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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일상/book 2020. 1. 15. 01:30
안타깝게도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그리 진득한 사람은 아니다. 특히 예술에 대한 관심사나 문학적 취향이 그러하다. 대체로 한번 책을 집어들면 심취하는 편이지만, 그렇다 해서 모든 글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뭐라 표현을 해야할지…) 유달리 문체가 마음에 드는 작가들이 있는데, 페르난두 페소아가 그러하고, 바로 이 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그러하다. (그런 감성을 전달받기 위해서는 물론 번역도 중요하다)
일전에 톨스토이를 가장 좋아하는 작가, 『안나 카레리나』를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 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까닭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담고 있는 명징한 주제의식―변혁기의 19세기 러시아 사회에 대한 통렬한 문제의식과 인간 본성에 대해 예리한 분석―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읽었던 나보코프의 두 작품이 다루는 주제―『롤리타』(어린 소녀에 대한 중년남성의 기묘한 성도착)와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이복형제라는 중첩된 자아를 뒤따르는 여정)―는 다소 신변잡기적인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그의 문체는 정말로 멋지다!! 두운(頭韻)과 각운(脚韻)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언어유희는 둘째 치고, 사물이나 현상을 묘사하는 기법과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치밀하게 계산된) 우연성이 좋다. (아직도 『롤리타』의 후반부에 미중년 험버트가 롤리타를 그리는 장면을 청각적으로 묘사한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너무 과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둔탁하지도 않게 나보코프의 글은 우아하고 세련스럽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에서는 망명생활 이후 줄곧 이방인을 자처하며 살아왔던 나보코프의 마음속 그림자가 잘 벼린 먹물처럼 스며들어 있는 듯하다. 낯선 언어 속에서 부유(浮游)하는 나보코프, 정처 없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보코프, 연인(戀人)과 함께 하면서도 메우지 못하는 마음 속 구멍, 작가로서의 고뇌. 일련의 스토리는 V라는 다소 모호한 관찰자―그는 서배스천 그 자신인 것 같기도 나보코프의 또 다른 자아인 것 같기도 하다―에 의해 전개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인식을 환기하고 성격을 바꿔가면서 단조로움을 타파한다. 이는 분명 자전적 소설로 나보코프 개인의 내밀한 심리를 조명하고 있지만, 단지 그의 사적인 생각과 감정을 다룬다고 하기에 독자인 나 자신의 사적인 생각과 감정에 허를 찔린 듯한 걸 보면, 분명 누구에게나 울림이 있는 글인 것 같다. 이미 나보코프의 책을 몇 권 더 사두었다. 인생은 짧고, 나보코프의 글은 그 짧은 순간을 비집고 내 삶에 들어왔다. 생각이 날 때마다 나보코프의 글을 들춰볼 생각이다.
서배스천의 삶의 기조는 고독이었다. 운명이 친절하게 그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경탄스러울 정도로 위조하여 안락하게 해주려고 할수록, 그는 그 그림에, 아니 그 어떤 그림에도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더 절실하게 의식했다. 마침내 그가 이 사실을 철저히 이해하고 마치 그것이 희귀한 재능이나 열정인 양 자의식을 무섭게 키워가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서배스천은 풍성하다못해 가공할 정도로 성장하는 그 자의식에서 만족감을 얻고 어색하게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p. 51
현재의 입술에서 과거를 배울 수 있으리라 너무 확신하지 말라. 가장 정직한 브로커를 경계하라. 당신이 들은 것이 실제로는 세 겹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화자가 한 겹, 청자가 또 한 겹, 그리고 그 이야기의 망자가 둘에게 숨긴 것이 또 한 겹.
