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지의 걸작/오노레 드 발자크/녹색광선>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으레 변명이 그러하듯 일상을 보내다보면 관심가던 것들이 바뀌고 흥미를 끌던 것들도 흐트러진다. 그런 까닭에 오노레 드 발자크의 글은 나의 변덕스러움 속에서 외면받아 왔었던 것이다. 이 얇은 책에는 짧지만 강렬한 두 편의 글―<영생의 묘약>과 <미지의 걸작>―이 실려 있다. 퇴근길을 할애해가며 책을 후루룩 읽었다.
이 두 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돈 후안과 프렌호퍼―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의심'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삶을 관조(觀照)하고 부유(浮遊)하는 돈 후안이나, 실재(實在)에 다가가기 위해 선 하나 면 하나에 번민을 거듭하는 프렌호퍼, 둘 모두 끝없는 회의(懷疑) 끝에 일종의 자기 부정(否定)에 이르는 인물들이다. '질레트'(즉 재현의 대상)와 '카트린 레스코'(즉 표현의 대상) 사이에서 최선의 화법을 모색하는 화가들과, 지고(至高)의 삶과 어설픈 삶 사이에서 그 어느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돈 후안. 양단(兩端) 사이에서 명쾌한 답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다만 종종 끝모를 괴로움에 시달리는 내가 양단 사이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짚어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그는 생기로 가득 찬 눈을 보았다. 죽은 이의 얼굴에 심어진 어린아이의 눈이었다. 젊은 정기(精氣) 한가운데서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검고 아름다운 속눈썹이 보호하고 있는 그 눈빛은 여행자가 겨울밤 텅 빛 들판에서 발견하는 독특한 섬광들처럼 반짝거렸다. 이 타오르는 눈은 돈 후안에게 달려들고 싶은 것 같았다. 생각하고 비난하고 책망하고 위협하고 판단하고 말하는 것 같았고, 소리지르고 물어뜯는 것 같았다. 인간의 모든 뜨거운 감정이 그 눈 안에서 동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부드러운 애원이었고, 왕의 분노였으며, 사형수를 위해 은총을 구하는 젊은 여인의 사랑이었다. 또, 사형대의 마지막 계단을 올라가는 남자가 사람들에게 던지는 깊은 시선이었다. 이 생명의 한 조각 안에서 너무나 많은 생명이 번쩍였기 때문에, 돈 후안은 뒤로 물러났다. 그는 감히 그 눈을 쳐다보지 못한 채 방안을 서성거렸지만, 마루의 벽걸이 장식융단에서도 그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열정과 생명과 지혜로 가득 찬 점들이 방 안에 흩뿌려졌다. 사방에서 그 눈들이 번뜩였고 그를 쫓아 다니면서 짖어댔다.
— p. 37~38
삶의 환상들에 대해 통달한 그는 젊고 잘생긴 모습으로 삶에 뛰어들었다. 그는 세상을 경멸했지만, 세상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의 행복은 정기적으로 먹는 삶은 고기, 겨울의 따뜻한 난상기(暖床器), 밤의 램프, 삼 개월마다 갈아 신는 새 슬리퍼로 만족하는 부르주아의 행복일 수 없었다. 아니, 그는 나무 열매를 손에 쥔 원숭이처럼 생을 꽉 움켜잡았고, 오래 가지고 놀지 않더라도 맛있는 과육의 음미를 위해 보잘 것 없는 열매 껍질을 교묘히 벗겨냈다.
시(詩)를 비롯한 인간 열정의 숭고한 발현들은 전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힘 있는 남자들이 저지르는 실수를 결코 따라하지 않았다. 작은 영혼들은 위대한 영혼을 따르기 마련이라 생각하면서, 이따금씩 미래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을 값싼 동전 같은 우리의 소소한 생각들과 교환하려 하는 실수 말이다. 그들처럼 그도 발은 땅을 딛고 머리는 하늘에 둔 채 걸을 수 있었지만, 그는 앉아서 부드럽고 신선하고 향기로운 여인의 입술과 입 맞추며 쇠약해지는 것을 더 좋아했다. 마치 죽음처럼 그는 자신이 거쳐 가는 곳의 모든 것을 부끄러움 없이 집어삼켰고, 소유하는 사랑을 원했으며, 길고 편안한 쾌락을 즐길 수 있는 동양적인 사랑을 원했다. 그는 여자 중의 ‘여자’만을 사랑했기 때문에, 냉소가 그의 영혼의 자연스러운 태도가 되었다.
