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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조르주 바타유/워크룸>
페르난두 페소아의 글을 연상시켰던 작품. 조르주 바타유는 인간의 나약하고 비루(鄙陋)한 근저를 철저하게 파헤친다. 불가능의 불가능. 인간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신을 그렇게 추앙하는 우리의 세계는 온갖 죄로 점철되어 있고, 우리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감정은 오직 살갗 위에서만 겉돈다. 이를 만회(挽回)하기 위해 우리는 어설픈 낱말을 조합해 시(詩)를 만들어 내지만 결국은 다다를 수 없는 세계의 그림자에 머물기에 문학은 곧 불가능이다. 얼핏 보면 자조(自嘲)하는 글 같지만, 오히려 자조에 흠뻑 빠져들지 않고 각성하는 작품, 「불가능」. 신랄하면서도 내밀한 긴 시 한 편을 읽은 것 같았다.
한계의 감정(결정적인 무력감)이 결여된, 세상 잘 만난 존재들을 나는 증오한다.
―p. 25
뜻밖이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니. 비겁하고 유치한 두려움이다. 나는 완전연소(完全燃燒)의 조건하에서만 살고 싶다(그게 아니면 그저 존속하고 싶은 것일 게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딱히 존속을 고집할 생각이 없다 보니 저항할 힘이 내게서 빠져나가는 거다. 내가 불안에 허덕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일 뿐이다.
―p. 31
밤을 열망한다. 언젠가 나는 이 세상을 버릴 것이다. 그때 비로소 밤은 밤이 되고, 나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지금,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밤을 향한 삶의 사랑이다. 내 삶이, 그나마 필요한 힘이 남아 있어, 자신을 밤으로 이끌어갈 대상에 기대를 품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 괜히 고생을 한다. 밤 자체가 자신을 사랑할 힘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계속 살아남을 경우, 밤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힘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p. 59
알몸 상태는 죽음일 뿐이며, 가장 감미로운 입맞춤은 쥐의 뒷맛을 남긴다.
―p. 106
세계를 정의할 유일한 방법은 먼저 그것을 우리만의 척도로 환원한 다음, 그것이 정확히 우리의 척도를 벗어나 있음을 활짝 웃는 낯으로 재발견하는 데 있다. 기독교는 결국 진짜 존재하는 것을 폭로해준 셈이다, 무너지는 순간의 둑이 그 진정한 위력을 드러내듯이.
―p. 126
우리는 오로지 양면적인 상태 속에서만 정신 차려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불행과 쾌락 사이에 극명한 차이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불행의 의식은 언제나 이곳저곳을 떠돌기 마련이며, 가능한 쾌락의 의식은 공포 속에서조차 완전히 압살당하지 않는다. 고통을 현기증 나도록 증식시키는 것이 바로 쾌락의 의식이지만, 반대급부로 고문을 견뎌내개 해주는 것 역시 그 쾌락의 의식이다. 사물의 양면성에 그런 경쾌한 작동 원리가 워낙 현저히 구현되어 있기에, 우리는 세상을 무겁고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근심 가득한 사람들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뜻에서, 교회의 진정한 오류는 윤리와 도그마에 있다기보다, 일종의 놀이인 비극적인 것과 노동의 징표인 심각한 것을 혼동한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p. 143~144
정신은 반항한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다(이는 곧 인간이 된다는 것은 '법칙에 굴종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얘기다).
―p. 186
자연을 초과하는 게임에서, 내가 자연을 뛰어넘느냐 자연이 나를 통해 그 자신을 넘어서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어쩌면 자연 자체가 그 자신의 과잉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 속에서 과잉이란 것은 결국 사물의 질서로 편입되기 마련이다(그때가 오면 나는 죽을 것이다).
―p.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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