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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없는 남자 II일상/book 2020. 1. 2. 00:15
요새는 책을 읽다 말고 곧잘 꾸벅꾸벅 졸곤 한다. 카페에 앉아 책을 읽다가도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온다. 타고나기를 체력이 좋은 편에 속하지 않는 나는 동생 말마따나 실속도 없어서 크고 작은 계획을 세워놓고선 독서에만 골몰하지만 이마저도 알차지 못한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전편에 비해 두 번째 읽는 「특성없는 남자」는 도통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아마 직전에 「정치적 감정」의 논리적인 텍스트를 꾸욱꾸욱 읽다가 소설로 넘어오니 문체가 달라져서 좀 더 뻑뻑하게 읽혔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갈피해둔 곳들을 짚으며 갈무리를 하다보니 소설의 숨은 뜻들을 곱씹어볼 수 있어 다행이다.
역사인식(歷史認識). 인간 이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새 역사를 열어보이려는 장력(Tension)과 이성에 대한 과신을 꺼림칙하게 여기고 흘러가는 시대 안에서 부유(浮遊)하는 군상(群像). 아마도 전자는 클라리세, 후자는 울리히로 표상된다 할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해를 구상하는 디오티마는 자신이 꾸민 아늑한 살롱 안에서 새로운 역사의 서막을 젖혀보이겠다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역사인식에 머물러 있다고도 할 것이다. 프로이센에서 온 아른하임 박사의 이론에 감명받으면서도 확장하는 게르만 세력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시민들의 역사인식을 환기(喚起)하는 것보다는 궁정에 이뤄지는 행정적 요식행위와 관료들의 물밑협상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3권이 아직 발간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맥락은 아마도 사라예보에서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1권에서 합스부르크-헝가리라는 다소 모호한 제국개념 속에서 형성된 오스트리아의 민족개념을 두루 다뤘다면, 2권에서는 오스트리아의 해라는 역사적 기념비를 세우는 과정에서 논의되는 역사인식과 이러한 인식의 주체로서 인간의 이성은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 다뤄졌다. 아울러 모오스브루거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법적 주체로서 근대적 인간이 등장하는 과정도 함께 다루고 있다. 마지막 3권—1~2권보다는 두꺼울지도 모르겠다—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된다.
이미 이야기한바, 신이라면 영혼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영혼에 복종하려는 불타는 욕망만이 무궁무진한 활동과 진정한 무정부상태를 허용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화학적으로 순수한 영혼이 실제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례도 있다. 그에 비해 한 영혼이 도덕을 소유하거나 종교, 철학, 심오한 부르주아적 교양이나 의무와 미의 영역에 관한 사상을 소유하자마자 그 영혼에는 규정, 전제조건, 행위수칙들의 체계가 주어지고 이런 것들이 가치있는 것인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영혼은 그 규정들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열정은 마치 용광로에서처럼 아름다운 사각형의 모래 위로 떨어져내린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남는 것이라곤 행위가 어떤 명령에 따랐느냐를 따지는 논리적인 해석뿐이다. 그리고 영혼은 전투가 끝난 들판의 공한 풍광을 간직하는데, 그곳에서는 시체가 누워 있고 몇몇 조각의 삶이 아직 신음하거나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통로를 그렇게 빨리 건너가야 하는 이유이다. 젊은 시절에 흔히 그러했듯이 우리에게 믿음의 회의가 찾아오면 우리는 곧장 무신론자들을 따라다니며, 사랑의 혼란이 찾아오면 재빨리 사랑을 버리고 결혼해버린다. 그리고 어떤 영감에 압도될 때는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게 어차피 불가능한 만큼 그곳을 떠나게 되고, 떠난 후에는 결국 그 불길을 갈망하며 사는 삶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의미와 자극이 필요한 매순간의 삶을 이상적인 상황에 두는 대신에 그 이상적인 상황을 만들기 위한 일들, 다시 말해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들, 방해물들, 소란들로 채우기 마련이다. 그런 것들이란 정말 추구할 가치라곤 없는 것들인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오직 바보들이나 광신자, 정신이상자들만이 그 불길 속을 견뎌낼 수 있다. 건강한 사람은 단지 이러한 신비로운 삶의 불길조차 없다면 삶이란 가치가 없다고 설명하는 데 만족해야만 한다.
