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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faction)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국내에 <망가진 세계>라고 소개되었지만 원제가 <Kaputt>이다. 독일어로 그냥 ‘망가진 상태’을 뜻하는 두 음절의 간결한 형용사다. 한편 작가의 이름이 상당히 독특한데, 쿠르초(Curzio)라는 이름은 쿠르트(Curt)라는 원래 이름을 어느 정도 살려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라파르테(Malaparte)라는 필명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Bonaparte Napoleon)의 이름에서 차용한 것이다. (아버지의 성씨는 게르만 색채가 물씬 풍기는 주케르트(Suckert)다.) 이는 하나의 말장난으로, 직역하면 ‘좋은 편’이라는 의미의 ‘보나파르트(Bonaparte)’의 반대 의미로 ‘말라파르테(Malaparte)’라는 이름을 고심 끝에 택했다고 한다. 일종의 반테제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 유럽을 지배한 나폴레옹처럼 전유럽적인 가치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재택근무를 할 즈음 집에서 발견한 책이다. 본가에 마땅히 읽을 책이 없나 뒤적거리다 떠올린 책이 사놓은 지 좀 된 <망가진 세계>. 아마 책이 출간되자마자 샀던 걸로 기억하는데, 얼마나 방치되었기에 원래 이렇게 출간됐나 싶을 정도로 공기에 노출된 책 옆면이 갱지(更紙)처럼 색이 노랗게 바래 있었다;; 여하간 저널리스트가 이렇게 문학적인 글을 멋지게 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 책이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많아서 수집하고 싶은 표현도 많았던 책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인 ‘파리(곤충 파리)'에서 세기말적 향락에 젖어 있는 무솔리니 정권 하 지배계층의 풍경을 보는 지점에서, 독서가 약간 정체(停滯)를 겪었다. 답답한 독서를 하면서도, 한 나라가 몰락해가는 모습이 과연 이런 광경일까 이미지를 그려가며 이탈리아 근현대사에 함께 관심이 갔다.
아마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내가 읽은 책 가운데 <망가진 세계>와 가장 닮은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다만 프리모 레비가 수용소의 수감자로서 겪은 전쟁에 대해 그리고 있다면, 말라파르테는 종군기자이자 장교로서 전쟁통을 누비며 목격한 것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인가>과는 좀 다른 측면을 조명하고 있다. 특히 말라파르테가 접촉한 사회고위층―독일장교들을 포함하여 호엔촐레른의 귀족에 이르기까지―의 대화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상대적으로 변방에 위치하는 행운을 누린 핀란드와 스웨덴, 루마니아까지 아울러 서술한다. 물론 후일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편파적으로 각색된 것이라는 <망가진 세계> 속 모델들의 비난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라 하면,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많이 공감할지도 모르겠지만, 유리 의안(義眼) 이야기 하나와, 책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 무솔리니와 영국대사 드러먼드를 비교하는 대목이다. 유리 의안 이야기는 전격전을 치르는 독일인들의 아주 고약한 위선을 비웃는 이야기이고, 무솔리니와 드러먼드를 비교하는 대목은 과거 로마의 찬란한 유산 위에서 점점 몰락해 가는 이탈리아와 이 노쇠한 강대국을 이끌어가는 지도자 무솔리니의 무능함을 폭로한다.
사실 감상평을 쓰기에 앞서 짚어둘 필요가 있는 것은 무솔리니가 집권할 때까지 말라파르테는 파시스트 당원이었다는 점이다. 외부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가입한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고 레지스탕스 활동까지 자처했던 그가 자발적으로 6년여간 파시스트당에 당적을 둔 것이다. 이후 무솔리니의 실정을 지켜보며 유럽 전역에 이탈리아의 부조리를 고발했다고는 하나, 어쨌든 그의 과거행적은 그가 조국 이탈리아에 가한 비판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사실 책의 말미에 달린 이러한 해설을 읽으며 떠올랐던 또 한 명의 인물은 귄터 그라스다. 나치즘과 네오나치즘을 맹렬히 비판했던 그는, 말년에 자신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가담한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말라파르테는 좌파 진영에서 공산당 이력이 있는 지식인들에게는 우리 사회가 적대적이지 않으면서, 우파 진영에서 파시즘 이력이 있는 (그렇지만 지금은 손을 씻은) 지식인들에게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느냐며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하지만, 사실 이런 유비론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여기서 말하는 이념상 좌우는 좀 더 유럽적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만 말라파르테를 포함한 적잖은 지식인들이 파시즘이라는 집단 광기에 사로잡힐 만큼 파시즘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던 것인지, 그저 그 시대가 그렇게 휩쓸릴 수밖에 없는 시대였던 것인지 궁금증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마비된 합리성이란 무엇이며, 구한말 지식인들이 처했던 상황이나 군부독재를 눈앞에 둔 해방 직후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지도층의 모임과 대화가 런던이나 파리, 워싱턴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닮는 것은 좋지만, 로마를 닮아서는 안 된다는 한 구절에 왠지 모를 여운이 남는다.) 그럼에도 전쟁의 포화 속에 노트북도 없던 시절 온갖 고초를 거쳐가며 원고만큼은 지켜낸 이 르포르타주는 인상적이다.
“그들의 잔인성은 두려움 때문이지요. 공포라는 병에 걸린 겁니다. 그들은 크랑케스폴크, ‘병든 민족’입니다. ……그들은 두려운 겁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두렵고 모두가 두렵습니다. 그들이 죽이고 파괴하는 건 그 공포 때문이지요.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독일인들은 남녀노소 막론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심지어 고통당하는 것도 겁내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고통을 즐긴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신들 외의 살아 있는 모든 것, 자신들과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질병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약자, 무방비 상태인 사람, 병자, 여성과 어린이를 두려워합니다. 노인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이 느끼는 공포를 보면 저는 늘 깊은 연민을 느낍니다. 유럽이 그들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다면 아마 독일인들은 그 끔찍한 병을 치유할 수 있을…….”
