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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Une vie)일상/book 2019. 11. 25. 22:14
연남동에는 번화가로부터 아주 살짝 빗겨난 골목에 <모파상(Maupassant)>이라는 카페가 있다. 하루는 일이 끝나고 머리도 식힐겸 홍대 일대를 정처없이 걸어다니며 군상(群像)을 바라보다—나의 주특기다=_=—바로 이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 메뉴보다도 밀크티가 간판인 집이어서 유리용기에 담긴 밀크티 한 잔을 먹었었는데, 정작 이 카페에서 읽었던 책이 카프카의 단편집이었다. 이 카페는 어쩌다 모파상을 모티브로 이름을 짓게 되었을까 떠올려보다가 내가 모파상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들어보기만 했지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곧장 인터넷으로 이 책을 주문했다!!
막상 이 책을 집어들기까지는 또 시간이 걸렸지만, 막상 손에 쥐어지고 나니 소설답게 술술 읽힌다. 원제 《Une vie》. 삶 또는 인생. 번역가가 지적하듯이 일본의 번안에서 유래된 <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이 대단히 아쉽다. 제목에 성별을 달아놓고 보니 마치 어느 한 쪽의 관점에 서서 삶을 관찰하고 해석하게 되니 말이다. 꼭 마르그리트 뒤라의 작품 <연인>이라는 한국어 제목이 원제 《L'armant》이 가진 정관사의 뉘앙스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정관사 'Un'이나 'Des' 대신 정관사 'Le'가 특정짓는 대상(Armant, 연인)은 <연인>이라는 그 정서를 한국어에서는 곧바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언뜻 제목을 접하는 독자라면 <연인>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바로 그 때 그 연인'이라는 느낌을 받기보다는 '보편적 연인'을 연상할 것이다.
각설하고 이 책은 다름 아닌 노르망디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이 직전에 읽은 북유럽 역사책에서 바이킹 족이 뿌리를 내렸던 노르망디 공국이 비중있게 다뤄진 바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했고, 마르셀 프루스트 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무대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반갑기도 했다. 기 드 모파상의 자연주의 소설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현대적 서술기법의 초기 모습을 보여준다고도 하는데, 과연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프루스트의 글쓰기가 살짝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극중 주인공, 잔느를 빼놓을 수 없다. 치정(癡情)으로 인해 겪는 주인공의 괴로움, 노쇠함, 덧없음, 허무함, 고통, 불신, 심지어 공포에 이르기까지 잔느는 개인이 감내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것이지만, 불과 300 페이지 남짓의 책 안에 한 여인의 생애가 담겨 있고, 그렇게 묘사된 그녀의 삶은 가공(架空)되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있음직하다. 그만큼 그녀의 절절함이 명료한 문장 안에 고스란히 묻어났기 때문이다. 기 드 모파상은 대체로 단편집이 널리 알려져 있다보니 단편집도 찾아서 읽고 싶지만, 사놓고 안 읽은 책도 많고, 또 겉멋이 들어 정작 도외시했던 책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조만간에는 셰익스피어의 책들도 다시 찾아—아마도 어떤 책들은 너무 낯익어서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들도 있을 것이다—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잔느는 갑자기 자신이 밝은 빛 속에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손으로 가리고 있던 머리를 쳐들자, 새벽의 광채에 눈이 부셔 두 눈을 감았다.
미루나무 가로수 길 뒤에 일부가 가려진 붉게 물든 구름 봉우리가 잠에서 깨어난 대지 위로 선혈 같은 빛을 투사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번쩍이는 구름을 가르고, 수목이며 들판이며 대양이며 수평선 전체를 불길로 선명하게 밝히면서, 타오르는 거대한 구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느는 행복감으로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사물의 찬란한 앞에서 열광적인 기쁨과 무한한 감동이 마음을 휘감아서 그녀는 기절이라고 할 것 같았다. 그것은 그녀의 태양이었다! 그녀의 새벽이었다! 그녀 생의 시작이었다! 그녀 희망의 동틈이었다! 그녀는 태양을 껴안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빛나는 공간을 향해 두 팔을 뻗쳤다. 그녀는 이 빛의 발현처럼 신성한 무엇을 말하고 싶었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력한 열광 가운데 마비된 듯 그대로 서 있었다. 그래서 두 손을 얼굴을 파묻었고,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감미로운 눈물을 흘렸다.
