신들의 영혼을 내적으로 관조하며 대화를 나눌 한순간을 얻기 위해 그 다중적인 거울 이미지를 예술 속에서 추구하려는 삶”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전시관 현광 위에는 분리파의 목표가 선언되어 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예술에는 자유를
하지만 그것이 주장하는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화적 쇄신과 개인적 내면 성찰, 현대적 정체성과 현대성으로부터의 요양소, 진실과 쾌락, 분리파 선언에 들어 있는 요소들은 상충되는 여러 가능성을 암시하는데, 그것들의 공통점은 오직 한 가지 의미뿐이다. 즉 그들 모두가 19세기의 확실성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p. 318~319
클림트의 「법학」은 공격적인 폭로이면서 진심어린 외침이라는 성격도 담고 있다. 고통받는 개체를 강조한 고발 양식 그 자체가 공적인 에토스ethos에서 사적인 파토스pathos로의 무게중심 이동을 내포하고 있다. 클림트의 그림에 나오는 늙어가는 법의 희생자에게는 니체적인 ‘아모르 파티amor fati(운명에 대한 사랑,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없다. 그저 허약함의 표시, 원망의 흔적이 있을 뿐이다. 클림트의 대학 그림들 가운데 중심인물이 남자인 것은 이 「법학」뿐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예전에 클림트가 그린 은유적 남성인 제1회 분리파 포스터의 테세우스, 화가의 오이디푸스적 반항의 상징적 주인공과는 완전히 다르다. 거기서는 정력적인 젊은이가 전통의 미노타우로스를 칼로 찌른다. 이제 늙어가는 희생자는 오이디푸스적 범죄에 특히 적절한 처벌인 거세, 영락하여 성불능이 된다는 처벌로 고통받고 있다. 클림트가 여기서 표현하는 것이 고통과 분노뿐만 아니라 허약해진 자아의 또 다른 특징인 죄책감이기도 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학계와 정치계에 있는 클림트의 적들이 간파했듯이, 아버지들에 대한 그의 분노가 곧 성적인 방탕함으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의 죄가 성애의 해방을 지지하는 반란 때문이라면 복수의 여신들이 내리는 성적 처벌이라는 클림트의 환상은 썩 그럴듯하다. 그러므로 이 도상화는 클림트가 평론가들의 공격에 시달리고, 또 반격을 가하는 동안에도, 본능적 삶을 법의 문화로부터 해방시키는 자라는 자신의 예술적 임무를 거부한 것이 어떤 점에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죄책감이 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의 반항 자체가 무능함의 분위기로 얼룩져 있는 것이다.
―p. 382~383
클림트가 1901년 맞닥뜨린 위기, 그리고 그 속에 함축된 예술과 정치의 분리라는 것의 의미를 충분히 평가하려면 「법학」의 희생자 처벌 장면과 「베토벤」 프리즈에 나오는 완성 장면이 함께 감상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각자에 대한 반대라는 입장에서 한 쌍을 이룬다는 관계에 놓이며, 각각의 작품은 그 이념에 적절한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두 작품 모두에서 중심이 되는 상징은 자궁 및 그것과 남성의 관계다. 「법학」에서 법이 들어가 있던 자궁 모양의 폴립과 위협적인 촉수는 「베토벤」 프리즈의 세 번째 화폭에서는 자궁 모양이고 부드러운 덩굴손을 가진 나무인 시와 대비된다. 「법학」에 나오는 흡반이 「베토벤」 프리즈에서는 꽃으로 피어난다. 두 작품 모두 중심인물은 남성이다. 첫 번째 그림에서 그것은 정의의 희생자, 육욕의 덫에 걸려 굴복한 늙은이였고, 두 번째 그림의 중심인물은 예술의 자궁 안에 있는 행복한 휴식처에서, 발기한 남근과 굉장히 비슷하게 생긴 원기둥 안에서 배우자와 함께 황홀경에 빠져 있는 젊은 남자, 예술의 승자다. 이 그림에 쓰인 두 가지 스타일로 인해 예전에도 관찰된 바 있는 차이, 즉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이념을 처리하는 이차원적이고 선적인 방식과 현실을 나타내기 위한 조형적 자연주의다.
