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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명사를 '정치적'이라는 형용사가 꾸미고 있는 책의 제목만으로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치와 감정은 언뜻 보기에 어울려선 안 될, 오히려 분리시켜 봐야할 개념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으레 제목만으로 단숨에 시선을 잡아끄는 책들이, 읽는 과정에서는 상당한 시간과 인내를 요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만 일단은 책을 집어들었다. 요즘처럼 혐오(嫌惡)와 배제(排除)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저자 마사 누스바움은 어떤 정치적 인간을 논할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이 책은 계량화된 사회과학적 논의가 쏟아지는 오늘날 독특하게도 귀납적 추리를 통해 서사(敍事)를 이끌어간다. 수치화되지 않은 것들을 불신하는 오늘날의 독자들을 감안한 듯, 저자의 글에는 풍부한 예술작품(시와 오페라, 희극과 비극, 건축물까지), 정치인들의 레토릭(rhetoric), 실험사례들을 여봐란듯이 풀어보인다. 가장 먼저 논의의 소재가 되는 것은 재미있게도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다—지금이야 흥미로운 설명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막상 읽을 때에는 쉽지 않은 텍스트였다. 그도 그럴 것이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오페라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논의에서 대단히 재미있는 지점은 보마르셰의 원작을 다소 각색한 (다 폰테와 모차르트의) 이 작품이, 백작과 피가로로 대변(代辯)되는 남성성의 한계와 여성적 포용력을 아울러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과 복수에 눈이 먼 남성 주인공들은 이른바 앙시앵레짐(Ancien Régime)—프랑스 혁명 전의 절대군주정체—의 표상(表象)으로, 구체제로부터 탈피해 선(善)을 추구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 인물로 묘사된다. 이와 반대로, 신체적으로 남성이면서 여성적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케루비노'라는 캐릭터는 그야말로 위트가 있고, 사랑을 사랑 자체로 바랄 뿐이며, 자신의 바깥에서도 기꺼이 선(善)을 발견할 수 있는 열린 인물이다.
이런 대조군(對照群) 설정은 이후의 논의를 이끌어가는 데에도 일관성을 부여한다. 동질적인 시민감정의 고양(高揚)을 강조한 콩트와 루소의 사상을 비판한 저자는, 존 스튜어트 밀이 천착했던 개인의 고유성—그러나 시민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어떻게 개인의 자율을 길러낼지에 대해 구체적 실현방식에는 다다르지 못했다—이라는 중간단계 거쳐, 바울에 감화받아 서정적이고 에로틱한 시와 예술을 가르쳐썬 타고르의 사회참여방식과 교육이념에까지 이른다.
정치적 감정을 논하는 데 애국심이라는 주제가 빠질 수 없는데, 이 대목에서는 저자의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 엿보인다. 게티즈버그 연설을 통해 링컨이 어떻게 남북전쟁이라는 극한의 내부분열을 보다듬었는지, 대공황 상태에서 타협적 경제정책—전통적인 자유시장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선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루스벨트가 국민들을 어떤 방식으로 설득했는지 수사적(修辭的) 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옛날이야기를 펼쳐보인다. 시카고 대학이 일반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해가는 과정, 워싱턴 D.C.의 넓은 부지에 베트남전에서 전몰한 장병들을 기리는 공간을 조성(造成)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건축이라는 테마까지 종횡무진하며 공적 (그리고 물리적인) 공간에서 시민들의 감정을 배양(培養)할지 고민하는 저자의 생각이 멋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민주주의와 함께 태동한 미국 역사에서 족적을 남긴 정치적 유산—게티즈버그 연설이라든지 뉴딜 정책이라든지—과 더불어 이를 오늘날 정치의 장(場)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논의를 개진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카리브디스'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부터는 공통의 관심사, 공통의 국가관을 도출하기 어렵다는 점을 언급한다.)
수치심과 죄의식을 다루는 대목에서는 당연히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한 국민의 역사를 다룸에 있어 과거 서사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자각(自覺)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현 독일정부의 반성적 태도와 확연하게 비교되는 일본의 과거사 왜곡은 마사 누스바움의 논의 틀 안에서도 명료히 설명된다. 오늘날의 독일정부는 자신들이 만행(행위)을 인정한 위에 죄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물론 동시에 이는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반면 오늘날의 일본정부는 자신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것(특성)을 드러나는 것을 저어한 나머지 사회의 아래 저 먼곳에 숨기고 외면하기에 급급하다. 이는 일본정부의 입장에서 자국민들이 이웃국가에 대한 미안함을 '관심의 원' 바깥에 두게 하는 단기적인 성공일지 모르지만, 보다 긴 관점에서 인간에게 내재된 '근본악'에 틈을 내보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이 분명하다.
저자는 인간이 유아기부터 형성해온 여러 부정적 감정—수치심, 죄의식, 경쟁심, 시기심, 질투심, 두려움—을 나열할 때 두려움과 시기심에 대해서는 이들 감정의 반작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순기능이 있음을 인정한다. 요컨대, 저자는 이상적인 정치적 감정에 대해 말하면서도 건설적인 정치행위를 방해하는 감정이 상존(尙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는 애석하지만 현실적인 진단이고 매우 적절하다. 하지만 우리는 공적 공간에 내재된 혐오정치에 내성(耐性)을 기르고, 건전한 정치적 감정의 사다리를 견고히 붙잡아야 할 것이다.
모두를 위한 정의와 평등한 기회를 열망하는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감정의 정치적 함양을 위해 두 가지 과제가 요구된다. 하나는 많은 노력과 희생을 요하는 유의미한 기획에 대해 사람들의 강력한 헌신을 촉구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재분배, 배제되고 소외되었던 이들의 완전한 참여, 환경 보호, 해외 원조, 국가 안보 등이 포함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편협한 공감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쉽게 자아도취적 기획에 갇히며, 자신의 협소한 굴레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의 요구는 금세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국가적 차원의 목표를 향한 감정들은 흔히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거시적으로 사유하게 만들고, 좀 더 넓은 공동선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공적 감정을 함양하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과제는 나약한 자신을 보호하고자 타인을 폄하하고 무시하려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사회 안에,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 안에 도사리고 있다. 혐오나 시기, 타인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욕망 등은 모든 사회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인간의 삶 속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적절히 제어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피해가 발생한다. 특히 이런 것이 입법과정이나 사회 형성 과정에서 하나의 지표로 작동한다면 그 피해는 더 커진다.
