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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화사회I : 알고리즘 인문학과 노동의 미래일상/book 2019. 9. 13. 00:12
<자동화사회I : 알고리즘 인문학과 노동의 미래/베르나르 스티글러/새물결>
유별난 걸지 모르지만 요새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혁신'이다. 그 다음으로 듣기 싫은 말은 '4차 산업혁명'=_= 절로 진저리가 쳐지는 이 단어는 세보지는 않았어도 우리 회사 팀명에 포함된 것만 해도 몇 십 개는 족히 될 것 같다. 심지어 정부 중앙부처 명칭에도 떡하니 들어갈 뿐만 아니라 온갖 정책 명칭에 양념처럼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가정 먼저 드는 생각은 '혁신'의 정의(定義)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혁명(革命), 개혁(改革)이라는 좀 더 오래된 (그리고 교과서적인?) 표현을 두고 '혁신(革新)'이라는 말을 쓰는 게 언제부터 이렇게 대유행이 된 걸까.
정말 경악스러운 것은 '△△혁신'이라고 할 때 '△△'가 무엇인지조차 정의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존의 성과관리 제도를 혁신한다고 하자. 그러나 정작 기존의 성과관리가 어떠했는지 진단을 내리지 않는 경우는 다반사고, 이슈의 본질을 제대로 파고들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사실 △△가 무엇이든간 말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저 뭔가 골치 아픈 일이 생기거나 누군가를 동기부여 하고 싶을 때, 그냥 '혁신'이라는 말을 갖다 붙일 뿐.
이처럼 '혁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혁신하려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 더욱 중요한 데도, 이미 '혁신'은 하나의 만능 마법주문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혁신이나 4차 산업혁명 주제가 나오면, 특정 인물을 혁신 아이콘이라며 우상화한다든가 몇몇 시사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상황인식의 빈곤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표현이 '남용'될 수록 그 말의 진가(眞價)가 드러나기보다는 원래 의미를 잃는다는 경을 경험적으로 안다. 그만큼 '혁신'이라는 말은 '대―박', '헐', '쩐다'는 말들 만큼이나 대단히 상투적인 표현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문제인식에서 읽은 책이 바로 이 책. 옮긴이의 서문부터 공감가는 대목이 많아서 읽기는 읽었는데, 본론으로 들어가니 이 책 참 난해하다.. 정말 난해하고 난해한데, 웃기는 사실은 푸코 책보다는 '상대적으로' 잘 읽힌다~_~ (『말과 사물』이 워낙 어렵긴 어려웠었나보다) 여하간 나는 '인신세'라는 말도 처음 들었고, 이와 관련하여 '그램화'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이렇게 진행이 되어 왔었는지 신선할 따름이었다.
특히 이 책의 결론 파트에서는 레비-스트로스가 니힐리즘에 귀착한다며 스티글러가 꽤 신랄한 어조로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_+ 『슬픈 열대』의 몇몇 대목을 가져다가 조목조목 반박하는데, 심지어 내가 감명깊게 읽었던 구문들을 하나하나 가차없이 비판을 하니 그럼 내가 그렇게 감명깊게 읽었던 레비-스트로스의 글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하는 허무함도 들고, 프랑스 학자들끼리 세대의 장벽을 뛰어넘어 기탄없이 비판을 제시한다는 게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철학책을 자주 읽지는 않는데, 관심가는 주제를 중심으로 서칭을 하다보면 대개 프랑스 철학에 다다르게 되는데 문제는 이 현대철학라는 것이 너무 어렵다. 더 읽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기는 한데 엄두는 나지 않고, 일단은 좀 가벼운 책으로 옮겨 갔다가 그 다음 철학 서적에 얼쩡거려야 되려나 보다'―';; 지적인 역량부족을 느끼며...悤悤
프랑스 철학계의 이단아, 베르나르 스티글러
노동의 종말에 의해 해방된 시간은 자동화된 문화, 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노동을 재발명할 수 있는 문화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자동화에 의해 가능해지는 탈자동화 문화는 부엔트로피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고 또 생산해야만 한다. ―그리고 역으로 이는 내가 전에 '인민의 여가(optium de peuple)'라고 부른 것을 요구한다.
