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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없는 남자 I일상/book 2019. 11. 18. 23:08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을 지닌 로베르토 볼라뇨(Roberto Bolaño)의 작품에서 발견한 이름, 로베르토 무질(Robert Musil). 언뜻 <특성 없는 남자>라는 책 제목만 봐서는 로맨스 소설 같기도 하다. 그래서 회사에서 마련한 어느 강좌에서 강사가 책 읽는 나를 발견하고 어떤 책인지 호기심을 보였을 때 그리 민망했었나보다. <Der Mann ohne Eigenschaften>이라는 독일어 제목으로는 꽤 철학적으로도 들리는데 말이다.
국내에서는 독일문학에 비해 (정작 독일어를 공유하는) 오스트리아 문학에 대해 매우 빈약하게 알려진 것이 사실이고—헨릭 시엔키에비츠나 밀란 쿤데라 같은 여타 동유럽 국가들의 문학과 비교해도 현저히 소개가 적다—로베르트 무질이라는 그리 낯익은 작가가 아니다. 사실 나 역시 로베르토 볼라뇨가 자신의 소설 속에서 넌지시 소개하고 넘겼던 이 작가의 이름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오스트리아 문학이라는 생소한 풍경에 발을 담글 리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프로이트, 클림프,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철학과 예술을 아우르는 근대학문의 용광로인 빈 또는 비엔나에 관해 떠오르는 실루엣은 아련하기까지 하다.
주인공 울리히가 보나데아라는 애인을 만나기까지의 초반 몇 장은 주인공 개인의 사색이 내밀하게 담겨 있기 때문에, 페르난두 페소아가 로베르트 무질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페소아의 글과 비슷한 분위기를 띤다. 뒤이어 이야기는 크게 두 개 토막으로 나뉘는 것 같다. (적어도 분권된 첫 번째 책에 한해..)
첫 번째 이야기는 울리히의 죽마고우이기도 한 발터-클라리세 커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울리히의 세계관과 발터의 세계관이 대조되고 이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클라리세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요컨대 '진리'를 희구하는 발터와, 아무런 특성도 띠지 않는 울리히는 각각 근대와 현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클라리세는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19세기말 유럽인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로베르트 무질이 19세기와 20세기의 중턱을 보낸 작가라는 점을 감안할 때 소재나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내게도 확 와닿은 점에서 이 작품을 읽으며 많이 놀랐다.
두 번째 이야기는 디오티마와 라인스도로프 백작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의 해'를 꾸리는 내용이 주축을 이룬다. 프로이센 중심으로 단결한 게르만 민족의 기민하고 냉철한 문화와 달리, 서정적인 게르만 문화—'서정적'인 게르만 문화라니!!—를 점유하고 있는 합스부르크의 전통에 대해 자부심을 지닌 작가의 인식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오스트리아적'인 것에 대한 정체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바깥에 서 있는 우리에게도 오스트리아라는 실루엣이 불분명하듯이, 당시 오스트리아라는 실체가 헝가리 민족과 불가피하게 맺은 느슨한 연대에 기반해 있고 또한 혼종적인 동유럽 문화가 공생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다움'을 명확히 짚어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작가는 간파하고 있는 듯하다.
