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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문화의 수수께끼일상/book 2019. 9. 19. 20:33
<식인문화의 수수께끼/마빈 해리스/한길사>
문화유물론(Cultural Materialism)에 기반해 인류 문명에 대해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 이 책은, 사회과학과 인문학 사이에서 모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문화인류학을 과학적으로 명쾌하게 풀어낸다. 이 책은 역사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었던 크고 작은 사건―가령 전쟁이나 제국의 흥망성쇠―을 인간 본성을 윤리적인 관점에서 파악함으로써 안이하게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 학파에서 ‘전쟁’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하는 주장이, 그와는 반대로 인과관계가 뒤집혀 있으며 대단히 단순화된 ‘정언명제’를 정초(定礎)함으로써 그릇된 일반화로 빠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사소한 의문은 다음과 같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같은 경도보다는 같은 위도에 놓인 지역에서 동질적인 생태적 환경이 형성되므로 대체로 같은 위도상에 문명이 형성된다는 설명이 떠오른다. 그 결과 신대륙(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제국이 발달하지 않은 반면, 구대륙(유라시아 대륙)에서 다채롭게 문명이 발달했다는 것이 유발 하라리의 논지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 역시 꽤 문화유물론적인 설명방식이다.
여하간 마빈 해리스가 거대동물이 사라진 시점에 관하여 인류의 단백질 수요와 생식압력을 결정적인 독립변수로 두는 부분은 없잖아 작위적인 느낌이 든다. ‘거대동물의 멸종’이 인류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까닭은, 거대한 단백질 공급원이 사라짐으로써 유목생활(목축으로 대표)과 정주생활(가축으로 대표)이 등장한다는 논리로 이어지기 때문인데, 매머드의 멸종에 인류의 육식욕구가 크게 작용했다면 그보다 더 큰 거대동물인 공룡의 멸종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순환논리에 빠지게 된다.
또 한 가지는 유럽에서 최초로 자본주의가 싹튼 이유를 고찰한 대목에서 약간 고개를 갸웃했는데, 대규모 관개(灌漑) 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유럽에서는 전제통치가 다른 지역(동양)보다 덜 발달했고, 이로 인해 상인 길드와 기업 형성이 촉진될 수 있었다고 논리를 전개하는 대목 때문이다. 이는 간단히 반례를 떠올려볼 수 있기 때문인데, 프랑스의 절대왕정처럼 유럽에서도 동양적인 전제정치가 등장한 사례가 있고, 그와 반대로 중국에서는 봉건제가 발달한 사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빈 해리스의 논리는 탄탄하기 때문에 위의 갸웃거리는 부분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특히 그가 에필로그에서 제언하는 부분에 적극 공감을 했는데, 그는 지금 같은 소비행태와 인구증가(생식압력), 자원고갈 아래에서라면 인간은 어느 시점에서는 화석연료에서 대체에너지로 불가피하게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는 부분이다. 마빈 해리스의 책은 <문화의 수수께끼> 이후로 두 번째인데, 두 번 모두 신선하고 명료한 저자의 글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첫 번째 책에서는 ‘메시아의 등장’에 대한 부분이 재미있었다) 레비-스트로스 이후 모처럼 인류학 책을 읽었는데 종종 찾아 읽어야겠다.
나는 평화, 평등, 풍요 같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능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빈번한 전쟁, 불평등, 가난을 설명해주는 물질적 발달 과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에 관한 학문을 애써 외면한 결과, 세상은 모럴리스트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도록 강요당한 것을 자신이 자유로운 의지로 원하는 것이라고 우겨댄다. 또 자유로워야 할 수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속박에 자신을 내맡긴다. 사회생활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왜 세상은 대개 안 좋은 방향으로만 변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나는 문화발전의 인과적 요인에 무지한 것과 바람직한 결과를 방해하는 장애물의 존재를 간과하는 것이 도덕적 이중성이라고 생각한다.