테일러주의[과학적 경영관리제도] 이후 실행되어온 것과 같은 종류의 자동화는 오늘날 인류가 그리고 젊은 세대는 한층 더 미래에 대해 근본적 의문을 가질 정도로 전 세계에 걸쳐 엄청난 양의 엔트로피를 초래했다. 인류가 미래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청년 실업률이 유례없는 수준에 도달한 사태에 직면한 것은 바로 산업화와 함께 시작된 인신세가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된 바로 그때였다.
―p. 78~79
기술은 부엔트로피의 강화이다. 그것은 분화(differentiation)의 증가의 담당자이다. 그것은 "생명이 아닌 다른 수단에 의한 생명의 추구"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엔트로피의 가속화이기도 하다. 단지 항상 모종의 방식으로 연소와 에너지 산일 과정이어서일 뿐만 아니라 산업적 표준화가 현재의 인신세를 생명의 파괴 가능성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생명은 차이가 급증해 확산되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디폴트에 의해 심리적 개채화와 집단적 개채화로 생성되는 특이성[단독성](singularité)의 종[생명]다양성, 사회적 다양성('문화적 다양성'), 심리적 다양성으로서 말이다.
―p. 93
디지털트래킹 기술은 후기구석기시대 말에 시작된 그램화 과정의 가장 진보된 단계를 대변한다. 인류는 먼저 다양한 종류의 기록 속에서 인류를 거쳐나가고 인류가 생성한 흐름, 즉 심상 이미지(암각화), 말(쓰기), 동작(생산의 자동화), 소리와 빛의 주파수(아날로그 녹음 기술) 그리고 지금은 개인적 행동, 사회적 관계 및 포월개체화 과정(망상적 쓰기의 알고리즘) 등을 이산화하고(discrétiser) 재생하는 방법을 배운 바 있다.
이 기록들이 기억보조장치(hypomnēmeta)에 의한 제3차 파지를 구성한다. 오늘날 디지털화된 그것은 인터페이스, 센서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장치에 의해 2진수 형태로, 따라서 계산 가능한 데이터로 생성되면서 자동화 사회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사회에서는 삶의 모든 차원이 그렇게 해서 철저하게 초-산업적(hyperindustirielle)으로 되는 산업경제를 위한 기능적 요소를 구성하고 있다.
―p. 109~110
자유근분주의(ultralibéralisme)가 투기를 우선시하고 투자 의욕을 꺾기 시작하자마자 기능적으로 충동에 기반한 것이 되며, 그리하여 알베손과 스파이서에 의해 기능적 어리석음으로 묘사된 것을 훌쩍 넘어선 새로운 문턱을 넘어간다. 최근 망연자실의 전면화 상태가 그러한 기능적 어리석음을 동반해왔다.
······이 망연자실은 1993년의 디지털적 전환에서 비롯된 일련의 기술적 쇼크에 의해 야기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주요한 특징과 결과가 드러나면서 지금 쇼크에 가까운 상태를 만들어냈다. ―특히 구글, 애플, 페이스북과 아마존의 헤게모니 권력에 직면해 말이다. 이 네 기업이 '묵시록의 네 기사'로 불려온 사실은 이 기업들이 계몽주의(Aufklärung)에서 비롯된 산업사회를 말 그대로 해체 중인 것을 반영하고 있다.
······19세기 노동의 노하우를 잃어버리고, 이어 20세기에는 삶의 노하우를 잃어버린 후 21세기에는 이론적 지식을 상실하고 있는 시대가 등장하고 있다.
―p. 122~123
자본이 항상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는 그램화와 프롤레타리아화의 산업적 단계에서 이데올로기는 기술 체계를 사회 체계를 복제하고, 흡수하고, 대체하고 단락시키는 제2의 본성으로 만들려는 경향을 띤다.
······현재의 그램화 단계는 완전 자동화의 전면화를 구성 중이다. 이 단계는 글로벌한 차원에서 그러한 흡수, 단락 그리고 그로부터 유래하는 해체를 체계화하고 있다. 그것이 알고리즘적 통치성을 구성하고 있다.
