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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베의 태양(Todo esto te daré)일상/book 2019. 11. 3. 23:44
<테베의 태양/돌로레스 레돈도/열린책들>
Todo esto te daré. 우리말로 <당신에게 줄 모든 것들> 쯤 될까. <테베의 태양>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 책은, 아마 그냥 추리소설이었다면 잠시 관심을 갖고 지나쳤을 것이다. '스페인' 추리소설이기 때문에 700 페이지라는 얇지 않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고민 없이 집어들었다. 우리나라에 꽤 소개된 프랑스 문학이나 독일 문학에 비해, 심지어 같은 언어권인 남미 문학에 비해서도 많이 소개되어 있지는 않지만, 스페인 현대문학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글이 더 번역되어 소개된다면 언제든 기꺼이 읽을 생각이 있다.)
도입부는 조금 장식적인 느낌이 있어 읽을 만한 책인가 잠시 의심이 들었지만, 움베르토 에코에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큼 다양한 소재와 스토리, 지식백과와 같은 토막 상식들이 가득한 책이다. 여성작가 특유의 섬세한 내면묘사와 전통적 성(性) 관념에 대한 이의제기는 눈여겨볼 만한 또 다른 대목이다. 보통 스페인 본토의 주무대라 할 수 있는 마드리드나 카날루냐 지방, 그것도 아니면 안달루시아 지방이 아닌 갈리시아―산티아고 데 콤포스테야로 순례객들에게 알려진 지역이다―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점도 독특한데, 지역에 대해 사전 조사를 많이 했다고 작가가 밝힌 것이 과연 사실이라 할 만큼, 갈리시아 지방의 루고와 벨레사르를 여행하는 기분으로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옮긴이의 주(註)에서 왜 주인공 마누엘이 쓰다 만 소설 『테베의 태양』을 제목으로 삼았는지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책에는 작가인 주인공 마누엘이 쓴 글로 총 세 소설이 소개된다: 『부인(否認)의 대가(代價)』, 『테베의 태양』, 『거부당한 모든 것들』. 소설에서 『테베의 태양』이 어떤 줄거리를 담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옮긴이는 이 각각의 소설을 과거-현재-미래의 구도로 이해한다. 아물지 않는 과거의 상처를 덮기 위해 쓴 『부인의 대가』. 봉합된 과거를 딛고 인식된 현재에 관한 『테베의 태양』. 다시 찾아 온 현재 고비 속에서 모색하는 미래의 지향점, 『거부당한 모든 것들』. 결국 옮긴이가 <테베의 태양>을 우리나라에 소개하면서 책의 제목으로 삼기로 한 것은 과거와 미래의 교차 지점으로써 주인공 마누엘과 주변인물들이 인식하는 현재시점에 초점을 두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이 다루는 문제의식은 비단 이 뿐만이 아니다.
1. 계급(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영속적인 관계)
무니스 데 다빌라 후작가문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시민들의 태도는 자발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인 것이기도 하다. 물과 기름처럼 분리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차이는 노동에 대한 인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무니스 데 다빌라의 둘째 아들 산티아고는 자신의 아내 카타리나가 화훼업에 뛰어든 것을 굉장히 못마땅해 하는데, 그 까닭은 단지 귀족이 노동에 뛰어든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녀가 자기만족을 위해, 또는 금전적인 목적으로 노동을 행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노동은 그 자체로 불명예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리베이라 사크라에서 땀을 흘리며 포도를 따고 <에로이카>를 빚어내는 농부들은 자신들의 노동에 대해 자긍심을 느끼고, 또한 그러한 자긍심의 원천을 제공해주는 땅을 애정어린 마음으로 아끼며 돌본다. 이처럼 '노동'은 아스 그렐레이라스와 리베이라 사크라에서 전혀 다른 대접을 받는다.