— p. 18~19
바로 이러한 지점에 이 책의 주된 문제의식이 놓여 있다. 즉, ‘어떻게 하면 품위 있는 사회가 루소의 방식처럼 반자유주의적이거나 독재적이지 않으면서도 로크나 칸트가 시도했던 것보다 더 많은 안정성과 동력을 가질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덧붙여, 내가 주장하는 품위 있는 사회라는 개념이 ‘정치적 자유주의’의 한 형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문제는 더 까다로워진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란 정치적 원칙들이 종교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포괄적인 교리 위에 세워진 것이어서는 안 되며, 개인에 대한 평등한 존중이 특정 종교 혹은 포괄적인 윤리적 입장에 대한 정부의 승인을 신중하게 조절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관점은 독재적 강제성을 조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강경한 승인 혹은 내집단과 외집단을 형성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양산하는 잘못된 행태의 용인을 주의해야 한다. 내 관점에서 볼 때, 감정들은 단순한 충동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치 평가적 내용을 포함하는 판단을 아우른다. 그렇기에 감정을 구성하는 내용물이 다른 것들과 대립하는 특정한 포괄적 교리의 부산물이 아님을 밝히는 게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 p. 22~23
「내가 한숨 짓는 동안 Vedrò mentr’io sospiro」이나 바르톨로의 「복수하리라La vendetta」를 틀었다고 상상해보자. 이 곡에서 두 명의 힘 있는 남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다. 이 자유는 지배당하는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 지배하는 권력이 선사하는 자유다. 하지만 쇼생크의 죄수들은 그런 식의 자유에 의해서는 결코 감동받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매일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듀엣 곡이 말하는 자유는 당신을 모욕한 사람에게 그 모욕을 되갚아주는 기회를 갖는 그런 자유, 즉 앙갚음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우리가 인간에게 있어 뭔가 불안해 하고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그러한 모습 너머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그런 자유다. 스스로 평등을 가짐으로써 행복해지는 자유이며, 누가 자신보다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는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다. 이것은 우리 마음을 쇼생크 감옥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게 하는 자유이며, 그러한 위계 제도가 거울처럼 투영된 미국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 자유다.
— p. 69
“나는 내 바깥에 있는 좋음을 찾고 있어요ricerco un bene fuori de me.”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오페라의 다른 어떤 남자 배우도 자기 바깥에 있는 선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모두 경쟁에서 승리하거나 치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이다. 반면 케루비노의 사랑에는 대상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향한 강렬한 경이가 들어 있다. 이 경이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이는 호기심을 기계적인 것이 아닌 위대한 것으로 만든다.
— p. 73
우리에게 필요한 시민 종교는 “그것 없이는 좋은 시민 또는 충실한 주체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성의 정서를 심어주어야 한다”. 이러한 정서는 사회계약과 법의 신성함을 포함하는 어떤 유사 종교와 같은 교리에 기초한다. 하지만 그러한 정서 자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국가와 법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포함한다. 또한 만장일치와 동질성에 근거를 둔 형제애를 포함한다. ‘시민 종교’에 반대하는 사람은 “비사회적 존재로서 법과 정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추방당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민적 사랑은 정치 질서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의식, 그리고 개인이 느끼는 집단으로부터의 분리감과 양립할 수 없다. 진실성에 대한 시험은 만장일치가 조건이다.
……봉건적 질서에 대해 강한 증오를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측면을 사유하는 데 있어 루소는 그것을 뛰어넘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봉건적 사랑과 같이 시민적 사랑도 순종적이며 계층적이다. 모차르트의 여성들에게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호혜성을 여기서는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시민 종교는 앙시앵레짐을 지탱해온 남성적 용기, 확신, 명예와 같은 사유에 의존함으로써 이른바 지극히 온순한 기독교와 대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수치심과 모욕감을 잊는 것은 비천하고 천한 신분에 속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주장이 지금의 새로운 세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진정 평등주의적 제도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러한 미래지향적 사랑은 비판의 목소리에 열려 있어야 한다. 즉 개개인은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과 똑같을 수 없는 독특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루소의 동질성보다는 모차르트적 체제가 실질적인 동질성을 추구하면서도 이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동시에 개별적 특이성을 수용한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와 농담과 같은 여성의 세계를 선호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전통과 복종에 대한 전복과정에 있어 필요한 하나의 칸트적 계몽 지표다. 즉 이는 침범할 수 없는 자유의 공간, 소위 에로틱하면서도 소중한 즐거운 차이성을 갖는 개인의 정신에 대한 사유다.
— p. 81~83
문화와 개인에 대한 무시는 콩트의 전적인 유머 감각 부족에서 나타난다. 이에 대한 밀의 비판은 타당하며, 콩트의 유머 없음(humorlessness)은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을 특이하고 독특한 개체로서 정해진 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존재로 대하기보다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교환 가능한 기계처럼 다루는 콩트의 경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유머는 상황적 맥락을 반영하며 문화도 담고 있다. 또한 친밀함이 있어야 가능하며 상호 간에 공유된 배경 지식도 요구한다. 그렇기에 문화적 차이나 개성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유머를 갖거나 이를 소중히 여기기란 불가능하다. 유머는 대개 경이로움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기저에는 반항과 전복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 콩트는 스스로를 온전하고 완벽한 존재로 생각하는 반면 삶이 주는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에, 그가 미소를 짓기란 어려운 일이다.
— p. 114~115
여러 측면에서 타고르는 콩트의 전통 안에 머무른다. 그는 인간 종을 하나의 전체로 볼 수 있는―과거와 미래 양쪽으로 뻗어나가면서―능력에 큰 비중을 둔다. 독자로 하여금 인간 존재를 위한 이상적인 미래를 상상하도록 권고하면서, 이를 자신이 말하는 종교로 간주한다. “종교는 영속적 존재로서의 인간 본성에 내재한 특징들을 표현하고 배양하고자 하는 시도와 그것들에 대한 믿음을 갖기 위한 노력으로 구성된다.” 개인적인 탐욕과 제한된 공감의 위험성에 대한 타고르의 우려는 콩트의 생각과 맥락을 같이 한다. 탐욕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분리된 자아의 환각으로 인간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그리고 “탐욕이 목표로 삼는 물질을 얻으면, 그것은 끝을 모르고 질주한다. 이는 마치 미치광이가 지평선을 쫓는 것과 같다”. 타고르는 대개 이러한 주제를 과학 기술의 새로운 진보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발전시켜 나간다. 그에게 과학이란 인간의 공감 능력에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은 물건이라는 괴물에 기생하는 능력을 빠르게 발전시켜나가면서, 자신만의 우리를 만든다. 그리고 이 우리가 사방으로 자신을 가두도록 내버려둔다.” 사실상 왜 우리가 새로운 종교를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타고르의 설명은 전반적으로 콩트의 것과 같다. 즉 우리는 자기중심주의와 탐욕으로 향하는 강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반대의 길을 택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소중한 목표들을 깨닫지 못한다.