―p. 131
법[칙]을 사실과 구분한다는 것은 정치투쟁뿐만 아니라 경제적〮인식론적 투쟁을 벌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만약 과학이 진리의 전립을, 예술이 미의 숭고함의 존립을 보존하듯이 법칙이 공정함의 존립을 다루는 것이 사실이라면 법칙의 새로운 상태라는 이해방식이 충동의 경제와 욕망의 재무장의 모든 재구성의, 즉 모든 형태의 경제의 초석이 될 것이다.
······이론과 법칙은 이상화 과정과 분리 불가능한 개념들로, 거기서 욕망의 대상 그리고 그것과 함께 존립하고 있는 것들이 형성된다. 하나의 사태로서의 자동장치에 의한 정신의 프롤레타리아화로부터 칸트가 구분의 주관적 원리로 불렀던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법칙과 사실의 차이를 재발견하는 새로운 단계의 노에시스화로 이행하는 것, 다시 말해 정신과 영혼의 새로운 시대의 구성으로서의 자동화 사회로 이행하는 것.
— p. 165~166
완전 자동화에 대해 말해보자면, 그것은 먼저 디지털에 의한 제3차 파지가 모든 자동장치를 통합하는 것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리고 탈자동화의 모든 치료적 가능성을 단락시키는 것에 의해 가능해진다. 이 완전한 자동화가 인식의 장뿐만 아니라 전장이라는 장에서도 자유를 위한 투쟁 그리고 헤겔 말대로 대자(對自)적인 것이 아니라 즉자(卽自)적인 것에 맞선 투쟁이라는 이중적 희생 경험을 해체한다. ―’이미 잘 알려진 것’으로서 자아에게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의 표현을 막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것의 대자적 존재로서 말이다.
— p. 172
지식, 권력, 경제 모델, 사회 체계, 기본적인 심리-관계적 구조와 세대 간 관계, 기후 체계의 전면적 해체는 기술 체계의 자동화된 통합에 의해 생성되고 있다. 그리고 이 체계는 호환성과 그 밖의 다른 기준, 교환 포맷, 데이터 포맷, 브리지, 플러그-인, 플랫폼 등에 의해 지금 철저하게 디지털화되고 있다. 그것은 RFID 전자기록장치와 다른 식별시스템, 태깅 시스템, 자동기록시스템을 통해 초-산업적 환경의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디지털에 의해 기술체계가 완전히 통합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자동장치의 기능적 통합을 가능하게 해준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신경마케팅이니 신경경제학이니 하는 것이 발전하고 있다. 그러한 기능적 통합은 생산 측면에서는 완전 로봇화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단지 공권력, 사회 체계와 교육 체계, 세대 간 관계 그리고 그 결과 심리적 구조를 해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 임노동에 기반한 산업경제 자체가 해체 과정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 p. 195~197
제2차 세계대번부터 시작해 매스미디어, 텔레크라시적인 심리-권력의 구성, 정보와 컴퓨터 기술로 이어지게 될 혁신과 함께 일상성을 표준화된 '근대적 삶'으로 용해시키는 과정이 급속하게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부르주아 계급 자체는 사라지는 반면 자본주의는 마피아적이고 문맹이 되는 경향을 점점 더 맹렬하게 표현하게 되었다.
―p. 213
꿈꾸는 힘은 자기의 자동장치를 탈자동화시킬 수 있다. ―충동이 욕망을 구성하듯이 말이다. 비록 후자가 충동을 제어하고 붙잡아두고 차연시키고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우연적인 것, 즉 맹목적이고 숙명적인 필연성으로서 충동을 구성하는 우연을 준인과적으로 전도시킴으로써 '숭고한 것'을 구성하지만 말이다. "몽상을 닮은 어떤 것도" 24/7 자본주의, 즉 데이터경제와 이 경제의 자동적이고 쌍방향적이고 즉각적인 기록가능성에 의해 부과되는 "능률, 기능성, 속도의 우선권과는 심히 양립 불가능하다."
―p. 219
지난 20년 동안 혁신의 촉진은 두 측면을 갖고 있었다. 먼저 서구 자본주의의 전 세계적 세력 확대를 지속하기 위한 전략적 시도. 그리고 기술적 사실성. 그것의 시간은 디지털적 그램화를 통해 다가왔다. 즉 산업화되고 자동화된 망상화된 쓰기가 웹과 함께 일반화되었을 때 말이다. 계획하지도 또 원하지도 않은 것을 자기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능력은 여기서 경악스러운 동시에 경탄할 만하다. 몇 년 안에 터너가 "디지털 유토피아"라고 부른 것이 알고리즘적 통치성을 통해 글로벌 자본주의의 새로운 통치 체제가 되었다.
