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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에서 본 세계사일상/book 2019. 11. 29. 00:44
처음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는 출판사 <까치>에서 나온 신간인 줄 알았다. 표지에 실린 삽화나 겉면의 재질이 꼭 <까치> 책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시선을 잡아끈 또 하나의 요인은 '인도양'이라는 키워드인데, 해양의 역사를 다루는 책은 더러 있지만 태평양, 대서양도 아닌 인도양을 다루는 책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저자 산지브 산얄은 역사도 아닌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이고, 옥스퍼드에서 수학(修學)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현재 인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도양이라는 글로벌한 지역을 묶어내기에는 다소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을 수 있겠다는 우려도 있었다. 어쨌든 이 진분홍 색깔의 책을 집어들고 구매를 결정하는 데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소 예상했던 대로 인도에 대해 자부심 섞인 저자의 관점이 일부 드러나기는 하지만—예를 들어 인도의 고대 신(神)이 여러 갈래로 전래되어 크리스마스로 정착했다는 에피소드가 그렇다—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는 책이다. 대륙이 아닌 해양 관점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균형있고, 부계사회와 모계사회를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도 균형이 있다. 또한 평소 접하기 어려운 인도사를 읽는다는 사실도 흥미로운데, 서인도양(아프리카와 중동 일대)과 동인도양(인도차이나 반도와 동남아 일대)의 역사를 두루 다룬다는 점도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목이다.
이런 식의 '뒤집어보기'는, 아주 자연스럽게도 기성의 역사관의 대척점에 서서 대안적인 역사관으로 귀결된다. 마치 서구가 세계의 문명화 사명을 띠고 앞장 서 왔다는 식의 단선적 역사관을 저자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모든 불확실성이 가득하고 상호연계성이 다양한 서사(敍事) 통째를 역사로 인식한다. 이러한 역사관은 비단 인도를 끈질기게 억압했던 서구 열강에 대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가령 산지브 산얄은 인도를 불교 아래 통합시켰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한다. 산지브 산얄은 아소카 대왕의 쌓은 치적은 근대 서구학자들에 의해 쌓아올려진 리더십 신화(결론적으로 서구의 헤게모니 장악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었던 논리)의 일부이며, 아소카 대왕이 인도사의 흐름에 악영향을 미친 측면이 있음을 기탄없이 지적한다.
러시아 인명(人名)이 독서하기에 가장 부담스러운 언어가 아닌가 했는데, 힌두어로 된 인명이나 지명도 쉽지가 않다. 각설하고 몇 권의 인도사를 읽고 나니 완벽한 통일왕국 또는 제국을 이뤄야만 현대국가의 역사로 편입되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도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는 무굴제국도 최남단을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오늘날 인도의 국경선과는 차이가 있다. 게다가 서파키스탄(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가 나뉘어 인도의 국경선은 한층 복잡해지고, 동일한 국경 안에서도 케랄라와 오디샤, 카르나타카처럼 저마다 고유의 색채를 지닌 지역들이 있다. 이런 완결되지 않은 듯 부유(浮遊)하고 있는 사회와 문화가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단일한 정통의 무언가가' 깃들어야 정체성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편견 때문에서인지도 모르겠다.
인도양 동부와 다를 바 없는 교류와 교역의 세계가 인도양 서부에서도 수천 년 동안 이어져왔다. 인도의 항구에는 수백 년 동안 아랍인, 페르시아인, 로마인, 그리스인, 그리고 유대인 상인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항구에서 출발한 인도의 상인들도 중동과 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했다. 그래서 페르시아만이든 동아프리카든 동남아시아든, 어디를 가나 대규모 인도인 공동체가 존재했다. 또한 반대로 가장 오래된 유대인 공동체가 인도 케랄라주에 있었다. 다만 최근에는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많이 이주하는 바람에 그 규모가 줄어드는 추세다. 이처럼 인도양 해안을 따라 오가는 사람들의 소용돌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리적 위치, 그리고 경제 및 문화적 무게 때문에 인도가 인도양의 세계에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도양 동부와 서부 사이의 교류 혹은 교역에 반드시 인도가 개입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아우트리거 보트를 타고 인도양을 곧바로 가로질러 건넜다. 6세기에서 9세기 사이 인류 최초로 마다가스카르를 개척한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의 후손은 지금도 마다가스카르에 살고 있다. 그들의 언어를 말라가시어라고 하는데, 오늘날 마다가스카르 공화국 공식 언어다. 언어학적 분석 결과, 말라가시어는 보르네오섬의 방언에서 파생된 언어임이 밝혀졌다.