―p. 62
그는 예민하고 지적인 사상가들은 중국에서 일어난 지진 때문에 잠 못 이룰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이해했다. 하지만 그로서는 왜 똑같은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중국에서 일어난 것과 비슷한 재난이 오래 전 일어났을 경우에는 똑같이 거센 슬픔의 발작에 휩싸이지 않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시간과 공간은 똑 같은 영원을 재는 척도였으므로, 굿맨 씨가 ‘전후 유럽의 분위기’라고 한 것에 그가 어떤 식으로든 특별히 ‘현대적으로’ 반응했다는 생각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는 여행자가 항해하며 보는 광경에 신이 나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거의 동시에 뱃멀미에 시달릴 수도 있듯이, 자기가 태어난 세계에서 가끔씩은 행복해하고 가끔씩은 불편해했다. 서배스천은 어떤 시대에 태어났건 똑같이 무언극 공연을 보면서 간간이 내일 치과에 가야 한다는 것을 떠올리는 어린아이처럼 재미있어하는 한편으로 불행해하고, 즐거워하면서 불안해했을 것이다. 그가 불편을 느꼈던 이유는 부도덕한 시대를 사는 도덕적인 인물이어서도 아니고, 도덕적인 시대를 사는 부도덕한 인물이어서도 아니다. 너무 빠른 속도로 장례식과 불꽃놀이가 이어졌던 시대여서 자신의 젊음을 꽃피우지 못했다는 갑갑한 느낌도 아니었다. 그저 그의 내적 존재의 리듬이 다른 영혼들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일 뿐이다. 케임브리지 시절이 막 끝난 무렵인 그때도, 어쩌면 그 이전부터도 그는 자신의 아주 사소한 생각이나 감정조차 늘 주변 사람들보다 적어도 한 차원 이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천성에 조금이라도 과한 데가 있었다면 이를 떠벌리고 자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은 없었기에 그는 그저 계속 유릿조각 틈에 섞인 수정, 동그라미 속에 섞인 공 같은 어색함을 느끼며 살았다. (하지만 그가 결국은 작가로서 정착했을 때 겪었던 일들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배스천은 『잃어버린 자산』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수줍음을 너무 많이 타서 아무리 실수를 피하려 애써보아도 항상 결국은 실패했다. 주변의 환경과 색깔을 맞춰보려는 나의 처참한 시도는 색맹 카멜레온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여드름투성이의 후줄근한, 평범한 사춘기 소년이었다면 나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내 수줍음은 훨씬 참아줄 만했을 것이다. 많은 소년들이 이런 단계를 거치고, 아무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그것이 사춘기의 고통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병적인 비밀스러운 형태를 띠었다. 고문실에서 고안해낸 것 중 가장 진부한 고문 중 하나가 죄수에게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몽사몽을 오가는 행복한 상태에서 자기 마음의 이런저런 부분과 더불어 하루를 보낸다. 굶주린 사람이 스테이크를 먹을 때는 음식에만 관심이 있지 칠 년 전 우연히 보았던 실크해트를 쓴 천사들에 관한 꿈의 기억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정신의 모든 덧문과 뚜껑과 문이 온종일 죄다 활짝 열려 있는 셈이다. 대부분의 뇌는 휴일이 있지만, 나의 뇌는 반공일조차 거부했다. 이렇게 한시도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상태는 그 자체로도 그렇지만 그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와 관련해서도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평상시에 내가 수행해야 하는 일상적인 행동 하나하나가 이렇게 복잡한 외양을 띠고, 내 마음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을 불러냈다.
―p. 78~80
그에게 단어들과의 고투는 유난히도 고통스러웠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와 같은 유형의 작가들에게 흔한 것으로, 표현과 생각 사이의 심연을 이어보려는 노력 탓이다. 딱 맞는 단어, 유일한 단어가 멀리 안개 속 건너편 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미칠 듯한 기분, 심연의 이쪽 편에서 여전히 벌거벗은 생각이 그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있다는 소름 끼치는 느낌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든 것들이기에 그는 이미 존재하는 문구를 싫어했다. 동시에 그것에 잘 들어맞는 단어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진정한 생각도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유사한 비유를 쓰자면) 그저 벌거벗고 있는 듯이 보이는 생각은 눈에 보일 수 있도록 입을 옷을 달라고 애원하고 있을 뿐이며, 멀리 숨어 있는 단어들은 겉보기처럼 텅 빈 껍질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숨기고 있는 생각이 불을 붙이고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때때로 그는 뒤죽박죽 뒤엉킨 전선 한 뭉치를 가지고 빛의 경이를 만들어내라는 명령을 받은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그 일을 해냈다. 가끔씩 자기도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성공할 때가 있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가장 논리적이라 생각되는 방법으로 전선을 집적여도 결국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평생 한 번도 창의적인 산문이나 시 한 줄 뽑아내본 적 없는 클레어가 서배스천의 고투를 샅샅이 완벽하게 이해했다(그것이 그녀만의 기적이었다). 그녀가 타자로 친 단어들은 그녀에게 자연스러운 감각을 전달해주는 도구라기보다는 어떤 이상적인 표현의 선을 따라 서배스천이 더듬어간 궤적을 보여주는 곡선과 틈새, 갈지자 흔적들이었다.