―p. 257~258
디지털 기계와 알고리즘, 인프라는 무엇보다 먼저 대중기만이나 대중의 '중립화나 무력화'가 아니라 대중을 전혀 돌보지 않는 자원으로 이용하는 것을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생명정치도 없이 이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에 사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생명권력 또한 생명을 이용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 생명을 '돌보기' 때문이다.
·····무-돌봄은 목표가 아니라 모순 또는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한계이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악이 아니라 어리석음으로, 분명히 그것이 악을 낳는다. 이 한계, 그것은 돌보지 않고 기능함으로써 자체가 타당성을 잃는 것은 체계 전체라는 의미에서 한계로의 이행이다. 이 한계는 아래와 같은 사실에서 유래한다. 즉 디지털적 인공물성을 전유하기 위해 24/7 자본주의가 활용하는 그러한 사후 전략이 이 인공물성을 '생산/소비'라는 기능적 맞짝에 기반한 소비주의 모델, 자체가 구매력의 재분배에 기반하고 있는 모델 속으로 통합시키려는 시도로 이루어지는 사실로부터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적 전략을 활용하는 것에 의한 자동화에 의해 지탱되는 기술적 경향을 구체화하는 것은 그러한 재분배를 따라서 그렇게 해서 앞의 맞짝이 기능하도록 하는 것을 엄밀하게 말해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한 사실의 상태에 맞서 싸우고 법의 상태를 수립하는 것은 그러한 경제적 비합리성에 통합된 합리성을 맞세우는 것이다. 즉 지구와 지구의 생명체가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돌봄을 필요로 하는 지금 돌봄의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발명하는 것이다. 즉 합리성의 새로운 역사적 시대, 따라서 합리성에 대한 재규정일 수밖에 없는 돌봄을 말이다. 즉 계산 가능성과 과학적 필증성에 국한되지 않느 합리성 말이다. 즉 무엇보다 먼저 비개연적인 것을 돌보는 것이 그것이다.
―p. 272~274
알고리즘적 통치성 내부에는 더 이상 꿈꿀 어떤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데이터경제인 산업적 기록-논리에서 유래하는 영혼의 디지털적 분신이 항상 영혼에 선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분신은 실제로는 꿈으로 이루어지는 욕망을 기능적으로 단락시킨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시퀀스를 그것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퀀스가, 알레고리를 하나 만들어보자면, 디지털적 페로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구성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p. 279~280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즉 만약 현재의 우리 모습은 원래부터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으로 그렇게 된 것이 사실이라면, 만약 우리는 단지 어떤 것을 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동장치는 우리가 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고 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를 잊어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은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그만큼의 무수한 기회를 잃어버리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말이다. 만약 우리가 실천을 통해 우리를 발전시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만약 자동화가 모든 종류의 실천을 우리 손에서 빼앗아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동화는 철저하게 우리를 멍청이로 만들고 있는 과정 중에 있는 셈이다. 우리를 거칠고, 상스럽고, 난폭하고 잔인한 그리고 흔히 말하는 대로 무례하고 못 배운 사람(malappris)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p. 320~321
지금 너인 것으로 되어라(Werde, der du bist). ······바로 이 슬로건이 모든 종류의 테크놀로지적 자동장치에 의해 기술-논리적인 것-되기로 생성되는 대대적 탈숙련화로부터 귀결되는 전면적 야만화 내부에서는 사유 불가능하게 된다. 이 되기는 어떤 미래도 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 반대로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벽 안에 우리를 가두어놓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완전 자동화에 의해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가장 일상적인 수준에서 강요되는 탈숙련화의 전면화는 불편함(mal-être)을 초래한다. 그것 때문에 오직 내가 지금의 내 모습으로 되는 것에 의해서만 그렇게 될 수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어떤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 되기에서는 무, 텅 빔, 자아의 사막화의 경험만이 나타난다.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이 뭐라 이름 할 수 없는 전례 없는 느낌, 즉 존재가 싱겁게 되었다는 느낌이다. 지식이란 어떤 형태의 것이든 삶을 살고 어떤 것을 하고, 어떤 것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에 관한 지식이다. 이 지식을 잃는 것, 그것은 아래와 같은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구성하는 데 실패한 결과로 나타나는 세계의 절멸은 그러한 지식으로부터 모든 동작, 모든 행위, 모든 '세계-내-존재' 또는 '공존재'를 박탈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세계는 그러한 지식을 통해서만 존립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 속에 존재하고, 세계 속에서 생성되고 있음을 아는 모든 형태의 지식처럼 말이다. 즉 엔트로피적인 것-되기를 넘어 부엔트로피적이고 부인간-논리적 미래를 여는 것을 세계 속에 투사할 수 있음을 아는 지식처럼 말이다.