— p. 147~148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르의 휴머니즘은 여러 면에서 콩트의 논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먼저 다원주의적 측면을 살펴보자. 백인과 유럽이라는 헤게모니 대신 우리는 특권의식에 기반한 모든 인종적·종교적 구분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의식을 갖고 있다. 부족주의를 거부하고 모두를 위한 존중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타고르가 말한 “인류의 신the God of humanity이 폐허가 된 부족의 사원 앞문에 당도했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제국적 힘이나 인종적 편견을 바탕으로 한 우월성을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타고르의 비전은 콩트의 종교가 갖는 통제와 동질성이라는 또 다른 근본 정신을 거부한다. 타고르는 분명 전통과 제의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과거로부터 전수되어온 형식들이란 대부분 죽었고 진정성이 없다고까지 말한다.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아마도 그는 밀이 생각했던 것과 유사하게 과거란 우리 손안에서 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받고 검증되어야 한다고 여긴 듯 보인다.
— p. 149, 152
첫째, 우리는 밀과 타고르가 제시한 인간의 악에 대해 정확히 진단해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은 연민의 제한적 실천을 우리의 첫 번째 도덕적 문제로 제시한다―이것은 짐승 무리 같은 온순함과 결합된 형태로,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제한적 연민을 표현하는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한다. 밀은 두려움이나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으며, 혐오, 수치, 집단적 증오에 대해서도 전혀 말하지 않는다. 타고르는 젠더와 카스트를 극복하는 것과 연관하여 인간 신체로부터 극복해야 하는 혐오감이 훌륭한 시민의 또 다른 주요 과제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타고르가 묘사한 바울의 면면을 살펴보지 않고는 혐오감을 극복하는 것과 연민을 넓혀가는 것 사이의 연계는 함축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지속된 인간의 소름 끼치는 야만성에 관한 기록을 돌아보면 우리는 밀의 낙관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좀 더 깊은 이해를 모색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비슷한 이유로 타고르와 밀은 연대감과 개별적 시도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정확히 밝히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두 사람 모두 콩트적 통제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무모한’ 저항의식과 상상력을 위한 자유로운 공간들을 가치 있게 생각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이 정서적인 연대에 속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밀의 인간 종교는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를 미래의 휴머니티와 동일시할 것을 요구하며, 이러한 공동의 감정적 노력 안에 함께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공통의 과업과 개별적으로 시도하고 저항할 자유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밀은 우리에게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타고르 쪽이 좀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의 학교에서 타고르는 매일 이 미묘한 균형의 예시를 보였는데, 다른 한편으로 훈련을 하고 어떤 한정된 이상을 전달하면서, 한편으로는 개인성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의 춤이 전달하는 말은 안무와 개별화를 결합한 형태다. 그의 대중적 음악 장르의 창조에는 균형을 잡는 행동과 유사한 것이 있다. 노래의 전체적인 방점은 사람들이 때로는 혼자, 때로는 집단으로 노래를 부르는 데 있고, 이때 집단은 틀림없이 정치적 감정을 형성하는 강력한 구동력이 된다. ……어떻게 우리는 터무니없고 질식할 듯한 억압 없이 사회구조와 연대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 나아가 어떻게 공통의 관심사를 잃지 않으면서도 반대 의견을 길러낼 것인가? 대중적 감정 문화 속에서 예술이 갖는 역할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이러한 정면의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p. 173, 175~176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와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사촌격인 국가들의 극명한 차이가 여기서 드러난다. 우리가 그리는 사회는 폭력과 사기의 범위를 넘어 정치적·시민적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영역’이라 불리는 삶의 부분들에까지 해당되는 권리를 모든 시민에게 보장한다. 여기에는 건강, 교육, 품위 있는 수준의 복식, 피난처, 주거 등이 포함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는 국가의 형태들은 본질적 특징에 있어서나 권리 보호의 범위에 있어서나 차이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는 방식 또한 차이를 갖는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실현 가능한 ‘유효한 재분배’라는 공정한 세금 제도를 통해 물질적 불평등의 수준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은 똑같이 모색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국가보다 훨씬 더 많은 재분배를 시행하기 때문에 이러한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공감의 확장,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악한 편견들을 깨부수는 데도 충분한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또한 경쟁적인 시기심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며, 자신의 운명을 타인의 입장에서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감정적 힘들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시기심을 억제하려는 과제는 우리 사회가 모든 물질적 기회에 대해 완벽한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우리는 정치적·시민적 권리의 평등―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투표권이나 더 큰 종교적 자유를 가질 수는 없다―을 주장하지만, 재산과 수입 그리고 기회의 측면에까지 평등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회 전체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혁신과 노력에 대한 보상을 하고자 일정 수준의 불평등은 남겨두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존 롤스는 이러한 불평등이 최소 수혜자의 소득과 부를 증진하는 것에 한해서 허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롤스는 또한 정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개념을 갖는 사회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분배의 원칙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인정했다. 나의 역량 이론 접근법은 모두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충분한 기반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회의 기틀이 잡힌 후에 이러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불평등의 원리들을 위한 여지는 남겨두고 있다. 여러 사회는 최하위층의 사람들을 위한 복지의 기본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불평등을 크게 줄여나가지만, 일정 수준의 불평등은 허용하는 방식을 택할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 사회는 감정이 연관된 부분들에서 섬세한 균형을 맞추는 일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 경쟁심을 허용하고 심지어는 어느 정도 부추기면서, 모든 사회 구성원의 복지에 대한 사회의 약속을 뒤흔드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도록 제어해야 하는 것이다.
— p. 200~201
그렇다면 그것이 생성하는 정치적 원칙, 사회적 의례, 예술작품 등은 어느 정도 사회적 논란을 만드는가? 물론 여기에는 여러 이견이 있다. 특히 많은 미국인은 자신이 준수하는 공적 규범 속에서 발견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 사실상 오늘날 미국 내에 그 어떤 큰 집단에서든 인종차별을 시행하기란 매우 어려우며, 공적 감정을 구축하는 일은 인종차별주의자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큰 관련이 있다. 분명 정치적 규범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이상을 추구하려는 개인적 선택에 대해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분명한 한 가지는 언론과 결사의 자유는 소중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첩적 합의는 포괄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신념 체계 중 최소한 그 일부에 대해 긴장감을 갖고 살아가며, 또한 규범이 주는 일관성에 대한 안정감의 범위 안에서 제약을 준수한다.