— p. 26
남아선호로 인구증가를 규제하는 것은 자연의 힘에 대한 문화의 괄목할 만한 ‘승리’다. 부모가 낳은 아이를 돌보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직접 죽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는 매우 강력한 문화적인 힘이 필요하다. 더욱이 남아보다 여아를 많이 죽인다든가 더 홀대하도록 하는 데는 더욱 강력한 문화적인 힘이 필요하다. 바로 전쟁이 그러한 힘을 공급하는 원천이었다. 왜냐하면 그 집단의 생존은 전투능력을 갖춘 남자들을 양육하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남자 가운데 그럴 듯한 놈들을 골라내 싸우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기는 창, 곤봉, 활과 화살 등 모두 손으로 다루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의 승패는 힘센 싸움꾼이 어느 쪽에 더 많느냐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남자는 여자보다 사회적으로 더 소중해졌고 남자와 여자는 아들을 최대한 많이 길러내기 위해 딸을 ‘제거’하는 일에 공모하고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 p. 96
오이디푸스적인 상황이 광범위하게 발생한다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남성우월주의적 제도의 복합구조―남자의 무기독점〮담력훈련〮전투훈련, 여아살해의 관행, ‘남자다운’ 일을 해낸 데 대한 보상물로 자신들이 제공되는 것을 순순히 따르도록 여자를 길들이는 일, 부계제적 편견, 일부다처제의 성행, 남자 간의 스포츠 경기, 성년에 이른 남자를 위한 야단스러운 의식, 생리 중인 여자를 종교의식상 더러운 존재로 간주해 기피하기, 신붓값 치르기 관행, 그 밖의 수많은 남성우월주의적 제도―속에 거세공포증과 남근선망증이 생겨난 모든 조건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적극적이고 공격적이며 지배적인 ‘남자다운’ 남자와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자다운’ 여자를 만들어내는 것을 양육의 목적으로 삼는 곳이면 어디서나 다음 세대 남자 사이에서 일종의 거세공포증―그들은 자신의 ‘남자다움’을 확신하지 못해 불안해할 것이다―이 생길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남근의 힘과 중요성을 실제보다 크게 생각하도록 교육받게 될 자매 사이에서는 일종의 남근선망증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에서 한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전쟁의 원인이 아니라 전쟁이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원인이라는 것이다(전쟁은 그 자체로 최초의 원인이 아니라 생태환경적 압력과 생식압력을 제어하려는 바람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처럼 끝없는 논쟁거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 p. 138
주어진 지역에서 일단 시원적인 초기 국가가 형성되고 나면, 다양한 특수한 조건하에서 제2단계 국가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어떤 경우는 앞선 이웃나라의 약탈적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제2단계 국가를 형성하는가 하면 또 다른 경우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역로와 그곳을 통과하는 더 많은 재화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 제2단계 국가로 발전한다.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에 세워진 국가들을 검토할 때는 생산강화와 생식압력이 이 지역의 초기 국가를 발전시키지 않았다고 결론짓기에 앞서 항상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컨대 인구밀도가 낮은 유목민족들―투르크족, 몽골족, 훈족, 만주족, 아랍족―은 여러 번 국가를 세웠는데, 언제나 중국, 힌두, 로마, 비잔틴 등 기존의 제국들을 집어삼킴으로써 국가를 발전시켰다. 서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교도와 유럽인들이 노예무역과 황금〮상아무역을 지배하려고 시도한 결과 제2단계 국가가 발전했고, 남아프리카에서는 침입해오는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19세기에 줄루족이 국가를 세웠다.
초기 국가의 발달과 관련해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그것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과정을 따른다는 사실이다. 이 엄청난 대변화의 참가자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전혀 모른 채 그 일에 참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재분배적 균형의 보이지 않는 변화로 인류는 소수의 지위를 상승시키기 위해 다수가 자기를 비하하게 되는 사회생활의 형태에 스스로 묶이게 된다.