……현대적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법학」이 법의 문화에 대한 클림트의 비판적 도전의 최고봉인 것처럼, 「베토벤」 프리즈는 현대적 삶에서의 피난처라는 예술의 이상을 최대한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베토벤」 프리즈에 나오는 몽상가의 유토피아, 그 삶의 역사적 구체성이 완전히 배제된 유토피아는 것 자체가 자궁의 포로, 후퇴를 통한 성취다. 프로메테우스 전통의 오르페우스적 전복은 완성되었다. 클림트가 「음악」에서 진리의 이름으로 열어졎힌 무덤은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그 존재를 주장했다.
―p. 394, 398
클림트의 초상화들은 「베토벤」 프리즈에 그려진 심미적이고 에로틱한 유토피아의 사회적 닮은꼴이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고급 스타일이라는 것이 결국은 충족된 소원을 사회적으로 관례화된 방식에 따라 탐미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클림트의 사회적 후퇴와 심리적 은둔을 예술적 몰락과 동일시하면 잘못이다. 그와 반대로 교체된 그의 자아는 새로운 예술 형태를 고안해 이를 삶의 고통을 방어하기 위한 갑옷으로 활용했다. 새로운 클림트 그림의 두 가지 중심 특징은 추상화와 상징인데, 우리가 앞서 살펴본 초상화들에서 점점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추상화는 감정을 구체적인 외적 실재로부터 해방시켜, 스스로 만들어낸 형식의 영역으로, 자가 발견을 위해 설정된 이상적 환경에 풀어놓는다. 하지만 더 크고, 완고하고 구조적인 이런 형식들 속에서 작고 가물거리는 입자들은 장식적 기능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역할도 수행했다. 그리하여 블로흐 바우어 초상화에서 클림트는 예전처럼 그런 상태가 어떻게 느껴지는 직접 제시하지 않고서도 이런 입자들을 통해 상충하는 심리적 상황들을 추상적으로 암시할 수 있는 것이다. 신나게 돌돌 말린 소용돌이와 응축된 모자이크 세포 간의, 그리고 뭔가를 암시하는 듯한 눈의 형태와 음문처럼 쪼개진 차원형들 사이의 긴장감, 이 모든 공식화된 개별적 요소가 그렇게 병치되어 추상적인 틀 속에 꼼짝 못하게 응고된 채 유보되어 있는 폭발력의 존재를 암시한다. 비잔티움 예술에서처럼 유기체적 힘은 결정화된 단편들의 조합과 전체적으로 이차원적인 대칭성의 조합에 의해 중화된다.
―p. 407
“기존의 사회질서와 상대하는 것도 어렵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질서를 세우는 것은 더 어렵다.” 후고 폰 호프만슈탈의 이 말은 유럽 정신이 만족스러운 유토피아를 기획할 능력을 잃어버린 20세기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더 이전, 프랑스 혁명의 뒤끝이었더라면, 대부분의 작가는 호프만슈탈의 판단을 뒤집어 말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상적 사회질서의 초안을 작성하기보다는 기존 사회질서와 싸우기가 더 힘들다고 느꼈을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한, 또 그런 것이 보편적인 가치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사회에서 허가와 지원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한, 사회 현실은 그가 자신의 사회에서 허가아 지원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한, 사회 현실은 그가 자신의 문학 작품을 두드려 빚어내는 모루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건들이 기대를 무너뜨리거나 예술가의 가치가 사회적 지지를 받지 못해 추상적인 것이 되면, 호프만슈탈이 말한 것과 같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질서를 세우는 데서 겪는 어려움이 기존 사회와의 투쟁이라는 더 전통적인 문제보다 더욱더 중요해진다. 그렇게 되면 예술가의 역할이 재규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저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가치와 사회적 현실의 관계를 표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회질서에 절망하는 인류를 위해 진실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 내가 택한 주제는 문학의 이 기능이 사회질서와의 관계 속에서 출현하는 무대인 자유주의 오스트리아의 문화와 그 여건이다.
