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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집은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독일 현대사>를 읽으면서 몇 가지 독일 현대소설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중 귄터 그라스의 이름은 리스트의 가장 상단에 있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읽어보고 싶었지만—심지어 읽을 요량으로 이미 사놓은 두 권의 책도 있다—엄밀히 말해 그는 오스트리아 작가다. 노벨 문학상을 거머쥐었지만, 이후 <양파 껍질을 벗기며>라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나치 행적을 고백한 문제적 인물, 귄터 그라스.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렸던 그는 전후 독일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개인적으로 귄터 그라스의 글은 굉장히 어렵게 느껴진다.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떠나서, 응당 세계적인 고전이 갖춰야 할 보편적인 메시지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양철북>도 두 번을 펼쳐 두 번을 낑낑대며 읽어보다 덮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독일 현대사에 관한 지식으로 무장(?)된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보면, 귄터 그라스의 글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독일사회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그가 살았던 시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 <게걸음으로>라는 작품도 <독일 현대사>를 읽지 않은 채 무작정 맞닥뜨렸다면,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님에도 <양철북>처럼 진저리치며 덮어버렸을 것이다.
상당히 현대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소설인 것이, 온라인상의 혐오발언을 다룬다. 실제로 소설은 귄터 그라스가 사망한 해이기도 한 2015년에 빛을 보았으므로 아주 근래의 작품이다. 작품에서는 온라인을 통해 교묘하게 워딩을 바꿔가며 나치즘과 애국심을 병치시키는 동시대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과거(나치시절)의 사건들과 뒤섞여 아주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반유대주의라는 사생아적 발상—글의 화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를 모른다고 말한다—은 탈나치화가 공론화되고 있는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마치 24번째의 여분 염색체가 있어 유대인을 결정짓는 DNA가 있기라도 하다는 듯 낙인찍기에 대한 도착(倒錯)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된다.
실제로 2차대전 시기를 살았고 또한 살아남았던 툴라의 나치즘은, 아버지도 누구인지 모를 아들 세대에서는 잠시 희석되는 듯했지만, 손자 콘라트헨(애칭 코니)을 통해 다시 한 번 악랄한 미소를 흘린다. 뼛속까지 냉전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세속화되고 탈냉전된 시대를 살고 있는 코니에게까지 나치즘이 마수(魔手)를 뻗어 형태를 바꿔가며 진화하는 모습은 가증스럽지만, 종종 스킨헤드들이 독일사회에서 일으키는 크고 작은 테러들을 떠올려보면 그리 먼 세상 얘기만은 아니라 생각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형태는 조금씩 다를지 모르지만, '존중'이나 '배려'와 달리 '혐오'의 원형은 매우 단순하고 투박하며 값싸다.
때문에 오늘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온라인상의 비방전을 보고 있노라면, 나 같이 깊은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 말초적인 단순성에 중독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중독'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비판'의 기능이 마비된다는 것이다. 이는 '취미'나 '애호'와 달리 다른 장르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주 공격적인 방법으로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한다. 혐오발언과 혐오감정을 부추기는 감정의 저변에는 일종의 '신념'이 깔려있지만, 혐오를 '종교'를 동일선상에 놓고 볼 수 없는 까닭은 이들이 보편적인 선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구호는 건설적이기보다는 파괴적이다. 사실 혐오주의자(-phobia)들은 흑백으로 손쉽게 나뉘는 것이 아니면 크게 관심 자체를 두지 않는다.
