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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Aesthetica)일상/book 2019. 10. 22. 13:12
<미학(Aesthetica)/알렉산더 고틀립 바움가르텐/마티>
§14 미학의 목적은 감성적 인식 자체의 완전함이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이다. 반면 피해야 할 것은 그것의 불완전함이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추함이다.
§15 감성적 인식의 완전함은 너무도 비밀에 싸여 있어 우리에게 전적으로 모호하게 남아 있거나 오성적 능력 없이는 들여다볼 수 없다. 따라서 미적 인간 스스로는 이러한 감성적 인식의 완전함에 도달할 수 없다.
§16 감성적 인식의 불완전함 또한 너무도 비밀에 싸여 있어 우리에게 전적으로 모호하게 남아 있거나 오성적 판단 능력이 없이는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미적 인간 스스로는 이러한 감성적 인식의 불완전함에 도달할 수 없다.
§21 우리가 피해야 할 감성적 인식의 추함이나 결함, 오점에도 똑 같은 종류와 수가 있을 수 있다. 〮〮〮1) 관념이나 사태에 있어서의 추함, 2) 여러 관념의 결합에 있어서의 추함, 3) 기호를 통한 의미작용에 있어서의 추함.
§22 인식의 풍요로움, 크기, 진리, 명석함, 확실성, 생명력과 같은 것이 하나의 지각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면, 예를 들자면 풍요로움과 크기가 명석함과, 진리와 명석함이 확실성과,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이 생명력과 조화를 이루면, 또 인식의 서로 다른 부분들이 위에서 언급한 특징들과 조화를 이루면, 어떤 인식에 있어서든 완전함이 발생한다. 현상으로서 이것들은 감성적인 것의 아름다움을, 특히 사태와 관념의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이러한 사태와 관념 안에서는
풍부함과 고상함, 감동을 주는 참된 것의 확실한 빛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
§73 잘못된 규칙은 규칙이 없는 경우보다 언제나 더 나쁘다. 하지만 이런 혹은 저런 실례로부터만 도출되고 그 이상의 다른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보편적이라고 과대 선전되는 법칙들이라면 특수한 것으로부터 보편적으로 추론하는, 빈틈이 매우 많은 귀납적 논증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185 미적 위엄은 미적인 크기의 일부이자 하나의 하위 유형인데, 미적인 크기처럼 절대적이거나 아니면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미적 위엄은 모든 아름다운 사유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그에 관해 우리는 로마의 법률 전문가들을 따라서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무엇이든 더 자세하게 사유하는 것이 훌륭한 도덕관습에 위배되는 경우, 그것에 대해 오래도록 곰곰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대적인 미적 위엄은 아름답게 사유되어야 할 어떤 특정한 것에 요구되는 것으로, 모든 것에 동일한 정도로 요구되지는 않는다.
§186 키케로는 『의무에 관하여』에서 “아름다움의 두 가지 종류”를 확정하고 “그중 하나는 매력이고 다른 하나는 위엄인데, 매력은 여성적, 위엄은 남성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이때 그의 말은 앞 절에서 언급한 상대적 위엄에 관한 것이라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그 키케로 자신이 연설가에게서 “위엄”뿐만 아니라 “매력”도 “드러내는” 완벽한 “외모”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는 매력이 아니라 “추함”을 “위엄”에 대립시키고 있다. 따라서 귀부인에게도 자신에게 어울리는 위엄이 있는데, 물론 울피아누스가 『원로원 의원에 대하여』에서 법률 전문가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더 정확하게 말한 것처럼 “더 큰 위엄은 남성에게 속한다”. 우선 키케로의 동의와 그의 권위를 전제로, 절대적인 위엄조차도 전혀 없는 모든 것은 추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참된, 특히 남성적인 아름다움, 예를 들자면 행위의 아름다움 안에서는 매력도 그 으뜸가는 것들에는 위엄을 요구하는 것이 허락될 것이다. 또 어떤 사태나 인격도 그 “위엄을 탈취당하고 빼앗기게 되면 추하게 된다”고 결론지어도 무방할 것이다.