―p. 21~22
“말을 풍경처럼 그렸습니다. 스웨덴의 자연에는 뭔가 이상한 게 있어요. 말과 같은, 말에게서 느낄 수 있는 어떤 광기 같은 것 말입니다. 말과 같은 온화함, 말과 같은 병적 민감성, 말과 같은 자유롭고 추상적인 상상 같은 게 있지요. 말을 연상시키는 스웨덴 자연의 광기는 근엄하고 짙푸른 거목들은 물론이고 비단처럼 반짝이는 호수와 숲, 섬과 구름, 그리고 멀리 펼쳐진 가슴 탁 트이는 환한 풍경에서도 드러납니다. 백연(白鉛)처럼 투명한 하양, 따스한 선홍, 차가운 청색, 촉촉한 초록, 화사한 청록색이 명징하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루는 풍경입니다. 그러면서도 온갖 색채가 숲이나 풀밭, 수면 위에 오래 머물지 않고 나비처럼 사뿐사뿐 옮겨다니지요. 스웨덴의 풍경을 만져보면 손가락들이 나비날개처럼 느껴집니다. 그 풍경은 말의 털처럼 보드랍습니다. 그 풍경은 왁자지껄 사냥이 시작되면 회색빛, 분홍빛 하늘 아래 풀과 잎들이 무성한 곳으로 날쌔게 달려가는 말의 털에서 보이는 색조처럼 다채롭고, 바람처럼, 빛이 납니다……”
―p. 31~32
……“우리는 좀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좀더 위엄을 갖추고 자부심을 가져야겠죠. 하지만 맞는 말씀일 겁니다. 겸손만이 우리를, 곤두박질친 굴욕에서 구해낼 수 있을 테니까요.”……“우리는 자부심이라는 병을 앓고 있어요. 그리고 자부심은 우릴 굴욕에서 구해내기에는 충분치 않지요. 우리의 행동, 우리의 생각이 순수하지 않은 겁니다.”
―p. 39
햇빛은 젊음을 잃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쾌청한 여름날이 유령처럼 끝없이 계속됐고 일출도 일몰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한낮의 얼굴에는 이미 주름이 잡혔고 저녁이 조금씩 어둠을 들이밀었다. 아직 훤한 빛을 머금고 있긴 하지만 검은 어둠이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다. 나무와 바위와 집들과 구름은 다가오는 밤을 예감하며 푸근한 가을 풍경 속으로 서서히 녹아들었다.
―p. 47
……해바라기들이 바람에 출렁거리고 있었다. 멀리 지평선 아래로 폭풍우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고통스럽게 헐떡이는 검은 허파와 같았다. 잔뜩 부풀어오르고 속은 텅 빈 거대한 허파 같았다. 하늘이 부풀었다 오그라들었다 하는 것이, 거대한 허파처럼 숨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미로처럼 얽힌 혈관과 기관지 같은 형상이 매캐한 번개의 섬광에 언뜻언뜻 허옇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작은 나무문을 열고 도로로 가봤다. 말의 사체는 웅덩이에 잠긴 채 널브러져 있고, 머리통은 흙먼지 날리는 도로 끝에 놓여 있었다. 주름진 배는 한껏 부풀어올랐지만 부릅뜬 퉁퉁한 눈은 촉촉하게 반짝였다. 먼지투성이의 노란 갈기는 엉긴 피와 진흙이 말라붙어 뻣뻣하게 곧추서 있었다. 고대 전사들이 쓰던 투구의 갈기 장식 같았다. 나는 길섶에 앉아서 울타리에 어깨를 기댔다. 검은 새 한 마리가 천천히 상공을 선회했다. 금세라도 비가 퍼부을 듯한 기세였다. 돌풍이 하늘을 질주할 때마다 쉬잇 소리와 함께 길가에 흙먼지 구름이 일었다. 티끌들이 얼굴이며 속눈썹을 후비고 개미떼처럼 머리칼에 들러붙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이다. 나는 농가로 돌아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삭신이 쑤시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p. 51
그사이 해가 푸른 지평선 위로 떠올랐다. 새들의 노랫소리는 점점 더 우렁차고 활기가 넘쳤다. 햇빛은 주철 같은 호수 표면을 망치로 두드리듯 내리쪼였다. 물비늘이 금속성으로 떨리면서 호수 가장자리로 번져나갔다. 마치 바이올린 소리가 연주자의 팔을 타고 떨리면서 번져나가는 것 같았다. 길가는 물론이고 옥수수밭 여기저기에도 뒤집힌 차량이며 불에 탄 트럭들, 속이 다 드러난 장갑차, 버려진 대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하나같이 폭발로 일그러지고 뒤틀린 상태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사람 시체 하나, 동물 사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수십수백 킬로미터를 둘러봐도 죽은 쇳덩어리뿐이었다. 기계의 시체들, 수없이 많은 처참한 쇳덩어리의 시체들…… 부패하는 쇳덩어리의 악취가 들판과 호수에서 피어올랐다……
―p. 54
……그들은 루마니아 농민이었고, 루마니아 농민들은 동물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은 동물도 나라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기계가 뭔지 모른다. 그들은 동물도 나라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기계가 뭔지 모른다. 기계도 나라가 있다는 것을, 부츠도 나라가 있다는 것을, 우리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농민이다. 그런데 농민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른다. 브리티아누법은 토지를 말에게 주고, 소에게 주고, 양에게 주었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곤 자신들이 루마니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정교회 신자라는 것밖에 없다. 그들은 “국왕 폐하 만세!”를 외친다. 그들은 “안토네스쿠 원수 만세!”를 외친다. 그들은 “소련 타도!”를 외친다. ……그들은 소련은 거대한 기계라는 것을 모른다. 자신들이 그런 기계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천 개의 기계, 백만 개의 기계들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p. 59
밤새 북풍이 휘몰아쳤다. (무르만스크 쪽 바다에서 요란한 비명과 함께 북풍이 죽음의 사자처럼 몰려오면 대지는 돌연 숨이 멎는다.) 추위도 무시무시했다. 갑자기 유리가 깨지는 이상한 소음과 함께 물이 얼어붙었다. 열평형이 깨지면서 바다와 호수와 강이 몽땅 얼어붙은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바다의 파도도 공중에서 얼어붙어 허공에 얼음 파도가 매달린 모양이 된다.
