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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놓은지가 좀 된 책이다. 가끔은 인문학만 들여다보는 것 같아 과학서적 코너를 서성인다. 과학에도 여러 주제가 있지만, 요 근래에는 뇌인지학이나 우주와 관련된 서적이 많이 깔려 있는 듯하다. <뷰티풀 퀘스천>이라는 꽤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책은, 처음에는 생물학과 화학, 물리학을 총망라하는 다양한 질문이 다뤄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의외로 단출한 질문 하나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세계는 아름다운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규명(糾明)하기 위한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꾸준히 이루어져 왔고, 오늘날에는 뉴턴이 초석을 닦아 놓은 고전물리학 위에 아인슈타인 이래로 발달한 양자역학이 꼭 들어맞게끔 포개어졌다.
책을 읽으면서 기시감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주제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카를로 로벨리의<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차이라고 한다면 <뷰티풀 퀘스천>에 보다 풍성하게 삽화가 실려 있고, 다양한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곁들여져 있어 좀 더 흡입력이 있다는 정도. 덕분에 물리학 일반을 복습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이 거론되는 파트부터는 헤매기 시작했다. 원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것은 다시금 알겠지만, 이러한 명제를 도출하는 수학적 사고와 논리까지는 아무래도 따라가기가 버겁다. 고등학교 수학에서 허수(虛數)를 다룰 때 등장했던 복소수라는 녀석이나 그라스만 수 등 아련했던 수학적 개념이과 생소한 수리(數理)를 접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아름다운 질문(Beautiful Question). 세상을 읽어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늘 궁금한 것 중 하나는 현대물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읽어낼까 하는 부분이다. 인문학적인 사고에 길들여진 나는 그저 확률구름(probability cloud) 같은 얘기를 들으면, 어떠한 사건도 0이 아닌 어떠한 값을 가지고 있고, 이를 구하기 위한 파동함수 또한 확정(確定)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두근거림 같은 것을 느낀다. 정지해 있는 듯한 것 안에서도 어떠한 역학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는 반면, 역동적인 것은 정형화된 규칙 속에 자리잡고 있을 수 있고, 또한 내가 한 걸음씩 내딛으며 앞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동안에도 시공간은 쉴틈없이 변화하면서도 평형상태에 있다. 변화 없는 변화. 저자가 말하는 그러한 대칭적 세계 속에서 테러와 전쟁이 일어나고, 때로는 주식이 폭락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납득해야 하는 것일까. 저자의 의도대로 머릿속에 뷰티풀 퀘스천을 던져본다.
이 책은 ‘하나의 질문에 대한 긴 고찰’로 요약된다.
이 세계에는 아름다운 사고가 깃들어 있는가?
다소 생소한 질문이다. 물리적 객체와 사고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고(idea)’가 ‘깃든다(embody)’는 건 과연 무슨 뜻일까?
자신의 사고를 대상물에 투영하는 것은 주로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다. 예술가는 관념적인 사고에서 출발하여 물리적 객체(또는 악보와 같은 준-물리적 결과물)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름다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꿔 쓸 수 있다.
이 세계는 하나의 예술 작품인가?
이렇게 질문을 바꾸면 다른 질문이 연달아 떠오른다. 이 세계가 예술 작품이라면 그것은 과연 성공적인 작품인가? 물리적 세계는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아름다운 면을 갖고 있는가? 물리적 세계에 관한 지식은 과학자의 연구를 통해 축적되지만 앞서 제시한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예술가의 심미안도 필요하다.
— p. 23~24
네 개의 힘(중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을 설명하는 코어이론의 중심에는 국소대칭(local symmetry)이라는 원리가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국소대칭원리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이 열성적으로 추구했던 ‘조화’와 ‘개념적 순수함’을 곳곳에 간직하고 있으며, 가끔은 그것을 초월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 원리는 브루넬레스키의 예술적 기하학과 천연 색채에 대한 뉴턴과 맥스웰의 통찰을 기반으로 하면서 이것마저도 초월해 낸다.
