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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늑대 : 바이킹의 역사일상/book 2019. 11. 19. 22:53
역사책이라고 하면 개인적으로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쓸 법한 교과서적인 책을 찾아 읽어보는 편이라, 내 방 구석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내가 이런 책도 샀었나? 하고 의문을 가졌던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여하간 북유럽 역사와 관련해서는 딱 읽어보고 싶다는 책이 없었다가 (북유럽 신화에 관한 책이나 북유럽식 행복추구에 대한 책은 많다) 가볍게 읽을 겸 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기대 이상으로 재미 있게 읽었다.
유럽의 중세에는 무슨 종족이 그리도 많이 등장하는지 모르겠는데 (제대로 된 국가도 형성하지 못한 고트족, 반달족, 켈트족 등등등) 지도도 얼마나 복잡한지 모른다. 정략적인 혼인도 굉장히 많기 때문에 유럽국가에 사는 청소년들은 자국의 역사를 배울 때 어떤 생각이 들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바이킹족도 그런 유(類)에 속한다. 이 책이 대체로 중세 안에서 바이킹에 대해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사실 바이킹이라는 정체성이 명징하게 드러나는 시기도 대체로 중세에 한정된다—오늘날 구분하는 것처럼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아이슬란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러 지역에 산포한 바이킹적 정체성이 있을 뿐이다.
정작 이 책에서 관심 있게 읽은 대목은 아일랜드의 역사에 관한 부분이었다. 중세까지만 해도 때묻지 않은 가톨릭교의 보고(寶庫)를 자처했던 아일랜드는 중세에는 끊임없이 바이킹족의 침략에 시달렸고, 르네상스 시대를 넘기면서부터는 영국의 침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윤리 관점에서 이해하려 들기에 버거운 바이킹의 정복술과 외교술을 보며 어쩐지 근대에 대한제국이 감내해야 했던 외세의 침략이 떠올랐는데, 역사란 이처럼 돌고 도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자는 무자비한 파괴를 거름 삼아 창조가 탄생되었다고 조심스럽게 평가하지만, 또한 혹자는 전쟁이나 재난으로 인한 혼란상황에서 구조적 불평등이 가장 완화된다고도 하지만, 역사에 족적을 남길 수 있던 승자만이 할 수 있는 태평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그런 책이었다. (내용의 무게감과는 별개로 구체적인 역사사건이 다양하게 거론되고 거기에 흥미로운 서사를 덧붙인 책이다!!)
이 중요한 세 세계를 연결해주는 것은 이그드라실(Yggdrasil)이라는 거대한 물푸레나무다. 이 나무의 뿌리에는 신과 거인과 인간의 운명은 주관하는 노른(Norn)이라는 세 여신(‘운명’, ’존재’, ‘필연’)이 앉아 있다. 이들의 임무는 사악한 자들의 시체를 포식하고 이그드라실의 뿌리를 갉아 먹는 거대한 용 니드호그(Nidhogg)로부터 나무를 지키는 일이다.
13명의 중요한 발할라 신 가운데는 오딘과 토르가 단연 두드러지는 존재다. 하지만 둘 중 누가 더 힘이 센지에 관해서는 시비가 분분하다. 상류층, 특히 덴마크와 스웨덴 남부 사람들은 오딘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농부들은 토르를 더 선호했다.
‘최고신’ 오딘은 시·광기·전투마술의 신이다. 그는 인간에게 용기를 불어넣거나 인간에게서 지혜를 앗아갈 수 있다. ···반면 토르는 머리가 아둔한 신이라 적을 제압해야 하는 순간이면 무자비한 폭력에 의존했다. ···토르에 대한 인기는 언제나 높았지만 바이킹 시대 말엽에 한층 커졌다. 아마도 사람들이 시시각각 잠식해오는 기독교를 가장 잘 막아줄 수 있는 존재로 그를 꼽았기 때문일 것이다.
— p. 38~39
아일랜드인은 둡갈(‘검은 이방인’, 즉 데인인)과 핑갈(‘흰 이방인’, 즉 노르웨이인)의 싸움으로 어부지리를 얻었다. 이 전쟁이 일어난 첫해에 데인인 군대가 성벽을 부수고 쳐들어가 더블린을 약탈했다. 하지만 반격에 나선 노르웨이인이 사흘 동안 이어진 유혈 전투에서 데인인을 대대적으로 살해했다. 이 난리 통에 제3의 집단이 가세했다. 아일랜드인과 바이킹 간의 혼인으로 태어난 혼혈인, ‘낯선 아일랜드인’이라는 의미의 갈고이델이었다. 갈고이델은 자신들에게 더 나은 조건을 제의하는 쪽을 위해 싸웠고 대개의 경우 용병으로 참가했다.