좋아하는 작가 톨스토이와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마음에 드는 글인데, 그보다 더 놀라운 점은 부끄럽게도 그가 살았던 생애와 관련해서다. 그의 글만 읽어서는 결핍 같은 것은 느낄 수가 없었는데, 정작 그 자신은 어린 시절 경험한 누이의 죽음과 가정을 내팽개친 어머니와의 불화로 평생 마음의 병마와 싸워야 했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호사로운 교수직을 고사하면서까지 작품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끝끝내 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하니, 어쩐지 그의 히스토리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그런 작가들은 적지 않다...) 결국 그런 그의 작품 <특성 없는 남자>도 미완성으로 남았고, 우리나라에서 소개되고 있는 이 책도 아직 완간이 되지 않은 듯하다. 이렇게 훌륭한 글을 남긴 작가와 우리나라에 이렇듯 소개를 해준 출판사에도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다음 책도 정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능성 감각을 지닌 사람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말하지는 않는다. ‘여기 이러저러한 일들이 일어났고,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야만 한다.’ 오히려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날 것 같고, 일어나야 할 것도 같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누군가 그에게 그것이 이러저러하다고 설명하면, 그것은 아마 달랐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능성 감각이란 모든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상상하고, 실재를 실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이 다루는 능력을 표현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가능성 감각은 사람들이 놀랄 만한 것이라 칭송하는 것을 틀린 것이라 말하고, 사람들이 금기시하는 것을 허용하며, 그 둘을 매한가지 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사람들이 섬세하게 직조된 세계라고 말하는 것들 속에서, 가능성 감각을 지닌 사람은 환영과 상상력과 꿈과 가정법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아이들에게서 이런 성향을 엄격하게 몰아내며, 이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을 환상가, 몽상가, 나약한 자, 아는 체하는 사람 또는 공연히 긁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을 좋게 말하려고 할 때면 바보라는 말 대신에 이상주의자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현실 감각이 없다는 게 실제의 결함으로 드러났을 경우,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지레 투덜대며 현실을 피하는 이들의 약한 대처방식만을 포착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가능성이란 그렇게 신경이 여린 사람들의 환상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직 발현되지 않은 신의 의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가능한 체험이나 가능한 진실의 그저 현실의 체험이나 현실적 진실에서 진짜 현실적인 것들의 가치를 뺀 것과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들은, 적어도 그것들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신적인 것, 불, 비약, 창조의지는 물론,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사명’ 혹은 ‘창안’으로 지칭될 수 있는 의식적인 유토피아주의를 품고 있다. 그러니까 이 땅은 그렇게 노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축복받은 상태도 아닌 것이다. 편리한 방식으로 현실 감각과 가능성 감각의 인간을 비교해보려고 한다면, 단지 어떤 돈의 총합을 생각해보기만 하면 된다. ···현실은 가능성을 일깨운다. 이는 무엇보다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반복되고 있는 가능성은 총합에 있어서나 평균치에 있어서 늘 그대로 남아 있다. 생각된 것을 실재의 것보다 소홀히 여기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나타난다면 바로 그가 새로운 가능성에 비로소 의미와 형체를 부여해줄 사람이다. 그가 가능성을 깨워 일으킬 것이다.
— p. 24~25
사실 오늘날 무수한 다수는 또 다른 무수한 다수를 향해 지속적으로 적대적인 입장에 서 있다. 자기자신의 범위 밖에서 사는 사람들을 뿌리 깊게 불신하는 것은 오늘날 문화의 한 본질이 된 것이다. 그래서 독일인이 유대인을, 또한 축구 선수가 피아노 연주자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를 가치없는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물이 단지 경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결국 자신의 주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적대적 행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황이 없으면 루터도 존재할 수 없고, 이교도가 없다면 교황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사회 속에서 인간의 가장 심오한 경향은 거부에 뿌리를 둔다. 그것을 그가 그렇게 자세하게 생각해본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이렇듯 우리 시대의 대기중에 가득 찬 막연하지만 공기와도 같은 적대감을 알고 있었고, 마치 천둥과 번개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가 다시 영원히 사라져버린 그 세 남자를 떠올리자, 그것이 마치 구원과도 같이 생각되었다.