—p.22~23
하라파 사람들이 동쪽과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그들의 기술과 문화도 전파되었다. 주류 역사학자들은 북서부 인도에서 남동부 지역으로, 그 뒤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문화가 일방적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주장이 오래도록 인도 역사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으나, 완전히 잘못된 선입관이다. 실제로 다른 지역에도 이미 정착지가 건설되어 있었고, 심지어 하라파 사람들이 들어와서 정착한 곳도 이미 사람들이 살던 도시였다. 따라서 기존의 선입관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 영향 관계도 많았다. 인도 문명은 사람과 지식과 영향 관계가 여러 방향에서 복합적으로 움직인 결과다. 즉 고정된 레일 위를 달리는 기관차처럼 전파된 것이 아니라 거품처럼 서로 뒤섞였던 것이다. 남인도에 살던 사람들이 청동기 시대에 고도의 복잡한 도시를 건설했는지는 모르지만, 철기를 개발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p.91
베다와 관련된 미탄니 왕국의 신 미트라(Mitra)는 중동 지역에서 유명한 신격이 되었다. 몇 세기가 흐른 뒤 로마 제국에서도 다시 유명한 신격, 곧 태양의 신 미트라(Mithra)로 추앙되었다. 소수파 종교였던 미트라 숭배는 로마 후기에 이르러 널리 확산되며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경쟁상대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가 국교화되기 전 로마에는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는 축제가 있었는데, 매년 12월 17일에 시작해서 솔 인빅 투스(Sol Invictus,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 파티를 열었다. 로마 제국에서 주류 종교가 된 기독교는 솔 인빅투스 축일을 그대로 계승해서 그날을 크리스마스로 삼았다.
알다시피 모든 기독교인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정교회에서는 여전히 1월 7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한다. 청교도들도 이런 엉터리 크리스마스에 동의할 수 없었다. 북아메리카와 브리튼 지역의 청교도들은 17~18세기에 크리스마스를 금지하고자 했는데, 그들이 보기에 과거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지나치게 흥청망청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12월 25일은 휴일로 남아서 지금은 기독교도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두가 축제를 즐기는 날이 되었다.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철기 시대 초기의 이주 때문에 전 세계는 하리아나 지역 고대 신의 탄생일을 경축하게 된 셈이다.
—p.95~96
두 개의 주요 도로가 인도아대륙을 연결한 때가 바로 철기 시대였다. 첫 번째 주요 도로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이른바 우타라 패스(즉 북부 도로)였다. 이 도로는 아프가니스탄 동부에서 갠지스 평원을 가로질러 벵골의 항구까지 이어지는데, 이후 인도 역사 내내 보수와 재건을 거듭하면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오늘날 이 도로가 바로 국립 1번 고속도로(암리차르에서 델리까지)와 국립 2번 고속도로(델리에서 콜카타까지)다.