……호수는 마치 거대한 대리석 같았고, 그 위에는 수백 개의 말 머리가 널려 있었다. 도끼로 깔끔하게 잘라낸 것처럼 보였다. 얼음장을 뚫고 나와 있는 것은 말들의 머리통뿐이었다. 그리고 그 머리들은 하나같이 기슭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부릅뜬 눈들 속에는 공포의 허연 화염이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기슭 가까이에는 앞발을 쳐든 말들이 얼음 감옥에서 몸을 내밀고 있었다.
―p. 76~77
유럽 어디서도 폴란드처럼 독일인들이 그렇게 벌거벗은 모습을, 그렇게 적나라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나는 전쟁을 오래 경험하면서 독일인들은 강자는, 무장을 하고 용감하게 맞서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겼다. 독일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방비 상태인 사람, 약자와 병자들이었다. 두려움이라는 라이트모티프, 그런 두려움이 낳은 독일인들의 잔인함이라는 라이트모티프는 내 전쟁경험 전체의 기저를 이루는 으뜸음이 되었다. 현대적이고 기독교적인 정신을 가진 세심한 관찰자에게 그런 ‘두려움’은 전율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나는 폴란드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심한 전율과 연민을 느낀 적은 없다. 폴란드에서 바로 그 병적이고 여성적이라 할 만한 두려움의 본질이 그 복잡다단한 형태를 내게 완벽히 드러냈다. 독일인을 잔인함으로 몰아가는 것, 더할 나위 없이 차갑고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전인한 행동으로 몰아가는 것은 두려움이다. 독일인은 이런 야릇한 ‘두려움’을 숨기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본의 아니게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것도 가장 어울리지 않는 타이밍에, 특히 만찬 테이블 같은 자리에서…… 포도주와 진수성찬에 열이 올라서였는지, 여럿이 무리 짓다 보니 자신감이 흘러넘쳐서였는지, 아니면 나는 겁먹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픈 무의식적 충동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일인은 결국 스스로를 드러내고, 기아와 사살과 학살에 관해 스스럼없이 계속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적의와 질투심과 좌절된 사랑과 증오는 물론이고 자기비하에 대한 기이한 열정까지 드러나 보이는 병적인 쾌감 같은 게 있다.
―p. 123~124
금단의 도시 거리들에 깔린 적막, 저 얼어붙은 적막은 전율처럼, 이를 가는 소리처럼 나를 무겁게 짓눌렀고, 어느 순간 나는 혼잣말로 떠들기 시작했다. 다들 나를 돌아봤다. 그들의 눈에는 깊은 충격과 공포가 넘실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들의 눈빛을 알아보게 됐다. 눈에 들어오는 얼굴마다 하나같이 수염이 나 있었다. 수염 없는 얼굴은 오히려 섬뜩했다. 기아와 절망이 그들을 그토록 유린한 것이다. 젊은이들의 얼굴에는 거무스름하거나 불그레한 곱슬곱슬한 솜털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피부는 밀랍으로 만든 것 같았다. 여자와 아이들의 얼굴은 종이로 만든 것 같았다. 보는 얼굴마다 이미 푸르스름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런 얼굴 속에서 잿빛 종이 내지는 허연 백묵 같은 색깔의 눈알들이 기괴한 벌레처럼 안와(眼窩) 속으로 털 많은 작은 발을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그 깊은 구멍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솟아나오는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역겨운 벌레들은 내가 다가가면 안절부절못하고 잠시 먹잇감에서 떨어졌다. 놈들은 소굴에서 나오듯이 안와에서 기어나와 공포에 젖은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들의 눈은 잔뜩 촉각을 곤두세우고 신열(身熱)에 그을린 상태이거나, 그게 아니면 축축하고 슬퍼 보였다. 다른 눈들은 녹색 광택이 나는 것이 풍뎅이 날개 같았다. 또 어떤 눈들은 빨갛고, 어떤 눈들은 까맸으며, 어떤 눈들은 하얗고, 어떤 눈들은 광택이 없이 불투명했다. 엷은 물줄기의 베일에 가린 것 같았다.