―p. 321~322
우리는 노동을 고용의 종말과 함께 다시 주요한 물음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재사유해야 한다. 고용이 노동에 대한 이해를 중층결정해왔기 때문이다. 노동을 20세기 자본주의의 '도그마'에 종속시킴으로써 말이다. 완전히 컴퓨터적인 통치성이 지급 집단적 개체화를 해체하고 있듯이 고용은 노동을 해체해왔다. 노동은 고용이 아니다. 이 둘을 혼동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노동을 생존하는 것에 따른 제약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뿐이다. 오직 생존이라는 판에서 그것을 생각할 때뿐이다. 하지만 노동의 존재는 판뿐만 아니라 존립의 판에서도 구성적이다.
―p. 387
육체노동(main-d'œuvre)이라는 말에서 노동(œuvre)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인간과 기계를 짝짓는 것과 관련해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다. 기계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화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손]와 기계 사이의 관계에서 '일하는 것'은 후자이다. 그리고 그것은 맹목적으로, 즉 자동적으로, 하지만 쉽게 작업(œuvrage)이나 노동(œuvre)으로 묘사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이 단어는 항상 여는 것(ouverture)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형태의 생산, '연속생산'은 그와 반대로 체계가 닫혔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연속생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생산물[제품]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성 상품이기 때문이다.
―p.418
해방된 시간은 해방된 노동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노동만이 아니라 에너지의 재발명을 전제한다. 에네르게이아(energeia)라는 이 단어의 이전 의미뿐만 아니라 이 단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뒤나미스(dunamis)를 재활성화함으로써 말이다. 이 뒤나미스는 종종 퍼텐셜 또는 역능(virtue)으로, 라틴어로는 virtus로, 즉 힘과 능력으로 불린다. 그리스인이 aretē라는 말로 불렀던 것이 그것으로, 이 말은 '훌륭함'으로 번역된다.
'에너지 이행'이 어떻게 새로운 고용을 창출할지가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노동, 육체, 두뇌와 에너지를 구성하고, 연결하고 있는 내밀한 본래적 관계에 대해서는 좀체 성찰되지 않고 있다.
―p. 447
기여적 수입게 기반한 기여 경제에서 오티움과 스콜레는 삶의 모든 단계에서 배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는 분명히 노동의 한 형태일 것이다. 모든 활동, 에네르게이아는 자기의 변-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형으로 이루어지는 심리적 개체화는 오직 집단적 포월개체화에 참여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또한 타자의 변-형이기도 하다.
―p. 456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자동화된 분석적 오성이 이성, 즉 해석적 능력을 추월하고 능가하는 사실에 의해 불가피하게 초래되는 구조적인 법적 진공에 기반해 있다. 이 통치성이 내재적으로 유독한 것은 바로 이 점에서이다. 기본적으로 가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가치들의 가치'를 말이다. 그리고 반대로 수분을 정확히 꿀이 아닌 것으로 다룬다.
꿀은 양봉업자에 의해 교환가치 형태로 '돈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가치들의 가치는 벌 자신에 의해,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시장을 넘어서 생산된다. 준-지출(somptuaire)적 잉여분(surplus)으로 그리고 삶의 지출성인 일반 경제 내에서, 특히 바타이유가 보여준 대로 노에시스적 삶 내에서 생산된다.
