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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일상/book 2019. 10. 14. 00:05
<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자음과모음>
좀 더 가볍게 철학에 다가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이전부터 눈여겨 봐두었던 책이다. 사실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은 부끄럽게도 『소피의 세계』라는 책에서 접한 것이 전부다. 이 책은 『소피의 세계』처럼 철학자의 사상을 해제(解題)해 놓은 책이기도 하지만 『미움받을 용기』처럼 컨설턴트의 역할을 하는 책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책의 전반부에 다룬 '절망'이라는 주제는 흥미로웠지만, 어쩐지 도덕규범과 신앙에 대해 다루는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가 떨어졌다.
개인이 느끼는 절망의 원인이 외재적인지 내재적인지 냉철하게 따져볼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일리가 있다. '행복'을 우리 일상의 디폴트값으로 생각한다면 예상치 못하게 다가오는 절망이나 우울감은 자연히 장애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즉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크고 작은 절망감들이 우리 바깥에서 들이닥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나도 관대한 나머지, 당장의 고통과 절망감을 자초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이 세운 계획에 착오가 없었는지, 과욕을 부린 것은 아닌지, 불필요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닌지 따져보기보다, 녹록치 않은 세태를 탓하고 주위환경을 비교한다.
평생 극심한 우울감에 시달렸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생애에 감히 100% 공감한다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가 어떠한 현실인식 위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하지만 저자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의 해제(解題)를 읽으면 읽을 수록 느끼는 것은, 저자가 말하는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이 절반은 참이고 절반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언뜻 그의 말이 '분수를 알아라, 불행을 피하고 싶다면'이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상황은 외부원인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부에서 원인을 찾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또한 실제로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충분히 자아비판이 선행된 뒤에 사회구조를 논하는가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가 말하는 것처럼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에서도 절망감과 고통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하지만, 단지 주어진 자기 자신에 수긍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절망을 끝까지 밀어붙여 자기 자신과 맞닥뜨리고 사회와 맞닥뜨리는 용기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면에서 나는 인간 역사의 진보를 확신하는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지극히 '근대적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뒤로 갈수록 윤리규범과 도덕이라는 존재의 당위성, 신앙에 대한 부분은 느낌 탓인지 다소 설교처럼 들리기도 했다. 윤리규범과 도덕의 당위성은 나 역시 100% 공감하는 부분이었던 반면, 신앙의 필요성으로 나아가는 저자의 논지는 급작스러운 면이 있었다. 용두사미(龍頭蛇尾)의 느낌이 났던 책으로, 다음번에는 키에르케고르의 책들―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다가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는 사람을 보고 무척 반가웠던 기억이...―을 직접 찾아 읽어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절망은 나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이다. 절망에 빠지면 부족한 나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다가온다. ···절망은 언뜻 철저한 자기비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은밀한 자기중심적인 태도다. ···실제로 절망한 사람은 온통 자기 생각뿐이다. 절망한 사람은 무수히 아픈 상처처럼 끝없이 나타나는 자기 단점에만 집중해 자기만 생각한다. 자기 자신, 또 자기 자신, 언제나 자기 자신. 자신밖에 안보이는 것일까?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하지만 이기심은 아니다! 겉만 보고 속아서는 안 될 때가 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밤낮으로 그 사람만 생각한다. 그런데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 있어도 밤낮으로 그 사람만 생각나지 않던가?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과도한 자기애의 형태다.
―p. 26~27
"너 자신 때문에 절망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야. 네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너 자신에게 절망하는 거야." 고통의 은밀한 실체를 밝히고 드러낸 후 이를 극복해야 자기 비하에서 벗어날 수 있다.
―p. 34
"요즘 사람들이 왜 절망하는지 보자. 삶이란 근본적으로 덧없다는 사실을 알아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절망의 이유일까? 삶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변했는가? 일시적인 것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인가? 겉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핵심적인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이 아닐까? 결론을 내리자면, 사람들이 절망한다면 이전에 이미 절망한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완전히 우연한 차이다"(『이것이냐 저것이냐』 490쪽)
―p. 40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 어딘가에 문제가 되는 요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의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이 행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으려면 문제의 원인만 밝혀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손쉽게 낙관적인 시각에 접근한다. 고통은 언제나 우리 안에 무질서의 증상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관점이다. 고통을 느끼면 우리의 안팎에서 무엇인가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상황이 있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이런 식의 접근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서 비판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도 절망에 빠지면 과연 내부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할까? 이러한 믿음이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 안에는 랭보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 '행복의 운명(fatalité de bonheur)'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통은 어떤 문제 때문에 일어나기 때문에 그 문제가 원칙적으로 행복을 방해하는 유일한 원인이라는 논리가 나온다.
