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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너무 다기망양(多岐亡羊)하게 독서를 한다고 느껴 찾은 책이다. 만성적인 야근에 시달리면서도—요새는 일상패턴이 정돈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차마 이 얇은 책 한 권은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절반 가량은 희극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기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활자를 '본' 것 같은 느낌마저 들지만 말이다.
몇 주만에 칼퇴를 기대했던 이번 금요일도 여지 없이 계획에 없던 업무들이 쏟아졌고, 업무를 서둘러 마무리한다고 했는데도 지하철역에서 내리니 이미 10시가 되어 있었다. 건조하다 못해 감쪽같이 증발해버릴 것 같은 일상에 어떻게 해서든 숨통을 틔어야 할 것 같았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씨에 카페에 들어갔지만 이미 카페인은 충분한 상태였기에 와인을 한잔 주문했다.
<햄릿>은 이미 일전에 읽었던 책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는 명대사가 여기서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로 풀이된다. To be, or not to be라는 원문을 옮기는 작업은 이리 재나 저리 재나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뭔가 내 마음을 더욱 후벼팠던 대사는 난 북북서로 미쳤을 뿐이야 였지만.
인간사가 신들의 운명에 의해 결정되던 옛 문학의 허물을 벗겨내고, 인간의 내적갈등이 빚어내는 이야기 전개를 비로소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셰익스피어. 그의 책은 초등학교 어릴 적 희극도 읽어보고 비극도 읽어보고, 또한 어른이 된 뒤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연극도 여럿 찾아 보았지만, 그냥 뭐라 할지..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다. 나는 동시대 작품으로 올수록 더욱 재미를 느끼는 편이다. 그럼에도 대기중에 꽉차 있는 산소처럼,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문학에서 셰익스피어가 지니는 무게감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을 집어들었다. 어쩌면 사정없이 펀치를 날리는 세상속에서 무게추를 단단히 잡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무게중심은 아직 잡지도 못했는데, 마음은 벌써 너무 무겁기만 한 요즈음이다.
진정으로 위대함은 큰 명분이 있고서야 행동하는 게 아니라, 명예가 걸렸을 땐 지푸라기 하나에도 큰 싸움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럼 난 어떤가?
폴로니어스) 요 몇 가지 교훈을 네 기억에 새겨둬라 / 네 생각을 발설하지 말아라 / 절도 없는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도 말고 / 친절하되 절대로 천박해지면 안 된다 / 있는 친구들은 겪어보고 받아들였으면 / 그들을 네 영혼에 쇠고리로 잡아매라 / 허나 신출내기 철없는 허세꾼들 / 모두를 환대하느라 손바닥이 무뎌지면 안 된다 / 싸움에 낄까 조심해라. 허나 끼게 되면 / 상대방이 널 알아모시도록 행동해라 / 귀는 모두에게, 입은 소수에게만 열고 / 모든 의견을 수용하되 판단은 보류해라
— 1막 제3장 55행
햄릿) 난 북북서로 미쳤을 뿐이야. 바람이 남쪽으로 불면, 뭐가 발인지 톱인지 분간할 수 있다고.
— 2막 제2장 388행
햄릿)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 끝장을 내는 건가. 죽는건 ——자는 것뿐일지니 / 잠 한번에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끝난다 말하면 / 그건 간절히 바라야 할 결말이다 / 죽는 건, 자는 것. 자는 건 / 꿈꾸는 것일지도 ——아, 그게 걸림돌이다 / 왜냐하면 죽음의 잠 속에서 무슨 꿈이 / 우리가 이 삶의 뒤엉킴을 떨쳤을 때 / 찾아올지 생각하면, 우린 멈출 수밖에—— / 그게 바로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로다 / 왜냐면 누가 이 세상의 채찍과 비웃음, / 압제자의 잘못, 잘난 자의 불손, / 경멸받는 사랑의 고통, 법률의 늑장, / 관리들의 무례함, 참을성 있는 양반들이 / 쓸모없는 자들에게 당하는 발길질을 견딜 건가? / 단 한 자루 단검이면 자신을 / 청산할 수 있을진대. 누가 짐을 지고 / 지겨운 한 세상을 투덜대며 땀흘릴까? / 국경에서 그 어떤 나그네도 못 돌아온 / 미지의 나라, 죽음 후의 무언가에 대한 / 두려움이 의지력을 교란하고, 우리가 / 모르는 재난으로 날아가느니, 우리가 / 아는 재난을 견디게끔 만들지 않는다면? / 그리하여 양심 때문에 우리들 모두는 / 비겁자가 되어버리고, 그럼에 따라 / 결심의 붉은빛은 창백한 생각으로 / 병들어 버리고, 천하의 웅대한 계획도 / 흐름이 끊기면서 행동이란 이름을 잃어버린다.