— p. 9~10
그러나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견뎌내야 할 것으로 가득 찬 삶이 아마도 교수대에 오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았고 한 몇년을 더 살거나 덜 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어 보였다. 너무나도 유폐된 채 방치된 그 남자의 수동적인 자존심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빼앗아버렸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삶에 목을 매지는 않았다. 그는 무엇을 좋아해야 했을까? 봄바람이나 너른 시골길 또는 태양은 아니지 않았을까? 그것은 지루하고 덥고 먼지퉝이일 뿐이다. 확실히 아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p. 56
그는 자신의 혀 혹은 내면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이 접착제로 붙여진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것은 그를 비참할 정도로 불확실하게 만들어 며칠이고 숨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기분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어떤 날카로운, 거의 소리가 없는 경계가 찾아왔다.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밀려들었고 공기중에 커다란 공이 떠올라 그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눈 속에, 입술에, 얼굴 근육에 무엇인가를 느꼈다. 주변의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캄캄해지더니 집들은 나무 위로 올라가고 고양이들이 숲에서 뛰어나와 재빨리 사라졌다. 그런 상황이 잠시 이어지더니 곧 끝나버렸다.
— p. 103
종종 그는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때가 있었다. 그것은 때로 굉장히 모호했다. 그것의 형상은 외부에서 온 것이었지만 얼핏 보이는 빛은 그것이 진짜 그의 내부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부에 있느냐 외부에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이 상황은, 마치 맑은 물 속에 투명한 유리 한 장을 넣어둔 것과 같았다.
— p. 105
법학은 말하길 인간은 법을 지킬 수 있든지 아니면 그럴 수 없든지 둘 중의 하나다. 이 두 상태 이외의 제3의, 혹은 중간의 것은 법학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에 따라 사람은 처벌받을 수 있고, 이렇게 처벌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람을 법적인 인간으로 만들며, 그런 법적인 인간으로서 사람은 법이 주는 초인간적인 자비를 누리는 것이다.
— p. 110
울리히가 생각하기에 단 하나 모자란 것은 형식이었다. 다시 말해 행위의 목적이 성취되기 전에 그 목적의 표현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마지막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표현은 항상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고 사물의 현 상태와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며 확실하면서도 불확실한, 정확성과 열정의 결합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시절이 그에게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 그를 고무했어야 할 때였다. 그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철학자들은 명령할 군대가 없는 폭군들이어서, 세계를 하나의 체계 속에 가둠으로써 자신들에게 복종시킨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폭군의 시대에 위대한 철학자가 나왔고, 진보적인 문명과 민주주의의 시대엔 뛰어난 철학자가 나오지 못했을—적어도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을 들어보면 그 실망감을 알 수 있는데—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엄청나게 많은 철학이 조각난 상태로 존재하여 구멍가게만이 세계관 없이 뭔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되었다. 그런 반면 그야말로 큰 규모의 철학에 대해서 사람들은 뚜렷한 불신을 드러낸다. 그런 철학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며 울리히조차도 그런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학문적인 체험을 빌려 철학을 어느 정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었다.
— p. 128
과학적인 태도는 원래부터 미학적인 것이기보다는 신앙적인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과학적 태도가 '신'을 깨닫는 일이라 전제돼 있을 때만 신은 모습을 드러내고 과학은 그 모습에 무조건 무릎을 꿇는다. 반면, 신의 현현 앞에 선 탐미주의자들은 신의 재능이 그리 독창적이지 않고, 신의 세계관 역시 정말 신이 선사한 재능이라고 하기엔 지적으로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울리히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모호한 예감에 자신을 내맡길 수는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주도면밀한 정확성을 세계에 살던 오랜 시절 그 자신을 거스르며 살았음을 감출 수도 없었다. 그는 뭔가 예측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고, 그래서 그가 '삶으로부터의 휴가'라고 조롱하듯 부른 그런 시도에서 안식을 주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어떤 나이에 이르면 인생은 엄청 빠르게 흘러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산을 남기고 떠나기 전, 그 마지막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할 시기는 저 멀리, 결코 연기할 수 없는 시간에 놓여 있다. 이미 아무것도 이룬 것이 반년이 지나버렸기 때문에 이것이 그에게는 더 뚜렷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는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렸다. 스스로 대수롭지 않게 바보처럼 행동하면서 모든 것을 내버려두었고 마치 그물을 텅 빈 강물에 내던진 어부가 초조하게 인내하며 살듯이 그가 그토록 중요시하던 사람들과 관련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계속 떠들어대기만, 너무 많이 떠들어대기만 했다. 자아라는 것이 세계와 인생에서 형성된 인간의 한 부분을 말하는 게 맞다면, 그는 그 자아 뒤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그 뒤에 쌓아올린 조용한 회의는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그는 인생의 최대 위기에 선 자신을 발견했고, 스스로의 태만을 경멸했다. 거대한 시련은 위대한 창조물인 인간만이 겪는 특권일까?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아주 초보적인 신경생물조차 자신이 위기를 겪기 때문이다. 그가 싶은 동요 가운데 남겨둔 것은 모든 영웅과 범죄자들이 소유한 침착함의 잔여물이었다. 그것은 용기도, 의지도, 자신감도 아니었고, 마치 개에게 거의 짓이겨진 고양이의 생명을 빼앗기 어렵듯이 그렇게 제거하기 어려운 완강한 생의 집착이었다.