—p.28~29
그동안 먼 고장에 대한 그녀의 그리움도 차츰 약해졌다. 어떤 물이 침전되어 석회층을 형성하는 것처럼 습관이 그녀 삶에 체념의 층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일상생활이 오만 가지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한 일종의 관심이, 단순하고 시시한 규칙적인 일들에 대한 근심이 그녀의 마음속에 다시 생겨났다. 일종의 명상적인 우수(憂愁)가, 산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환멸이 그녀의 마음속에 퍼져 나갔다. 그녀에게는 무엇이 필요했던가? 그녀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알 수 없었다. 어떤 사교적 욕구도 그녀를 사로잡지 않았다. 쾌락에 대한 어떤 갈구도, 있을 수 있는 기쁨을 향한 어떤 충동조차도 없었다. 도대체 어떤 기쁨이 있단 말인가? 세월에 빛이 바랜 낡은 거실 의자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보기에 모든 것이 서서히 퇴색하고, 소멸하며, 희미하고 암울한 색조를 띠어 가는 것이었다.
—p.123
커다란 벌레 한 마리가 촛불에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왔다. 벌레는 공처럼 벽에 부딪히며, 방의 이 끝 저 끝으로 헤맸다. 윙윙대며 벌레가 내는 소리에 정신이 산만해진 잔느는 벌레를 보려고 눈길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하얀 천장 바닥을 배회하는 벌레의 그림자밖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괘종시계가 가볍게 똑딱거리는 소리와 또 다른 작은 소리, 아니 차라리 거의 분간되지 않는 미세하게 살랑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침대 발치에 놓인 의자 위에 던져 놓은 옷 속에 잊힌 채 들어 있던 엄마의 회중시계가 계속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리고 불현듯 잠시도 멈추지 않는 이 기계 장치와 어머니의 죽음이 막연히 비교되면서, 잔느의 마음에 날카로운 고통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p.225
그녀는 항상 폴을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무얼 하고 있을까?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아이는 이따금 내 생각을 할까?' 농가들 사이에 움푹 들어간 길을 천천히 산책하며,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온갖 상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특히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자기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간 낯모르는 여자에 대한 가라앉힐 길 없는 질투였다. 이 증오심만이 그녀를 붙들어서, 행동하는 것을, 아들을 찾아나서는 것을, 그의 집에 쳐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아들의 정부가 문간에 서서 "무슨 일로 오셨죠, 부인?" 하고 묻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머니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그녀는 그런 식의 만남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다. 어떠한 과실(過失)도 오점도 없이 항상 순결을 지켜 왔던 여자의 오연한 자존심 때문에 그녀는 영혼 자체까지 비열하게 만드는 추잡한 음욕 행위에 사로잡힌 인간의 온갖 비열함에 점점 더 격분하게 되었다. 관능의 모든 불결한 비밀, 사람을 타락시키는 애무, 떼어 놓을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예상되는 모든 의혹을 생각할 때, 그녀에게는 인간성이 불순한 것처럼 여겨졌다.
—p.320~321
미래를 기대하던 시절, 포근한 봄날이면 빠져들던 그 달콤함과 어지러운 도취를 다시 맛보면서, 잔느는 그때와 똑같은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미래가 닫혀 버린 지금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되찾은 것이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아직도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그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다. 마치 되살아난 이 세계의 영원한 기쁨이란 것도 그녀의 메마른 피부, 그녀의 차가워진 피, 그녀의 짓눌린 영혼 속으로 스며들면서, 거기에는 허약하고 비통한 매력밖에 투사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또한 그녀 주위의 도처에서 무언가 좀 변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태양은 그녀의 젊은 시절보다 얼마간 덜 뜨겁고, 하늘은 좀 덜 파랗고, 풀 역시 덜 푸르른 것 같았다. 꽃들은 색이 더 희미해지고 향기도 약해져서, 전만큼 사람을 완전히 취하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떤 날에는 안락한 삶의 느낌이 그녀의 마음속에도 침투하여, 그녀는 또 다시 꿈꾸고, 희망하고, 기대하기 시작했다. 운명의 집요한 가혹함에도, 인간이란 언제나 날씨가 화창할 때면 희망을 품기 마련 아니겠는가?
마음속에 어떤 자극을 받아 내몰리듯, 그녀는 몇 시간씩 무턱대고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때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앉아서 서글픈 상념에 빠져들었다. 왜 자기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을 받지 못했던가? 왜 자기는 평범한 삶의 단순한 행복조차 누릴 수 없었던가?
—p.34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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