— p. 212
첫째는 진지함seriousness이라는 생각 방식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동정심을 경험할 때, 이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 중대한 것이라고 여긴다. 이런 평가는 감정을 경험하는 외부 관찰자 혹은 평가자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며 또 이루어져야만 한다. 만일 고통받는 사람이 사사릿아 심각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해 신음하거나 불평한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동정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둘째는 무과실nonfault에 대한 생각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스스로 선택한 혹은 자초한 곤경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이는 모든 종류의 동정심과 관련해서 개념 성립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동물이든 인간이든 그 어떤 책임의 소지도 묻지 않은 경우들에서 동정심이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전통적으로 동정심의 필수 요소라고 여겨지는 유사성 자각similar possibilities이라는 생각이다. 동정심을 가진 사람은 대개 고통받는 타인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기며, 삶의 가능성 또한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 p. 231~232
그렇다면 감정이입empathy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의 관점에서 타인이 처한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타인의 상황을 그저 아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혹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느낄지 생각해보는 것과도 완전히 다르다. 감정이입은 단순히 감정의 전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와 다른 타인’의 곤경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감정이입은 어떤 형태든 나와 타인 사이의 구별에 대한 인식과 함께 상상적 전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감정이입만으로는 동정심을 만들어내기에 충분치 않다. 사디스트는 다른 사람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감정을 이입할 수 있지만, 상대를 괴롭히는 데 이를 사용한다.
— p. 235
그렇다면 문화는 어떤 종류의 편협함을 특별히 극복해야 할까? 뱃슨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처한 곤경이 생생하게 기술된다면 그들에 대한 관심과 감정이입을 보이는 데 본질적 한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러한 관심을 보이는 데 개인적인 경험이 선행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동물적 유산에 깊이 뿌리내린 다른 한계들은 합리적인 도덕성이 요구하는 동정적 관심을 불완전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은 이리저리 요동치며, 지속되지 못한다. 종종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계속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도움의 노력을 유지하는 데 실패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감정을 이입하여 동정심을 표현한 결과로 종종 비도덕적인 행동을 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대해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중요시 여겨왔던 공정함의 원칙으로부터 저 멀리 벗어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사소한 보상의 문제에서부터 생사가 걸린 문제들 모두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합의한 공정함의 기준에 더욱 적합한 사람보다 자신들의 상상에 부합하는 이야기의 인물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사실상 사람들은 두 개의 판단 체계를 갖고 있다. 하나는 상상력과 관점에 기반한 사고에 근거한 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원칙에 근거한 체계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동정심을 공적 선택을 위한 무비판적 토대로 여겨서는 안 된다. 감정 근본주의는 감정에 대한 배제만큼이나 치명적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정심이 전달해주는 정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원칙들은 의미를 상실할 것이며, 동기 부여의 동력까지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생한 상상력과 공평한 원칙 사이의 지속적인 또 주의 깊은 대화dialogue를 만들어야 한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상황에 실제로 처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동시에 공평한 원칙을 어느 정도 선까지 따라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이 둘 사이의 최상의 조합과 일관된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상상력에 의문을 던지면서, 머릿속에서 상상한 실제 사건과 공평한 원칙 사이에 다리bridge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가교를 통해 사람들이 응답하고자 하는 생생하게 묘사된 그들의 곤경이 사실상 훨씬 더 광대한 문제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공적 문화 속의 동정심의 발현은 이러한 대화와 가교를 세우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
— p. 252~253
‘모든 것은 내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유아의 사유를 형성한다. 이러한 사유는 프로이트가 탁월하게 그린 “아기 폐하” 이미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아기들은 진정 왕족에 가깝다. 이들은 세계를 자기 자신과 욕구를 위해 굴러가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들은 그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누군가의 봉사를 끊임없이 필요로 하는 무력함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왕족과 유사하다. 그런데 아이의 무력함이 극에 달하기도 하고, 또 그들은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이상한 입장에 서 있지만, 그저 우는 행동 말고는 그들의 이런 바람을 강권하고 확장시킬 방법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렬한 감정들이 생겨난다. 즉 버림받고 굶주릴 수 있다는 공포, 세계를 복원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 원하는 음식과 안정이 제때 제공되지 않을 경우의 분노, 기대와 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 느끼는 치욕 등이 점차 자리를 잡는다, "나는 군주다. 나는 여기 홀로, 굶주리고, 젖은 채로 서 있다.”
이러한 초기 나르시시즘으로부터 타인을 각자의 욕구와 관심사를 지닌 온전한 존재가 아닌 그저 노예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발생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나르시시즘을 타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 이 물음은 모든 좋은 사회가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나르시시즘과 무력함―분노와 부인의 대상이 되어온 무력함―의 결합은 ‘근본악’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는 타인을 자신의 욕구하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성과 같은 형태를 지닌다. ……진정 분노와 부인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저 순전한 휴머니티가 아니라, 나약하고 때론 힘없는 신체로 인해 느끼는 무력감이다.
— p. 275~276
위니콧이 볼 때, 가장 일반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놀이란 “잠재 공간”을 확보하는 상상력의 활동이다. 이 잠재 공간이란 가설적인 상황을 가능케 하는 이야기로 가득 찬 비현실의 영역이다. 이 영역 안에서 어린이들은 스스로 세계의 모습을 그리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보다 더 큰 통제 권한을 행사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결과는 현실세계가 만들어내는 결과들처럼 심각한 것은 아니다.
……초기 형태의 놀이가 갖는 결정적인 부분은 바로 “전이 대상transitional object”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물건에 집착하면서 유아들은 오직 자신을 실제로 안아주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안정을 느낀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유아들은 스스로에게 안정을 주는 법을 배우는데, 이는 가짜 동물 인형이나 담요를 두르고 이것들에 안정을 주는 마법의 속성을 부여하면서 이루어진다. 물건에 집착하면서 유아들은 스스로 안정감을 갖게 되고, 그러면서 점차 타인을 도구나 하인으로 보는 욕구로부터 스스로 떨어져나오게 된다. 또한 아기들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킥킥거리며 찾는 경험을 통해 상실과 회복의 감정을 경험한다.
— p. 285
‘이중화’는 다른 행동의 원칙이 적용되는 두 세계를 비합리성에 근거하여 만들어내는 것을 포함한다―그렇지만 이 두 세계의 기저에 놓인 현실세계는 사실상 동일하다. 이 세계 내의 행위자 또한 ‘이중화’되어 있다. 즉 각각의 세계에 다른 원칙들을 적용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리프턴에 따르면 이러한 ‘이중화’는 자아의 급격한 붕괴에 직면하여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서 행위자가 내보이는 극단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투사적 혐오는 비정상적인 스트레스나 독재적인 정치 통제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발달된 사회에서도 지극히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투사적 혐오는 작동 방식에 있어서도 두 개의 다른 환경 속에 분리된 두 자아를 만들어 행동하는 이중화처럼 극단적이지도 않다. 혐오는 일상의 심장부에서 작동한다. 이는 하나의 환경과 하나의 자아만을 요구하며, 자아가 공포를 느끼고 거부하려는 특성들을 지녔다고 머릿속에서 덧씌운 하위 계층을 만들어냄으로써 분할된 일상세계의 공간을 이룬다. 그렇기에 이것은 이중화보다 훨씬 더 보편적이며 일상적이다. 따라서 투사적 혐오라는 것이 악에 점령당한 사회뿐만 아니라 지극히 품위 있는 사회까지도 얼마든지 위협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 p. 296~297
‘근본악’에 대한 우리의 고찰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 이제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면서,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안정성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경향을 추가로 검토하고자 한다. 하나는 진실을 포기하고서라도 악행을 범하게 되는 또래 압력에 대한 굴복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의식을 버리고서라도 악행을 범하게 되는 권위에 대한 복종이라는 경향성이다. 이 두 경향은 인간 진화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이유인즉 원시적 삶의 조건에서는 위계와 집단 내 연대가 유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둘은 지금까지도 인간 사회 안에서 유용한 것이 사실이다. 나아가 이 둘은 지금까지도 인간 사회 안에서 유용한 것이 사실이다. 법적 권위에 대한 복종은 대개 좋은 것이며, 개인의 전문성이 부재한 상태에서 집단의 판단에 대한 존중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둘은 민주주의의 공적 문하를 해치는 것이기도 하다.