— p. 33
일단 a와 c가 모두 짝수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각 변의 길이가 원래의 절반인 직각이등변삼각형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크기를 또 반으로 줄이고 ···이 과정은 a와 c 중 적어도 하나가 홀수가 될 때까지 반복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반으로 줄이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곧바로 모순에 도달한다.
c가 홀수인 경우부터 살펴보자. c가 홀수면 도 홀수이다. 그러나 2×a^2은 앞에 2가 곱해져 있으므로 무조건 짝수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짝수와 홀수는 절대 같을 수 없으므로, 2×a^2=c^2이라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당장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이번에는 c가 짝수라고 가정해보자. c=2×p로 쓸 수 있고 c^2=4×p^2이므로 피타고라스의 정리에서 양변을 2로 나누면 a^2=2×p^2이 된다. 즉 a^2은 짝수이므로 a도 짝수여야 한다. 또다시 모순에 직면했다! 왜냐고? 앞에서 우리는 삼각형을 계속 반으로 줄여서 a와 c 중 적어도 하나를 홀수로 만들어 놓았는데, ‘c가 짝수면 a도 짝수여야 한다’는 결과가 얻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정수일 수는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길이가 '특정 원자의 길이의 정수 배'로 표현되는, 그런 원자(atom)는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 p. 53
피타고라스의 두 번째 규칙은 끈의 장력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줄의 한쪽 끝에 무게가 다양한 추를 매달아서 장력을 수시로 바꿔가며 줄을 퉁기는 실험을 하다가 이전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줄을 길이를 조절하던 실험에서는 줄의 길이가 간단한 정수 비율일 때 듣기 좋은 화음이 생성된 반면, 줄의 장력을 조절하는 실험에서는 장력의 비율이 작은 정수의 제곱 비율일 때 듣기 좋은 화음이 생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연주자는 줄 끝에 달려 있는 나사를 조이거나 풀 때마다 피타고라스를 소환하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 규칙이 첫 번째 규칙보다 인상적인 이유는 자연에 있는 숫자가 그대로 반영되지 않고 가공 단계를 거쳐(줄의 경우에는 ‘제곱되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숫자가 자연 속에 더욱 교묘한 형태로 숨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한 무게는 길이보다 더욱 근본적인 물질의 속성이므로, 물질세계(무게)와 정신(화성을 느끼는 감각)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 p. 59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예상에서 벗어나는가? 아마도 주 신호가 완전히 동떨어진 경우보다 완벽한 조화에서 조금 벗어난 경우에 훨씬 큰 불쾌감을 느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몇 번의 주기가 반복되는 동안 진동이 잠시 보강되기 때문에 고단계 뉴런이 ‘조화로운 후속 신호’를 예상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예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예를 들면 피아노의 C와 건반을 동시에 눌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마도 C와 (또는 반음 차이가 나는 모든 건반들)은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최악의 조합일 것이다.
우리의 논리가 옳다면 화성의 기초는 인식 초기 단계부터 예측 가능하다. 우리는 예측이 맞아떨어질 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예측에서 벗어나면 불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반복 학습을 통해 이 경험을 확장하면 과거에 들을 수 없었던 화음을 인지하고 불쾌감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다.
— p. 66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해방이 ‘배움과 투쟁의 과정’임을 강조했다. 이것은 바깥 세상에 대한 관용과 금욕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잇다는 대중의 관념과 많이 다르다.
해방이라는 것이 숨은 실체와의 투쟁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무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여기에는 내면을 통한 길과 바깥 세계를 통한 길, 두 가지가 있다.
내면의 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을 비판적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표면에 덮인 찌꺼기를 덜어냄으로써 이상형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철학과 형이상학이 여기에 속한다.
바깥 세계를 통한 길은 사물의 복잡한 외형을 벗겨내 그 그 안에 숨어 있는 정수(精髓)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과학과 물리학이 여기에 속한다.