―p. 126
문득 벌써 밤이 깊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포우의 대공포 부대는 달을 향해 포를 쏘아대고 있었다. 노랗고 축축한 달이, 거대한 여름밤의 둥근달이 구름 자욱한 하늘 위로 천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대공포는 달을 향해 짖어대고 있었다. 강 쪽에서 불어오는 축축한 바람에 나무들이 흔들렸다. 대공포의 성난 고함 소리가 언덕 위로 솟아올랐다. 달은 금세 나뭇가지들 사이에 갇혀버렸다. 교수대에 매달린 사형수의 머리통처럼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달은 잠시후 다시 시커먼 먹구름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퍼런 번갯불이 번쩍 하고 밤하늘을 갈랐다. 그 갈라진 상처 속으로 깨진 유리조각들에 비친 것처럼 짙은 녹색으로 물든 현란한 밤의 풍경이 언뜻 드러났다.
―p. 175
마리오아라는 내 품에 몸을 맡긴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광탄의 화염이 크게 원을 그리며 까만 유리 같은 밤하늘을 갈랐다. 마치 보이지 않는 여자들 목에 걸린 산호목걸이 같았다. 그것은 벨벳처럼 검은 심연에 내던져진 꽃다발이었다. 밤바다를 스쳐지나는 야광물고기였다. 실크파라솔 그늘 속으로 녹아드는 빨간 입술이었다. 새벽 전 달도 없는 밤에 정원 은밀한 구석에서 피어나는 붉은 방미였다. 경마클럽의 ‘비외 보’와 노교수들은 파티가 끝나자 거대한 하얀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해 집으로 향했다. 마지막 폭죽이 발사되고 있었다.
잠시 후 한바탕 쇼는 끝이 났다. 갑자기 비가 그쳤다. 구름 사이로 달이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샤갈의 풍경화 같았다. 유대인 샤갈의 하늘에는 유대의 천사들이 우글거리고, 유대의 구름들이 있고, 유대의 말과 개들이 마을 위 허공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 바이올린을 켜는 유대인들이 지붕 위에 앉아 있거나 길거리 위로 창백한 하늘에 둥둥 떠다닌다. 늙은 유대인들이 불 켜진 나뭇가지 촛대 사이 길가 도랑에 죽어 널브러져 있다. 유대인 연인들은 풀밭처럼 푸른 구름 가장자리 허공에서 사지를 쭉 뻗고 있다. 그런데 문득 유대인 샤갈의 하늘 아래서, 둥근달의 투명한 빛에 물든 저 샤갈의 풍경에서, 니콜리나, 소콜라, 파쿠라리 지구에서 어지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드르륵 하는 기관총 소리, 펑 하고 수류탄 터지는 둔탁한 소리들이었다.
―p. 182~183
안에 있던 죄수들이 사르토리에게 와르르 쏟아졌다. 사르토리는 순식간에 시쳇더미에 파묻히고 말았다. 죽은 자들이 기차에서 탈출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르르 떨어졌다. 쿵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조각상처럼 떨어졌다. 시쳇더미에 파묻힌 채 거대하고 차디찬 무게에 짜부라진 사르토리는 죽음의 짐에서, 그 얼어붙은 산더미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결국은 시쳇더미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거대한 돌사태가 덮친 것 같았다. 죽은 자들은 분노했고 완악했고 바보 같았다. 아녀자들처럼 허영심이 강하고 변덕스러웠다. ‘죽은 자들은 미쳤다.’ 죽은 자의 미움을 받는 산 자에게 화 있을진저. 죽은 자가 사랑하는 산 자에게 화 있을진저. 죽은 자를 모욕하고 그들의 고요를 깨뜨리고 그들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산 자에게 화 있을진저. 죽은 자들은 시기심과 복수심에 넘쳤다. 그들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드려 맞는 것도 부상당하는 것도 압도적인 수적 우위에 있는 적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움켜쥔 손을 절대 놓지 않는다. 절대 도망치지 않는다. 그들은 끝까지, 고집불통의 차디찬 용기를 가지고 싸운다. 그들은 말은 못해도 창백한 얼굴로 웃고 비웃는다. 그들은 미친 눈을 부릅뜨고 흘겨본다. 그러다 마침내 패배하면, 좌절과 굴욕을 체념하면, 흠씬 두드려맞고 뻗어버리면, 달콤하면서도 끈적끈적한 악취를 내뿜으며 서서히 썩어간다.
―p. 226~227
“루마니아인은 너그럽고 친절한 민족입니다. 난 루마니아인을 정말 좋아합니다. 라틴계 민족 중 루마니아인만이 이 전쟁에서 고귀한 의무감을 입증했고, 그들의 그리스도와 그들의 왕을 위해 피를 흘리는 엄청난 희생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민족입니다. 소박하고 상냥한 농민들이지요. 그들을 비난해선 안 됩니다. 그들에게 모범외 되어야 할 상류층이, 가족과 남자가 영혼이 썩고 정신이 썩고 뼈까지 썩은 것뿐이지요. 루마니아 인민은 학살에 책임이 없습니다. 루마니아에서 유대인 박해는 당국의 명령이나 방조로 조직화되고 조장됩니다. 철위단(鐵衛團)이 유대인들 시신을 사지를 절단해서 부쿠레슈티의 수많은 정육점에 소고기처럼 갈고리에 걸어 전시해놓고 야유와 조소를 보낸 것도 인민들 잘못은 아니지요.”
―p. 231
“아, 아니. 쥐구멍으로 나가지. 밤에 당장 밑에 파놓았다가 낮이 되면 흙이랑 낙엽을 모아 살짝 덮어놓는 거지. 그 구멍으로 시내로 기어나가 음식과 옷가지를 사는 거요. 게토 안의 암시장은 주로 그런 구멍을 통해 유지가 되지. 이따금 쥐새끼들이 덫에 걸려요. 여덞아홉 살 미만의 아이들 말이야. 아이들은 진정한 스포츠 정신으로 목숨을 걸어. 그것도 공정하지 않소?”