기록을 돈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고 자동화된 관리가 기록의 예지에 대한 계산으로, 즉 예지에 대한 조작으로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돈으로 만드는 것은 예지적 능력 자체를 철저하게 황폐화시킨다. 심리적 개체를 가분체화함으로써, 즉 리비도 에너지를 고갈시킴으로써 말이다. 우리는 지금 이 리비도 에너지가 노에시스적 에너지 자체임을 알고 있다. 즉 변-형 노동으로서의 에네르게이아임을 말이다. 그것에 의해 노에시스적 존재는 자기와 다른 사람을 시장을 넘어서 돌볼 수 있다.
가치들의 가치는 돈으로 바꿀 수 없다. 시장의 새로운 초월성을 구성하는 것이 그것이다. 시장은 여기서 더 이상 소명(Beruf)의 신이 아니라 모든 경제를 가능하게 만드는 긍정적 외부성이다. 그리고 단지 인지 경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노에시스적 경제로서 그렇게 한다. 간헐성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탈자동화를 가져올 수 있는 지식과 권력으로 배양하는 경제로서 말이다. 그것은 또한 삶에서도 관건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삶에서 더불어 주어지는 것(en plus), 더 이상 이윤(plus-value)이 아니라 발명에 관대한 삶의 비개연적 측면인 잉여분(surplus)으로서 말이다. 이보다 덜 서정적인 용어로 정식화하자면, 그것은 그것이 부엔트로피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p. 509~510
'빅데이터'를 통해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플랫폼을 통제하는 권력[힘]은 대규모 데이터를 실시간에 처리하는 수행성을 이용해 기능적 통합을 유도한다. 그것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해체한다. ······그런 다음 이 테크놀로지들은 개인적·집단적 행위를 자동적으로 예견하기 위해 상관관계를 계산한다. 또한 모든 숙의를 단락시키고 우회하는 것에 의해 앞의 행위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자동-실현한다,' 그 결과 이 테크놀로지들은 '소셜'적이고 숙의적인 인과성, 즉 노에시스적 인과성으 ㄹ파괴하게 될 것이다.
······만약 사회라고 하는 것이 숙의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만약 알고리즘적 자동장치가 그러한 숙의 가능성을 추월한다면 자동화 사회는 어떤 조건에서 여전히 가능할까? 우리 대듭은 간단하다. 즉 오직 시장을 넘어, 시장 밖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오티움 안에 네코티움을 끼워 넣으라는 정언명령으로부터 출발해, 이 정언명령을 가치들의 가치로 구성하라는 정언명령으로부터 출발해 노에시스적 수분에 기반한 기여 경제를 구상해야 한다.
―p. 547~548
수만 년 전에 즉 후기신석기시대에 기억보조장치적인 제3차 파지의 출현과 함께 앞의 가능성들이 강화되었다. 이 파지는 쇼베의 동굴부터 베돌리니 암각화에 이르기까지 그램화 과정을 개시시켰다.
르네상스와 함께 인쇄된 작품의 유통시 시작되었다. 그것은 계산을 통해 그리고 동전, 지폐, 신탁증서의 광범위한 보급과 함께 노에시스적 정신에 각인(impression)을 남기고 일상생활을 변형시켰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등장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그램화는 노동하는 신체의 동작의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노동의 노하우 그리고 제조방법과 업무수행방식에 대한 지식을 포획하고 고정시켰다. 이어 그와 유사한 그램화가 지각 과정과 주의 과정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신용을 떨어뜨리고, 양화시켰다.
디지털에 의한 망상적 구조의 제3차 파지라는 역사적 시대에는 20억 명이 넘는 지구인의 상호 연결된 뇌에 거의 동시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편집 문제가 절대 전례가 없는(inédits) 용어들로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이 표현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절대 선례가 없는 것'은 광속도로 막대한 계산을 수행해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새로운 수행성의 시대를 수립하고 새로운 해석학을 요구하는 능력뿐만이 아니다. 디지털에 의한 망상적 구조의 제3차 파지에 의해 수립된 기관-논리적·파르마콘적 상황의 절대 선례가 없는 성격, 그것은 그것이 새로운 인쇄의 시대를 수립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이 시대는 3D 프린팅에 의해 열렸다.
―p. 558~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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