— 3막 제1장 56행
햄릿) 광증이요? / 제 맥박은 어머니 맥박처럼 박자 맞춰 / 건강하게 노래해요. 제가 발설한 건 / 미친 말이 아닙니다. 시험해 보세요, / 그 내용을 다시 말할 테니. 미쳤다면 / 헛갈릴 겁니다. 어머니, 은총에 맹세코, / 자기 죄는 조용한데 제 광기가 떠든다는 / 아첨 같은 고약을 영혼에 바르진 마세요. / 그건 단지 곪을 데를 막 씌울 뿐이며, / 썩은 고름은 밑으로 파고들어 / 안보이게 퍼집니다. 하늘에게 고백해요. / 지난 일은 튀우치고 앞일은 피하세요. / 그리고 잡초에 퇴비를 뿌려 더욱더 무성하게 / 만들진 마시고. 제 덕행을 용서하세요. / 왜냐면 바람들어 띵띵해진 이 시절엔 / 미덕이 몸소 악덕에게 용서를 빌고, 예, / 잘해 줘도 좋다는 허락을 간구한답니다.
—3막 제4장 141행
햄릿) 모든 일이 사사건건 얼마나 날 꾸짖고 / 내 둔한 복수심을 찌르는가. / 인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을 판 주소득이 먹고 / 자는 것뿐이라면, 짐승 이상은 아니다. / 우리에게 그렇게 넓은, 앞뒤를 내다보는 / 사고력을 넣어주신 분께서, 그 능력과 / 신과 같은 이성을 쓰지 않고 썩이라고 주신 건 / 분명코 아니다. 헌데 이 무슨 / 짐승 같은 망각인지, 혹은 결과를 너무 / 꼼꼼하게 생각하는 비겁한 망설임인지 —— / 그 생각을 쪼개봤자, 반에 반만 지혜이고 / 나머지는 비겁함이겠지만——난 내가 왜 / 이건 하리라고 살아 말하는지 모르겠다, / 해치울 명분과 의지, 힘과 수단이 있음에도. / 흙처럼 흔한 예가 날 훈계한다. / 그 증거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왕자가 이끄는 / 이 대규모 호화판 군대를 보라. / 그의 마음은 하늘 같은 야심으로 부풀어 / 예측 못할 결과 따윈 코웃음치면서, / 죽기 쉽고 불확실한 목숨을 / 게딱지만한 땅 때문에, 온갖 운명과 / 사망과 위험에 내맡긴다. 진정으로 위대함은 / 큰 명분이 있고서야 행동하는 게 아니라, / 명예가 걸렸을 땐 지푸라기 하나에도 / 큰 싸움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럼 난 어떤가?
—4막 제4장 32행
왕) 사랑의 발단은 시간임을 알며, / 그 불꽃과 열기도 시간 가면 줄어듦을 / 실제 증거를 통하여 보았기 때문이다. / 사랑의 불길 속엔 그것을 약화시키는 / 일종의 심지나 검댕이 자라는 법이며 / 언제나 꼭같이 좋은 것도 없는 법이다. / 왜냐하면 좋은 것도 넘치면 홧병처럼 / 제품에 죽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픈 일 / 하고플 때 해야 돼. 왜냐면 <하고픔>은 / 말이 많고 손이 많고 사건이 많은 만큼 / 변하고 줄어들고 지연되며, <해야 됨>도 / 한숨이 피 말리는 것처럼, 누그러지면서 / 우리를 해치니까.
—4막 제7장 111행
알렉산더는 죽었다. 알렉산더는 묻혔다. 알렉산더는 가루로 변한다. 가루는 흙이고, 그 흙으로 우리가 회반죽을 만든다면 왜 그의 변신인 회반죽으로 맥주통을 못 막지?
시저 황제, 그도 죽어 진흙으로 돌아가면 / 병 아가리 바람마개 되는 수도 있는 거다. / 아, 세상을 떨게 하던 그 흙덩어리 몸뚱이가 / 겨울 바람 쫓으려고 벽 구멍을 때우다니.
—5막 제1장 206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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