―p. 98~99
‘파도 한 번 친 것으로 바다의 달부터 뱀까지 바다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움푹 파인 바위에 고인 웅덩이도 중국까지 이어진 다이아몬드가 잔물결로 부서지는 길도 모두 물이다.’(『달의 뒤편』)
‘육체적인 사랑은 똑같은 것을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 일단 한번 울리면 영혼의 다른 부분까지 온통 다 반향하는 특별한 색소폰 음표는 아니다.’(『잃어버린 자산』, 82쪽.) ‘모든 것이 사물의 같은 순서에 속해 있다. 인간 지각의 일체감, 개성의 일체감, 그 물질이 무엇이 되었건 물질의 일체감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진정한 숫자는 하나이고 나머지는 단순한 반복일 뿐이다.’(같은 책, 83쪽.)
―p. 122
한 남자가 죽어간다. 그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책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은 완벽하게 현실적인 반면(아니면 적어도 나이트가 쓰는 의미에서는 현실적이다). 그 죽어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운명할 침대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혹은 떠 있는지, 아니 침대가 과연 있기는 한지를 독자는 계속 알지 못한다. 그 남자가 책이다. 책 자체가 한숨을 토해내고 죽어가며 유령 같은 한쪽 무릎을 세운다. 마음속의 이미지 하나, 잇달아 또 하나가 의식의 해안 위로 홀연히 떠오르고, 우리는 그것 혹은 떠오른 존재를 따라간다. 난파한 삶에서 흩어진 잔여물들. 기어가다가 눈 달린 날개를 펼치는 느려터진 공상들. 그것들, 이런 삶들은 주제 대한 해설에 불과하다. 우리는 온화한 늙은 체스 선수 슈바르츠를 따라간다. 그는 어느 집 방안에서 의자에 앉아 고아 소년에게 나이트에 관한 수(手)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싸구려 염색을 해서 색이 빨리 빠진 머리카락에 흰머리가 한 가닥 섞인 뚱뚱한 보헤미아 여인을 만난다. 평판이 나쁜 선술집에서 귀를 곤두세운 사복 경찰을 앞에 두고 탄압 정책을 목청 높여 맹비난하는 창백한 안색의 불쌍한 남자에게 귀를 기울인다. 장신의 사랑스러운 프리마돈나가 서두르다가 웅덩이를 헛디뎌 은색 신발을 더럽힌다. 한 노인이 흐느끼고 부드러운 입술의 상복 입은 소녀가 그를 위로한다. 스위스인 과학자 누스바움 교수가 젊은 정부를 총으로 쏘고 새벽 세시 반에 호텔방에서 그 자신도 시체로 발견된다. 왔다가 가고, 이런저런 사람들이 문을 열었다가 닫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따라가는 길에 불이 밝혀져 있는 동안 삶을 살아가다가 압도적인 주제의 파도에 차례로 휩쓸려간다. 한 남자가 죽어간다. 그는 베개 비슷한 것 위에서 한 팔을 움직여보려고, 혹은 고개를 돌려보려고 하는 것 같다. 그가 움직일 때 우리가 지금까지 막 보아왔던 이런저런 삶이 희미해지거나 바뀐다. 순간마다 그의 인격은 점점 더 나름대로의 의식을 갖고, 우리는 책의 주요 동맥을 따라 훑어 내려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제 너무 때가 늦어 인생의 상점들이 문을 닫아버렸을 때 그는 줄곧 갖고 싶었던 책을 사지 못한 것을, 지진, 화재, 열차 사고를 겪어보지 못한 것을, 티베트에서 다젠루를 보지 못한 것을, 중국 버드나무에서 지저귀는 푸른 까치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것을, 언젠가 호젓한 공터에서 마주친, 부끄러움 없는 눈을 가진 그 비행 소녀에게 말을 걸어보지 않을 것을, 수줍음 많은 못생긴 여인이 재미없는 농담 한마디를 던졌으나 방안의 사람들 아무도 웃어주지 않았을 때 자기도 웃지 않았던 것을, 기차를, 암시를, 기회를 놓친 것을, 어느 잊힌 마을에서 음산한 날에 떨면서 홀로 연주하던 오래된 거리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주머니 속에 있던 동전을 건네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p. 205~207