— p. 97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플라톤은 정확성과 타협을 보았다. (사실은 포기했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외면했고, 결국 자신의 이론에 확신이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되었다. 게다가 플라톤의 제자들은 스승의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당시 전쟁과 가난 질병에 시달리면서 고대 그리스 문명이 와해되고 있었으므로 현실도피적인 사조가 널리 퍼진 것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플라톤의 제자이자 경쟁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몇 가지 면에서 좀 더 현실에 가까운 철학자였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다양한 생물 표본을 수집하여 주도면밀하게 관측했고 그 결과를 매우 자세하고 정직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부터 복잡한 대상을 파고들었기 때문에 기하학과 천문학에 숨어 있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기하학과 천문학에 숨어 있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놓치고 말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투박한 현실에서 굳이 수학적 이상형을 찾지 않았으며, 찾을 가능성도 없었다.
— p. 103
현대물리학의 핵심은 앞에 서술한 네 가지 개념(상대성, 대칭성, 불변성, 상보성)으로 요약된다.
— p. 113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는 국소적인 지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면, 하늘을 나는 새는 국소적 정보보다 전체적인 조망을 통해 갈 길을 판단한다. 하늘을 보며 기어가는 개미는 구덩이에 빠지고, 땅 위의 세세한 지형에 신경 쓰면서 날아가는 새는 절벽에 부딪힐 것이다. ‘정확성’과 ‘목표’도 이와 비슷한 대립관계에 있다. 정확성을 추구하면 오직 진실만 말해야 하고, 과학의 궁극적 목표를 추구한다면 할 말이 매우 많아진다.
— p. 116
-화학원소와 달리 빛의 주기율표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구현할 수 있다. 태양빛이나 임의의 발광체에서 방출된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맞은편 스크린에 무지개 무늬가 맺힌다. 그러나 화학원소의 주기율표는 실험이 아닌 사고(思考)의 산물이다.
-빛의 주기율표는 연속적이지만 화학원소의 주기율표는 불연속적이다.
-빛의 구성 입자들끼리는 상호작용의 세기가 매우 약하다. 실제로 두 줄기의 빛을 교차시키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불꽃이 일어나지 않고 부산물이 남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빛의 구성성분은 화학 주기율표의 ‘불활성기체’와 비슷하다.
— p. 137
빛의 입자설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갖고 있다. 뉴턴은 빛의 파동설보다 입자설을 선호했지만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빛의 파동설이 대세로 굳어진 20세기 초에 입자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뉴턴의 명성 덕분이었다. 19세기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전자기학으로 빛의 근원을 설명한 후로, 빛의 파동이론은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빛의 입자설은 ‘광자’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재기했고 결국 ‘빛은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상보적 결론에 도달했다. 18세기에 탄생한 뉴턴의 입자설이 20세기 상보성원리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 p. 138
뉴턴이 구축한 고전물리학은 역학법칙(dynamical law)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뉴턴의 물리학은 ‘변하는 물체’를 서술하는 이론이다. 역학법칙은 기하학의 법칙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물체의 특성과 물체들 사이의 관계를 서술하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법칙과도 다르다.
역학법칙은 우리를 아름다움의 세계로 인도한다. 뉴턴역학의 진수를 이해하려면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사건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사건까지 고려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뉴턴의 역학은 ‘가능성의 세계’이다.
— p. 141
1. 행성의 궤도는 원이 아닌 타원이며, 두 개의 초점 중 하나에 태양이 자리 잡고 있다.
2. 태양과 행성을 연결한 직선이 일정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간 면적은 항상 동일하다.
3. 행성의 주기[행성의 ‘연(year)’]를 제곱한 값은 타원의 장축 길이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 p. 142
중력법칙 같은 심오한 원리를 과연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떠올렸을까? 내 생각은 다소 부정적이다. 사과보다는 좀 더 시각적이고, 사례별 비교가 가능한 ‘뉴턴의 산’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 같다.