— p. 134
"저는 이루어진 현실보다는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에 더 끌린다고 했어요. 그건 미래의 일뿐 아니라 과거의 일이나 한때 놓쳐버린 일에서도 마찬가지라고도 했지요. '제가 보기에 우리의 역사는 뭔가 작은 생각을 이룬 기쁨에 젖어서 훨씬 더 큰 일들을 그냥 내버려뒀던 거 같아요. 거대한 조직이란 보통 그들의 사유가 엉망으로 뒤엉킨 설계도입니다. 거대한 인물이란 것도 마찬가지죠.' 이게 제 대답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명백한 시각의 차이가 있었던 셈이죠."
— p. 168
"제가 주장하기를," 울리히가 말을 시작했다. "그럴 능력이 있는 어떤 사람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서류철을 가득 채운 제안들을 기억하시나요? 이번에 제가 한번 묻겠습니다. 누군가 평생을 걸쳐 애타게 바라던 일이 갑자기 이뤄진다면 당황스럽지 않을까요? 가령 갑자기 가톨릭 교도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찾아오고, 사회주의자들에게 미래국가가 도래한다면 어떨까요? 그러나 아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은 요구하는 일에 익숙하지만 그 일이 실현되는 것에는 큰 기대를 품지 않죠.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게 자연스런 일입니다. 말이 나온김에 하나 더 묻겠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음악가에게는 음악이, 화가에게는 그림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마 콘크리트공에게는 콘크리트로 짓는 집이 가장 중요하겠죠. 그렇다고 어떤 사람이 신을 철근콘크리트의 전문가로 상상한다면, 또는 그림이나 나팔소리를 실제 세계보다 더 좋아한다면 당신은 어떻겠습니까? 당신은 이 질문이 말도 안된다고 하겠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어리석음을 계속 원할 것이라는 심각한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며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제 말은 사람들이 실현하기 어려운 일을 열망하고 쉬운 일은 경멸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현실 가운데 비현실을 향한 불합리한 열망이 존재한다는 거예요."
— p. 190~191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정확히 모르니까요. 우리는 과도하게 현재를 현재의 느낌을, 그러니까 여기 있는 것을 과대평가하죠. 내 말은, 당신이 나와 함께 이 골짜기에 와 있는 것조차 바구니에 담아놓고 현재라는 마개를 그 위에 씌워놓은 것처럼 본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런 현재를 너무 과대평가해요. 우리는 기억하죠. 아마 1년 후에라도 여전히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머물렀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를 진정 감독시키는 것은, 적어도 저에게는, 신중한 말이에요. 나는 그런 말에 어떤 설명이나 이름을 구하고 싶진 않아요—항상 어느 정도는 그런 방식에 반대하는 편이죠. 그런 신중한 말이 현재에 의해 밀려나고 있어요. 따라서 그것은 현재가 되지 못하는 거예요!"