―p. 413
부정적 방향의 의도―당대의 ‘비참한 타락상’과 싸우려는 의도―라는 점에서 슈티프터는 동시대의 위대한 프랑스인인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와 입장이 같다. 플로베르가 그의 통렬한 교양소설인 『감정교육』을 쓴 것은 『늦여름』이 나온 지 고작 12년 뒤인 1869년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독자들은 이 두 작품이 사회역사적으로 100년 정도는 떨어져 있다고 느낄 것이다. 플로베르가 사회 현실과 맞서 투쟁하면서 택한 전략은 사회의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움직임을 폭로할 뿐 아니라 이상주의 입장에서 모든 저항을 그것이 타락시키는 양상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주인공인 프레데릭 모로의 ‘교육’은 환멸의 교육이다. 지적 지각(知覺)은 마음이 가진 것을 파괴한다. 경험 많은 오성(悟性)은 모든 이상이 무용지물임을 확인한다. 플로베르의 ‘리얼리즘’은 자신의 규범적 이상을 독자들에게 드러내지 않은 채 직접 사회를 묘사하는 방법으로 사회적 문제를 고발한다. 슈티프터의 전략은 그와 정반대다. 그는 묘사함으로써가 아니라 무시함으로써 당대 현실의 혼란상을 고발한다. 그는 금방 정체가 확인될 정도로 실제 모습에 가까운 사회적 재료를 가지고 질서정연한 환경을 구축하며, 그 속에서는 내재하는 이상성이 주인공에게 서서히 확연하게 알려진다. 습관과 머리와 마음의 신중하고 너그러운 훈련에 의해 슈티프터의 주인공은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슈티프터의 ‘교양 있는 인간gebuildeter Mensch’에게서 그렇듯이 그의 허구적 사회에서는 지성과 감수성, 진실과 선함이 플로베르의 작품에서처럼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통합된다.
―p. 418~419
1890년대에는 자르가 그린 것 같은 교양 과잉의 예술아동Enkelkinder들이 성년이 되었고 황금시대의 중심 이미지로서 정원을 다시 도입했다. 그들의 정원은 로젠하우스의 최종적 변형태였다. 다시 한번 예술이 완벽해진 인류의 최고 영광으로 봉사한다. 귀족주의 전통이 다시 한번부르주아들에게 고양된 존재 양식에 대한 영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신세대들에게서는 슈티프너가 말한 질서정연한 우주의 여러 측면인 예술과 과학의 통합, 문화와 자연의 통합이 생명력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슈티프터는 앞으로 완벽해질 사회의 모델로서 유토피아를 고안한 데 비해, 신세대 예술가들은 특권층이 비우호적인 현실에서 물러나 은둔할 수 있는 정원을 만들어낸 것이다. 슈티프너에게서 예술은 도덕적 정화와 부르주아적 근면성에 의해 획득되어야 하는 영광이며 노력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의 정신적 손자들은 예술을 향유할 대상인 유산으로 보았다. 고귀한 단순성은 고상함Vornehmheit으로 대체되었다. 윤리는 미학에, 법은 우아함에, 세계에 대한 지식은 인간 감정에 대한 지식에 우위를 내주었다. 쾌락주의적 자기 완벽성이 갈망의 중심이 되었고, 슈티프터의 ‘덕성의 정원’은 ‘나르시시즘의 정원’이 되었다.
출신으로든, 더 드문 경우이지만 입양에 의해서든, 이런 새 정원을 지은 예술가들은 재능 있는 부르주아를 수없이 배출한 하층 귀족계급과 부유한 상류 중산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1860년대 이후 그 계급의 상황은 엄청나게 바뀌었다. 1890년대에 이 계층의 경제적 지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번영하는 계급으로서 일부는 금리생활자, 일부는 전문직, 또 일부는 관료였다. 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지위는 더 이상 경제적 명성에 부응하지 못했다. 과거에 자유주의자는 새로운 세력과 새로운 요구자들을 정치에 참여하도록 불러냈다. 슬라브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범게르만주의 반유대주의자, 기독교사회주의 반유대주의자들이 그들이다. 자유주의자는 이런 새로운 운동을 법적 질서 속에 통합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도 않았다. 이 상충하는 집단들이 추구하는 천국은 각기 달랐겠지만, 그들의 지옥은 동일했다. 즉 독일계 오스트리아 자유주의자 중산계급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반자유주의 운동은 1890년대가 되면 투표함을 활용한다든가, 의사진행 방해를 활용하는 방법, 또는 대중 시위와 거리 소요를 활용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해 국가를 마비시키고, 자유주의자를 고작 30년 동안 차지하고 있던 권좌에서 밀어냈다.