— p. 171~172
고문-희생-식인풍습의 복합적 체계를 군사적 비용편익이라는 다소 엇나간 듯한 측면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너무 기계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군사적 성격이 강하고 남성지배권이 확립된 사회에서 오이디푸스적인 상황에 따라 구성된 애증갈등의 이중심리적 동기가 존재함을 내가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나는 전쟁이 서로 모순되는 정서를 낳으며, 전쟁의 참가자들은 정서적으로 서로 다른 의미를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식인행위가 희생자에 대한 애정과 증오의 동시적 표현이라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내다 단호하게 배제하는 것은 집단 간 공격의 구체적〮특징적 유형을 애매모호하고 자기모순적인 정신적 요소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이다. 사실 그러한 정신적 요소가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모는 첫째 원인인 생태환경적 압력과 사람의 생식압력에서 추출해낸 기발한 추상적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 p. 212
나는 아즈텍족의 식인풍습이 종교의식의 일부로 인간고기를 먹는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님을 기정사실로 확립하기 위해 희생자의 몸뚱이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되는지 추적했다. 그 결과 인간고기는 동물고기와 마찬가지로 소비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고기라는 형태로 동물단백질의 상당한 양을 생산하고 재분배하는 국가제도에 따라, 살인은 종교의식의 일부로서 아즈텍족의 성직자들에게는 정당한 일이다. 물론 성직자들은 다른 임무도 수행하지만 실질적으로 사람을 도살하는 일 이상으로 그들에게 중요한 임무는 없었다.
메소아메리카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동물자원이 많이 파괴된 상태에서 빙하시대의 종결을 맞았다.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고산지대에 자리 잡은 제국들이 강제적으로 관리한 집중적 생산강화로 사실 보통 사람들의 식단에서 동물단백질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면 과연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사람을 죽여 그 고기를 나눠먹음으로써 아즈텍족의 식생활에서 단백질 및 지방질 섭취량은 개선되었을까. 멕시코계곡의 인구를 200만 명이라고 했을 때 식용포로가 연간 1만 5,000명밖에 되지 않는다면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 p. 221~223
‘바비큐’라는 말에는 재미있는 내력이 있다. 그것은 카리브어의 ‘barbricot’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카리브는 ‘인간고기를 먹는’이라는 뜻인 ‘cannibal’의 어원이며 카리브인들은 식인잔치를 준비할 때 푸른 나뭇가지로 만든 석쇠를 사용했는데 이를 카리브어로 ‘barbricot’라 했다.
예수는 유월절에 조각낸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빵을 가리켜 “이것은 나의 몸이요”라 하고 포도주를 가리켜 “이것은 나의 피요”라 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체성사에서는 지금도 이런 재분배가 종교의식으로 되풀이된다. 성직자는 웨이퍼(wafer)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회중들은 이 웨이퍼 빵만 먹는다. 이 웨이퍼 빵을 적절하게도 ‘호스트(host)’라 부르는데 이 말은 ‘희생(sacrifice)’을 의미하는 라틴어 호스티스(hostis)에서 파생된 것이다.
— p. 237~239
국가성립의 초기 단계에서의 식인풍습에 대한 비용편익분석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첫 번째는 적국의 병사를 음식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생산자로 이용하는 문제다. 〮〮〮식인풍습의 비용편익을 평가할 때 고려해야 할 두 번째 차원은 이 문제가 결국 인구증대와 생산강화 및 환경적 고갈에도 불구하고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는 데서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차원의 것이라는 점이다.
'위대한 시혜자'에게 무릎 꿇는 자를 모두 잡아먹겠다는 태도로는 쉽게 제국을 건설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제국적 팽창을 성공으로 이끌 기본원리는 ‘위대한 시혜자’에게 굽히는 자가 문자 그대로든 비유적으로든 잡아먹히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더 잘 먹고 잘살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식인풍습과 제국은 뒤섞일 수 없다. 사람들은 역사 내내 불평등한 부의 분배가 자신의 복지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믿도록 속임당하고 또 속여왔다. 그러나 ‘위대한 시혜자’ 가운데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관계에 일종의 ‘동위성’이 있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꿔 말하면 식인풍습을 택한다는 것은 이웃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택한다는 것이다. 백성을 문자 그대로 국 끓여 먹을 고기로밖에 대접하지 않는, 반란으로 뒤끓는 영역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아스테카왕국의 경우처럼 환경이 이미 고갈되어 제국적인 정치단계로 나아갈 수 없는 국가에나 의미가 있을 뿐이다.