— p. 42~43
그러나 무슨 부적절함이란 말인가? 300 걸음마다 아주 작은 질서위반이라도 처벌할 준비가 된 경찰이 배치된 거리가 있고, 그 바로 옆엔 마치 정글과도 같이 똑 같은 힘과 성향을 요구하는 다른 거리가 있다. 인간은 성경과 총, 그리고 결핵균과 결핵약을 만들어냈다. 공평하게도 왕과 귀족들은 교회를 짓는 동시에 교회에 대항하여 대학을 지었고, 수도원을 병영으로 만들고는 수도사들을 다시 병영으로 파견했다. 또한 인류는 부랑아들에게 납으로 가득 찬 고무호스를 쥐여주고는 동포를 때리게 하고, 고독하고 잘못 다뤄진 생에겐 깃털로 만들어진 침대를 준비해둔다. 그것이 바로 생의 모순이고 불연속성이며 불완전함이라는 잘 알려진 측면들이다.
— p. 44
“운명의 타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예정된 한계 때문에 재능있는 청년이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은 아마 없을 거야.”
— p. 87
정치는 전혀 ‘새로운 인간’의 세계관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 잡지들이나 공적인 기구들은 마치 페스트 병균에 둘러싸이듯 신인류에 둘러싸여 있었다. 언젠가부터 세상은 점점 더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 저울질할 수 없는 것이다. 징후, 환영. 마치 자석이 쇳조각을 놓치고 나서 그 둘이 혼란에 빠진 상태와 같다. 실이 실뭉치에서 풀려나온 것 같다. 차가 브레이크를 풀어버린 것 같다. 오케스트라가 잘못된 음으로 연주를 시작한 것 같다. 어떤 세부적인 것들도 증명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 같다. 물론 전에도 증명은 불가능하긴 했지만, 모든 관계가 약간은 다른 자리로 옮겨진 것 같다. 예전에는 날씬했던 생각이 뚱뚱해졌다. 예전에는 하찮게 여겨졌던 사람들이 명예를 얻었다. 냉혹한 것들이 부드러워졌고, 분리된 것들이 다시 모였으며, 비타협적인 것이 대중적인 것에 자리를 내주었고, 잘 키워온 취향은 다시 새로운 불확실성들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날카로은 경계는 사방에서 섞여버리고, 어떤 하나의 새로우면서도 연합을 꾀하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새로운 인간과 사유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 인간과 사유가 나쁘지는 않았다. 절대로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너무 많은 악한 것들이 선한 것 속에 섞여 있었고, 진리 속에 오류가, 의미 속에 굴종이 섞여 있었다. 이 혼합에는 세상의 가장 먼 곳까지 닿는 어떤 권위있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천재를 천재적으로, 재능을 희망으로 보이게끔 하는 아주 적은 양의 대용품으로, 마치 많은 사람들이 치커리나 무화과에 아주 풍부한 커피 맛이 난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갑자기 지식인들 사이의 모든 권위있고 중요한 자리는 그런 사람들 차지가 돼버렸고, 모든 결정은 그 사람들이 내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책임을 어느 하나로 돌릴 수 없다. 또한 어떻게 모든 것이 그리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또한 사람들에 대항해서도, 사상에 대항해서도, 또는 어떤 현상들에 대항해서도 싸울 수 없다. 거기에 어떤 재능이나 선한 의지, 또는 개성이 부족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것 역시 부족하기도 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공기 또는 몸 안의 피가 변질된 것 같았고, 알 수 없는 병이 이전 시대의 천재들의 작은 씨앗을 다 먹어치운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새로움으로 반짝였고, 결국 사람들은 세계가 더 나빠진 것인지 아니면 자기자신이 너무 늙어버린 것인지를 더 이상 구별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는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마치 하루가 푸르게 빛을 뿜고 시작했다가 천천히 구름에 덮여 끝나듯이 시대 역시 그렇게 변해갔고, 울리히를 기다려줄 만한 친절함은 이제 남지 않았다. 그는 시대의 병이 만들어냈고, 천재성을 잡아먹어버린 그 비밀에 찬 변화의 원인을 모두 일상적인 우둔함으로 돌려버림으로써 그의 시대에 보복을 가했다. 절대로 모욕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우둔함이 내적으로 보기에 재능과 혼동될 만큼 비슷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외적으로도 진보, 천재성, 희망, 발전처럼 보일 수 없었다면, 아마 아무도 우둔해지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어떤 우둔함도 남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우둔함과 맞서 싸우기는 아주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둔함은 유감스럽게도 매우 매력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우둔함은 모든 곳에 활동하며 어떤 진실의 옷으로든지 갈아입을 수 있다. 반면에 진실은 언제나 한 가지 옷에 한 가지 길만 있었고, 그래서 늘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 p. 101~104