두 번째 주요 도로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이른바 닥시나 패스(즉 남부 도로)였다. 매우 복잡한 네트워크와도 같은 이 도로는 갠지스 평원의 알라하바드-바라나시 부근에서 시작되어 남서쪽으로 내려가 우자인까지 이어진다. 여기서 둘로 갈라져 한 갈래는 구자라트의 항구로 이어지고, 다른 한 갈래는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서 프라티슈타나(파이탄)를 거쳐 카르나타카주의 도시 키슈킨다까지 이어진다. 사람과 물건과 사상이 이 길들을 따라 인도 전역을 오갔다. 서사시에서 언급되는 사건들이 모두 이 길을 따라 이루어진 일들이라는 사실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p.107~108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아소카는 결코 위대한 황제가 아니었다. 잔인하고 평판이 나쁜 찬탈자였을 뿐이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세운 거대하고도 잘 굴러가던 제국이 결과적으로 아소카 때문에 무너졌다. 아소카가 위대했다는 근거는 매우 빈약하며, 기껏해야 어쩌다가 조그만 업적이 남은 정도였다. 정치가들이 늘 그러하듯이, 아소카 또한 말은 번지르르했지만 행동은 전혀 달랐다. 이는 기존의 인도 전통에서 불교 경전 이외에는 아소카를 위대한 왕으로 칭송하지 않았던 사실에도 부합한다. 그 부록 경전은 그의 통치를 경험한 적 없는 다른 나라에서 쓰인 텍스트였다. 아소카를 "재발견"한 사람은 19세기 식민지 시절의 동양학자 제임스 프린셉이었다. 아소카를 "대왕"으로 치켜세운 시기는 더 나중이었다. 즉 인도 독립 이후 새로운 정치 리더십이 그 이야기를 더욱 발달시킨 결과였다.
—p.125
인도 남부 지역은 오늘날 케랄라주와 타밀나두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지역의 고대사는 대부분 세 부족의 경쟁에 관한 이야기다. 촐라, 체라, 판디아가 그 세 부족이다. 촐라족은 카베리강 삼각주의 핵심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고, 판디아족의 근거지는 더 남쪽의 마두라이 지역이었으며, 체라족은 케랄라주 해안을 따라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 세 부족의 세력 관계는 시기에 따라 강약을 반복했다. 세 부족이 무려 1500년 동안 전쟁을 지속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p.142
우리는 스리랑카의 싱할라인과 타밀인이 언제나 끊임없는 분쟁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우리는 20세기 말 타밀 분리주의자들의 유혈 투쟁과 과격한 진압의 과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나긴 역사를 보면 이들의 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며, 이들 두 민족의 왕국들은 때로 협력하고 때로 싸웠다. 굳이 어떤 패턴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역사적으로 싱할라인과 마두라이에서 건너온 타밀 판디아족은 서로 연대했고, 타밀 촐라족과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었다.
게다가 싱할라인의 종교는 역사적으로 대개 매우 독특했고, 언제나 힌두교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우풀반 혹은 비슈누는 지금도 싱할라인이 스리랑카의 수호신으로 섬기는 신격이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주요 불교 사원에는 힌두교 신격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p.145~146
《에리트리아해 안내기》에 의하면, 무제리스 항구를 찾은 방문객은 그리스인과 아랍인뿐만이 아니라 유대인도 있었다. 당시 이미 그곳에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정착해 있었고,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 수십 년 이내에 난민들이 몰려오면서 유대인 공동체의 규모는 상당히 커졌다. 예루살렘 제2성전이 기원후 70년 로마인의 손에 파괴되었을 당시, 많은 유대인 난민들이 무제리스 근처로 들어와서 정착했다. 그리하여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 공동체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박해를 피해 기독교도들이 인도로 이주해 온 사례는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기원후 345년 카나의 토마스라고 하는 지도자를 따라 기독교인 집단이 이주해 왔다. 모두 72개 가족이 무제리스 인근에 정착했는데, 당시 힌두교도였던 왕이 이들에게 무역 특권을 부여해주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세기 후, 초기 무슬림들이 체라만 마스지드라는 사원을 건축했다. 이는 전 세계 무슬림 사원 가운데 두 번째로 오래된 모스크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고대의 항구 무제리스에는 서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유대교인, 기독교인, 무슬림의 공동체가 모두 형성되었다.