— p. 41~42
우아함과 고귀함의 표본이며 매혹적인 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자신의 배를 모든 해안에 정박시켰고, 누군가 자신을 이끌도록 내버려 두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데까지만 갔다. 살면 살수록 그는 의심이 더 많아졌다.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그는 자주 용기가 무모함이 되는 것을 알아챘다. 신중함이 비겁함이 되고, 관대함이 교활함이 되며, 정의가 범죄가 되고, 섬세함이 어리석음이 되고, 성실함이 조직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기이한 숙명으로 인해, 그는 진실로 올바르고 섬세하고 정의롭고 관대하고 신중하고 용기 있는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존경도 받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 얼마나 냉정한 농담인가! 이것이 신의 뜻은 아니겠지.'
— p. 43~44
그들의 예술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그 순수함을 잃어간다. 순수함이란 분명 하나의 의심일 텐데, 승리의 습관이 그 의심을 감퇴시키기 때문이다.
— p. 72
"내적 의미는 그의 작품 안에서 '형태'를 부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이지. 형태는 그림 안에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것이네. 그것은 관념과 감각을 서로 주고받기 위한 중개물이며, 하나의 거대한 시야. 모든 형상은 하나의 세계이네. 또한 모델이 숭고한 비전 속에서 나타나고, 빛으로 물들어 있으며, 내적인 목소리에 의해 지시되고, 천상의 손가락에 의해 실체를 드러내는 하나의 초상화이지. 그 천상의 손가락은 모든 삶의 과거에서 표현의 원천들을 찾아내 보여준다네. 자네들은 자네들의 여인들에게 아름다운 살색 드레스와 아름다운 머리 두건을 만들어주었지. 하지만 평안이나 열정을 낳는 피, 특별한 효과를 일으키는 피는 어디에 흐르고 있는가? 자네의 성녀는 갈색머리 여인이지만, 가엾은 포르뷔스여, 이것은 금발 여인이라네. 자네들의 그림들은 그러니까 창백한 채색 유령들일 뿐이고, 자네들은 그것들을 우리 눈앞에 보여주며 회화라고, 예술이라고 부르지. 집보다는 여자를 더 닮은 무언가를 그렸다는 이유로, 자네들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믿네. 그림들 옆에 더 이상 초기 화가들처럼 '근사한 수레' 혹은 '잘 생긴 남자'라고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자네들은 경이로운 예술가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 p. 84~85
"선이란 인간이 대상에 대한 빛의 효과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야. 모든 것이 충만한 자연에는 선이 존재하지 않지. 사람들은 선으로 그리면서, 즉 사물들을 그것이 있는 배경으로부터 떼어내면서 형상을 만들지. 빛의 배분은 오로지 육체의 외양을 부여하는 데만 사용하고! 나 역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지만, 동시에 나는 그 윤곽선 위에 따뜻한 금색의 반농담 암영을 펴 바르네. 이 암영은 윤곽선이 배경과 만나는 자리를 정확히 지적할 수 없게 만들어줘. 가까이서 보면, 이 작업은 희미해 보이고 정확함이 부족해 보이지. 하지만 두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모든 것이 확고해지고 멈춰서고 뚜렷이 드러나네. 육체는 움직이고, 형태는 도드라지며, 모든 것의 주위로 공기가 순환하는 것이 느껴지지."
— p. 99~100
"탐구가 지나쳐서, 탐구의 대상 자체를 의심하게 되었어. 절망의 순간들에, 그는 데셍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선으로는 오로지 기하학적 형상들만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 이것 또한 지나치게 절대적인 사고야. 왜냐하면 색채가 아닌 선과 어둠만으로도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지. 이는, 우리의 예술이 자연처럼 무한한 요소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네. 데셍은 골격을 부여하고, 색채는 생명에 해당하지. 그런데 골격 없는 생명은 생명 없는 골격보다 더 불완전한 것이라네. 여하튼, 이 모든 것보다 더 진실한 무언가가 있네. 바로, 화가에게는 실천과 관찰이 전부라는 것이야. 또 추론과 시정(詩情)이 화필과 싸우면, 화가이자 광인인 저 어르신처럼 결국 의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지."
— p. 105~106
절대 회화의 추구 끝에 일종의 물활론적 사유에 빠져 있던 그는 그림 속 여인이 아니라 진짜 살아 있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순간, 자신의 헛된 꿈 혹은 강박의 실체를 깨달았을 것이다. 십 년 동안 자신이 한 일이라곤, 살아 있지 않은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헛되이 덧칠하고 또 덧칠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오로지 관념만이 지배하던 자신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실재에, 현실에 눈을 뜬 것이다.
— p. 150~151
'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학(Aesthetica) (0) 2019.10.22 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 (0) 2019.10.14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0) 2019.10.01 소송, 변신, 시골의사 外 (0) 2019.09.28 불가능 (0) 2019.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