툴라가 법정에서 코니를 위해 최대한 합리적으로 변론을 펼치다가 한순간 자기 함정에 빠져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은, 그녀가 단단히 구축해 놓은 구스틀로프호의 세계 안에서, 히틀러의 세계 안에서, 울브리히트의 세계 안에서 도저히 반박할 거리를 건져낼 수 없는 순간에 나타난다. 흑백세계 안에서 그녀의 몸은 편안했고 그녀의 마음은 안정되었다. 이렇게 편안하고 이는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원주의를 기치로 하는 현대 독일사회를 그녀가 순 엉터리 투성이라 여기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다원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란 코니는? 그 아이가 습득하고 체화한 혐오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귄터 그라스는—물론 말년에 자기 허물조차 관리하지 못하는 지식인이라는 비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지만—처음에는 간헐적이다가 점점 하나의 일정한 파동을 그리기 시작하는 현대독일의 극우주의를 경계하고자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힌다. 무력한 관찰자로 등장하는 화자—툴라의 아들이자 콘라트헨의 아버지—는 낀 세대로서 툴라의 병적인 극우주의와 아들의 차가운 극우주의를 지켜보며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어떻게 된 세상이란 말인가? 나는 보잘 것 없는 언론인이었을지언정 양심에 거리끼는 일은 없이 살아왔거늘, 내 혈육의 정신을 통째로 뒤흔들고 있는 뿌리깊은 비이성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수분(受粉)된 것일까?
우리는 화자처럼 끝없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일상을 한 마디 말로 간단히 불안하게 만들어버리는 극단주의, 혐오, 테러리즘을 어떻게 양지(陽地)로 끌어올려 공론화하고, 어떻게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 중화(中和)시킬 것인가. 호시탐탐 민주주의의 빈틈을 비집고 얼굴을 내미는 극단주의는 오늘날 한국 역시 당면한 이슈이며, 비록 쉽지 않은 글이나마 귄터 그라스의 글은 살갗을 파고드는 증오심에 관하여 강력한 비판을 제시한다.
그렇다. 나에게는 진짜 아버지란 없다. 서로 바뀌어도 상관없는 환영(幻影)들만 있을 뿐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이제 나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저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여하간 어머니 자신도 1945년 1월 30일 부모와 함께 고텐하펜옥스회프트 부두에서 칠천몇백 명과 함께 배에 올랐을 때 배 속에 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 배의 이름을 따온 바로 그 사람의 경우에는 헤르만 구스틀로프라는 상인이 자기 아버지임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그리고 짐을 너무 많이 실은 그 배를 격침하는 데 성공한 알렉산더 마리네스코는, 오데사에서 보낸 소년 시절에 ‘블라트네트’라고 불린 도둑 일당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마리네스코로부터 이따금 심하게 두들겨 맞곤 했는데, 바로 그 점이 뚜렷이 느낄 수 있는 아버지로서의 애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베른에서 다보스로 여행하면서 그 배가 어느 순교자의 이름에 따라 불리도록 만든 다비드 프랑크푸르터에게는 심지어 정통파 랍비인 아버지가 있었다. 그러나 애비 없는 자신인 나도 결국은 아버지가 되었다.
—p. 29~30
지금 인정하는 바이지만, 어머니는 많은 것을 언제나 너무 과장해서 말했고 시간대도 틀리게 말했다. 그녀는 가차없이 버리거나 아니면 집착한다.
—p. 51
근래에는 할리우드에서 상영된 타이타닉호의 침몰이 인기를 끌었는데, 엄청난 연출 방식으로 제작된 감상적인 작품, 곧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선박 참사로 상품화되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난센스는 하인츠 쇤이 객관적으로 입증한 숫자들과 극단적으로 대비되었다. 그 반향이 있을 것임은 당연했다. 즉 그 후로 구스틀로프호가 사이버 공간에서 떠돌아 다니면서 가상의 파도를 만들고 있으며, 증오 진영이 온라인에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유대인에 대한 사냥이 시작되었다. 다보스에서의 살인이 마치 어제 일어난 사건이기라도 한 것처럼 극우주의자들은 그들의 웹사이트에서 ‘구스틀로프를 위한 복수!’를 촉구했다. 가장 격렬한 어조로 외치는 ‘구타 사이트’는 아메리카와 캐나다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독일어가 통용되는 인터넷에서도 월드와이드웹 내의 ‘민족적 저항’이나 ‘툴레넷’ 같은 주소로 그들의 증오심을 분출하는 홈페이지들이 증가하고 있다.