—p.153
마하발리푸람을 출발한 상선들은 누구와 거래를 했을까? 8세기 무렵 동남아시아에는 이미 인도의 영향을 받은 여러 왕국들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스리위자야 왕국은 수마트라섬의 대부분과 말레이반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스리위자야 왕국의 중심지로 두 개의 도시, 즉 수마트라의 팔렘방과 말레이반도의 카다람이 있었다. 자와는 또 다른 정치 중심지였다. 자와에 기반을 둔 왕국들은 주변에 있는 발리섬이나 마두라섬으로 점차 영향력을 넓혀가다가 마자파힛 제국으로 성장했다. 마자파힛 제국은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대부분 지역을 통치했다. 캄보이아에서는 크메르족이 힘을 합쳐 왕국을 건설했고, 발전을 거듭하여 앙코르 제국이 성립되었다. 동쪽으로 더 나아가면 참파 왕국이 베트남의 중남부 해안을 따라 뻗어 있었다. 이들 여러 왕국들은 서로 교육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나 중국과도 거래했다. 또한 서로 치열한 전쟁을 하기도 했는데, 특히 크메르-참족, 자와-스리위자야의 전쟁이 그러했다.
—p.173
···사바인은 한때 아라비아반도의 남부를 장악했던 힘야르와의 동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힘야르는 두 개의 거대 세력, 즉 사산조 페르시아와 그들의 최대 라이벌 비잔틴 제국 사이에 끼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비잔틴 제국은 열렬한 기독교 국가였고, 백성들의 개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 여파로 지정학적 관계에 종교적 색채가 더해졌다.
···에티오피아는 당시 지정학적·종교적 소용돌이의 여파가 가장 강력했던 곳 중 하나다. ···에티오피아(악숨 왕국)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로써 에티오피아는 지정학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다. 당시 인도사람들도 이러한 지정학적 변화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인도 사람들은 에티오피아를 "크리슈나 야바나"라고 했는데, 이는 곧 검은 그리스라는 의미였다.
—p.176~177
기원후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메카를 점령하고 불과 2년 뒤였다. 그의 후계자들은 급속도로 제국을 팽창시켰다. 637년 카디시야 전투에서 아랍이 페르시아를 물리침으로써,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이 이슬람의 수중에 떨어졌다. 곧이어 페르시아 제국 전체가 아랍의 지배 아래 놓였다. 비잔틴 제국은 본거지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영적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638년 아랍인이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641년까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가 이슬람의 손에 넘어갔다.
···무함마드 사후 불과 10년 안에 아랍인은 거대 제국을 장악했다. 특별한 성공이 계속되자 그들은 정말로 신의 뜻이 자신들에게 임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같은 부와 권력의 급격한 성장은 필연적으로 신흥 엘리트층의 경쟁과 긴장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권력 투쟁이 쌓이던 중 680년 카르발라 전투가 벌어졌고, 무함마드의 손자 후사인 이븐 알리와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은 대학살을 면치 못했다. 그들을 상대했던 우마이야 칼리프 야지드가 보낸 군대가 수적으로도 우위였다. 후사인은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함께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결국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파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이 분쟁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p.181~182
8세기 중엽 투르크는 거대한 두 세력 사이에 놓였다. 동쪽에서는 중국의 당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었고, 서쪽에서는 이란에 중심을 둔 아바스 왕국이 중앙아시아를 노렸다. 양대 세력은 기원후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맞붙었고, 아랍 군대가 당 제국의 군대를 완전히 격파했다. 이후 중앙아시아는 중국보다 이슬람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p.188~189
8세기와 9세기를 거치면서 아프리카 동부 해안을 따라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정착지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주로 무슬림의 종파 분쟁으로 처형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면 이바드파, 시아파, 하와지리파 등이었다. 목걸이의 진주처럼 이들이 건설한 항구가 해안선을 따라 조롱조롱 늘어서 있었다. 모가디슈, 몸바사, 킬와, 잔지바르 등등이었다. 이주민들은 곧 현지 여성들과 결혼했고 현지 문화를 받아들였다. 스와힐리어는 아랍어와 반투어가 교류하면서 생겨난 언어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언어만은 아니었다. 언어를 포함하여 소용돌이치는 인도양으로부터 분출된 문화 자체가 진화를 거듭했다. 이후로도 포르투갈, 인도, 영국 등의 영향이 그들의 문화에 기여했다.