‘어떤 타격도 받지 않고 동시대에 화를 내기는 힘들 것’이라고 울리히는 느꼈다. 울리히는 또한 이 모든 살아있는 모습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사회의 분위기가 요구하듯 쉼없이 그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그가 행하고 체험하는 모든 일에서 그는 어떤 혐오의 느낌, 어쩔 수 없음과 고독의 그늘을 느꼈는데, 그 보편적인 혐오에서 그는 어떤 보완적인 애착을 발견할 수 없었다. 종종 그는 자신이 현재로서는 어떤 목표도 없음의 재능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 p. 105
“그가 어떤지 한번 생각해봐. 그는 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어. 그는 여자의 눈을 들여다볼 줄 알아. 모든 순간에 모든 것들을 제대로 숙고할 수도 있지. 복싱도 할 줄 알고 말이야. 그는 재능 있고, 의지력도 있으며, 편견도 없지. 용감하고 끈기도 있고, 대담하며 신중하기도 해. 그가 그 모든 특성들을 소유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가지지 못한 거야! 그 특성들이 오늘의 그를 만들고, 그의 길을 정해주었지만, 그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었지. 그가 화를 낼 때, 그 안의 무언가는 웃고 있지. 그가 슬플 때, 그는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어. 무언가에 감동을 받을 때도, 그는 그것을 거부해버리지. 모든 잘못된 행위도 이러저러한 관계 속에서 선한 것으로 드러내기도 해. 그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가능성을 지닌 관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야. 그에겐 어떤 것도 고정돼 있지 않아. 모든 것은 변할 수 있고, 부분은 전체 속에, 추측컨대 아마도 그가 조금도 알지 못하는 그보다 더 큰 수많은 전체 속에 존재하는 거야. 그의 모든 대답은 부분적이고, 모든 느낌은 하나의 관찰일 뿐이며, 그래서 그에겐 ‘무엇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부수적인 ‘어떻게’나 이러저러한 부속물들이 더 중요한 것이지.”
— p. 115~116
그의 정치적 견해는 지나치게 완고했고 단지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지경에서야 가능한 자유라는 위대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토지세습 귀족으로서 상원의원이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지는 않았고 의회나 정부에서 관직을 받지도 못했다. 그는 단지 ‘애국주의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덕분에 그리고 그의 독립적인 재산 덕분에 그는 근심에 차서 제국과 인류의 발전을 염원하는 모든 다른 애국주의자들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또한 그저그런 구경꾼이 아니라, 위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윤리적 임무가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는 ‘민족’이 ‘선량하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많은 관리나 지배인, 그리고 하인들이 그의 재산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치 오페라처럼 무대 양쪽에서 뛰어나와 즐겁게 무리를 이루는 일요일과 축제일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이런 인상에 들어맞지 않는 것을 그는 ‘선동적인 요소’라고 치부했고, 그는 책임없고 조야하며 저속한 인간들의 일처럼 보였다. 그는 종교적이고 봉건적인 교육을 받았고, 시민계급과 교류하면서도 충돌 한번 없었으며, 적지 않은 책을 읽었지만 젊은 시절을 감싸준 정신적인 교육 덕분에 평생 책 한권에서 조화 외엔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자신의 고유한 규칙을 벗어나는 일탈 따위엔 빠지지 않았던 그는, 동시대인들의 군상을 오직 의회나 신문 속의 대립으로만 이해했다. 그리고 그들 속의 많은 것들을 매우 피상적으로 접했기 때문에, 시민사회란 더 깊이 이해할수록 자기가 생각하는 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편견을 날로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신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너무 자주 신을 부정하는 세계를 바로잡는 그의 방식은 정치적인 신념에 ‘진실한’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는 ‘진실한’ 사회주의 역시 그와 같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맞다. 그는 사실 처음부터, 스스로도 완전히 인정하지는 못했지만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진영으로 행군해 들어올 다리를 놓겠다는 생각을 은밀히 간직하고 있었다. 불쌍한 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기사의 임무임은 확실했다. 그리고 진실한 귀족에게 시민계급 출신의 공장주와 노동자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점도 확실했다. ‘우리 모두는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이다’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구호였고, 앞으로는 더 이상 사회적 차별이 없다는 것과도 대동소이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사회적 차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노동자계급이 마땅히 물질적인 번영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비이성적인 선진적인..