— p. 304
동정심은 이타주의의 강력한 원인이지만, 이타주의는 구체적인 서사와 이미지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 이타적 국민 감정이 동기 부여의 힘을 가지려면 구체성을 입어야 한다. 즉 이름을 가진 개인들(건국자, 영웅), 물리적 특수성(특징적 풍경, 생생한 이미지나 메타포),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과 희망이 포함된 투쟁의 서사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감정은 도덕적 동기들을 강화하지만, 한편으로는 공정한 원칙들을 위협할 수도 있다. 이런 긴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하나는 동정심의 확장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과 원칙 간의 협상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상징하고 옹호하는 이미지와 제도들에 동정심을 결부시킴으로써, 그리고 되도록 국가 밖의 사람들까지 포함함으로써 동정심을 확장할 수 있다. 좋은 애국심이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다. 좋은 애국심은 사람들을 일상적 감정들로부터 좀 더 넓고 공평한 배려로 이끌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선한 도덕 원칙들과 구체적인 이미지에 뿌리를 둔 자기중심적 감정 사이의 협상은 계속 필요하다. 이는 애국심이 끊임없는 비판적 검증을 요한다는 것을 뜻한다.
— p. 332~333
"희미한 동기 부여(카리브디스)"라는 말은 플라톤의 이상 도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에서 유래했다. 플라톤은 가족관계를 없애고 모든 시민이 다른 시민 모두를 똑같이 보살필 것을 요구함으로써 불공평을 없애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전략의 애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사랑하고 보살피게 하는 모든 동기를 지배하는 것은 두 가지다.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것이 자기가 가진 유일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두 가지 생각 중 어느 것도 이 도시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요컨대, 사람들이 뭔가를 사랑하게 만들려면 그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보게 해야 하고, 또한 되도록 "자기가 가진 유일한 것"으로 보게 해야 한다. ……즉, 중요한 감정들은 "행복론적"인 것으로, 그 사람의 번영이라는 개념과 그 개념과 관련된 '관심의 원'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돌봄으로 이끌려면 그들이 잠재적 돌봄의 대상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것" 혹은 "자기 자신"으로 보게끔 해야 한다.
— p. 347
우리는 필사의 존재이므로, 우리에 관한 모든 특별한 것이 결국 다 지워지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가족, 도시, 성교, 자식, 이 모든 것이 결국 망각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사실 그런 애착을 포기하는 것이 그리 큰일은 아니다. 남는 것, 유일하게 남는 것은 세계의 도덕적 질서인 진실과 정의다. 곧 닥칠 불가피한 종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꺼이 이미 죽은 사람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
— p. 354~355
애국심은 곧잘 부적절한 가치들, 소수자들에 대한 낙인찍기, 무비판적 동질성 등을 선동하게 되는 만큼, 애국심이 갖는 문제 중 하나는 역사 왜곡이다. 그래서 학교에서의 애국심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역사적 증거의 가치를 평가할지, 어떻게 역사적 서사를 구축하고 비판하고 옹호할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과거란 자명한 게 아니라는 것, 과거란 저절로 해석되는 게 아닌 자료들을 공들여 조립함으로써 드러난다는 것을 학생들은 배워야 한다. 또한 모든 서사가 똑같은 가치를 갖는 게 아니라는 것, 어떤 서사는 심각하게 왜곡되고 얼버무려진다는 것, 이념이란 끈기 있게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흔히 애국주의자들은 영광스럽게 각색된 과거와 현재를 좋아하는 나머지 현실을 싫어한다. 그들은 국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국가에 대한 사랑을 약화시킬 거라고 염려한다. 하지만 이 말은 결국, 인간의 마음은 현실을 견딜 수 없고, 연인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진자 몸을 견딜 수 없으며, 부모는 이상화된 성취의 모습에 부합하지 않는 자녀를 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슬프게도 종종 이것이 사실일 때가 있긴 하지만, 이것은 한 국가의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출발점으로서는 끔찍하다.
— p. 397~399
용감한 자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분출하며 기뻐한다.
그들은 자신의 축제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기쁨을 누리는 능력을
갖지 못한 이 용기 없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것에 의존해야 한다.
다가올 미래에 이 세상에 행여 축제가 부족할까봐,
그들은 후일을 위해 조상이 남겨둔 자투리들을 아껴가며 비축한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창조하는 법을 알지 못하므로
선조들을 찬양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바울, 타고르의 「사람의 종교」에서 인용
— p. 404
비극 관람은 평범한 인간의 나약함을 강조하면서, 혐오감과 우리가 인간부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기인한 구분에 거짓이 내포돼 있음을 드러내고, 지배 집단 너머로 관심을 확장하게 해준다. "비극"과 "비극적인 것"을 전체적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항상 위험이 따르는 일이며, 도덕적 둔감함을 내포하는 비극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록테테스」를 더 깊이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윤리적 잘못들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 그 장르 자체에 내재된 반전과 슬픔의 구조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비극은 과실과 사회 변화에 대한 유의미한 대화를 생산한다. 필록테테스는 왜 고통을 겪는가? 그를 보살핌 없이 버려둔 사람들의 냉담함 때문이다. 트로이의 여성들은 왜 고통을 겪는가? 강간과 예속이 정복당한 민족의 공통된 운명이기 때문이다. 일부 철학자들은 비극이 체념이나 불가피하다는 의식을 조장한다고 주장하지만, 고대 아테네의 비극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목격하는 수많은 고통 중에서 변할 수 없는 상황에 기인한 고통은 어느 정도이고 인간의 악한 행위에 기인한 고통은 어느 정도인지 자문해보게 하는 중대한 동요를 야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비극은 인간 야망의 한계를 알려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 의지의 마비로 귀결되지도 않고, 또한 책임, 의무, 변화 가능성에 대한 어려운 질문들을 침묵시키지도 않는다.