―p. 445~446
물론 미학 운동이 오스트리아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은 결코 아니며, 시에서든 그림에서든 그 운동의 오스트리아 주창자들은 서유럽의 선배들로부터 영감을 끌어왔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보들레르나 폴 부르제Paul Bourget의 권태로운 관능성을 기꺼이 포착했지만, 프랑스 데카당스의 타는 듯, 스스로를 찢어발기는 듯한 관능성도, 도시 상황의 잔혹한 아름다움에 대한 그들의 통찰력도 달성하지 못했다. 영국의 라파엘 전파는 세기말 오스트리아의 아르누보 운동(분리파라는 이름의)을 촉발했지만 그들의 의사(擬似)중세적 영성이나 강력한 사회개혁가적 충동은 오스트리아의 신도들에게 감명을 주지 않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오스트리아의 탐미주의자들은 프랑스에 있는 영혼의 동지들만큼 자기들 사회에서 소외되지도 않았고, 영국의 동지들만큼 그것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전자가 가졌던 통렬한 반부르주아적 정신이나 후자가 가졌던 따뜻한 사회개선론적 추진력이 부족했다. 거리두기도 아니고 참여도 아닌 오스트리아 탐미주의자들은 그들의 계급으로부터 소외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대를 패퇴시키고 그 가치를 거부한 사회로부터 그들 계급과 함께 소외되었다. 그에 따라 오스트리아 젊은이들의 미의 정원은 현실과 유토피아 사이에 기묘하게 걸쳐 있는 정원, 행복의 소유자들beati possidentes의 은둔처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탐미주의 교양인들의 자기만족과 사회적 무용지물들이 갖는 자기 의혹 모두를 표현했다.
―p. 447~448
안드리안의 『인식의 정원』은 제목과 달리 주인공의 구체적인 환경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안드리안의 리얼리즘은 슈티프터의 것과는 정반대다. 그것의 관심 대상은 사회적, 물리적 현실의 외부 세계가 아니라 정신적 삶의 내면 상황이다. 사회적, 물리적 세계는 그저 주인공의 감정을 자극하는 매개나 상징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에르빈과 하인리히는 둘 다 그들보다 더 우월한 세계로의 입장 허가와 연줄을 얻고자 한다. 둘 다 세계를 다측면적이고 복합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단계적으로 그것을 장악해나가며, 그것이 본질적으로 인간들이 노동을 통해 조화하지 못하는 것을 제거해나가는 요소들의 정태적 조화임을 이해하게 된다. 세계의 통일성은 부분들이 명료하게 표현될 때 얻어진다. 에르빈의 경우, 세계는 혼탁해졌다가 맹렬하게 흐르곤 하는 하나의 흐름이다. 그 흐름의 액체적 요소는 서로서로에게, 또 그 자신에게 섞여든다. 그 요소들의 통합은 좀처럼 붙잡히지 않는 흐름이다. 하인리히에게서 진실이란 명료성에 있다. 에르빈에게서는 진실이 ‘깊고, 어둡고, 다측면적인’ 신비에 있다. 에르빈은 이성적 자아, 외계 현실, 개인적 감정을 무차별적 연속체로 보기 때문에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 주관적, 객관적 경험이 고통스럽고도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호프만슈탈은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가 갖는 유동적 의미를 안드리안보다 좀더 명확하게 표현했다. “인간, 사물, 꿈이라는 세 가지는 하나다.” 그런 범정신주의pan-psychism는 슈티프터의 개별화되고 규정된 우주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하인리히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물과 인간은 각기 하나 이상의 존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그 존재가 되어야 한다.”
―p. 455~456
슈티프터와 안드리안은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다르게 규정했기 때문에 정원의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상이한 목적으로 활용한다. 슈티프터에게서 정원은 자연과 문화의 결합을 상징했다. 그곳에서 인간은 과학과 예술을 통해 신의 작업을 완성한다. 그곳에서 그는 자연의 질병과 혼란을 청소하고 그 속에 들어 있던 쓸모와 아름다움을 융합하는 질서의 잠재력을 발현시키는 것이다. 안드리안의 생각에, 정원을 직접 가꾼다는 것은 물론 전혀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인생에 노동 같은 것은 없다. 정원은 오로지 감수성을 자극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것은 기묘하게 혼합된 인생의 덧없는 향기,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움의 경험을 상징한다. 정원은 하나만 있는 것(즉 유일한 낙원인 에덴)이 아니라 여러 개가 있다. 그것들은 스스로에게 매혹된 사람의 표시인 관능적인 사고와 사유된 감각을 더욱 강화한다. 자신들이 삶의 주류 바깥에 있다고 느끼며, 실재를 굴절하여 전달하는 매체인 예술을 통해 삶을 흐릿하게밖에는 감지하지 못하는 세대―”우리에게는 우리 운명보다 희곡 하나가 더 중요하니까”―에게 정원은 아무런 의지 없이 인생을 떠내려가는 동안 어쩌다가 손에 잡힐 수도 있는 덧없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에르빈의 유일한 영혼의 동지인 그의 어머니는 비참여적 세대에게 정원이 갖는 심리적 기능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마치 이상한 아니들의 안내를 받아 이상한 성(城)들의 놀이동산을 거닐 듯 우리 삶을 지나간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사랑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또 얼마나 빨리 지나갈지는 그들에게 달려 있다.