죽음으로 가는 육체적 과정을 표현하는 작가의 방식에도 어떤 기법이 있는 것 같다.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뇌, 살, 폐가 차례로 행동을 취한다. 처음에는 뇌가 생각들, 죽음에 대한 생각들로 이루어진 위계질서를 더 파고 들어간다. 빌린 책 여백에 휘갈겨 적은 영리한 척하는 엉터리 생각들이다(철학자의 일화). ‘죽음의 매혹: 중지된 낙하를 늘임으로써 거꾸로 간주되는 육체적 성장, 드디어 무(無)로의 낙하,’ 시적인, 종교적인 생각들: ‘……악취 풍기는 물질주의의 늪과 딘 파크가 신비낙관주의자라고 부른 자들의 황금빛 파라다이스……’ ‘그러나 죽어가는 남자는 이것들이 진짜 생각이 아니며, 죽음이라는 관념의 딱 절반만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음을 알았다. 문제의 이쪽 측면―확 비틀어 떼어내기, 작별, 손수건을 펄럭이며 부드럽게 움직이는 생의 선창가: 아! 그는 이미 반대편에 있었다. 멀어져가는 해안을 볼 수만 있다면. 아니, 아니다―그가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면.’ (친구를 배웅하러 온 사람이 아주 늦게까지 부두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다고 그가 여행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조금씩 육체적 병마들이 엄청난 고통으로 온갖 생각, 철학, 추측, 기억, 희망, 회한을 질식시킨다. 우리는 끔찍한 풍경들 사이로 비틀거리고 기어가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모든 것이 괴로움이고 괴로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이제 기법이 반전된다. 앞이 안 보이는 골목길을 따라갈수록 점점 더 빛이 희미해져가는 생각의 이미지들 대신 이제는 곁으로 다가와 우리를 둘러싼 무시무시하고 거친 환상들이 천천히 공격해 온다. 고문당한 아이의 이야기, 잔인한 나라에서 도망쳐나온 망명자의 인생담, 검은 눈을 지닌 온순한 광인, 자기 개를 심술궂게 힘껏 걷어차는 농부. 그다음에는 고통마저 희미해진다 ‘이제 그는 너무나 기력이 쇠해서 죽음에도 흥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붐비는 삼등 객실에서 땀에 전 남자들이 코를 골았다. 그래서 남학생은 셈을 미처 끝내지도 못하고 엎드려 잠이 들었다.’ ‘나는 지쳤다, 지쳤다…… 뒤뚱거렸다가, 느려졌다가 하면서 저절로 굴러가는 타이어……’
여기가 빛의 파도가 갑자기 책으로 밀려드는 순간이다. ‘……마치 누군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방안의 사람들이 눈을 껌벅이며 흥분해서 짐을 들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는 눈부시게 찬란한 빛을 내뿜으면서 동시에 볼품없다고 할 만큼 완벽하게 간소한 어떤 절대적인 진실의 가장자리까지 왔다고 느낀다. 암시적인 표현들의 믿을 수 없을 만큼 굉장한 묘기들을 통해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그가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으며 곧 말해줄 참이라고 믿게 만든다. 잠시 후, 이 문장의 끝, 다음 문장 중간쯤, 어쩌면 조금 더 가서 우리는 간단하지만 단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식으로 팔을 움직이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듯이 우리의 모든 관념을 뒤바꿔놓을 무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가장 풀기 어려움 매듭은 구불구불 꼬아놓은 실이다. 느슨하고 우아한 고리 모양이지만 손톱으로 풀기에는 빡빡하다. 눈으로 보면 풀릴 것 같은데 서툰 손가락은 피를 흘린다. 그(죽어가는 남자)가 그 매듭이었다. 그가 실을 보고 따라갈 수만 있다면 즉시 풀어낼 것이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풀릴 것이다―수수께끼로서 인간이 고안해낸 수수께끼인 시간과 공간, 우리의 그 유치한 두 용어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풀려서 우리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난센스들…… 이제 그는 진짜인 것, 생각이나 감정, 혹은 삶의 유치원에서 그가 했을 법한 경험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을 포착했다……’