— p. 156~157
이렇듯 위대한 이상이 무엇으로 이뤄진 것인지를 말하기란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평범한 사상과―심지어는 너무나도 평범해 오류가 있을 수도 있는―위대하고 마음을 뒤흔드는 사상을 구별하는 것은 자아가 영원한 확장으로 들어가는, 혹은 반대로 우주의 확장이 자아로 들어오는 어떤 융합된 상태에 존재하며 그 때문에 무엇이 자아에 속하고 무엇이 영원에 속하는지를 구별하기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위대하고 흥분되는 사상이 단단하지만 깨지기 쉬운 인간의 육체로, 또한 의미를 구성하지만 명료하지는 않으며 냉철한 언어로 그것을 붙잡으려 할 때마다 무(無)로 사라져버리는 불멸의 영혼으로 구성되는 이유이다.
— p. 194
“정신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의 젊은이는 ···끊임없이 사상들을 사방으로 내보내지. 그러나 상황이라는 공명에 부딪힌 것들만이 다시 자신에게까지 돌아오는 법이고, 그 울림을 증폭시키지. 그렇지 않은 다른 모든 것들은 허공에 뿌려지거나 사라져버린단 말이야!”
— p. 206
그는 사랑의 삶이라는 위대한 이상이 사실 육체적인 욕망, 또는 검약이나 사유, 폭식과 같은 것에서 기인한 ‘내 것이 돼주세요’라는 바람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기록한 마지막 편지를 썼다. 이것이 그가 부친 유일한 편지였고, 아마도 곧 종말을 맞고 갑자기 깨진 그 사랑의 열병 중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 p. 224
“나는 우연일 뿐이야.” 필연이 눈을 흘겼다. “편견 없이 보자면 내 얼굴은 문둥병자와 별 다를 것이 없어.” 아름다움이 고백했다. 사실상 그것의 효과는 다음과 같을 뿐이었다. 광택은 사라졌고, 의도하는 바는 힘을 잃었으며, 기절이나 기대, 긴장의 끈은 끊겨버렸다. 그 공간에서 몇초 동안 감정과 세계 사이를 흐르는 신비한 균형이 깨졌다. 우리가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다소 ‘삶의 방향’으로 정향돼 있다. 그리고 그 방향에서 조금만 벗어난 것이라도 매우 곤란하고 놀라운 일이 된다.