—p. 80
오로지 한 점만을 응시하며 마침내 거기에 불기운이 스며들어 연기가 나다 불이 붙게 만드는 사람들은 결코 나에게 섬뜩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예컨대 구스틀로프는 오로지 총통의 의지에 따라 목표를 정했다. 그리고 마리네스코는 평화 시에 오로지 배를 침몰시키는 연습만 했다. 또한 다비드는 원래는 자신을 쏘려고 했으나, 나중에는 자기 민족에게 그 어떤 신호를 보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몸뚱이에다가 네 발의 총탄으로 구멍을 뚫었다.
—p. 86
어머니가 내 아들에게 그런 영향을 주었다. 그 때문에, 그리고 어머니 당신이 그 배가 침몰할 때 나를 낳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미워한다. 또한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이 어느 정도 원망스럽다. 수천의 다른 사람처럼 “각자 알아서 자신을 구하시오.”라는 말이 떨어졌을 때, 어머니 당신이 만삭의 몸으로 배 위에 구명조끼를 걸치긴 했지만, 차가운 물속에서 얼어 버렸거나 뱃머리 쪽으로 가라앉는 배가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배속 아이와 함께 휩쓸려 들어가 버렸더라면 차라리…
—p. 88
오랫동안 나는 내 예감에 의문을 제기했다. 네 혈육이 설마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어느 정도 좌익자유주의적인 교육을 받은 자가 그처럼 길을 잃고 심하게 우익화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가비 눈에도 띄고 말았을 텐데…… 그게 아니면?
—p. 92~93
다시 그 저주받은 날짜가 문제다. 지난 역사, 더 정확히 말해서 우리와 관계되는 역사는 꽉 막힌 변소와도 같다. 우리는 씻고 또 씻지만, 똥은 점점 더 높이 차오른다. 예컨대 그 빌어먹을 30일의 경우를 보라. 그 날짜는 나에게 들러붙어서 낙인을 찍는다. 아무짝에도 의미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생 시절이든 대학생 시절이든 혹은 신문 편집자이자 남편이었던 시절이든, 친구나 동료 아니면 가족과 함께 내 생일을 기념하는 것을 언제나 거부해 왔다. 나는 그러한 모임에서—건배의 말이든 아니든—그 세 번이나 저주받은 30일의 의미가 본의 아니게 강조될까 봐 늘 걱정해 왔다. 비록 폭발하기 직전까지 살이 쪘던 그 날짜의 덩치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야위었고, 이제 무해해졌고, 다른 많은 날짜들과 마찬가지로 달력 속 하루가 되어 버린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 우리는 과거와 소통하기 위한 말을들 써 왔다, 과거는 속죄되고 극복되어야 한다. 과거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은 슬픔을 이기기 위한 정신적 노력을 다함을 뜻한다.
—p. 144
자주 영화화되는 타이타닉호 사건은 선두를 지키려고 했다. 그리고 루시타이나호 침몰이 그 뒤를 따랐다. 이 배는 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 잠수함에 의해 침몰되었고, 그 결과 미국의 전쟁 개입을 유발하거나 가속화했다고 한다. 또한 한 고독한 목소리가, 집단 수용소 포로를 실은 아르코나호가 노이슈테트 만에서 영국 폭격기들에 의해 침몰되었다는 정보도 제공해 주었다. 착오로 인한 이 사건은 종전 며칠 전 일어났으며 이제 인터넷에서 사망자 7000명이라는 수치로 리스트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고야호가 같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경쟁적인 수치 비교에서 최후의 승자는 구스틀로프호였다. 내 아들은 그 애 특유의 철저함에 대한 열정으로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그 잊힌 배와 인간 화물들을 세계인의 의식 속으로 밀어넣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그 배는 톱니꼴로 선명하게 그려진 어뢰 명중탄을 포함한 스케치로 분명하게 부각되었으며, 이후로보 불행 그 자체로서 전 지구적 의미를 띤 이름이 되었다.