―p. 236
“스페인은……” 데 폭사가 말을 이었다. “관능적인 나라인 동시에 죽음의 나라이지, 유령들의 나라는 아닙니다. 유령들의 고향은 북유럽이지요. 스페인 소도시의 거리에서 만나는 것은 시신이지 유령이 아닙니다.” 그는 스페인 미술과 문학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죽음의 악취에 대해, 고야의 죽음 같은 풍경화들에 대해, 엘 그레코가 그린 살아 있는 시신들에 대해, 벨라스케스가 장대한 황금빛 건물을 배경으로 그려넣은, 왕궁과 교회와 수도원의 어두침침함 속에서 썩어 문드러져가는 스페인의 왕과 대공들의 얼굴들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유령이 아닙니다.” 데 폭사가 말했다. “그들은 시체들입니다. 그들은 육신 없는 형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살과 피로 돼 있습니다. 그들은 산 자들처럼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웃습니다. 하지만 죽은 몸뚱어리지요. 그들은 유령처럼 밤에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한낮에, 해가 쨍쨍할 때 돌아다니지요. 스페인이 그렇게 생기가 넘치는 건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그런 시체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카페에 앉아 있고, 컴컴한 교회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녹색 얼굴에 까만 눈을 반짝이며 말없이 천천히 움직이지요. 축제나 장날 같은 때 소도시와 마을의 유쾌한 부산함 속에 섞여듭니다. 산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웃고 사랑하고 술 마시고 노래합니다. 공사님이 유령이라고 하는 건 스페인 게 아니에요. 그건 외래종입니다. 아주 멀리서 온 거지요.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런 존재들은 이름을 부르거나 주문을 외워야 불러낼 수 있습니다.”
―p. 253
버건디 적포도주만큼 흙냄새를 느끼게 하는 와인은 없다. 따스한 촛불과 하얀 눈 반사광을 받은 포도주는 흙의 빛깔, 석양빛에 선홍색과 금빛으로 물든 프랑스 동부 코트도르 구릉지의 색조 그대로였다. 강한 포도주 향에서는 여름날 저녁 버건디의 풀과 나뭇잎 같은 냄새가 났다. 저녁 어스름에나 밤에 잘 어울리는 와인은 역시 뉘 생조르주였다. 부르고뉴 지방의 여름날 저녁 같은 깊은 맛이 나는 이 와인은 ‘뉘(nuit)’라는 이름부터가 밤이라는 뜻이다. 뉘 생조르주는 밤의 문턱에서 석양의 햇살이 수평선 가장자리 수정 같은 잔물결에 내려앉은 것처럼 핏빛으로 빛난다. 선홍색으로 물든 대지 위에서, 죽어가는 낮의 맛과 향취가 아직은 남아 따스한 풀과 잎사귀들 사이로, 붉고 푸르른 빛이 깜박이는 듯하다. 들짐승들은 밤이 내리면 땅속으로 숨어든다. 멧돼지가 덤불을 들이받아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짧게 나는 꿩은 벌써 숲에 깔린 어스름을 틈타 슬그머니 숨는다. 날쌘 산토끼는 이 순간 처음으로 떨어지는 팽팽한 은빛 밧줄 같은 달빛을 타고 달린다. 바로 이 순간이 버건디 와인의 시간이다. 겨울밤이 시작된 바로 그 시간에, 눈의 반사광을 받아 상앗빛으로 물든 그 방에서, 뉘 생조르주의 깊은 향은 여름날 저녁 그윽한 부르고뉴의 기억을, 아직 햇볓의 온기가 남아 있는 대지 위에 잠든 밤들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p. 258
몇 날 며칠 하염없이 비가 내렸다. 우크라이나의 진흙바다는 지평선 너머까지 스멀스멀 뻗어나갔다. 우크라이나의 가을은 정점에 이르러 있었다. 시커먼 개펄은 도처에서 발효가 시작된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올랐다. 짙은 갯내가 멀리 광활한 평원 끝에서 바람결에 실려와 밭고랑에 남아 썩어가는 알곡의 냄새와 섞였고, 해바라기의 들쩍지근한 냄새까지 뒤얽혔다. 까만 해바라기 눈동자에서 씨앗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그 커다란 둥근 눈에서 기다랗고 노란 속눈썹도 하나둘 떨어져갔다. 맹인의 눈처럼 멍하고 공허한 해바라기의 눈동자……
독일군들은 전선에서 마을 광장으로 돌아오면 말없이 소총을 땅바닥에 툭 던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흙투성이였다. 수염은 텁수룩하고, 퀭한 눈은 해바라기 동공처럼 멍하고 휑했다. 장교들은 입을 앙다물고 땅바닥에 널브러진 병사들과 소총을 마냥 바라만 봤다. 그때 이미 블리츠크리크, 전격전(電擊戰)은 종결된 상태였다. 그 대신 드라이시히얘리거블리츠크리크, ‘삼십 년 전격전’이 개시된 참이었다. 이기는 전쟁은 끝나고, 지는 전쟁이 시작된 거다. 허연 공포의 얼룩이 독일군 장병들의 멍한 눈에 번지는 게 보였다. 그 얼룩은 차츰 동공을 잡아먹고 속눈썹을 그슬렸다. 속눈썹은 하나둘씩 해바라기의 길고 노란 속눈썹처럼 떨어졌다. 독일군들이 공포에 사로잡힐 때, 저 불가사의한 독일인의 공포가 그들의 뼛속까지 스며들 때 보는 사람은 늘 기이한 전율과 연민을 느낀다. 그들의 외모는 비참하고, 그들의 잔인함은 서글프고, 그들의 용기는 고요하고 절망적이다. 바로 그때 독일인들은 사악해진다. 나는 기독교 신자라는 게 후회스러웠다. 나는 기독교 신자라는 게 부끄러웠다.