―p. 456~457
가면을 쓰고 지배하는 궁극적 인물인 정원사―군주에 대비되는 것이 광인이다. 그는 왕위의 상속자가 아니라 부의 상속자, “부자, 권력자의 최종 주자, 구제 불능의 인물이다.” 어마어마한 사업가인 광인의 아버지는 자신처럼 오만한 정신을 가졌지만 책임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아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호프만슈탈이 살던 사회에서 수많은 벼락부자의 아들들이 실제로 그랬듯이, 이 아들은 귀족과의 친교를 추구했고 원하는 것을 얻었으며, 세계를 매혹시켰고 자신의 재산을 탕진했으며 자기 자신을 낭비했다. 하지만 백수들 가운데 최상의 사례가 그렇듯이, 광인은 내면으로 들어가서 고독을 추구했다. 여기서 우리는 나르키수스를 이제는 금리생활자 계층의 방탕자라는 모습으로 다시 만난다. 광인은 스스로 탑에 틀어박혀 바깥으로 나오지 않으면서 자신의 대담하고 탐욕스러운 정신을 내면의 영혼에 집중시키고 자기 안의 심연을 시로 탐색하려 했다. 그곳에서 그는 ‘무시무시하게 많은 미안성의’ 힘을 발견했다. 행동의 세계에서 성찰의 세계로 이동한 부자 백수들의 자기중심적 태도 덕분에 그는 자기 내면에서 괴물 같은 본능적 힘을 찾아낸다. 이 힘을 통해 광인은 자기 외부에도 그와 유사한 미완성의 에너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정원사가 정치 영역과 아름다움의 정원 사이에 상응하는 질서가 있음을 알아낸 것처럼 광인은 내면의 본능과 외부의 살아 있는 힘 사이에 에너지가 상응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개체화가 진행되어 그것 자체를 초월하기 시작하며, 광인은 거울에 비친 자신, 아름다운 나르키수스의 영상을 영탄조로 부르면서 이렇게 선언한다, “나르키수스여, (자족적인 개인이라는) 환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나를 바깥세상으로 불러내는 음성이 점점 더 커진다. 광인은 호프만슈탈의 몫이 될 임무, 즉 개인과 세계 사이에 역동적인 통일성을 창출하는 임무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 이전에 살았던 시인과 왕들의 추상적이고 정태적인 방식은 이제 더 이상 현대 사회와 현대정신, 그 어느 것에도 도움이 못 된다.
―p. 462~463
화가는 본문과 그림을 삽화가로서가 아니라 리트Lieder 작곡가가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루었다. 리트 작곡가는 가사와 음악이 어느 한쪽에 종속되기보다는 서로 환기시키는 작용을 하도록 재료를 다룬다. 그처럼 시각적 요소와 언어적 요소가 낯선 보완관계에 놓이도록 함으로써 코코슈카는 자신의 독특한 작품이 갖는 환각의 범위를 넓힌다. 그 그림은 전체적으로 가사에서 드러나는 절규 같은 의식의 흐름과는 대조적으로 시 구절에 『시편』과 같은 평화로운 리듬을 강화시킨다. 하지만 그림은 미세한 회화적 세부 묘사를 통해 공포감을 강화한다. 예견대 반으로 잘린 작은 물고기, 인간의 손이 달린 나무 이미지 같은 것들은 본문에 없다면 관찰자가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는 특징들이다.
그림과 본문 사이에서 지속되는 이와 동일하게 반쯤 초연한 성질이 시 자체에서도 나타난다. 표면적으로 코코슈카의 시는 『시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조용하고 유동적인 리듬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언어의 순진성을 훼손한다. 선이나 색채에서와 마찬가지로 리듬에서도 코코슈카는 지연신관(遲延信管)을 써서 작업한다. 시행의 길이를 들쭉날쭉하게 설정하고 예기치 못한 곳에 슬래시 표시를 해 행을 단절시키는 식으로, 이미 분해의 고통을 겪고 있는 시각적-언어적 분야에 숨 가쁘고 기괴한 음악을 주입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고도로 형식적인 틀 안에서 전복적 본능의 단호한 돌파구라는 의미를 표현한다.