— p. 245~247
수소보다 암소가 더 아힘사의 정신과 생명의 신성함을 상징한다면 이는 아마 더 ‘쓸모없는’ 소라는 일반적 정서 때문에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기 때문일 것이다. 기근 때 암소는 일하는 수소에 비해 더욱 종교적 격식의 보호가 필요하다. 하지만 풍작기가 한참 계속된다는 견지에서 볼 때, 암소는 실제로 일하는 수소보다 더 가치 있다. 비록 수소처럼 힘은 세지 않더라도 암소는 비상시에 쟁기를 끌 수 있고 언젠가는 갈증과 굶주림에 무릎 꿇고 쓰러지는 소를 대체할 송아지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에 처했을 때조차 암소는 수소보다 낫지는 않을지라도 그와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아마 암소가 종교의식에서 공경받는 대상이 된 이유일 것이다. 간디가 “암소는 젖을 제공할 뿐 아니라 농사지을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힌두교도는 암소를 숭배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 p. 289~290
중국을 살펴보자. 위트포겔은 중국의 공산주의혁명을 고대의 제국적 통치제도의 복원으로 본다. 왕조가 또 한 번 무너지고 그 사이에 잠깐 외국이 지배한 다음 또 다른 왕조가 새롭게 창건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현대 중국이 여전히 수리관개에 의존하는 사회구조적인 것을 보면 위트포겔은 이러한 분석은 산업사회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이었던 러시아보다는 중국에 훨씬 더 들어맞는 것 같다.
어느 경우든 위트포겔은 자유를 위협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분석하는 데 지나치게 단순한 ‘단락반응적’(短絡反應的, short-circuited) 접근을 하는 것 같다. 전제주의적 전통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생명력을 취득해 한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 한 생태계에서 다른 생태계로 이전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전제주의적 전통 때문에 우리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위트포겔의 이론이 나에게 시사해주는 것은, 어떤 국가수준의 생산체계가 생산을 집중적으로 강화하고 있을 때 전제주의적 통치형태가 탄생할 수 있으며, 일단 자리 잡은 전제주의적 통치는 몇천 년 동안 인간의 의지와 지성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나아가 인간은 한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 이행하는 기간에만 의식적인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한 사회가 저하된 능률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특정한 산업기술적〮생태환경적 전략을 채택해 실천한 다음에는 그 후 기나긴 세월 동안 어리석은 선택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수 있다.
— p. 316~317
수리관개에 의존하는 수력사회의 전제군주와는 달리 중세 유럽의 왕들은 농경지에 물을 대줄 수도 빼줄 수도 없었다. 왕이 자신의 성에 앉아 내리는 칙령과는 상관없이 비는 내렸던 것이다. 생산의 진행과정에서 방대한 노동자를 조직할 필요가 없었다. 위트포겔의 말을 빌린다면, 비에 의존한 농업에서는 수리관개에 의존하는 농업 같은 거국적인 협동체제를 설립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봉건귀족들은 진정한 전국적 정부조직을 설립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할 수 있었다. 왕은 동양적인 전제군주로 변신하지 않고 단지 평등한 사람 가운데 제1인자로 남아 있었다. 영국의 왕 존(John)이 1215년 러니미드에서 한 것처럼 유럽의 왕들은 대체로 평민에게 과세하는 귀족들에게 간섭을 자제해야 했다. 영국의 귀족들이 존에게서 얻어낸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는 의회대표제의 보장이 아니라 귀족들이 각자 자신의 성에서 ‘왕’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전제주의가 탄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 p. 325~326
양모를 생산하기 위해 땅 주변을 울타리로 둘러싼다 해도 울타리 밖에 있는 땅의 추가생산능력이 한계수익의 한계를 이미 넘어섰을 만큼 개발할 대로 개발한 뒤가 아니라면 ‘울타리 치기’(Enclosure)는 그다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기후상 어떤 교란요인 때문에 생식압력만으로도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토대가 충분히 마련될 수 있었으리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결국 생산강화, 자원고갈, 새로운 생산양식이라는 이 순환운동은 계급이 없는, 국가형성 이전 단계의 소집단 및 촌락사회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봉건제가 원래부터 정치적〮경제적 이유와 생태학적 이유 때문에 불안정하며, 우리가 지닌 현재의 지식으로는 전자에게나 후자에게나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인과관계상 큰 의의를 둘 수 없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 p. 330