또는 사과에서 시작된 일련의 영감 어린 사고가 뉴턴의 산으로 꽃피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뉴턴의 아이디어는 매우 단순하고도 아름다워서 달이 공전하는 이유를 ‘지구가 달에 미치는 중력 때문’이라고 간주하면 외관상 전혀 다른 두 가지 운동이 하나로 연결된다. 지구에서 관측되는 중력은 주로 사과와 같은 일상적 물체가 지구의 중심을 향해 떨어지는 ‘낙하운동’으로만 나타나는 반면, 우주 공간의 중력은 달과 같은 천체의 ‘궤도운동’으로 나타난다. 낙하운동과 궤도운동이 동일한 원인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 p. 147
뉴턴의 분석-종합은 ‘환원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복잡한 물체나 어려운 문제가 단순한 부분으로 분할 가능하고 각 부분의 거동으로부터 전체적인 거동을 유추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그 물체나 문제가 “환원되었다(reduced)”고 말한다.
사실 환원주의는 그다지 좋은 명칭이 아니다. 환원주의라는 단어 자체의 어감도 별로 좋지 않지만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환원적 접근법이란 ‘분석-종합을 통해 주어진 문제를 단순화시켜서 이해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관찰 대상은 작은 부분의 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생명이 없는 물건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인간의 마음과 심성, 심지어 영혼까지 분자의 화학작용으로 설명된다고 하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 p. 156
행복한 사람이란 오늘 하는 일이 자신의 인생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영원의 작업을 구현하는 사람이다. 그는 무한대의 일부가 되었기에 신념이 흔들리지 않으며, 현재를 완전히 소유하고 있기에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신성한 과정을 가능한 한, 비슷하게 흉내 내면서 유한과 무한을 결합하는 데 힘써야 한다. 단명할 존재라며 자신을 가볍게 여겨도 안 되고, 시간의 신비를 영원히 밝히지 못할 것이라며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 p. 218~219
갈릴레이의 설명은 일종의 대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세상(또는 세상의 일부, 가령, 커다란 배의 객실)을 ‘모든 만물이 똑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세상’으로 바꿔도 물체의 거동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변환을 갈릴레이변환(Galilean transformation)이라 한다. 그리고 이 변환에서 나타나는 대칭을 갈릴레이대칭 또는 갈릴레이불변량( Galilean invariance)이라 한다.
갈릴레이대칭에 의하면 우주 만물의 현재 속도에 똑 같은 속도를 일괄적으로 더해도 우주는 여전히 동일한 물리법칙을 따른다. 우주에 갈릴레이변환을 가하면 모든 물체의 속도가 똑 같은 양만큼 빨라지거나 느려지는데, 갈릴레이대칭에 의해 물리법칙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 p. 223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파격적인 가설을 내세우는 와중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그리고 필요가 없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만물의 이론’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뉴턴의 천체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통합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피타고라스의 과학적 모험 정신과 뉴턴의 빛이론, 그리고 맥스웰의 인식론을 이어받아 더욱 깊은 영역에서 진실의 패턴을 찾으려 했던 것뿐이다.
좋은 과학이 되려면 거대한 통합으로 가는 경우와 지엽적으로 파고드는 것이 유리한 경우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만물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설명하는 ‘무언가의 이론(theory of something)’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 p. 237
전자의 파동함수를 논하기 전에 ‘확률구름(probability cloud)’이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부터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파동함수와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으로, 파동함수만큼 근본적인 양은 아니지만 물리적 의미가 명확하여 이해하기 쉽다.
고전역학에서 입자는 특정 시간에 특정 공간(아주 작은 공간)을 점유하지만 양자역학에서 입자를 서술하는 방식은 고전역학과 완전 딴판이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입자는 특정 시간에 특정 공간을 점유하지 않고 전 공간에 걸쳐 확률구름이라는 형태로 골고루 퍼져 있다.
— p. 241
파동함수를 다루는 앞에서의 두 가지 과정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위치와 운동량을 묻는 두 개의 질문에 동시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명확한 답이 아닌 확률밖에 알 수 없다.
-파동함수를 직접 관측할 수는 없고 한 차례 수정을 거친 값(제곱한 값)만 알 수 있다.