……이 비극적 질문은 단지 앞서 말한 명확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방편이 아니다. 선택의 어려움은 양쪽 선택 모두에 도덕적 과실이 존재한다는 것과는 무관하다. 사실, 많은 비극적 딜레마에서 그런 것처럼 이 경우에 아르주나가 해야 하는 선택은 오히려 분명하다. 그는 화살을 내던져버리고픈 마음이 굴뚝같겠지만,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 결과 자기편에 더 많은 죽음을 불러올 것이며, 대의명분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상대편에서도 수많은 죽음이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싸워야만 한다. 이 비극적 질문은 명확한 질문에 답하는 어려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분명이 존재하는 별개의 어려움을 나타낸다. 명확한 질문에 대한 모든 가능한 답은 최상의 답이라 해도 심각한 도덕적 악행을 포함하기에 그릇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바른 대답"이란 없다.
— p. 411, 416, 419
"더러운 손"을 가졌다는 인식은 단지 방종이 아니다. 그러한 인식은 미래의 행동을 위해서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선택을 한 사람에게 그가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빚을 지고 있음을 알리고, 그들에게 닥칠 그 재앙 이후에 그들의 삶을 재건하려는 노력도 필요함을 알려준다. 그러한 인식이 일반화될 때, 도덕적 과실에 대한 인식이 형성된다.
……아르주나는 비극적 선택을 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비극적 질문을 제기하고 그에 답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비극적 딜레마는 단지 상황에 연루된 사람만 숙고해야 할 일이 아니다. 비극적 딜레마는 시민, 비극 관찰자 등이 공히 숙고해야 하는 일로, 폭넓은 공적 결과들을 초래할 수도 있는 어떤 상황에 대한 최선의 설명을 요구한다.
비극은 우리에게 연극 속에서 서로 충돌하는 삶의 영역들이 갖는 중요성을, 그리고 그렇게 부딪치는 것들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을 해야만 할 때 초래되는 끔찍한 결과들을 환기시켜준다고 헤겔은 말한다. 따라서 비극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선택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있다면 어떤 곳일지 상상해보게 한다. 두 영역의 가치들 사이에서 "화합이 이루어지는" 세계를 상상해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은 무대 밖에서, 스스로의 건설적인 정치적 성찰을 통해 이러한 통찰에 이르게 된 시민들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진짜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은, 인간 행동의 힘들을 조정하는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순을 제거하는 과정에서다."
만약 정치 영역이 여러 가치 영역을 인정하기로 한다면, 정치 영역은 그 영역들 간의 항구적인 비극적 충돌 가능성 속으로 끼어 들어가게 된다. 그렇지만 헤겔은 우리에게, 특히 정치적 삶에서 취할 만한 최상의 전략을 제시해준다. 우리는 명백하게 대립되는 두 가지 가치의 조화로운 육성을 이루어내려고 시도해보기 전에는 이러한 일이 과연 성취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비극적 딜레마는 정치적 삶과 관련해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첫째, 비극적 딜레마는 기본적 권리와 그 권리가 부재할 때의 피해에 감정적·상상적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성찰하며 비극적 딜레마를 좇다보면 동정심이 생겨나고, 그 동정의 상황을 낳게 된 잘못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둘째, 비극적 딜레마라는 감정적으로 힘든 경험을 통해, 시민들은 큰 희생, 큰 손실이 명백히 나쁜 것임을 분명히 배운다. 어떤 시민이든 그러한 희생과 손실을 감내해서는 안 된다. 이제 사람들은 열심히 상상력을 발휘해, 시민들이 그런 갈등에 직면하지 않아도 되는, 혹은 최대한 적게 직면하는 세상을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정신 자세가 곧 진화다.
— p. 420~421 , 423~425
기념을 위한 건조물monument은 영원한 대망을 상기시킨다. 추모를 위한 건조물memorial은 고통스러운 상실을 상기시킨다. 아서 단토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항상 기억하기 위해서 기념비를 세우고, 결코 잊지 않기 위해서 추모비를 세운다". 베트남전 참전용사 추모비Vietnam Veterans Memorial는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과 링컨 기념관Lincoln Memorial 사이에 위치해 있다. 두 개의 기다란 거믄 벽이 125도 각도를 이루며 만나 날개처럼 되어 있고, 이 두 날개는 각각 워싱턴 기념탑과 링컨 기념관 쪽으로 뻗어 있다.
워싱턴 기념탑은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성공 지향적이다. 방첨탑은 사방에서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전적인 방첨탑과 다르게 단일암체가 아니고 분리된 덩어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은 여러 주의 통일을 상징하고, 또한 우아하게 쭉 뻗어오르면서 그 연방의 드 높은 목표와 그 목표의 계몽주의적 기원을 상징한다. 다른 식의 설계안들을 물리치고, 그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영웅적 묘사나 심지어 그의 업적을 알리는 말들도 의도적으로 피한 그 기념탑은 완전히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링컨 기념관은 걱정과 고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링컨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전쟁의 고통과 비극적 상실을 상기시키며, 인간의 평등과 정중한 정치적 합의를 얻기 위한 지속적인 투쟁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베트남전 참전용사 추모비는 국가의 최고의 헌신을 상징하는 지점과 국가의 가장 심각한 상실을 상징하는 지점을 모두 가리킨다.
— p. 445~446
처칠처럼 루스벨트는 두려움이 근거 있고 합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당대의 문제들을 어두운 마음으로, 그러나 정직하고 상세하게 열거한다. 동시에 그는 그 문제들이 "다행스럽게도 물질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넘어서는 방법을 보여준다. 연설의 요지는 자신감과 단합이었지만, 주요 하위 주제의 하나는 책임을 따지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경제 제도 자체가, 사실상 전반적으로 민주적인 삶의 방식이 현재의 위기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근심 어린 질문에 답한다. 사회주의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연설은 끝에서 이렇게 결론 내린다. "우리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미래를 불신하지 않습니다. 미국 국민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시작 부분에서 루스벨트는, 미국인들과 그들의 유서 깊은 전통에는 "실질적인 실패"도 없고 결점도 없다고 주장한다. 포괄적 동정심은 미국 그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생각에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그는 급진적 변화가 아니라, 미국이 스스로에게 충실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수정들로 이루어지는 개혁을 제안한다.