···한편 무역 수요 때문에 노예와 금을 해안으로 운송하면서 아프리카 내부에서도 정치 및 경제적 변화가 초래되었다. 이 무렵 반투족 이주민들이 기존의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코이-산족을 대거 몰아냈다.
—p.214~215
12세기 말의 인도양은 문화적 영향 관계를 기준으로 두 개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이슬람 권역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스와힐리 해안까지다. 또 하나는 인도 권역으로, 동부 아프가니스탄에서 남베트남까지다. 이보다 더 동쪽으로 가면 중국 문명 권역이다. 고비 사막에서 태평앙까지, 그리고 일본, 한국, 북베트남도 포함된다. 각 권역의 경계는 시기에 따라 가감이 있었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균형 관계가 수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균형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 문명 모두가 곧 들이닥칠 거대한 충격에 직면해 있었다. 근원지는 하나, 바로 중앙아시아 스텝이었다.
다가올 재앙을 가장 먼저 맛본 것은 인도였다. 중앙아시아에 있던 투르크족은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을 다스리던 힌두샤히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이들은 카불을 발판 삼아 인도로 침략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p.217
정화의 보선(寶船)은 1433년을 끝으로 더 이상 항해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다녀간 이후로 벌어진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결국 동남아시아의 정세에 근본적 변화가 만들어졌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중국인은 마자파힛 제국의 맞수로 믈라카 왕국을 키우고자 했다. 믈라카 왕국이 이끄는 무슬림 연합은 머지않아 자와서 서부를 파고들었다. 마자파힛 제국의 향신료 무역항 장악력은 점차 느슨해졌다. 마자파힛 제국이 15세기 말까지 그들의 근거지인 자와섬 동부에서 버텨냈지만, 쇠락의 기운은 이미 분명했다. 제국의 지위가 흔들리면서 자와섬의 엘리트들 중에 이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p.240
나다니엘 코트호프의 영웅적 투쟁 덕분에 영국은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667년 영국과 네덜란드는 브레다 조약을 체결했다. 이들은 두 섬을 서로 맞바꾸기로 했는데, 네덜란드가 풀라우 룬을 가지고 영국은 그 대가로 훨신 더 큰 북아메리카의 맨해튼 섬을 가지기로 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었다. 즉 절대로 과거에 근거해서 부동산에 투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p.274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소량의 아편을 수입하고 있었는데, 전통 약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 말부터는 아편을 피우는 풍습이 점차 세련된 유행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아편쟁이는 영화나 텔레비전에 아편 찌꺼기를 잇새에 물고 있는 지저분한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당시에는 모든 사회 계층에서 아편을 피우며 꽤나 멋있는 일로 인식되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파이프, 반짝이는 은 가열기, 아편을 피울 때 반쯤 몸을 뉘는 아름다운 붉은 비단 소파 등이 곧 아편의 이미지였다. 아편 수요가 급증할 무렵, 영국인은 아편의 원료가 되는 양귀비를 인도에서 재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삼각무역 체제가 탄생했다. 영국은 기계로 생산한 저렴한 직물을 인도에 팔고, 그 대가로 아편을 구입하되 인위적으로 가격을 떨어뜨려 싸게 사들였다. 그런 다음 아편을 중국에 가져다 팔고, 그 대가로 중국 상품을 사들여서 유럽에 가져가서 팔았다. 이렇게 해서 EIC의 은 부족 문제는 해결되었다. 저렴한 면직물이 영국의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지 인도의 면직물 산업은 초토화되었다. 그 충격이 워낙 심대해서 무려 한 세기가 지난 뒤에도 인도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손으로 물레를 돌리는 장면으로 저항의 의지를 표현했다. 한편 EIC의 관할 구역에 있는 농부들은 강제로 아편을 재배해야 했고, 수확물은 또한 강제로 낮은 가격에 EIC에만 팔아야 했다. 이런 불리한 재배 및 교역 조건 때문에 농민의 빈곤이 심화되어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식량 작물 제한에 있었다. 약간의 기후 변동에도 농민들은 파국적 기아에 시달려야 했다.