—p. 166~167
태만함에서 온 당연한 업보였다. 안 그래도 모자라는 구명보트를 왜 조심스럽게 바다 위로 내리지 않았단 말인가? 왜 보트를 매다는 기둥과 도르래의 얼음을 수시로 제거하지 않았는가? 또한 뱃머리에서 격벽 차단되었지만, 어쩌면 살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승무원들이 없었던 게 안타깝다. 교육 함대 예비 수병들은 구명보트를 다루는 데 미숙했다. 역시 배 갑판 중 하나였던 얼어붙은 상갑판은 거울처럼 미끄러웠기 때문에 배가 기울었을 때 상갑판으로 몰려온 사람들은 미끄러졌다. 일부 사람들은 붙들 데가 없었기 때문에 바다로 떨어졌다. 모든 사람이 구명조끼를 입고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바닷속으로 몸을 날렸다. 선박 내부의 열기 때문에 상갑판으로 몰려왔던 사람 대부분은, 대기 온도 영하 18도 그리고 마찬가지로 낮은 수온—2도 혹은 3도였던가?—에서 냉기에 의한 쇼크를 이겨 내고 살아남기에는 너무 얇게 입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뛰어내렸다. 이제 함교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밀어닥치는 인파를 아래쪽 유리로 된 산책 갑판으로 인도하여 문을 잠그고 무장하여 지키라는 것이었다. 구조선이 올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이 조치는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좌현에서 우현까지 연결된 166미터의 유리 진열장은 곧 1000명 이상을 그 안에 가두었다. 완전히 파국에 이르러 너무 늦었을 때에야 비로소, 산책 갑판의 방탄 유리벽 여기저기가 파열되었다.
—p. 167~168
그러한 것은 흑백 영화에서 스튜디오 배경에 나타난 그림으로 시도되었다. 밀어닥치는 인파, 꽉 막힌 통로, 어떤 계단을 통해서든 위로 올라가려고 사투하는 장면, 폐쇄된 산책 갑판 안에 갇힌 사람들로 분장한 엑스트라들, 배가 기울자 드러나는 바닥, 물이 차 오르고 배 안에서 수영하고 익사하는 장면들. 영화에서는 아이들도 보인다. 엄마와 헤어진 아이들, 손에 흔들거리는 인형을 든 아이들, 사람들이 이미 떠나 버린 복도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 근접 촬영한, 혼자된 아이들의 눈. 하지만 4000명이 넘는 젖먹이, 아이 그리고 소년소녀들은—그들 중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오로지 비용 때문에 영화화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추상적인 수치로만 남아 있다.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대략적으로 헤어릴 수밖에 없었고 수천, 수십만, 수백만에 달하는 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0’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즉, 통계 놀음에서 죽음은 수치 뒤로 사라져 버린다.
—p. 168~169
동쪽과 서쪽에 스탈린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나는 어머니가 우는 것을 보았다. 심지어 그녀는 촛불을 켜기까지 했다. 그때 여덟 살인 나는 부엌 식탁에 서 있었다. 학교에는 갈 수가 없었다. 등에 반점이나 그 밖의 어떤 근질거리는 게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마가린과 응유(凝乳)와 더불어 식탁에 오를 감자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어머니가 타오르는 촛불 뒤에서 스탈린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것을 보았다. 감자와 양초와 눈물은 당시에 재고가 부족한 물품이었다. 렘 거리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 동안 그리고 슈베린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를 통틀어서 나는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실컷 울고 난 어머니 눈은 예니 아주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알던 대로 멍하고 멀뚱멀뚱했다. 랑푸르 목공소 마당에서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툴라 얼굴에 다시 창문이 생겼네.”
—p. 208
그래서 그 사람은 나를 ‘지각한 아버지’라 부르겠노라고 고집한다. 내가 자기 앞에 놓인 일로부터 뒤로 게걸음질하며 행하는 모든 것, 상당히 진실에 가깝게 고백하거나 강요에 의해 체념해 버리는 모든 것은, 그 사람 평가에 따르면 “뒤늦게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이루어진 것이다.