— p. 507
시기심은 민주주의가 존재한 이래로 민주주의를 위협해왔다. 절대군주제하에서는 사람들의 가능성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고, 사람들 운명 또는 성스러운 정의가 그들을 지금 처해 있는 그 자리에 놓았다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해진 질서와 운명을 꺼리고 유동성과 경쟁을 지지하는 사회는 다른 사람들의 번영에 대한 시기심에 문을 열어두게 된다. 시기심이 지나치게 확산되면 사회 정의를 위협할 수 있다. 어떤 사회가 모든 사람의 복지라는 기준점을 보호하기 위해 물질적 재분재를 약속했을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시기심은 다른 사람의 행운이나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 스스로의 상황과 다른 사람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비교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거기에는 경쟁자가 개입되며, 중요하게 평가되는 어떤 좋은 것들이 개입된다. 시기하는 사람은 경쟁자가 좋은 것들을 갖고 있고 자신은 갖고 있지 않아서 고통받는다. 그 좋은 것들은, 우리가 추상적이고 초연한 방식을 취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중차대한 행복감에 얽매일 때 틀림없이 중요해 보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기심은 운 좋은 경쟁자에 대한 어떤 적대감을 내포한다. 시기하는 사람은 경쟁자가 갖고 있는 것을 원하며, 결과적으로 그 경쟁자에게 악의를 느낀다. 그리하여 시기심은 사회 한복판에 적대감과 긴장감을 끌어들이며, 궁극적으로 사회가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한다. 행복에 대한 판단이 맥락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고 광범위한 많은 사회에서 이것이 사실이라는 게 매우 분명하고 또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만큼, 시기심은 공통의 경험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며, 사회 불안의 원이 될 만하다.
시기심은 질투심과 유사하다. 둘 다 가치 있는 어떤 것의 소유나 향유와 관련해 경쟁자에 대한 적대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투심은 일반적으로 어떤 적대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투심은 일반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패배와 관련돼 있고, 따라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과 가장 소중한 관계들을 보호하는 것과 관련돼 있다. 질투심은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보이는 경쟁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질투심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손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과 관련 있다. 질투심의 원형은, 그리고 아마도 질투심의 기원은, 부모 중 한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얻기 위해 부모 중 나머지 한 사람과 벌이는 경쟁일 것이다. 형제 간의 경쟁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원형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기심은 바라는 상태를 소유했는지 소유하지 못했는지가 중심이 된다. 시기심은 좋은 것의 부재에 초점을 맞추며, 좋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은 간접적이다. 경쟁자는 좋은 것들 그 자체보다 덜 중요하다. 사실 경쟁자는 시기하는 사람에게 결여된 이점을 누리고 있다는 점 때문에 적대적인 시선을 받는 것이다.
— p. 527~528
시기심이 적대적으로 터져나올 만한 조건은 어떤 것일까? 롤스는 세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는 심리적인 것으로, "자신의 가치관과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이루어내는 능력"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결여한 경우다. 둘째는 사회적인 것이다. 사회생활의 조건들이 시기심을 낳는 차이를 매우 눈에 띄게 만드는 만큼, 그 심리적 조건이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것으로 경험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하는 경우다. 셋째, 시기심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적대감 말고는 어떤 생산적인 대안도 스스로에게 제공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경우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뿐이다.
— p. 533
수치심은 어떤 점에서는 죄의식과 유사하다. 그 둘은 자아를 겨냥한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우리는 이 단어들을 곧잘 혼용한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중요한 개념적 차이가 있다. 죄책감은 회고적이며, 어떤 행동과 관련돼 있다. 수치심은 자아의 현재 상태를 겨냥한 것이며, 어떤 특성과 관련돼 있다. 죄의식의 경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잘못된 뭔가를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수치심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바람직한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뭔가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죄의식이 자연스러운 반사 행동은 사죄와 배상이다. 수치심의 자연스러운 반사 행동은 숨기기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죄의식이 건설적인 미래를 제시하는 데 반해, 수치심은 종종 어떤 건설적인 진단도 내놓지 못한다. 때때로 사람은 부적절함을 인식해 그것을 수정하기로 결심할 수 있지만,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는 동기가 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변경할 수 없는 한 부분인 경우가 많다.
심리학은 수치심의 근원을 매우 이르게 유아기에서 찾는다. 두려움과 함께 수치심은 가장 이른 시기에 발생하는 감정 중 하나다. 그것은 무력하므이 엄청난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 보이는데, 이는 태아와 엄마의 몸이 공생하는 출생 전 시기처럼 전능함이나 완전함을 느끼는 시기와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유아들은 종종 출생 이전에 경험했던 것과 같은 더없이 행복한 충만함이나 완전함 같은 것을 경험한다. 하지만 많은 시간 유아들은 그러한 것의 부재를 경험하며, 결핍된 것을 공급할 능력이 없다. 한편 유아들은 생활 주기상, 또는 부모의 관심에 의해, 자신이 전능하며 우주의 중심이라고 느끼도록 자극된다. 하지만 도잇에 유아들은 자신기 갈망하는 더없는 행복을 유발하기에는 스스로 육체적으로 무력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수치심은 포괄적 동정심을 여러 양상으로 방해한다. 첫재,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서, 수치심은 사람들을 서로 적대적인 집단으로 갈라놓는다. 하지만 적대감이 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수치심은 두 파벌 간의 불화 같은 게 아니다. 왜냐하면 수치심은 사람들의 자아에 대한 의식의 핵심에 타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내가 휘그당원이고 휘그당과 토리당이 서로 격하게 싸우고 있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두 당의 사람들은 계속 스스로와 상대방을 평등하고 유용한 시민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수치심은 수치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고프먼이 "훼손당한 정체성이"이라 부르는 것, 즉 심리적으로 완전한 자존감의 결핍으로 느껴질 만한 위축된 상태를 부여한다. 하지만 수치심을 갖게 된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때조차, 그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모욕당한 상태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수치심의 변동성을 고려하면, 다른 사람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사람 편에는 많은 근심과 불안이 있을 것 같고, 이 또한 완전한 자존감을 저해할 수 있다.