-각기 다른 질문에 답하려면 그에 알맞게 파동함수를 조작해야 한다.
이 세 가지 항목은 각기 중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첫 번째는 결정론(determinism)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정말로 확률을 계산하는 것뿐인가?
두 번째 문제는 다중세계(many world)와 관련되어 있다. 누군가가 들여다보기 전에(즉 관측을 하기 전에) 파동함수가 서술하는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인가? 실체를 거대하게 확장시킨 세상인가? 아니면 단지 마음이 만들어낸 도구에 불과한가?
세 번째는 상보성에 관한 문제다. 여러 개의 질문에 답하려면 상호 보완적이지 않은 파동함수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가공해야 한다. 그리고 양자역학의 기본원리에 의하면 두 개의 질문에 동시에 옳은 답을 줄 수 없다. 두 질문이 완벽하게 타당하면서 명확한 답을 갖고 있다 해도 두 개의 답을 동시에 제시할 수는 없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물었을 때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이다.
— p. 243~244
1. 행성과 별들은 질량, 크기, 구성 성분이 제각각이지만 모든 전자는 완벽하게 동일하다.
(동위원소는 핵에 포함되어 있는 중성자의 수가 다르지만 화학적 성질은 완전히 똑같다.)
2. 원자는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른다.
3. 원자는 항상 에너지에 굶주려 있다.
— p. 256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을 통하여 갈릴레이대칭(또는 갈릴레이불변량)을 ‘모든 물리법칙이 따라야 할 최고의 원리’로 격상시켰다. 그런데 맥스웰 방정식은 이 조건을 만족한 반면 뉴턴의 운동방정식은 만족하지 않았기에 아인슈타인은 고전역학에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물론 물체의 속도가 광속보다 훨씬 느린 경우 수정된 상대론적 역학은 뉴턴이 창안했던 원래의 고전역학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뉴턴의 중력이론은 상대론적 버전으로 바꾸기가 훨씬 어려웠다. 고전 중력이론은 질량이라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는데, 상대성 이론에서는 물체의 운동 상태에 따라 질량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일반상대성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을 통해 대칭의 위상을 한 단계 더 격상시켰다. 광역적으로(global) 존재하는 줄 알았던 갈릴레이대칭이 국소적(local)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광역 갈릴레이대칭(또는 광역 갈릴레이불변성)에 의하면 우주의 모든 물체에 속도를 일괄적으로 더하거나 빼도 물리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반면에 우주를 구서하는 각 부분마다(또는 각 시간대마다) 각기 다른 속도를 더하거나 빼면 물리법칙은 달라진다.
…국소 갈릴레이 대칭(또는 국소 갈릴레이불변성)은 물리법칙에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 변환의 종류가 광역대칭보다 훨씬 많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즉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속도를 더해도 물리법칙이 변하지 않는다는 가정이다. 언뜻 듣기에는 말도 안 되는 가정 같다. 방금 전에 이런 식의 변환은 물리법칙에 변화를 초래한다고 이미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을 확장하면 국소대칭이 존재하도록 만들 수 있다.
— p. 266~267
물질은 시공간이 어떻게 휘어져 있는지를 말해주고,
시공간은 물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말해준다.
…시공간은 어떻게 물질의 갈 길을 결정하는가?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공간이 물질에 하달한 운동 지침은 아주 간단하다. “가능한 한, 측지선(geodesic)을 따라가라!”
— p. 297
맥스웰 방정식과 양-밀스 방정식, 그리고 일반상대성이론에 등장하는 아인슈타인 방정식은 매개 입자의 질량이 한결같이 0이면서 미학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국소대칭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기력을 매개하는 광자와 강력을 매개하는 글루온, 그리고 중력을 매개하는 중력자는 모두 질량을 갖고 있지 않다. 자연을 일관성 있게 서술하면서 방정식이 아름다우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질량=0’인 입자를 기반으로 형성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몇 종류의 입자는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특히 약력을 매개하는 W입자와 Z입자는 질량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무겁다. (그래서 약력은 단거리, 저에너지에서 약하게 작용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광자는 자신이 헤쳐 나가는 매질의 특성에 따라 운동에 영향을 받는다. 빛이 유리나 물 속을 통과할 때 속도가 느려지는 현상도 그중 하나이다. 대충 비유하자면 광자가 관성을 획득한 것과 비슷하다. 또한 초전도체 안에서 광자의 거동을 서술하는 방정식은 ‘질량이 있는 입자’의 거동을 서술하는 방정식과 수학적으로 완전히 똑같다. 즉 광자 역시 초전도체 안에서 마치 질량이 있는 입자처럼 행동한다.