2. 성(性)(신체적인 성과 성적 취향에 의해 선그어지는 차별)
아무래도 성(性)에 대한 부분은 이 책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먼저 작가로 등장하는 주인공 마누엘은 동성애자이고, 심지어 배우자(marido)인 알바로와 합법적인 결혼 상태에 있다. 굳이 동성애자를 등장시키지 않아도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었을 이 소설에는 유달리 성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노게이라의 아내인 라우라와, 또한 그의 어머니는 마치스타(Machista)의 폭력에 의해 무고한 제물이 되고 만다. 여기에 더해 소아성애를 가진 수도사에 의해 유린당한 어린 아이의 유년시절까지.. 작가가 이런 인물들의 소설 곳곳에 배치시켜 놓은 것은―또한 그러한 특이성에도 불구하고 막힘없이 이야기를 전개한 것은―성적 소수자에 대한 인식을 환기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히 들어 있을 것이다. (노게이라가 마누엘에게 고해성사하듯 라우라에게 행한 만행을 고백하는 대목에서 작가의 시선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3. 부(富)(부에 의해 규정되는 문화수준과 생활양식)
계급의 연장선상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부분은 부(富), 그리고 그 토대 위에 형성되는 문화생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바로가 마누엘도 모르는 이중생활로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 한 것은 무니스 데 다빌라 일가의 경제(經濟)이기도 했지만 곧 품위(品位)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주인공 마누엘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가로 '대중문화'의 한면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가문의 전통에 따라 아들들에게 기괴한 열쇠를 대물려주는 무니스 데 다빌라 일가는 '귀족문화'의 한면을 보여준다 하겠다. 폐쇄적인 귀족문화는 그것으로부터 배제된 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인 동시에 일방향으로 작용하며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인 반면, 대중문화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게 좀더 친숙한 무엇이다. 물론 귀족문화―너무 표현이 극단적이라면 '고급 문화'―도 순기능적인 측면도 있고, 반면 대중문화 역시 역기능적인 측면을 지닐 수 있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아집과 독선에 사로잡힌 방식으로 표출될 때 그들 자신이 배태한 문화가 어떻게 뒤틀려져 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하간 추리소설을 좋아하기는 해도 다른 읽고 싶은 책이 많다보니 항상 후순위로 밀리는데, 모처럼 흠뻑 빠져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요새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책의 후반부를 순식간에 읽어간 어제 하루 반나절은 어쩐지 마음이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다:) 강력히 권할 만한 추리 소설이다!!
<내가 이 세상을 뜨려면, 이 세상에 올 때만큼 시간이 걸릴 거야.>
―p. 15
어떤 면에서는 고통과 슬픔도 하나의 결정이다. 그는 자기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고, 너무 괴로워서 꼭 필요한 영감을 얻을 힘조차 없다고 속으로 되뇌면서 말이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가 찾던 궁전은 속죄의 상징이자, 병든 영혼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곳이었다.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조히즘적인 집착에 사로잡힌 그는 천국의 밖에서 잠들어 버린 천사처럼 서서히 타락하고 있었다. 그가 걸친 영혼의 옷 또한 누더기처럼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의 피부에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놀란 마음에 서둘러 상처를 가라앉히려 했지만, 이내 심하게 자책하면서 고통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그의 살갗이 다시 핏빛으로 변해 버렸다.
―p. 50~51
그 순간 알바로와 함께 묻을 뻔했다가 주머니 속에 종일 넣고 다닌 그 꽃의 보드라운 촉감을 떠올렸다. 우유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을 지닌 꽃잎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살갗처럼 덧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덧없음을 느끼기 위해 다시 한번 꽃을 만져 보고 싶었다. 마누엘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활짝 벌어진 꽃잎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손가락 사이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부드러움이 살며시 전해져 왔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은은한 향기를 들이마셨다. 갑자기 알바로의 열린 무덤 위에서 작별 인사를 하며 꽃을 들고 있던 순간이, 자신의 마음과 함께 묻어 버린 관을 망연히 내려다보던 순간이 눈앞에 떠올랐다.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변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온실 안 물건의 형체들이 너무 희미해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버티기 어려운 원심력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두어 걸음 비틀거리다 바닥에 넘어졌다.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허둥대며 달려오는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고, 곧이어 차가운 손길이 이마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을 떴다.
―p. 135
그는 글이라는 것이 인간으로서 겪게 되는 필연성, 즉 영혼의 결핍과 오직 글을 쓸 때만 일시적으로 가라앉는 내면의 굶주림과 추위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벽면을 뒤덮은 책과 유리 테이블, 커다란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 하얀 꽃이 피는 난초와 정적에 둘러싸인 채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런데 뭔가 불쾌하고 부자연스러운 분위기가 후광처럼 그의 글을 둘러쌌다. 자연히 그의 글은 알코올과 마약, 폭력 그리고 독창성의 보고(寶庫)나 마찬가지인 타락과 퇴폐주의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하고 불행한 것들만 창양하게 되었다. 그는 분명하게 믿고 있었다.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이 큰 힘이 되고, 불행이 소중한 영감의 원천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이 오히려 큰 자부심의 계기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타인들이 보내는 멸시의 눈초리가 새로운 삶을 위한 동기가 되고, 잊힌 것들이 강력한 무기이자 끊임없이 솟아나는 내면의 샘으로 되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저 깊은 곳을 흐르면서 작가의 마음을 휩쓸고 가는 시원한 물길, 혹은 불타는 용암의 강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때만 소중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거침없는 물길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빛이 잘드는 서재와 비싼 컴퓨터, 문학 박사 학위만 있으면 누구든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것을 말이다.