―p. 276~277
“신의 생명만이 아닙니다. 현대 국가는 그 자신의 존재를 보호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요.” 데 폭사가 말했다. “스페인의 예를 보십시다. 프랑코를 몰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신을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길거리에서는 신의 생명을 노리는 시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에게 권총을 쏘아대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어요.”
―p. 310
“영국인들은……” 데 폭사가 말했다. “무슨 문제든 쓸데없는 요소들은 완전히 제거해버리는 대단한 재능을 타고났죠. 아무리 심각하고 복잡한 문제라도 가차 없이 벗겨버려요. 이제 공산주의가 대영제국의 길거리를 벌거벗고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레이디 고다이바가 코번트리 거리를 말을 타고 돌아다닌 것과 마찬가지지요.”
―p. 311
“훤히 빛나는 북방의 밤이 정말 이상한 건……” 미르차 베린데이가 특유의 피곤한 루마니아식 억양으로 말했다. “은밀한 밤에만 태어나는 몸짓, 생각, 감정, 대상들이, 어둠의 품속에 소중하게 감춰져 있던 것들이 훤한 대낮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지요.”
―p. 312
……스핀은 영국 개였다. 사냥개로서 흠 잡을 데 없는 순종 포인터였다. 아주 좋게 말해 아리안 순종견이다. 녀석의 혈관에는 유색의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녀석은 서식스 최고의 애견훈련소에서 훈육을 받은 유능한 영국 개였다. 녀석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왕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핀은 사냥개였다. 그리고 전쟁은, 다들 알다시피, 일종의 사냥 행위였다. 거기서 사람들은 사냥감인 동시에 사냥꾼이 된다. 인간들이 총으로 무장을 하고 서로를 사냥하는 놀이다. 스핀은 총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일개 연대 전체를 상대로 ‘돌격 앞으로’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총소리가 나면 녀석은 신이 났다. 총소리는 자연의 구성요소였고, 태곳적부터 이어져온 세계의, 녀석의 세계의 일부였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삶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광활한 들판과 숲을 누비고 사바 강과 다뉴브 강 너머 구릉지를 달리며, 팽팽한 밧줄 같은 사냥감의 냄새를 쫓는, 냄새의 밧줄을 요리조리 곡예사처럼 타는 재미가 없다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냥꾼의 총소리가 맑고 옅은 아침 공기를 가르거나, 비 오는 가을날 잿빛 거미줄을 파르르 떨게 하거나, 눈 덮인 평원에 날아가 꽂힐 때, 자연의 질서는 완벽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런 총소리야말로 자연의 완성, 세계와 삶의 완성에 마지막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이다.
―p. 318~319
그날 나는 판체보에 있었다. 베오그라드가 코앞이었다. 도시 위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어마어마한 시커먼 연기가 멀리서 보니 마치 거대한 독수리의 날개 같았다. 날개는 점점 커져가며 하늘을 뒤덮었다. 석양이 검은 연기구름 사이를 뚫고 내리꽂히자 주변은 붉고 검은 광채로 빛났다. 치명상을 입은 독수리가 힘찬 깃털로 하늘을 찢고 날아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숲이 우거진 언덕에 자리잡은 도시 위로, 노란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저 끝 녹색의 평원 위로, 독일군 슈투카 폭격기 편대들이 부리를 삐죽 내밀고 쌕쌕 소리와 함께 곤두박질치면서 발톱으로 하얀 가옥들과 유리처럼 번쩍이는 높은 건물들, 교외에서 방사형으로 뻗은 도로들을 갈가리 찢고 있었다……그 어떤 음악도, 가장 순수한 음악조차도 개들의 목소리만큼 존재의 고통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은 변형된, 떨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들은 균일한 호흡으로 길게 서로 이어지다 갑자기 높은 흐느낌과 함께 뚝 끊어졌다. 그것은 듣는 이를 현혹시키는 유혹의 소리였고, 소나기의 중얼거림과 함께 바람이 스쳐가는 늪지와 빽빽한 숲, 갈대와 골풀이 우거진 도랑 사이에서 나는 고독한 외침이었다. 소택지에는 죽은 동물의 시체가 둥둥 떠다녔다. 둔중한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말들의 시체에서 날아올랐다. 그 소리 없는 날갯짓은 햇빛을 머금어 금빛으로 빛났다. 굶어죽기 일보 직전인 개들이 무리가 마을 주위를 맴돌았다. 가옥 한 채만이 아직도 고독하게 매캐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개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불신이 가득한 벌건 눈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펄떡펄떡 뛰었다. 놈들은 이따금 멈춰 서서 달을 보며 구슬피 울듯이 높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탐스러운 노란 달이 연한 장밋빛 하늘로 솟아오르면서 폐허도 변한 황량한 마을들을 투명한 빛으로 비춰주었다. 거리와 들판에 시체들이 널렸고, 저 멀리 허연 도시는 까만 연기의 거대한 날개로 덮여 있었다.