힉스 매커니즘의 기본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다. “텅 빈 공간(입자와 복사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은 W입자와 Z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매개 물질로 가득 차 있다.” 이 아이디어를 채용하면 무질량 입자를 서수라는 아름다운 방정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실에 부합되는 이론을 구축할 수 있다.
— p. 338~339
일반적을 대칭이란 ‘변화 없는 변화’를 의미한다. 수학적 대칭과 물리법칙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최초로 알아낸 사람은 독일 출신의 여성 수학자 에미 뇌터(Emmy Noether)였다. “X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 물리학자들은 “X는 보존된다”는 표현을 선호하는 편이다. 이 관례에 따르면 뇌터의 정리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물리법칙이 어떤 변환에 대하여 대칭적이면 그에 해당하는 보존량이 존재한다.”
이상형↔실체, 대칭→보존법칙
오늘 적용된 물리법칙은 과거와 미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 p. 354~355
-코어이론에는 세 종류의 비슷한 힘(강력, 약력, 전자기력)이 등장한다. 이들은 고유공간에 국소대칭이 존재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중력도 국소대칭을 갖고 있지만 종류가 다르다. 즉 중력은 국소 갈릴레이대칭을 갖고 있다. 게다가 중력은 다른 힘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약하다. 자연에 존재하는 네 종류의 힘들이 하나의 공통 대칭을 갖고 있다면 훨씬 만족스럽고 보기도 좋았을 것이다. 세 개(또는 네 개)는 분명히 한 개보다 많다. 그래서 우리는 궁극의 아름다움에 도달하지 못했다.
-고유공간에서 위치가 다른 입자들은 한 종류로 간주한다 해도 자연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는 여섯 종류나 된다. 여섯 개도 역시 한 개보다 많다.
-입자들이 세 개의 족(族)으로 존재하는 이유도 분명치 않다.
-코어이론에서는 힉스유동체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이론체 추가된 또 하나의 가동 부품일 뿐이다. 힉스유동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되었을 뿐, 이론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 p. 377
코어이론에서 ‘힘’과 관련된 부분은 글루온, 광자, 약력자, 그리고 힉스입자와 중력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다른 물체로부터 방출되거나 흡수될 수 있으며, 대체로 무리지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이와 같은 입자들은 ‘보손[boson, 인도 출신의 물리학자 사티엔드라 보스(Satyendra Bose)의 이름에서 따온 용어]’이라 한다.
— p. 392
일상적인 차원은 일상적인 숫자, 즉 ‘실수’로 표현된다. 공간상의 한 지점을 원점(origin)으로 설정한 후 임의의 점에 ‘원점까지의 거리’를 의미하는 실수를 할당하면 모든 공간을 표현할 수 있다. 거리를 측정하거나 연속체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는 실수는 곱셈의 교환법칙 xy=yx를 만족한다.
그러나 양자 차원에서는 ‘그라스만(Grassmann number)’라는 특이한 수가 사용된다. 이 수는 실수와 달리 곱하는 순서를 바꾸면 부호가 달라진다. xy=-yx. '-' 부호 하나만 붙었을 뿐인데,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로 나타난다! 특히 x=y면 x^2=-x^2이 되어 x^2=0이라는 희한한 결과가 얻어지는데, 이것은 양자 차원에서 “두 개의 객체는 동일한 (양자적) 위치를 점유할 수 없다”는 파울리의 배타원리로 해석할 수 있다.
— p. 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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