―p. 484~485
정반대의 스타일이면서도 동반자가 된 코코슈카와 로스는 사실상 회화와 건축을 탐미주의적으로 종합한 쿤스트샤우를 양쪽 날개로부터 공격한 것이다. 로스는 엄중하게 중립적인 합리성을 지지하면서 건축에서 장식적 요소를 없애버렸고, 코코슈카는 그와 달리 쿤스트샤우의 작품들이 지향하던 에로틱한 삶의 추상적 탐구에서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성격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사적인 것으로 보는 로스의 원리를 충실하게 따른 코코슈카는 삽화가의 열정을 그대로 지닌 채 새로운 유의 심리적 초상화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는 먼저 대화를 통해 자신이 그리는 인물의 정신을 포착한다. 그런 뒤 상대방의 영혼을 깊이 꿰뚫어봄으로써 “내 그림을 통해 자기 인식의 기반을 찾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돌이켜볼 때 코코슈카는 이렇게 새로운 유의 그림을 소외의 감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설명했다.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 위해 나는 초상화 그리기를 시작했다.” 그가 모델에 취한 전략은 그들을 계속 움직이게 하고 이야기시키면서 활력을 불러일으킨다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의 얼굴이 의식의 주체로서, 정신의 소유자로서 빛을 발하기 때문이었다. “인물은 정물이 아니다”, 코코슈카는 이렇게 주장했다. 얼굴은 의식이 ‘위임한 힘’을 처리하며, 그 힘은 얼굴이 영혼의 본성과 움직임의 일부―결코 전부일 수는 없다―를 표현하는 이미지를 선별할 수 있게 해준다. 얼굴(그리고 몸 몸짓)과 정신의 관계는 자동차와 기름의 관계와 같다. 그다음으로, 화가의 의식은 모델의 시각이 되며, 자기 앞에 있는 인물에 의해 전달된 넘쳐흐르는 생명력에 의해 “양육되고 자양분을 얻는다.” 모델의 얼굴과 화가를 통해 초상화, 즉 이미지에 전달된 일종의 삶의 “진정한 존재감”에 의해 타자성이 극복되고 착각은 훤히 간파된다.
화가는 지도도 없이 삶의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규칙 없는 인간regelloser Mensch’이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얼굴과 시각에 대한 그의 의식Bewusstsein der Gesichte을 통해 무한의 일부에 형태를 부여할 수 있다. 그 의식은 역동적인 동시에 정적이다. “유행은 흘러가게 하고 시각Gesichte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라.” 그것은 이제까지 화가들이 해온 것처럼 사람들이나 자연의 실제 세계를 ‘표상하지represent’ 않고 내적으로 형성된 의식의 의지에 의한 창조라는 것으로 ‘제시한다present.’
―p. 495~496
르네상스 이후 서구 음악은 위계적인 조성 질서를 토대로 하여 구상되었다. 그것이 조성 음계이며 그것의 중심 요소는 한정된 조성인 으뜸3화음tonic triad이었다. 으뜸3화음은 권위와 안정성과 무엇보다도 중요한 평정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음악은 움직임이다. 화음이 정지해 있는 구조로서만 감지된다면 모든 움직임은 불협화음이 된다. 우리의 음악 창작 시스템은 움직임을 조성에 확고하게 종속시키므로, 모든 움직임은 으뜸화음에서 발생하고 그곳으로 돌아간다. 불협화음은 항상 그것과 관련된 위에서만 역동적인 요소―조성 맥락에서의 일탈―로 인정된다. 조옮김―한 조성에서 다른 조성으로의 이행―은 허가받은 불법성이 시행되고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순간이기 때문에, 새 조성에서 새로운 방향성을 갖거나 예전 조성으로 복귀함으로써 해소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Alfred Brendel은 하이든 또는 리스트가 바흐 주제의 「변주곡」에서 행한 반음계주의chromaticism의 사용을 조성의 주요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반음계주의는 고통과 불안정을 나타내는 반면 이 작품의 종결부에서 도입되는 ‘순수한’ 온음계 화음은 신념의 확실성을 나타낸다. (……) 하이든의 「천지창조Creation」의 시작부분에서 (……) 혼돈과 빛이 번갈아 대조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불협화음―조성에서 잠시 벗어난 활기찬 소풍―은 음악에 흥분감을 주며, 그 표현력의 일차적 원천이다.