―p. 320~321
“쟤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전쟁에 잡아먹히지 않았으니까. 전쟁은 시체는 안 먹어요. 산 군인만 먹지. 산 군인의 다리를, 팔을, 눈알을 갉아먹습니다. 대개 잠든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지요. 쥐새끼들이 갉아먹는 것처럼. 하지만 인간은 그보다는 문명화됐어요. 절대 산 사람은 안 먹죠.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은 시체 먹는 걸 좋아해요. 아마 잠들어 있다고 해도 산 사람을 먹기는 아주 힘들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p. 341~342
“……순간 나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들에게 눈꺼풀이 없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눈꺼풀이 없는 병사들은 이미 본 적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 스몰렌스크 전선에서 돌아오는 길에 민스크 역 승강장에서였지요. 지난겨울의 무시무시한 추위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이한 결과들을 낳았습니다. 수천수만 명의 병사가 사지를 잃었습니다. 수천수만 명의 병사가 혹한으로 귀와 코와 손가락과 성기가 떨어져나갔지요. 머리칼이 떨어져나간 병사도 많았고요. 하룻밤 사이에 대머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기계총에 걸린 것처럼 군데군데 머리가 빠진 병사들도 있었지요. 눈꺼풀이 떨어져나간 병사도 많았습니다. 혹한에 피부가 손상되면 눈꺼풀은 각질처럼 툭 떨어져나가기 마련이지요. 바르샤바의 에우로페이스키 카페에서 그런 불쌍한 병사들의 눈을 보고, 나는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그들의 멍한 눈은 동공을 팽창, 수축시키면서 막무가내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차단하려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허사였지요. 나는 저 불쌍한 친구들이 어둠 속에서도 멍하니 눈을 뜨고 잠을 자는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밤은 그들의 유일한 눈꺼풀이었습니다. 그들의 종착점은 정신착란이었습니다. 정신착란만이 눈꺼풀 없는 눈에 약간의 가림막이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요.”
―p. 344~345
“그런 끔찍한 얘기를 하는 나도 등골이 오싹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양이도 지크프리트와 같은 종에 속한다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해요. 그런 생각해본 적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도 어쩌면 지크프리트와 같은 종이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고양이라는 것을요. 당신은 다른 독일인들이 교육받은 식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지크프리트는 독특하고, 다른 종족은 모두 고양이란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루이제. 지크프리트도 고양이와 같은 종입니다. ‘카푸트( kaputt)’라는 단어의 어원이 ‘희생물’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파로트( kapparoth)’라는 거 아세요? 고양이는 카파로트입니다. 지크프리트와 반대로 희생되는 대상이지요. 고양이는 희생된 지크프리트입니다. 희생물로 주어진 지크프리트지요. 그런 순간이 있고, 그런 순간은 항상 반복됩니다. 독특한 존재인 지크프리트도 고양이가 되고, 카파로트, 즉 희생물이 되고 파멸하는 순간 말입니다. 지크프리트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죠. 하겐이나 힘러 같은 자들이 그의 눈을 고양이 눈처럼 도려내려고 떨쳐나서는 순간 말입니다. 결국 카파로트, 희생물로 전락해 파멸하는 게 바로 독일민족이 타고난 운명입니다! 이 이야기의 깊은 의미는 지크프리트가 고양이로 바뀐다는 데 있습니다. 당신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어요, 루이제. 당신도 우리 모두가 지크프리트이며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카파로트, 희생물이 되고 파멸할 운명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도이고, 그래서 지크프리트 역시 기독교도이고, 그래서 지크프리트는 고양이이기도 한 거지요. 황제와 황제의 자녀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교육을 아주 잘못 받은 거예요, 루이제.”
―p. 349~350
“잘 들어라, 난 한쪽 눈이 유리 눈이야. 어느 게 진짜인지 구별하긴 어렵지. 생각하지 말고 바로 얘기해봐. 어느 쪽이 유리 눈인지. 맞히면 널 풀어주마.”
“왼쪽이요.” 소년이 바로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지?”
“그래도 인간적인 표정 같은 게 느껴져서요.”
……“독일 사람은 모두가 의안을 끼고 있어요.” 내가 말했다.
―p. 356~357
이나리 호숫가에는 비가 오고 있다. 하늘은 눈 없는 얼굴, 죽은 자의 하얀 얼굴 같다. 비는 나뭇잎사귀며 풀에게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다. 늙은 라플란드 여자가 호숫가에 앉아 파이프를 문 채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속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순록의 무리가 숲속에서 풀을 뜯고 있다. 녀석들은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본다. 녀석들의 눈은 초라하고 절망적이다. 저 불가사의한 죽은 자들의 눈빛 그대로다. 순록의 젖냄새가 빗속에 퍼진다. 호수 기슭의 나무들 밑에는 독일군 병사들이 앉아 있다. 얼굴에 모기장 같은 방충망으로 만든 마스크를 쓰고, 손에 두꺼운 순록가죽 장갑을 끼고 있다. 그들의 눈은 초라하고 절망적이다. 그들의 눈에서도 저 불가사의한 죽은 자들의 눈빛이 느껴진다.
……페데리코의 동료인 다른 장교들도 젊었다. 아마 스물, 스물다섯, 아니면 기껏 서른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같이 누렇게 주름진 얼굴에서 노년의 징표랄까, 분해되고 죽어가는 기색이 엿보였다. 다들 초라하고 절망적인 순록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모든 얼굴에서, 그 모든 눈에서, 아름답고 경이로운 온순함, 들짐승의 처연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들짐승의 그 멜랑콜리한 광기, 야릇한 순수함, 끔찍한 서글픔 같은 게 느껴졌다. 동물에게 있는 그 무시무시한 기독교적 연민 같은 것이라고 할까. 짐승들은 그리스도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내 입술과 손이 떨렸다.