—p. 215~216
그 정도로 그리고 더 많은 것에 대해 상당히 정확하게 어머니는 변호인 측 증인으로서 표준 독일어로 말하였으며, 용어도 세심하게 선택하였다. 콘라트의 “양심의 문제에 대한 예민한 접근”, “진리에 대한 불굴의 사랑” 그리고 “독일에 대한 범할 수 없는 자존심” 같은 말로 법정에서 손자를 칭송하였다. 하지만 콘라트의 컴퓨터 친구가 유대인 청년이었건 말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그녀가 잘라서 말하자마자, 청소년 담당 검사가 그녀에게 사실 관계를 확인해 주었다. 즉 살해된 자의 부모는 결코 유대인 혈통이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 슈트렘플린은 뷔르템부르크의 목사관 출신이고, 그 부인은 여러 세대 동안 바덴에 정착해 살아 온 농부 가족 출신이라는 사실이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 있고 서류로도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녀는 여우 목도리를 만지작거렸고, 수초 동안 멀뚱멀뚱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는 표준어를 쓰려던 그동안의 노력을 포기하고 소리쳤다. “아냐, 새빨간 거짓말! 그 다비드가 가짜 유대인이라는 걸 우리 콘라트헨이 몰랐을 리가 없어. 자기 자신과 남을 속이다니, 매번 진짜 유대인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노상 우리의 치욕스러운 짓에 대해서만 말하더니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사정이 바뀌는 건 아닙니다. 저에게 다비드라고 알려진 그 사람이 진정 유대인으로서 말하고 행동했는가 하는 그 점이 제게는 중요했습니다.”
—p. 222~223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무죄 방면될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내 어머니와 고루한 교육 윤리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내 전처와 나는—그녀는 다소 유보적이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교육학의 한계를 지적했다.—우리 둘의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아, 아버지 없이 태어난 나는 아버지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
—p. 226
내 아들은 나를 미워해 왔던가? 코니는 도대체 미워할 능력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여러 차례 부인했었다. 나는 콘라트의 증오심을 사물화된 증오심이라고 부르고 싶다. 희미하게 타오르는 증오, 지속적으로 타오르는 난로 같은 증오.
—p. 238
“아무도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했고 앞으로 무슨 생각을 하게 될지 알 수는 없다. 그 애의 뇌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뇌란 모두 다 침묵을 지킨다. 말하자면 출입 금지 구역인 것이다. 언어 사냥꾸이 들어갈 수 없는 미지의 땅이다. 두개골을 열어 본들 소용없는 일이다. 게다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자신을 속이고 만다. 가령 그 순간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라고 시작하는 문장들이라든지 그의 생각은 이랬다……라는 문장들은 이미 목발을 짚고 있는 불구이다. 그 어느 것도 사람 머리보다 자신을 잘 숨길 수는 없다. 심지어는 강도 높은 고문조차도 빈틈없는 자백을 받아 낼 수 없다. 그렇다. 분초를 다투는 죽음의 순간에도 생각은 살짝 빠져나간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이 보는 것만을 볼 뿐이다. 표피가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지만, 그로써 족하다. 그러므로 그 점에 있어서는 어떠한 생각도, 두 번 세 번 심사숙고한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말은 아껴야 하는 법. 그래야만 우리는 보다 빨리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p. 244~245
만일 아들이, 아버지에게는 발설이 금지되었고 그 때문에 수년 동안 가택 연금 상태에서 고통받아 온 아버지 생각을 알아차리고 순식간에 그 생각을 자기 것으로 하며 심지어 행동으로까지 옮긴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옳은 편에 서고, 거짓말만은 하지 않으며, 대외적으로는 정확한 입장을 전달하려고 언제나 노력해 왔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제심이라고 부른다. <슈프링거>에서 근무할 때건 <타츠>에 있을 때건 나는 언제나 주어진 대본에 따라서 노래를 했다. 그러므로 내가 직접 처리한 일에 대해서는 상당히 확신하기도 했다. 증오심이 휘저어 거품을 일으키고 빈정대면서 일을 재빨리 처리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번갈아 하는 것이 나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공격 선두에 선 적도, 사설 논조를 결정한 적도 없다. 주제는 다른 사람들이 제시했다. 나는 중도를 지켰으며, 왼쪽으로든 오른쪽으로든 완전히 미끄러져 떨어지지는 않았고, 모서리에 부딪히지도 않았다. 강물을 따라 헤엄치거나 흐름에 몸을 맡기면서 간신히 연명해야 했다. 좋다, 그건 아무래도 내 탄생 배경과 관계 있는 것 같다. 그것으로 거의 모든 게 설명될 수 있었다.
—p.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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