— p. 192~193
······위대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도대체 왜 물질은 허공에 머물지 않고 땅에 닿을 때까지 끊임없이 떨어지는가, 하는 자연의 깊고 본질적인 문제를 지워버리고 좀 더 일반적인 확정으로 대신했다. 즉 그는 오직 물체가 얼마나 빨리 떨어지는지, 그 궤적과 시간, 그리고 가속도를 간단하게 계산해내는 데 만족한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주저없이 그를 처형하는 대신 죽일 듯 위협하다가 잘못을 뉘우친다는 말만 받아냈는데, 이는 큰 실수였다. 왜냐하면 바로 그와 같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서—전체 역사로 치자면 눈깜짝할 사이에—기차시간표, 공업기계, 생리학적 심리학, 그리고 교회가 더이상 어쩌지 못하는 도덕적 타락이 일어났던 것이다. 아마도 교회는 너무 영리한 나머지 이런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것은 갈릴레이가 낙하법칙이나 지구 자전의 발견자일 뿐 아니라 오늘날 거대자본이 관심을 가질 만한 발명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새로운 정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사는 그에게 영감을 준 이성적 사유가 마치 전염병처럼 격렬하게 퍼져나갔음을 증언하고 있다. 오늘날 이미 너무 많은 이성을 소유했다고 믿는 우리에게 이성적 사유로 영감을 받는다는 말이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갈릴레이 시대에 형이상학에서 벗어나 갖가지 증거를 바탕으로 현실을 면밀하게 관찰한다는 것은 이성적 사유의 만찍이자 열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 때 인간이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지각있는 아이가 너무 이른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와 다를 게 없다는 대답이 나온다. 그 아이는 그리 기품은 없지만 믿을 만한 육체의 부분을 이용하여, 즉 엉덩이로 땅에 주저앉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땅이 굉장히 푹신푹신해 보여서 그 접촉의 순간부터 발명, 편리함, 발견 같은 것들이 기적적으로 끌려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 p. 215~216
"오랫동안 고민해봤어," 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오늘날 정말 비열한 일들은 사람들이 행하는 일 때문이 아니라 내버려두는 일 때문에 일어나고 있어. 그런 비열한 일들이 점점 자라서 공허의 구멍을 채워주고 있지." 이 말을 한 후에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성급히 말을 꺼냈다. "어떤 것을 내버려두는 것은 어떤 것을 행하는 것보다 열배나 위험해! 알겠니?" 그녀는 자신을 좀더 정확히 표현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이는 것에 그쳤다. "너는 내 말을 정확히 이해해, 그렇지? 비록 네가 항상 모든 일을 되는 대로 내버려둬야 한다고 하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여러번이나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너는 악마 그 자체야!"
— p. 310
첫번째 해답. 세계역사 역시 반드시 다른 역사들처럼 되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절대 새로운 것을 생각해낼 수 없으며 오로지 서로의 이야기를 베껴댈 뿐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정치가들이 생물학이나 그 비슷한 것들 대신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두번째 대답. 대부분의 경우 역사에는 저자가 없다. 역사는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만들어진다. 사소한 원인들에서 말이다. 고딕 시대의 인가 또는 고대 그리스인으로부터 현대의 문명화된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믿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식인종이 될 수도 있고 「순수이성비판」을 쓸 수도 있다. 또한 처한 상황에 따라 똑같은 신념과 특성을 가지고도 서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이때 드러나는 외면상의 차이는 아주 작은 내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번째 대답. 그래서 오늘날 유럽을 인류의 어린 시절인 기원전 5천년 이집트로 돌려놓고 세계역사를 그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한동안은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다가 아무도 예측하지 모한 이유로 원래 예정된 길을 점차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역사의 길은 한번 치면 예정된 경로를 가게 돼 있는 당구공 같지 않고 오히려 구름이 가는 길, 또는 여기서는 그림자에, 저기서는 사람들 또는 기이하게 생긴 건물에 의해 가는 방향이 바뀌어 결국에는 알지도못하고 가고 싶지도 않은 곳에 도착한 나그네의 길과 비슷하다. 역사의 길에는 길을 잃게 하는 어떤 것이 분명히 있다. 현재는 마치 도시의 맨 끝에 있어서 더이상 도시에 속하지 못하는 마지막 집 같다. 모든 세대는 놀라서 묻는다. 나는 누구이며 내 조상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차라리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고 조상들이 우리와 다른 족속이 아니라 그저 다른 장소에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는 그게 더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애하는 피셀 씨,' 그는 곧장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그건 간단하지 않아요. 당신이 기억하겠지만 제가 역사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또한 저는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매우 불쾌한 것으로 받아들였어요. 왜 사람들은 역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가? 그러니까 왜 인간은 마치 동물이 부상을 당했을 때나 옷에 불이 붙었을 때처럼, 한마디로 위기에 처했을 때만 역사를 공격하는가? 왜 이 질문이 불쾌한 것일까요? 그 질문이 의미하는 바가 인간은 그저 삶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둬서는 안된다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거슬러서 무엇을 하게 될까요?'
······우리는 절대로 사상들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사상들 사이에는 어떤 평형이, 힘의 균형이, 무장한 채로 평화를 이루는 순간들이 있어야 하며 그래서 어떤 사상들도 너무 많이 현실화되어서는 안된다. 피셀에게 교양은 진정제였다. 교양은 다름아닌 문명의 근본감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스스로를 더욱 생생하게 주장하는 반대감각이 생겨났는데 그에 따라 우연에 의해, 그리고 전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적이고 정치적인 역사는 거의 구식이 돼버렸고 모든 문제에, 모든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어떤 계획된 해결책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 p. 317~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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