§428 2)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는 부분들 안에서 미적 진리가 종종 논리적 진리 전체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부분들을 마지막까지 일일이 세어본 이후에야 겨우 그것이 가능한지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다음과 같은 사실 하나만을 확인한다. 미적 인간은 진리가 오성적인 것인 한 그것을 직접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간접적으로 많은 미적 진리로부터 동시에 하나의 진리로서 드러나거나 미적으로 참인 것과 일치하게 된다면, 이성적인 미적 인간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자기 자신을 축하하게 될 것이다. 그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440 미적-논리적 진리는 보편적인 것이나 개념들, 일반적인 판단들의 진리가 아니면 개별적인 것이나 이념들의 진리다. 전자는 일반적인, 후자는 개별적인 미적-논리적 진리다. 무엇보다 감성적으로는, 일반적 진리의 대상 안에서는 결코 개별적 진리의 대상 안에서만큼 많은 형이상학적인 진리가 발견되지 않는다. 미적-논리적 진리가 더 일반적일수록 그 대상 안에서 발견되는 형이상학적 진리는 그만큼 더 적게 표상된다. 일반적으로도 그러할 뿐만 아니라 유비적 이성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로써 당신은 깨달을 수 있는 한 가장 큰 진리를 추구하는 미적 인간이 가능한 한 개별적인 것을 일반적인 온갖 것보다 선호하는 이유를 하나 알게 되었다. 더 일반적이고 가장 추상적이며 가장 보편적인 것보다는 덜 일반적이고 덜 추상적인 것을 선호하는 이유를 말이다. 풍요로움의 원칙도 같은 일을 하도록 권한다. 왜냐하면 더 구체적으로 규정된 대상일수록 그와 동시에 그것을 다른 것들과 구분해주는 더 많은 특징을 지니게 되며, 그 대상에 대해 아름답게 사유하는 일이 그만큼 더 많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616 우아함의 규칙들에 따라 사유되는 모든 것의 내용이 “아주 명석해서, 마치 태양에 주목하지 않더라도 햇빛이 눈 속에 들어오듯 연설의 내용이 듣는 사람의 영혼 속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가 아무런 근거 없이 부정한 것은 아니다. 퀸틸리아누스에 따르면 어떤 사건의 변호를 맡은 사람은 “자신이 하는 변론을 재판관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신경 쓸 것이 아니라 그가 절대로 오해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하지만 매력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변호인은 아니다. 또 그가 작품을 통해서 만나게 될 어떤 대상이 뛰어난 인격을 갖춘 사람임을 그가 제대로 파악했다고 치자. 그런 사람을 모두가 수준 낮은 로마의 재판관들 같지는 않다.
§832 〮〮〮“처음 글자를 배우고 나서 아주 약간의 진전만을 이뤄내고는 스스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잘못 확신하는 사람보다 더 나쁜 경우는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애매함을 제거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다. 진리에 대한 판명한 의식은 확고한 신념이고, 판명하지 못하고 감성적인 의식은 설득에 의한 확신이다. 진리에 대한 이러한 판명하지 않은 의식은 다른 모든 인식과 마찬가지로 참되고 따라서 참된 확신이거나, 아니면 잘못된 것이고 따라서 잘못된 확신이다.
§837 미학은 자신도 설득력 있는 무언가를 추구하지 않으며, 자신의 자녀인 수사학에도 4)”믿을 만한 것을 참된 것보다 선호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때로는 참되면서 동시에 그럴듯한, 그래서 더 쉽게 사람들의 믿음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무언가를 보여주는 다른 어떤 것을 그저 참된 것들보다 선호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하는 미적 인간도, 그리고 그와 같은 학파에 속하는 “수사학자도 코르넬리우스 켈수스의 말처럼 참된 것과 비슷한 것만을 찾지 않고 진리 자체를, 그것도 매우 자주 가장 엄밀한 의미의 진리를 찾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죽어 없어질 인간들에게 말할 때는 겸손하게도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참되기보다는 오히려 참되어 보이는 것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하기는 한다. 죽어 없어질 인간 중에서는 극히 소수만이 진리가 무엇이며, 사실은 하나인 진리가 사람들에게 드러날 때는 언제나 얼마나 다양한 모습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5)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미학이든 진정한 수사학이든 “분칠을 해서 혈색을 속이고 살을 찌워 자기가 팔고자 하는 노예가 정말로 힘이 센 것처럼 속이는 노예상인처럼” 거짓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형이상학』 참조 구절
§8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은 무언가이다. 그 안에 모순을 포함하지 않으면서 표상될 수 있는 것,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닌 것이 아닌 것은 무엇이든 가능한 것이다.