―p. 148~149
마누엘은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맹신을 전제로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허공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번의 실수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던 먼 옛날, 인류를 진화하도록 만들어 준 순수한 본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안에 있는 대초원을 누비던 사냥꾼의 원초적인 직감 능력을 이용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닷새 동안 분명하고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모두 무너져 버리자, 그는 다시 무기력의 수령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더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p. 239
거부당한 모든 것에 관해서 ···마누엘은 온몸이 마비된 듯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 순간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혹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무시무시하면서도 불가해한 어떤 힘이 그를 현실로 내던져 버린 이상, 자신에게 어떤 상황이 닥치든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 할 일은커녕 아무런 열의도 갖지 못한 채 무기력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저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p. 285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이처럼 궁지에 몰린 처지였지만, 어리석게도 그는 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또한 자신이 누구한테도 사랑받은 적이 없다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계속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p. 312
눈앞으로 쓸쓸한 내면의 풍경이 펼쳐지자 그는 넋이 나간 채 어둠 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여태껏 몸을 숨기고 있던 곳이 더 이상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피난처 구실을 하던 요새를 자기 손으로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거짓으로 꾸며 낸 가짜 위안을 버렸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이의 잘못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으려는 소년처럼 가혹한 진실이 드러나자 곧장 달아나고 말았다. 마침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왜 진실은 늘 가혹하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모든 것이 점점 불확실해지는 상황에서 드러난 진실은 잠시 마음을 가볍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 우리를 다시 고통의 늪에 빠뜨리지 않을까? 만약 진실이 상처를 낫게 해주기는커녕 더 강한 독이 되어 온몸에 퍼진다면?
―p. 322
거부당한 모든 것에 관해서 ···그는 속이 비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화장대의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커다란 옷장 안에는 평소 알바로가 입던 셔츠 몇 벌이 잘 다려진 채 굵은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살랑살랑 흔들거리는 셔츠를 보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갑자기 셔츠를 만지고 싶은, 부드러운 천을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그의 존재를 손가락 끝으로 만져 보고 싶었다.
―p. 412
테이블 위에는 손때가 묻은 『부인의 대가』가 놓여 있었다. 그 책을 보자 무덥기만 하던 마드리드 도서 전시회에서 알바로에게 스무 번도 넘게 사인을 해준 기억이 떠올랐다. 마누엘은 바스크 지방에 전해 내려오던 전설에서 그 책의 제목을 따왔다. 잿빛 물질에서 불행이 싹튼다는 전설이었다. 그에 따르면, 사실을 아니라고 부인하면 그것은 서서히 녹아서 투명해지다가 자취를 감추고, 결국에는 불행을 키우는 양분이 된다고 한다. 가령 어떤 농부가 풍년이 들었음에도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면, 그가 부인한 몫만큼 불행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송아지가 열 마리 태어났는데 주변에는 네 마리밖에 없다고 하면, 나머지 여섯 마리는 불운이 닥쳐 결국 죽게 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비단 곡식이나 가축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나 숨겨 놓은 자식이나 재산이 없다고 발뺌해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처럼 부인의 대가는 불행의 씨앗으로 돌아왔다. 진짜 임자가 포기했다는 뜻이기에 모두 사라져 우주의 검은 기운이 차지해 버린 것이다.
―p. 432
그는 노게이라와 자기 자신 그리고 이 세상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의 질곡에 대해 생각했다. 또한 우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괴물과 얼마나 많이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실제로 이루어질 수 없는 보상을 바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괴물은 우리가 과거로부터 끌고 온 악몽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테고, 결국 우리를 파괴하기 전까지는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 488
선량한 사람을 크나큰 불행해서 건져 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타인의 고통이다. 우선 자신이 가장 증오하던 괴물이 되어 버렸다는 자책감으로 인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노게이라. 뜻하지 않게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여러 사건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겁에 질린 채 지켜봐야만 했던 루카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날 밤의 공포와 두려움을 형벌처럼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는 남자. 마누엘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과 함께 울면서 괴로움을 나누는 동안만큼은 버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타인의 슬픔에 함께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 마누엘은 그들에게, 타인의 처참한 경험과 부당한 행위마저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는 그 사람들에게 마음속 깊이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치 그동안 쌓이고 쌓인 슬픔이 한꺼번에 폭발이라도 한 것처럼 목이 멜 정도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저들이 있었다. 마누엘은 노게이라의 손을 잡은 채 루카스를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오르투뇨의 손을 꼭 쥔 채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p. 49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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