작곡가가 해야 할 일은 협화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불협화음을 조작하는 것이다. 이는 입헌제도의 정치 지도자가 주류 권력층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움직임의 물길을 이리저리 조정하는 것과도 같다. 사실 음악에서의 조성은 하나의 초점으로 집중된다는 점에서 미술의 원근법 이론과 동일한 사회문화적 체계에 속한다. 바로크 시대의 사회적 신분 시스템과 정치에서의 법적 절대주의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기하학적 정원, 즉 자연 속으로 확장된 이성적 건축으로서의 정원을 선호한 바로 그 문화의 일부다. 루이 14세의 궁정 악장이던 라모가 화성 ‘법칙’의 가장 명료하고 비타협적인 이론가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조성 시스템은 합리적으로 조직되고 위계적인 문화에 지배되는 인간의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고 정당화하며 표현하기 위한 힘을 각 조가 차등적으로 갖고 있는 그런 음악적 틀이다.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고전 화성악의 목적은 모든 음직임이 끝에 가서 질서정연해지도록 (음악적으로는 카덴차cadence라고 불리는) 만드는 것이다.
19세기는 전반적으로 ‘움직임의 힘’이 ‘질서의 힘’에 도전한 ‘움직임의 세계’로 여겨진다. 음악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19세기는 불협화음―조성적 움직임의 매체―이 확장되는 세기였고, 조성적 질서의 중심인 고정 조성fixed key이 와해되던 세기였다.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악에서도 시간은 영원 속에서 움직이고 동역학(動力學)은 정역학(靜力學)을 토대로 움직이며, 민주주의는 위계 위에서, 감정은 이성 위에서 움직인다. 정치적으로나 성적으로나 혁명가였던 리하르트 바그너는 조(調)key의, 전통적 조성tonality의 제1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에서 에로스는 엄격한 운율과 온음계적 화음으로 표현된 기존의 정치적, 도덕적 질서에 대항하여 자기 주장을 펼치기 위해 상승 리듬과 반음계를 사용해 되돌아온다. 반음계의 음조chromatic tones, 다시 말해 반음들은 모두 동일한 음가(音價)를 가지며, 평등주의적인 음향의 우주를 이룬다. 조성의 위계적 질서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런 민주주의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것은 흘러감의 언어, 해체의 언어다. 그것이 자유의 언어인지, 죽음의 언어인지는 각자의 관점에 달려 있다.
―p. 504~505
예술은 자기 자신을 (그 운명에) 적응시키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이 맞붙어 씨름을 벌이는 사람들의 호소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둠의 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논리를 알아내기 위해 그 장치 속으로 자기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호소다. 눈길을 돌리고 감정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하려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열어젖히고, 마땅히 싸워야 할 것에 맞붙어 싸우려고 나서는 이들의 호소다.
맞붙어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쇤베르크가 자신의 진심어린 호소를 문화비평과 연결시키고, 숭배하는 친구 아돌프 로스가 규정한 예술의 혁명적 기능을 완수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예술은 “우리가 안락함과 순종성을 떨쳐버리게 만든다.” 로스도 그렇지만, 사회적 혁명가라기보다는 도덕적 혁명가인 쇤베르크는 자신의 비판을 사회적 시스템이 아닌 그것의 자기기만적 문화에, 그것이 내세우는 질서의 환상과 그 환상을 담고 있는 아름다움의 차폐막에다 겨누었다. 쇤베르크는 자신의 저서인 『화성의 이론』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시대는 많은 것을 추구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안락함을 발견했다. 안락함은 이상의 영역에서도 대폭 침투하며, 우리에게 좋도록 그 영역도 아주 안락하게 만든다.” “세계관으로서의 안락함이라!” 그는 다시 외쳤다. “몸을 최대한으로 조금만 움직이고, 불편하지 않게!” 쇤베르크는 독립적 가치인 미의 이념을 이러한 정신의 순응성과 결부시켰다 “미는 오로지 비생산적인 사람들의 생각에 그것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부터 존재한다. (……) 예술가에게는 그것이 필요 없다. 그에게는 진실성만으로도 충분하다.” 안락, 지적 순응성, 정지, 미의 숭배, 이 모든 것이 쇤베르크의 마음속에서 연결되었다. 그는 이런 것들에 대비되는 것으로 움직임, 마음과 본능의 내면에서 지시하는 바에 대한 민감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실을 대비시켰다.