삶과 죽음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 ‘절대적인 해결책’은 그가 여태껏 알아왔던 세상 전체에 쓰여 있었다. 자기가 조사했던 야생의 나라가 자연현상들의 우연한 조합이 아니라 산과 숲과 들, 강이 하나의 방식에 따라 배치되어 일관된 문장을 이룬 어떤 책의 페이지였음을 깨달은 여행자와 같다 호수의 모음은 쉬쉬 소리를 내는 경사의 자음과 어우러지고, 구불구불한 길은 아버지의 손처럼 깨끗하고 둥근 손으로 메시지를 쓰고 있고, 나무들은 자기네 언어인 몸짓을 익힌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무언극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리하여 여행자가 풍경의 철자를 읽으면 그 의미가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인간 삶의 복잡한 패턴이 결합 문자로 드러나고, 뒤엉킨 문자들을 해독하는 내적 눈에는 이제 그것이 아주 명백하게 보인다. 그리고 단어가 나타내는 의미는 경탄을 자아낼 만큼 명료하다. 아마도 가장 놀라운 점은 지상에 존재할 동안에는 뇌에 쇠로 된 고리를 채우듯 자기 자신의 성격에 딱 맞는 꿈을 둘러쓰고 있던 사람이 속박된 사고들을 자유로이 풀어내고 위대한 깨달음을 얻게 해줬을 한 번의 정신적 경련을 우연히도 겪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퍼즐은 맞춰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형상을 통해 의미의 빛을 내뿜게 되었듯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던 많은 생각들과 사건들의 의미는 축소된다. 어떤 것도 무의미한 것일 수는 없으므로 무의미한 정도로까지 축소되지는 않는다 해도, 한때는 어떤 중요성도 부여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중요성을 획득한 다른 생각들, 사건들과 같은 규모가 된다.’ 그리하여 과학, 예술 종교처럼 우리 뇌에서 빛나는 거대한 존재들은 익숙한 분류 체계에서 떨어져나가 손에 손을 잡고 다른 것들과 뒤섞여 유쾌하게 대등해진다. 그리하여 낡은 벤치의 페인트칠된 나무 위에 놓인 버찌씨와 그것의 그림자, 혹은 찢어진 종잇조각, 그 밖의 수백 수천만의 사소한 부스러기들 속 사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놀랄 만한 크기로 커진다. 개조되고 재조합되어 세계와 영혼이 함께 숨쉬듯 자연스럽게 세계가 영혼에게 의미를 내놓았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될 것이다. 단어가 내뱉어질 것이다. 당신, 그리고 나, 그리고 이 세상 모두가 이마를 탁 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어리석었다니! 책의 이 마지막 굽이에서 작가는 그 진실을 내놓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를 숙고하는지 잠시 멈추는 듯하다. 고개를 들고 자기 생각을 따라가던 죽어가는 사람 곁을 떠나 고개를 돌리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가 그를 끝까지 따라가야 할까? 우리 뇌의 아늑한 침묵을 산산이 부수어버릴 그 한마디를 속삭여야 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그 단어는 이미 형체를 갖추었고 밖으로 나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서서 흐릿한 침대 위로, 회색의 둥둥 뜬 형체 위로 허리를 굽힌다. 낮게 더 낮게…… 그러나 한 순간의 의심이 치명적이었다. 그 남자는 죽었다.
―p. 207~211
손안에 있던 흔해빠진 조약돌을 물속 깊이 힘껏 집어던지고 나서야 실은 그것이 누구나 탐내는 보석이었음을 알게 되는 법이다. 일상의 햇빛으로 물기가 말라 있을 때는 조약돌처럼 보여도 연한 빛깔의 모래 위에서는 보석의 빛을 낸다. 그래서 잠을 깼을 때 머릿속에서 울리는 무의미한 문장이 실은 놀랄 만한 사실을 알아듣기 힘들게 옮겨놓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p. 223
그의 비밀이 무엇이었건 간에, 나도 한 가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은 항구적인 상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일 뿐이며, 내가 영혼의 파동을 발견하고 따라간다면 어떤 영혼이라도 나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세는 어떤 영혼이라도 선택해서, 아무리 많은 영혼 속에서라도 의식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 영혼 모두가 자신들이 짊어진 짐을 서로 맞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p.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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