유럽의 기업가들은 ‘대내수탈부’ 같은 것이 자신들의 사업이 성장하는 것을 막을까 두려워할 필요 없이 사업에 열중할 수 있었던 역사상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자가 되도록 도와준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부를 나누어주어야 하는지도 걱정하지 않았다. 옛날의 ‘대인’처럼 기업가들은 자기들의 추종자들을 더 부지런히 일하게 함으로써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솔로몬섬의 무미들과 달리 기업가들은 추종자들에게 자기를 따르도록 애걸하거나 감언이설로 구워삶거나 유혹할 필요가 없었다. 자본을 지닌 기업가들은 ‘도움’을 돈으로 살 수 있었고 일손을 고용할 수 있었다. 기업가들은 야유회에서 그들에게 무엇이든 거저 주겠다고 약속할 필요도 없었다. 종업원들은 옛 ‘대인’들의 경우에서처럼 친척이나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업가들은 생산한 것 가운데 더 많은 몫을 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하물며 손이나 등, 어깨, 발, 머리 따 따위 남에게 빌려주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토지와 기계에 접근할 수 없는 ‘일꾼’들은 ‘고기와 지방’, 즉 실속 있는 알맹이를 기업가들이 차지하는 권리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일자리를 얻을 수조차 없었다. ‘일꾼’들은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기업가를 도왔다. 요컨대 마침내 현대판 ‘대인’인 기업가들은 자본축적이 부의 재분배나 종업원의 복지보다도 고차원적인 의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 p. 337~338
연료혁명 이전에는 동식물이 생활에 필요한 주요 에너지원이었다. 지구상의 수백만 농장과 부락에 흩어져 있던 동식물들이 태양에서 받은 에너지를 모아 이를 사람이 사용하고 소비할 수 있는 적절한 형태로 전환했다. 하늘이나 산꼭대기 등에서 낙하하는 물과 바람 등 다른 에너지원도 마찬가지로 흩어져 있었다. 독재군주가 에너지 공급원을 차단하려면 백성이 토지나 바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기후와 지세 같은 각종 조건 때문에 극히 어려운 일이었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물은 좀더 쉽게 통제할 수 있었다. 물을 통제할 수 있으면 동식물도 통제할 수 있었다. 나아가 동식물은 주요 에너지원이었으므로 물을 통제하는 것은 곧 에너지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수력사회에 성립한 전제주의는 에너지를 통제하는 절대권력이었다. 그러나 이는 아주 간접적이고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연료혁명은 에너지에 관한 더 직접적인 통제의 가능성을 열었다. 에너지는 이제 소수의 정부기구나 법인체의 감독 아래 채집되고 통제된다. 연료는 비교적 소수의 탄광과 유전에서 나온다. 수많은 사람이 탄광과 유전에 접근하지 못해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어둠 속에 던져졌다. 고작 밸브 몇 개와 스위치를 조작함으로써 이들을 꼼짝달싹 못 하게 하는 일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이것으로도 아직 충분치 못하다는 듯이, 공업국가들은 이미 석탄 및 석유자원의 고갈을 보충하기 위해 원자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원자력은 화석연료보다 훨씬 농축된 에너지원이다.
감시용 및 기록보존용 컴퓨터들의 중앙집중식 망으로 개인의 행동을 추적할 수 있는 전자설비는 이미 존재한다. 원자력 에너지로의 전환은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전제주의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컴퓨터의 힘을 사용하는 데 가장 적합한 물질적 기초를 제공할 공산이 매우 크다. 오직 에너지 생산의 기본 방식을 분권화해야만, 다시 말해 현재 에너지 생산체제를 독점하고 있는 카르텔을 해체하고 에너지에 관한 새로운 형태의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만, 우리는 유럽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생태적〮문화적 공간을 되찾을 수 있다.
— p. 35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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