—p.303~304
마침내 1839년 5월, 중국 관리들은 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호문(虎門)이라는 도시에서 아편 2만 상자를 몰수해서 태워버렸다. 여기서 비롯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마침내 아편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은 군용 수송선 15척에 7000명의 군인을 태워 보냈다. 파견된 군인은 대부분 인도인이었다. 어떤 이들은 근대식 라이플 소총으로 무장했고, 뒤에서 증기선 전함 네메시스 호가 이들을 호위했다. 오합지졸에 구식 훈련을 받은 중국군으로는 영국 함대의 무차별 해안 포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게다가 바람의 방향과 상관없이, 심지어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도 움직이는 네메시스 호는 중국인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청나라 황제는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난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몇 군데 항구가 강제로 대외 무역에 개방되었고, 영국은 홍콩을 얻었다. 또한 청 제국은 망가진 아편 값은 물론 전쟁 배상금도 지불해야 했다.
중국이 동해안에서 영국이 지휘하는 인도인 병사들과 싸울 때, 티베트에서도 인도의 군인들이 전쟁 중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명한 장군 조라와르 싱(Zorawar Singh)은 라다크를 장악한 뒤, 1841년 도그라 왕국의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로 진격했다. 그의 군대는 성스러운 마나사로와르 호수까지 진출했다. 세심한 보급 계획을 수립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친 자연환경에서 보급로를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 허점을 노리고 티베트와 중국인이 반격을 가해왔다. 조라와르 싱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도그라 군대는 라다크까지 밀려났지만, 다시 티베트-중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무렵 양측은 몹시 지쳐 있었기에, 추술(Chushul)이라는 곳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때 획정된 인도와 중국의 국경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p.310~311
19세기 말 아프리카를 점령한 유럽인은 영국인뿐만 아니었다. 그 이전에 아프리카는 아시아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인식되었고, 점령지는 항해 보급품 조달을 위한 해안의 전진기지 정도에 불과했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자 그 전진기지마저도 그다지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해안이 아닌 아프리카 내륙은 사정이 달랐다. 산업 경제를 뒷받침할 원재료 공급지였고, 제국주의의 야망을 손쉽게 채워줄 수 있는 땅이었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에서 꽤 큰 지역을 점령했다. 독일은 1870년이 되어서야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지만, 서둘러서 아프리카를 차지했다. 탄자니아, 르완다, 부룬디, 나미비아, 토고, 카메룬이 모두 독일 식민지였다. ···유럽의 자그만 나라 벨기에조차 한몫 거들었다. 벨기에가 중앙아프리카에서 차지한 큰 땅은 오늘날 콩고 민주공화국이 되었다.
—p.331~332
역사와 문화를 부정하는 것은 식민 권력의 전형적 방식이다. 그들이 도착하기 이전 시대는 암흑과 무지의 시대로 몰아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점령한 땅을 "테라 눌리우스", 즉 주인 없는 땅이라고 했다. 원주민의 권리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테라 눌리우스 논리는 최근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통용되었다. 1992년 사법부에서 원주민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한 뒤에야 비로소 그러한 관행을 끝냈다.
—p.332~333
마하트마 간디와 인도 국민회의는 전쟁이 끝나면 곧 상당한 양보를 얻어낼 줄로 알았다. 그러나 인도인에게 주어질 협력의 대가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다. 대가는커녕 영국은 1919년 가혹한 롤래트 법(Rowlatt Act)을 통과시켰다. 식민 당국이 마음대로 활동가들을 체포 및 구금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귀국하는 병사들이 혁명 사상에 물들지나 않을까 우려하던 식민 당국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법이었다. 이 법령은 오히려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억압의 분위기가 점차 누적되어, 1919년 4월 마침내 잘리안왈라 바그 대학살 사건이 터졌다. 이는 네덜란드가 발리에서 자행한 학살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장도 하지 않은 그렇게 많은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로써 영국이 주장하던 문명적 우월성은 끝을 보았다.