···더블린은 여섯 차례 공격을 받았으며 그때마다 아일랜드인은 재난이라 할 만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바이킹은 아일랜드 토착민의 공격에 맞서 스스로를 방어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탄탄한 수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안보에 대한 위협은 밖이 아니라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노르웨이인으 ㄹ이끈 것은 토르길스가 숨진 해에 더블린을 찾은 노르웨이인 군사 지도자의 아들 백색 올라프였고, 데인인을 이끈 것은 그의 먼 친척뻘인,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맏아들 무골 이바르였다.
— p. 85~86
앨프레드는 10년도 되지 않아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할 정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런던에서 바이킹을 몰아냈고, 구드롬을 상대로 데인법 시행 지역과 자신의 영토를 가르는 국경을 재협상하는 최종 조약을 체결했다. 앨프래드가 군대를 재조직했기 때문에 군대가 강화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 왕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군대―혹은 적어도 글을 읽을 줄은 아는 장교단―가 구성되어야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게 아니므로, 부하들과 정확하고 소상한 계획을 주고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앨프레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모든 지휘관은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지령을 내렸으며, 만약 그렇지 못하면 세계열강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지령은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전사들의 문화권에는 놀라 나자빠질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앨프레드는 방식을 조금 달리해야 했다. 본인의 보안관들로 하여금 전사들에게 글을 읽어줄 문해력을 지닌 대리를 임명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웨섹스에서 학교교육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에서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앨프레드는 비록 본인은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자기보다 좀 더 훌륭하고 예리한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야말 것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경험임을 이해했다.
···그가 특히 좋아한 책은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으로,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묘비명을 골랐다. “나는 생전에는 가치 있게 살아가기를, 그리고 사후에는 내 뒤를 잇는 이들에게 훌륭한 일을 하면서 일생을 보낸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앨프레드는 학문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되살렸다. 소홀해진 교육을 회복했다. 무력해진 법에 권위를 부여했다. 추락한 교회를 일으켜 세웠다. 무시무시한 적에게 약탈당한 토지를 되찾았다. 인류가 과거를 존중하는 한 앨프레드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p. 120~123
아일랜드에 남은 바이킹의 유산에는 명암이 공존한다. 바이킹은 한편으로 아일랜드에 더블린·코크·리머릭·웩스퍼드·워터퍼드 같은 최초의 상업도시들을 건설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황금기를 구가하던 아일랜드 문화를 망가뜨림으로써 파괴적임 침략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굴기도 했다. 이들은 수도원과 교회를 약탈하고 가옥을 파괴했으며 수많은 무고한 시민을 살해했다.
또한 바이킹은 애꿎은 시민들을 끌고 가서 노예로 삼았다. 오늘날 이들에 대한 인상이 과히 좋지 않은 데는 이 탓이 크다. 성패트릭 자신이 아일랜드의 노예상에게 붙들린 것으로 보아 아일랜드에는 최초의 바이킹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노예제가 존재하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하지만 그 제도는 8세기경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그 노예제를 바이킹이 되살려 놓은 것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노예, 즉 스롤(thrall)을 스칸디나비아로 데려가거나 아니면 이슬람 시장에서 팔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붙잡은 포로를 보유해 아일랜드에서 자신을 섬기도록 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듯이 아일랜드인은 이것을 지극히 모욕적인 처사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아일랜드인 역시 오직 붙들린 바이킹만 가지고 그들 자신의 노예무역을 시작하는 식으로 앙갚음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예를 소유하는 것은 높은 지위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바이킹이 쇠락하자 노예의 자리는 토착 아일랜드인으로 대체되었다.
교회는 성패트릭의 말을 인용하면서 노예제를 맹렬히 비난했다. 성패트릭은 자기 스스로 겪은 끔찍한 경험을 통해 이 제도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 확신했다. 그럼에도 노예무역은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렸다. 노예제는 1171년 최고조에 달했다. 그래서 아일랜드가 영국군의 침략을 받았을 때(수백 년에 걸친 압제가 시작되는 계기였다), 어느 아일랜드 성직자는 신이 노예무역을 끝장내기 위해 영국인을 보낸 거라며 본인드르이 과오를 강력하게 시사하는 결론을 내렸다.
— p. 141~142
바이킹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투에서도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서도 적응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기존의 정치 질서를 기반으로 하고자 애썼으며, 무엇이든 간에 전부터 있었던 토대 위에 자신들의 왕국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들은 잉글랜드에서는 강력하고 중앙집권화한 정부의 전통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일랜드에서는 정반대의 문제에 부딪혔다. 즉 오직 맹아적인 공동체와 소왕들만 있었던지라 더블린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는 아일랜드의 정치에서 그저 또 하나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던 것이다.