§620 기표와 기의가 지각 행위를 통하여 결합될 때 기표의 지각이 기의의 지각보다 더 크면 이러한 인식은 상징적이라 불린다. 반면 기의의 표상이 기표의 표상보다 더 크면 그러한 인식은 직관적이다(직관). 두 가지 인식의 경우 모두에 적용되는 기호적 능력이 법칙은 다음과 같다. 함께 결합되는 지각들 중 하나는 다른 지각의 실존에 대해 알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된다.
§666 내가 탐낼 수 없는 많은 좋은 것이 있다. 1) 내가 모르는 것, 2) 내게 아무런 흥미도 못 느끼게 하는 것, 3) 오류를 통하여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것, 4) 즐거움을 느끼게는 하지만 전혀 예견할 수 없는 것, 5) 예견할 수는 있지만 나의 어떤 노력으로도 전혀 예감할 수 없는 것. 또 내가 싫어할 수 없는 많은 나쁜 것이 있다. 1) 내가 모르는 것, 2) 내게 아무런 흥미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 3) 오류를 통하여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 4) 불쾌감을 느끼게는 하지만 전혀 예견할 수 없는 것, 5) 예견할 수는 있지만 나의 어떤 노력으로도 막을 수 있으리라 전혀 예감할 수 없다.
§669 무언가를 열망하거나 혐오하는 사람은 어떤 지각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이런 까닭에 그런 종류의 의도가 생겨나는 근거를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지각들은 열망이나 혐오의 충동적 원인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영혼의 원동력이라 불린다. 영혼의 원동력을 지니는 한, 인식은 (어떤 감정에 사로잡히게 하거나, 감동시키거나, 열망케 하거나, 실제 효과를 낳거나, 실천케 한다는 의미로) 충동적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한, 인식은 (이론적이며 더 넓은 의미로는 죽어 있다는 뜻으로) 무기력하다. 게다가 인식의 무기력함이 아주 완벽하다면 그것은 (사변적이며, 헛되고 무익하다는 의미로) 사변이라 불린다. 따라서 상징적 인식은 그 자체로는 현저하게 무기력하다. 오직 직관적 인식만이 충동적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무심한 상태에서는 지각 전체가 무기력하지만, 순수한 쾌락의 상태나 순전한 혐오의 상태, 혹은 둘 중 하나가 지배적인 경우에는 지각 전체가 충동적이다. 무언가를 움직이는 힘을 지닌 인식은―다른 조건이 같다면―무기력한 힘보다는 더 크며 따라서 사변보다도 더 크다. 그러므로 어떤 인식은 그것이 더 거대하고 더 고상하고 더 참되고 더 명석한 만큼 더 생생하거나 더 판명하며, 더 견고하고 더 열렬할수록 그만큼 더 크다.
『철학적 윤리학』 참조 구절
§252 당신이 스스로에게 이승의 삶을 추구할 의무를 지우는 만큼 그 반대인 죽음을 피하는 이도 계속 행해야 할 것이다. 죽음은 마치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넘어가는 것과 같다. 현명한 사람은 죽음을 접하면서 전적으로 무관심하지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평정한 상태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매우 안락한 집에 대해 기뻐할 때도 지나치게 좋아하지 않고, 자신이 더 좋은 상태가 될 것이 확실한 경우에도 지나치게 놀라워하지 않는다. 죽음이 당신 방의 문을 두드릴 때까지 그렇게 죽음을 기다리라. 그사이에는 할 수 있는 한 죽음을 피하라. 당신이 자신의 죽음의 원인 제공자가 되는 행위인 자살도 피하라. 당신이 제대로 관찰하기가 어려운 관계 속에서라면 품위 있는 죽음이라도 투박한 죽음과 마찬가지로 피하라. 갑작스러운 죽음과 마찬가지로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도 피하라. 스스로의 과오로 자초한 죽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속아서 맞게 되는 죽음도 피하라. 언제나 죽음에 대비하라. 그러면서 적어도 아직 이승의 삶의 목적이 다 이뤄지지 않았으면 할 수 있는 한 때 이른 죽음을 피하기를 간절히 바라라. 죽어야 할 때는 그동안 살아온 삶에 만족하며 당신에게 더 이상 이승의 삶이 필요하지 않다고 확신하면서 죽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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