—p.356~357
할리우드 영화에는 언제나 진주만 공습이 제2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사실 최초의 사격은 1941년 12월 7일 오후 10시 20분, 말레이반도 동북부에 있는 코타바루 해안에 가해졌다. 지역마다 시간대가 달라서 그렇지, 실제로는 이 사건이 진주만 공습보다 조금 더 앞섰다. 인도군 병력이 해안을 방어하고 있었지만, 일본군은 습격 작전을 감행해서 순식간에 인력과 장비를 해안에 상륙시켰다. 오전 4시 30분에는 일본군의 폭탄이 싱가포르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p.358
마두스리 무커지의 정밀한 연구에 따르면, 처칠은 당시의 가혹한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식량 공급을 늦추거나 다른 곳으로 전용했을 혐의가 짙다.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는 청야 전술(초토화 작전)의 일환이었다. 무커지의 연구에 의하면, 처칠은 인도인을 "짐승 같은 종교를 믿는 짐승 같은 인간들"이라고 했다. 또한 벵골 지역의 기근은 "토끼처럼 먹고 자란 놈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당시의 사건을 인종 학살로 해석할 여지는 충분하다.
—p.364
인도양 연안의 식민지에서 유럽 세력들이 물러갔다고 해서 유토피아가 도래하지는 않았다. 유토피아는커녕 오랜 세월 동안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월맹군의 전차가 사이공 대통령궁의 정문을 박살 내버린 1975년 4월에 가서야 끝이 났다. 다음 차례는 캄보디아였다. 크메르 루주 정권은 농업 공산주의 체제를 만들겠다는 구호가 무색하게도, 1975년에서 1978년 사이 거의 200만 명의 양민을 학살했다. 동파키스탄에서도 서파키스탄의 군대가 인종 학살을 계속했다. 300만 명에 달하는 벵골인이 목숨을 잃었고, 1000만 명의 난민이 인도로 밀려들었다. 그 결과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벌어졌고,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했다. 서부 인도양 지역에서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길고도 참혹한 전쟁을 이어갔다. 이들의 전쟁은 1991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예멘에서는 내전이 발발해서 남과 북이 분단되었다.
—p.372
역사란 복합적이며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의 성격 때문에 역사의 저변에 어떤 틀이 있다고 보는 단선적 서술은 오해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유전자 같은 "과학적" 근거 자료를 가지고 역사를 서술해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과정을 추론할 때는 유토피아에서 출발해도 안 되고 유토피아로 나아가도 안 된다. 다른 사람을 "문명화"한다거나 유토피아를 실현해주겠다는 시도는 인류 역사상 비극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많았따. 이런 시도들은 거의 언제나 단선적 역사 해석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인도양 연안은 이 책이 집필되는 동안 수백 년에 걸친 식민 지배, 전쟁, 기근으로부터 벗어나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소말리아의 실패나 다시 시작된 예멘의 적대적 대립을 보면, 오늘날의 평화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오랜 변화의 세기 동안 축적된 연속성이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인도양을 항해하는 선원들은 이제 몬순 계절풍을 따르지 않지만, 아직도 수억 명 인구의 경제생활이 몬순 기후의 강우량에 달려 있다. 어떤 연속성은 워낙 저변 깊숙이 흐르고 있어서 우리가 눈치채기 어렵다. 예컨대 고대 문화의 유산은 오늘날도 분명히 어느 측면에선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계사회의 관습이 인도양 동부에서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서부 인도양 연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필리핀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여성 지도자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코라손 아키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아웅산 수치, 인디라 간디, 셰이크 하시나,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등은 그러한 여성 지도자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들 여성 지도자들은 민족이나 문화 혹은 종교와 상관없이 중요한 지위에 올랐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부모나 가족의 지위를 계승한 것이지만, 서부 인도양 연안에서 페르시아만에 걸친 나라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전무한 현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예외가 있다면 마다가스카르나 모리셔스 정도인데, 마침 그 지역은 문화적 뿌리가 동부 인도양에 있다.
—p.384~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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