항구적인 국가를 세우기에 잉글랜드는 너무 막강했고 아일랜드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러기에는 프랑스가 가장 알맞은 것으로 드러났다. 카롤링거 제국은 바이킹에게 비옥한 토지를 제공했다. 중앙집권적이지만 퇴락하고 있던 군주제는 한편 강력한 국가의 본보기가 되어주었으나 다른 한편 불안정했던 만큼 넘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았다. 국외에 정착할 의지가 있는 해적왕이 나타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 p. 142~143
롤로 자신은 허울뿐인 기독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후예들은 기독교의 가장 충직한 지지자로 떠올랐다. 바이킹에 기원한 노르망디 공국은 한편으로 프랑크 왕국의 문화와 종교를 흡수하고, 다른 한편으로 북유럽인의 격렬한 에너지를 받아들인 혼성 국가였다. 노르망디는 가장 성공적인 바이킹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 p. 157
어느 지역에서 집단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고대 게르만족처럼 싱(Thing, 민회)라는 방식에 따랐다. 아이슬란드의 자유민은 집회에 모여 투표를 했고, 대다수는 그 일을 썩 잘해냈다. 만약 외교 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거나 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알싱이라는 최고 의결 기구를 열였다. 각 농장마다 대표를 한 명씩 보내 투표를 통해 결론을 내리는 형태였다.
···이들이 법률 전체를 외운다는 것은 아이슬란드의 법률이 꽤나 단순하다는 것과 아이슬란드인의 기억력이 좋다는 것을 동시에 말해준다. 기나긴 북극의 밤을 보내면서 얻은 재주였을 것이다. 이들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바이킹 시대에 아이슬란드가 주로 수출하던 품목은 바로 그들의 시였다. 스칼드(Skald)라 불리는 아이슬란드 음유시인은 바이킹 영웅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능력으로 유명해졌다. 왕이나 장래의 모험가는 누구라도 본인의 집에 자기 공적을 널리 알려줄 스칼드를 한 명씩 두어야 했다. 수많은 아이슬란드인은 스칸디나비아 전역에 본인들의 이야기를 널리 알림으로써 명성, 그리고 심지어 부까지 얻을 수 있었다.
— p. 180~181
스웨덴 바이킹은, 롱십을 타고 프랑크 왕국과 영국제도 연안을 따라 항해하던 그들의 스칸디나비아 사촌과 달리 방향을 틀어 발트해 건너 펼쳐진 광대한 숲 지대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스웨덴인은 노르웨이 침략자들이 린디스판을 공격했을 때보다 40년이나 앞선 8세기 중엽에 이미 러시아 서부의 강들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약탈이 아니라 교역이었다. 부유한 수도원도 무방비 상태의 마을도 없었으며, 그저 광활한 자작나무 숲과 소나무 숲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 너머에는 동쪽으로 풀이 우거진 초원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바이킹은 처음에 원자재를 구하러 이곳을 찾았다. ···오늘날의 러시아 내륙쪽에서 살아가는 슬라브족(Slavs)은 약탈할 만한 것을 거의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노예로서는 값어치가 있었던지라 스칸디나비아에서 쓰이거나 번화한 남쪽의 노예 시장에 팔려나갔다. 바이킹은 이 같은 초기 핀족의 노예 약탈에 동참했다. 핀족이 스웨덴을 지칭하던 이름 루오치(Ruotsi)는 점차 루스(Rus)로 와전되었다. 동쪽에 사는 스웨덴인은 결국에 가서 남쪽의 이슬람 세계와 비잔틴 제국에 바로 이 루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바이킹은 어느 지역 출신이든 간에 물을 잘 아는 자들이었으므로, 지금의 러시아로 들어가는 방법은 강이나 호수를 통해서였다. 753년 이들은 '스타라야 라도가' 기지를 장악했다. 이 요새는 볼호프(Volkhov)강 어귀와 이어진 라도가 호수의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었고, 이곳을 통해 러시아의 두 거대 수계 볼가(Volga)강과 드네프르(Dnepr)강에 접근할 수 있었다.
— p. 209~210
올가의 통치는 유럽 역사에서 일대 분수령이 되었다. 그녀는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기예프가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과 손을 잡도록, 동쪽이 아니라 서쪽을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루스인의 바이킹 기원은 비잔틴 기원으로 서서히 대체되었다. 키예프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어찌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류리크 가문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현대의 세 국가들, 즉 우크라이나·벨라루스·러시아는 지금도 여전히 자기네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후계자라고 여기고 있을 정도다.