이 같은 비판적인 정신으로 쇤베르크는 1912년에서 1914년까지 부르주아 신의 죽음을 찬양하기 위한 대규모 교향곡을 계획했는데,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 교향곡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이 작품은 ‘삶의 변화(회고하고, 미래를 내다본다. 우울하고 도전적이며 움츠러든다)’라는 제목의 악장으로 시작한다. 두 개의 악장이 ‘아름답고 거친 세계’에 바쳐져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는 부르주아 신을 창조의 축제에 나오는 자연과 연결시킨다. 이 부분의 대본은 리하르트 데멜이 세기말의 정신으로 구상한 것인데, 에로스의 상징 아래에서 배태된 자연에 바치는 일종의 찬가다.
쇤베르크는 초년에 데멜의 범자연주의적 전망을 공유했다. 이제 그는 오로지 전복하려는 의도에서 그것을 자신의 계획 속으로 흡수한다. 네 번째 악장에서 그는 상반된 이념을 소개한다. “부르주아 신으로는 충분치 않다.” 교향곡의 두 번째 부분 전체에는 ‘원리의 죽음의 춤’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부르주아 신의 매장과 장례 행사를 극화한다. 죽음의 춤은 의미의 죽음이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불러온다. 왜냐하면 “인간은 살고 싶고, 믿고 싶어하기 때문, 즉 맹목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어둠이 물러난다…….
하지만 태양은 힘이 없다.
쇤베르크는 그가 말하는 죽어가는 부르주아 세계를 기만과 공허 사이의 날카로운 경계선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전체적으로 질서가 끔찍할 정도로 많다. 또 무질서도 그만큼 많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묻는다면, 모든 것은 동시에 질서이며 무질서라는 뜻이다.” 그것을 우리는 구별할 수 없고 판정할 수도 없다. 지식은 판정과 동일시된다. 쇤베르크의 대본은 우주적 통일성의 문제를 음악적 용어로도 묻는다. “조성이 하나인가? 아니면 조성이 전혀 없는가? 아니면 여러 개 있는가? 무한한 것인지, 무(無)인지? 지금 단일성을 파악하기보다 예전에 다수성을 파악하는 편이 더 쉬웠다. 지금의 이것은 사람을 압도한다.
―p. 517~519
정원에서의 폭발을 만들어낸 것은 예언적인 ‘생활감정Lebensgefühl’이었다. 그것은 니힐리즘과 서먹서먹하게 뒤섞인 인문주의였다. 코코슈카와 쇤베르크는 서로가 똑같이 위험하고 외로운 작업, 해방이면서 동시에 파괴인 작업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았다. 두 사람 모두 자기들이 그 속에서 자라온 심미적 문화와 세기말의 빈 모더니스트 제1세대의 작업에 반대해 저항했다. 이들은 그 문화가 결정적인 추진력을 잃은 바로 그 순간에, 그리고 쿤스트샤우에서처럼 그것이 상류 부르주아의 지배적인 관습적 문화가 되는 그 순간에 그런 저항을 벌인 것이다. 더 나이 먹은 주요 예술가들―미술에서의 클림트, 문학에서의 호프만슈탈, 건축에서의 오토 바그너―은 교육받은 상류 중산계급이 그 미적 문화를 확장하면서 씌운 정치적 권력의 고삐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계급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러나 젊은 예술가들, 코코슈카나 쇤베르크 같은 표현주의자들은 예술을 현실의 본성을 은폐하는 문화적 화장술로 사용하기를 거부한 최후의 청교도, 아돌프 로스나 카를 쿠라우스와 같은 합리주의 비평가와 연대했다.
코코슈카와 쇤베르크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본능적이고 심리적인 진실을 직설적인 시각적, 음악적 언어로 단언했다. 그들의 선배들도 이 진실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배운 것은 우의(寓意)라는 간접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뿐이었다. 신인들이 일으킨 충격은 사회가 그들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 거부 때문에 그들의 소외는 더 깊어졌다. 또한 그 소외는 정신적, 예술적으로 새로운 영토로 나아가는 모험의 토대가 되었다. 이 두 반부르주아적 부르주아인 코코슈카와 쇤베르크는 자신들이 속한 문화에서는 비합리적인 사적 경험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길을 금지당한 인간들의 영혼을 표현할 형식을 발견했다. 표현주의자는 비평가, 예언자, 새 예술의 창조자로서 영혼들에게 목소리를 주었다.
―p. 524~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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