— p. 228
그 순간 울리히는 특성 없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누구에게라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평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이 지금의 내가 되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그들의 과거, 아내, 성격, 직업을 갖게 되었는지를 몰랐으나, 지금 이 순간부터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느낌은 갖고 있었다. 그곳에 이 모든 것이 왜 이렇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관한 충분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속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공평한 것인지도 몰랐다. 좀 더 다르게 이야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일어나건 간에 그것은 그들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대부분 환경이나 분위기,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 p. 232
이러한 불확실성은 울리히의 개인적인 물음들에 더 폭넓은 배경들을 던져주었다. 예전의 인간들은 오늘날보다 더 나은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들판의 짚더미 같았다. 아마도 그들은 신, 우박, 불, 페스트나 전쟁 때문에 오늘날보다 훨씬 더 심하게 동요되었겠지만 전체로서, 시(市)로서, 지역으로서, 들판과 아직 개인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각각의 집단으로서 그것들은 대답될 수 있었고 명확히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책임감의 무게중심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황들에 넘어갔다. 만약 인간이 자신들의 경험이 인간과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극장으로 달려가거나, 책으로, 통계연구원의 보고서로, 탐사여행으로, 이데올로기나 종교집단으로, 그렇듯 마치 사회적인 실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지불하는 대가로 독특한 방식의 체험들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달려가고 그 체험이 곧바로 실현되지 않는 한, 그것은 허공에 뜬 채로 남겨질 뿐이다. 오늘날 누가 과연 자신의 분노가 자신의 분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 p. 267
정신을 모든 것을 지배하는 최고의 것으로 보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정신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만이 스스로를 치장할 수 있는 법이다. 정신은 이러저러한 요소들과 결합하여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된다. 그 어떤 것과 결합된 정신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넓은 범위의 것이다. 진실의 정신, 사랑의 정신, 남성다운 정신, 교양있는 정신, 현재의 가장 위대한 정신. 우리는 이러저러한 정신을 높이 평가하려 하며 이러한 정신 속에서 활동하려 한다. 저 밑바닥까지 가 닿는 정신의 울림은 얼마나 견고하고 자명한 것인가. 일상적인 범죄나 끊임없는 영리욕 같은 그 외의 모든 것은 마치 신이 발톱에서 떼어낸 것처럼 단지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정신이 벌거벗은 주어로 홀로 서 있을 때, 마치 유령처럼 차가운 그에게 감히 담요를 빌려줄 마음이 생길까? 우리는 시를 읽을 수도, 철학을 공부할 수도, 그림을 살 수도 있고 밤새 토론을 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에서 얻는 게 과연 정신일까? 설사 정신을 얻는다 가정하더라도, 과연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정신이란 그것이 생겨났을 때의 우연한 형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신은 누군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을 통과해 지나가며 그에게는 단지 아주 적은 전율만을 남겨둘 뿐이다. 우리가 이 모든 정신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 p. 270~27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감각은 워낙 훌륭한 것이어서 그것을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감각이란 그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서로 보완관계로 믿고 있었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체와 부분으로, 다시 말해 헝가리적인 국가 감각와 오스트리아-헝가리적인 국가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 두 번째는 스스로의 국가는 없었지만 그들의 의식 속에 오스트리아 국가라는 것은 남아 있던 오스트리아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인은 오직 헝가리에만 있었으며, 그것도 혐오의 대상으로만 있었다. 그는 자기 고향에서는 스스로를 왕국의 국민이요 제국의회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의 거주자로 일컬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인에다 헝가리인을 더했다가 바로 이 헝가리인을 다시 빼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인은 이런 행위를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비위에 거슬리는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서 했는데, 그것은 헝가리인들이 오스트리아인들을 견디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스트리아인들이 헝가리인들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며, 결국 전체적인 상황은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그냥 체코인이나,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이나 독일인으로만 불렀고 이것이 바로 더 많은 부패의 시작이자, 라인스도르프 백작이 말하는 ‘내부정치의 불쾌한 현상’이라는 유명한 현상의 시작이었다.
— p. 303
울리히는 이미 아른하임에 관해 많이 들었고, 그의 책도 읽어 보았다. 그 책에는 거울에 자신의 옷을 비춰보는 남자는 두려움없는 행동을 할 수 없다고 씌어 있었다. 왜냐하면 마치 시계가 우리의 행동이 더 이상 자연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대용물이 된 r서처럼 원래 즐거움을 주기 위해 창조된 거울이 두려움을 드러내는 기구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 p.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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