이 모든 것이 올가로 인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고, 그녀 역시 자신의 삶을 실패라고 여기면서 죽어갔다. 하지만 그녀가 신봉한 동방정교회는 훗날 그녀의 백성들에게 그녀가 꿈꾸던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했고 그들이 대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 p.240~241
블라디미르가 사망한 때로부터 100년도 되지 않아 바이킹이 동쪽에 남긴 흔적은 거의 다 사라졌다. 바이킹은 최초의 중앙집권 국가를 구축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음에도 그들이 실제로 동쪽에 남겨놓은 유산이라고는 '러시아'라는 이름, 그리고 우크라이나 국기에 새겨진 블라디미르의 문장(紋章)뿐이다. 바이킹의 유산은 동로마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에 의해 서서히 사라져갔다. 이 과정은 1472년 마지막 비잔틴 제국 황제의 질녀가 이반 대제(Ivan the Great)와 혼인하면서 막을 내렸다.
···거대한 슬라브 인구 가운데 스칸디나비아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기에 바이킹의 영향력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바이킹의 영향력이 사라진 데는 블라디미르 통치 기간 동안 바이킹의 세계 자체가 변화한 것도 부분적인 이유가 되었다. 얽매인 데 없는 탐험가와 먹이를 찾아 헤매는 바다 늑대의 시대는 종지부를 찍었다. 스칸디나비아는 왕이 통치하는 땅으로 달라졌다.
— p. 252
어느 면에서 이는 바이킹 시대에 어울리는 종말이었다. 3세기 동안 무자비한 북유럽의 겨울이 이어지고서 라그나로크가 왔고, 오래된 신들은 유혈이 낭자한 들판에서 목숨을 잃었다. 발키리들이 그들의 영웅을 인도하느니만큼 하랄 하르드라다는 비록 명목상 기독교도이긴 했지만 발키리의 인도 대상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질서는 사라졌다. 멀어져가는 시대를 이 반백의 왕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랄 하르드라다는 기예프를 지나는 드넓은 드네프르강에서부터 으리으리한 콘스탄티노플로 이어지는 강력한 급류에 이르기까지 바이킹 세계를 누구보다 오래, 그리고 드넓게 경험했다. 그는 황제들의 거처인, 금으로 치장되고 숨은 통로가 가득한 신비로운 황실을 직접 보았다. 시칠리아의 오렌지 숲을 걸어보았고 팔레스타인의 대리석 분수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북대서양에 흩어져 있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여러 섬을 돌아보기도 했다.
하랄 하르드라다는 다른 몇몇 사람들처럼 황혼 녘에 이른 바이킹 세계의 빛나느 쇠락을 경험했다. 그는 '엄격한 지배자', '예루살렘 여행자, '군 지도자', 그리고 바이킹이라면 누구도 자랑스러워할 '시인' 등의 별명을 얻었다. 그가 자기 나라의 수도인 트론헤임에 묻힘과 동시에 바이킹 시대의 해는 저물었다.
— p. 310
바이킹이 남겨놓고 간 세계는 그들이 약 300년 전 덮치러 온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이 변화의 과정에서 그들이 맡은 것은 파괴자의 역할이었다. 하르드라다가 스탬퍼드브리지에서 사망한 때로부터 거의 1000년이 지난 오늘날에조차 그들에 관해서는 용머리 모양의 배에서 뛰어내려 피 맛을 보고 싶어 하는 도끼를 휘두르는 미개한 야만인이라는 이미지가 끈덕지게 남아 있다.
이들이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피해자들로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게 전쟁을 치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파괴는 결과적으로 창조의 밑거름이 되었다.
···제멋대로 뻗어나간 샤를마뉴 제국을 세상에 선보인 것도 바로 바이킹이었다. 이로써 장차 로마 제국이 되는 그 제국의 근원적 결함이 드러난 것이다. 샤를마뉴 제국이 바이킹의 망치로 파괴되자 거기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더 작지만 더 효율적인 국가를 건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킹의 공격에 따른 잿더미 위에 중세 서유럽의 위대한 강국 네 나라가 들어섰다. 프랑스,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시칠리아 왕국이다.
···이 바다 늑대들에게는 잔혹한 폭력 이상의 것이 있었다. 이들은 법을 만들었으며,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라는 참신한 제도를 잉글랜드에 도입했다. 1세기에 걸친 조선 기술의 혁신은 해양을 가로지르거나 피오르와 강 상류까지 항해할 수 있는 멋진 용머리 배의 축조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이들은 바이킹 시대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이 같은 기술적 성취를 통해 바그다드에서 북미 연안에 이르는 정교한 교역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훌륭한 바이킹의 특성은 군사적 기량이나 항해술이 아니라 귿르의 놀라운 적응력이었을 것이다. 바이킹은 자신이 경험하는 지역의 전통을 그때그때 흡수하는 놀라운 재능을 지녔으며, 그렇게 흡수한 전통을 새롭고도 역동적인 형태 속에 결합할 줄 알았다. '신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더러운 종족'이 프랑스에서는 모범적이고 격조 있는 국가를 건설했고, 아이슬란드에서는 개인의 권리에 기초한 공화국을 세웠으며, 러시아에서는 동방정교회의 적극적인 옹호자가 되었다.
— p. 31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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