— p. 559, 561, 563
마치니, 콩트를 비롯한 "시민 종교"의 지지자들은 자기네 과업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았다. 그들이 생각한 대로라면, 그들이 모든 인간을 아우르는 확장된 공감을 일으키기만 하면 이기심은 없어지기 마련이었다. 밀과 타고르는 좀 더 심도 있게 보아,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과, 어떤 사람의 효용을 다른 사람의 효용과 겨루게 하는 "매우 불완전한 상태의 세계 배치"라고 보았다. 아마도 모든 것을 가장 심층적으로 봤을 타고르에게는 "불완전한" 상황 그 자체가 규범적으로 가치 있었다. 모든 사랑은 개인들의 특별한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고, 따라서 품위 있는 사회는 공평하지 않은 애착을,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당연히 온 마음을 다해 공동선을 지지하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을 증진시키려는 경쟁을 항상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논의는 타고르의 의견에 동의해, 우리가 사랑 그 자체를 근절하지 않는 한, 또한 사회가 선을 위해 쏟는 에너지를 사회로부터 박탈하지 않는 한, 자기중심주의를 근절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자기중심주의가 남아 있다면,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어느 품위 있는 사회의 제도에 의해 칭송되고 가치 있게 여겨진다면, 사람들의 공동선에의 헌신을 약화시키는 두려움이나 시기심 같은 감정을 느낄 이유가 항상 존재하게 될 것이다. 대개 사회는 혐오감 없이도 굴러갈 수 있을 것이다. 그 감정은 긍정적인 선의 자원들과는 단절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심지어 특정 범주의 사람들을 강력히 비난하는 유형의 수치심 없이도 굴러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수치심은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들의 사회가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을 성취하도록 박차를 가하는 좀 더 건설적인 수치심에 본질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한 두려움은 빼놓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위험한 세상에서 두려움은 사람들을 분리시키고 많은 건설적인 활동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우리가 논한 바와 같이, 시기심 또한 남아 있어야 한다. 경쟁과 경쟁의 대상인 '좋은 것'에 대한 관심은 좋은 사회가 영원히 에너지를 잃지 않는 한 막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 p. 581~582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정치는 변했다. 박애 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군주에 대한 두려움과 그의 전횡에 대한 복종으로는 더 이상 사람들이 한데 뭉칠 수 없었다. 시민들은 서로 협력해 새로운 삶의 방식들을 생각해내야 했다. 어떤 성공적인 국가라도 공동선을 위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가능해야 하므로, 시민들은 군주의 강제가 없는 상태에서 희생과 공동의 노력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따져봐야 했다. 그리하여 일종의 "시민 종교" 또는 "사람의 종교"를 위한 제안이 많이 생겨났는데, 말하자면 그 종교는 국방에서 자선 사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가치 있는 활동들을 촉직할 수 있는 대중의 공감, 사랑, 배려를 함양하는 것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국가들이 생겨나면서, 비유럽적 사고가 이러한 아이디어들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했다.
1부에서는 역사를 통해서 그런 기획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살펴보았다. 시민 감정에 대한 생각은 금세 둘로 갈라졌다. 두 갈래 전통 모두 광범위한 공감을 추구하고 편협한 이기심과 탐욕을 반대했다. 하지만 루소와 콩트로 대표되는 전통은 감정적 효과에는 강제적 동질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 전통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비판의 자유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감정적 연대를 위한 제안들을 내놓았다. 반대와 비판에 대한 이런 관심 부족은 당연히, 그들이 갈망하는 정치적 사랑의 형태에 영향을 미쳤다. 루소와 콩트의 사랑은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 대한 사랑처럼 변덕스럽고 개인적이지 않다. 그 대신에, 똑같이 사랑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공적 감정들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데 모든 것이 맞춰진다.
한편, 모차르트와 다 폰테, 밀, 타고르는 광범위한 공감의 필요성에 대해 루소, 콩트와 생각을 같이했다. 하지만 그들은 훨씬 더 다채롭게, 심지어 도덕률 폐기론적으로 이 공감을 생각했다. 서정시, 반체제적 음악, 그리고 심지어 코미디에서 새로운 정치적 사랑에 대한 그들의 은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 p. 586~587
가장 중요한 것은, 비판 정신을 보호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의 핵심 가치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냉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좋은 사회는 모두,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인종주의는 나쁘고 평등한 존중으 ㄴ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자들의 자유로운 언론이 보호되는 한, 그 명확성에 대한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대의 자유는 사회의 가장 소중한 목적과 목표를 겨냥하는 열정적인 수식어로 인해 위험에 처하지는 않는다. 반대자들은 자유롭게 이러한 목표들과 겨룰 수 있다. 한편, 어떤 감정이 됐든 자기가 소집할 수 있는 감정적 후원에 힘입어 그 목표들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회에 대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 603
그런데 우리는 어재서 사랑이 정의에 중요한가에 대한 답을 아직 얻지 못했다. 우리가 상상한 공적 감정들은 단지 공정한 사회가 목표를 달성하고 달성된 목표를 안정화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일 뿐인가? 아니면, 시민들의 실제 삶에서 실현되는 것으로서, 사회가 이루려 애쓰는 목표의 일부인가? 달리 말해서, 우리가 정치적 목표들을 일단 이루었고, 미래에도 그 상태가 안정적으로 지속되리라는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가졌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정치적 사랑이 필요하지 않게 될까? 원칙 의존적인 요소들뿐만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부분도 포함하는 감정의 관여 없이는 사실상 안정성이 확보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긴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연구의 중심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스위스 군용 칼처럼 그저 매우 유용한 무엇인가? 아니면, 그것 없이는 우리의 공적 삶이 불완전해질 만큼 뚜렷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닌 무엇인가? 「피가로의 결혼」의 결말에서는 코러스가 "오직 사랑"만이 자신들의 시절을 행복으로 마감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사랑이 일단 행복을 성취한 뒤에는 내던쳐버리는 사다리 같은 것인가? 아니면, 사랑은 우리가 행복으로 인정해야 하는 어떤 행복의 일부분인가?
— p. 605~606
그렇다면 우리가 묻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질문해보자. 우리가 진보적 뉴딜의 겉모습을 취한 '신체 강탈자'들로 이루어진 사회를 가졌다고 상상해보라. 그 사람들은 우리가 희망하는 모든 이타적인 일을 하고, 실제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한 것과 같은 행동을 통해 국가의 제도들을 유지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사람의 껍데기일 뿐, 마음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이제 우리가 첫 번째로 하려는 말은 당연히, 이 책이 취한 접근법은 항상 실제로 느끼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충분히 많은 경우에 충분히 많은 사람이 충분히 느끼기를 바랄 뿐이고, 심지어 정확한 측정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 어떤 사람들은 베트남 참전용사 추모비를 보고도 감동하지 않을 것이고, 밀레니엄 파크 등등을 즐겁게 돌아다니지도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민적 삶에서 특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신체 강탈자(그저 시늉만 하는)를 닮았다. 감정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무기력함과 무관심함은 호주머니에 넣어둔다. 게다가 사랑에는 많은 형태가 있고, 따라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단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일군의 감정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공적 감정에 대한 그런 신체 강탈 개념은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서로를 보살피는 시늉만 하지 않는 문화를 원하는 강력한 이유가 있는 본질적인 가치에 도달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것은 그것보다 현실적이어야 하며, 아니면 사리사욕의 힘이 더 커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는 실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론적인 것이다.
여전히 그것은 중요해 보인다. 이상들은 현실적이다. 설령 우리가 이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상이 우리의 탐색을 이끈다. 그러니 좋은 시민에 대한 우리의 이상은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시민이란 나무랄 데 없이 바른 행동을 하는 신체 강탈자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진정한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인가?
— p. 609~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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