―p. 51~52
무대에서 보면 마치 근대성은 주체성을 당당하게 승리로 이끌어내며 주체성을 부정하는 모든 것과 맞설 권리를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부대의 이면을 보면 다르다. 근대성은 사람들이 온전한 개인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제대로 알 수 없게 교묘히 방해하고 개인으로서의 독립성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온전한 개인이 되지 못한 채 마치 주체성을 가진 것처럼 뿌듯한 기분에만 취한다. 근대 인간은 시대의 산물이다. 근대 인간은 과거 시대의 인간과 달리 인위적인 삶에 쉽게 만족한다. 과거 시대의 인간은 인위적인 삶을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사상의 역사가들은 근대성의 사조를 크게 세 가지 특징으로 묘사한다. 학문 분야에서 근대성은 '사유의 주체'를 강조한다. 얼핏 우리는 논리적인 존재처럼 생각하고 우리 스스로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 우리는 마치 진실인 것처럼 믿도록 강요하는 권위의 논리에 굴복한 존재일 뿐이다. "용기를 내서 너만의 분별력을 사용해!"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계몽주의 사조에 붙인 좌우명이다. 이는 여전히 우리의 좌우명이다.
윤리와 종교 분야에서 근대성은 천국에서의 행복보다는 이승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라고 부추긴다. ···이를 위해 사람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행복은 순탄한 인생을 살며 주류 계급인 '부르주아'의 가치를 목표로 하는 것과 동의어다.
끝으로 기술과 정치 분야에서 근대성은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개인을 강조한다. 데카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되어 자연을 마음껏 이용하고 싶어한다. 정치적인 부분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이야말로 정해진 공동체 혹은 계보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법률 계약을 기반으로 한 자유로운 단체만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사회라고 생각했다.
이 세 가지 분야의 발전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무엇일까? 분명한 개인의 선언을 제외하고 말이다. '생각하는 주체' '부르주아적인 소유자' '주체적인 개인'은 근대성의 세 가지 얼굴이다. 근대성은 열정을 부정하는 특징이 있다. 사유의 주체는 열정에 관심 없이 이성만을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가치로 본다. 부르주아적인 소유주는 지나친 열정보다는 합리적인 이익을 선호한다. 개인 지상주의에 빠지면 열정을 수동적으로 생각해 이러한 열정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꾼다. 동시에 우리 시대도 열정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허상과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맞는 길인 것처럼 사람들을 부추긴다.
―p. 78~80
감정과 열정은 다르다. 감정은 다른 사람들과 동조하는 방법이고 열정은 특정 명분에 헌신하는 자아의 존재를 단단히 보호하는 방법이다. 열정은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지 못하게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정체성을 보호해주는 유일한 방패막이다.
―p. 90
"미학적인 열정 속의 픽션 같은 인생이다. 그러니까 부조리한 인생이며 시간이라는 암초에 부딪히는 인생이다. 허상 같은 삶이 최고조에 달하면 절망이 된다. 따라서 픽션 같은 인생은 진정한 인생이 아니라 표류하는 인생이다. 픽션 같은 인생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마치 매 순간이 고정되지 않고 사라져버린 느낌이 든다."(『철학적 단편에 붙이는 비문학적 해설문』, 168쪽)
―p. 152
미학적인 개인이 추구하는 이상이란 선택해야 하는 의무는 줄이고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을 알아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선택하다'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에게 다가온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책만을 의미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아예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일도 생긴다. 그 대신 최선책을 찾았다 하면 바로 선택하려고 한다. 해결책이 곧 최선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것이 좋은 결정이 맞는지를 의심해야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착각이다. 우선 시간이 부족하고 꼼꼼히 검토해볼 시간도 없이 선택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결정자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리스크 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좋은 결정이 정말 좋은 것이 되려면 '적절한 순간'에 해야 한다. '적절한 순간'은 '긴급하게'를 의미할 때도 있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오면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일일이 기다릴 수가 없다. 그런 자유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완벽한 선택만 하려고 시간만 보내다가는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끝없이 생각하는 이유는 완전히 만족스러운 자아를 만들 수 있는 연금술 같은 비법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는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p. 162~163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여전히 과거와의 관계를 신경 쓴다는 의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과거를 부정한다고 해서 과거를 잊는 것은 아니다. 과거가 마법처럼 스스로 사라질 일은 없지 않은가. 과거는 절대로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내가 과거를 부정한다고 더 이상 내 과거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나 과거를 부정하려면 또 다른 것을 연속 부정해야 한다! 과거와 완전히 연을 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매우 위험한 착각이다. 과거를 부정할수록 내 생각과 달리 과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과거의 존재를 생생하게 느낀다. 자신의 배경을 잊는다고 그 배경이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무의식 속에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따라다닌다. 모든 과거에서 해방되었다고 믿으며 더 이상 우리 이야기를 쓰지 않지만 사실은 과거의 그림자를 늘 안고 있다.
―p. 170
자신이 한 구체적인 선택이 가치가 있으려면 방향이 되어줄 수 있는 중심적인 선택 하나가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선택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선택하고 싶다는 의지다. 즉, 우리의 삶에서 중요하게 그러내야 하는 것은 특이한 삶이 아니라 군더더기 없는 삶이다.
―p. 179
우리는 우월감을 느끼지 않고도 스스로 특별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말을 자주한다. 그런데 왜 각자의 차이점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하는가? '일반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특별해지고 싶어서는 아닌가? 우리는 인간의 평등 지수를 높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영광스러운 귀족적인 취향을 대중화시킨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끝없는 자아 경쟁 때문에 우리는 개인이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도 자신다워지는 법을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
―p. 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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