―p. 434~437
알몸의 독일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무방비 상태였다. 그들에게는 이제 비밀이나 위용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이제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의 힘의 원천은 피부나 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제복에 있다. 그들의 진짜 피부는 바로 제복이다. 유럽인들이 독일군의 회녹색(灰綠色) 군복 속에 흐물흐물한 무방비 상태의 죽은 나신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독일군은 아무리 약한 사람들에게도 두려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일개 소년이라도 독일군 일개 대대와 감히 맞서려 할 것이다. 그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는 것은 독일 국민의 삶과 역사의 감춰진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들은 벌거벗은 상태로 우리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수치심으로 수줍어하는 시체들처럼. 디틀 장군이 한 팔을 들어 큰 목소리로 “하일 히틀러!”를 외쳤다.
―p. 442
……그들을 보면서 나는 무엇이 그들을 저렇게 완전히 바꿔놓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들은 아직 독일인이었다.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소련의 키예프와 스몰렌스크와 레닌그라드에서 만났던 바로 그 독일인들이었다. 똑같이 쉰 목소리에 똑같이 강인한 이마와 둔중한 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어떤 독일인에게서도 보지 못했던 놀라운 것, 뭔가 순수하고 순결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 짐승 특유의 잔인함, 잔인한 순진무구함, 어린이와 야수의 천진난만함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들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른 먼 나라 일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서 어떤 경멸감이랄까, 폭력과 기아와 파괴와 살인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들은 자연의 잔인함에는 불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저 끝없이 펼쳐진 숲속에서 외롭게 문명과 동떨어져 사는 삶,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겨울밤의 지루함, 이따금 오로라 불빛으로 갈라지는 밤하늘, 무한히 계속되는 여름밤 백야의 고문, 밤이고 낮이고 하늘을 응시하는 태양…… 그 모든 것이 그들을 인간 특유의 잔인함으로 몰아간 것 같았다. 그들은 들짐승의 절망적인 초라함에, 죽음을 달가워하는 저 불가사의한 감정에 절어 있었다. 그들은 검고 깊게 반짝이는 순록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죽은 자들의 눈에서 보이는 그 불가사의한 동물 같은 눈빛이었다.
―p. 450~451
……녀석들은 가까이로 지나가며 번들거리는 붉은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녀석들은 우리를 두려워하거나 의심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자신감에서 평화로움과 무관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일종의 처연하면서도 고상한 무덤덤함 같은 것이었다. 늑대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민첩한 걸음걸이로 신속히 이동했다. 그들에게서는 야수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상한 수줍음이라고 할까. 당당하면서도 잔인한 온순함 같은 게 느껴졌다. 한 병사가 총을 들자 다른 병사가 그 총을 끌어내렸다. 인간 특유의 잔인함을 포기하는, 거부하는 몸짓이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고독한 환경에서는 인간조차 저 처연하고도 온순한 동물의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자신의 인간성을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p. 452
연어와 싸운 지가 어느덧 세 시간이 지났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물고기 한 마리한테 글려다닌다는 것은 독일 장군의 위엄에 먹칠을 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러다 지면 어쩌나 겁이 나기 시작했다. 혼자만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눈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리가 보고 있었고, 라플란드 사람들이 야릇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고, 강기슭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호위병들도 보고 있었다. 소련군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난감한 일이었다. 여기서 끝을 내야 했다. 자신의 품위가, 한 독일 장군의, 모든 독일 장군들의, 독일군 전체의 품위가 훼손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소련군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또 얼마나 난감한 일인가!
폰 호이너츠 장군이 갑자기 베안다슈를 돌아보며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게누크! 에어쉬스트 인!―됐어! 쏴버려!”
―p. 470~471
“브리태니아 메이 룰 더 웨이브즈, 벗 쉬 캔낫 웨이브 더 룰즈―영국이 바다를 지배할지는 몰라도 규칙을 안 지킬 수는 없지요.”
―p. 476
……무솔리니라는 인간이 정말로 믿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는 논리와 행운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 의지와 운명은 따로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다. …….반면에 드러먼드 대사는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는 권력과 특권과 영국 함대의 영원함과 영국 중앙은행과 함대의 유머 감각을 믿는다. 그리고 영국 중앙은행의 공정성을 믿는다. 이는 이튼스쿨의 운동장과 워털루전투 현장의 긴밀한 연관성을 믿는다. 반면에 대사 앞에 선 무솔리니는 완전히 혼자다. 그는 자신이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대표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대표했다. 반면에 드러먼드 대사는 영국 국왕의 대리자일 뿐이다.
……무솔리기나 말한다. ……그가 ‘문제’, ‘지중해’, ‘수에즈운하’, ‘에티오피아’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면 마치 ‘카드놀이’, ‘람브루스코 와인’, ‘폭동’, ‘포를리’라고 말하는 것 같다. 드러먼드 대사의 말씨는 스코틀랜드 쪽으로 피가 약간 섞인 옥스퍼드 대학생 같다. ……대사가 ‘문제’, ‘지중해’, ‘수에즈운하’, ‘에티오피아’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면 마치 ‘공정함’, ‘런던 하이드파크 서펜타인 연못’, ‘위스키’, ‘에든버러’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무솔리니가 마한다. “난 그러고 싶소!” 드러먼드 대사가 말한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무솔리니 왈: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드러먼드 대사 왈: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무솔리니 왈: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드러먼드 대사 왈: “제 생각에는 이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무솔리니 왈: 말할 필요도 없지요.” 드러먼드 대사 왈: “그래도, 어쩌면, 아마, 거의, 추측컨대……” 무솔리니 왈: “파시스트 혁명은……” 드러먼드 대사 왈: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왈: “우리 국왕은…….” 드러먼드 대사 왈: “국왕 폐하께서는……” 무솔리니 왈: “나는……” 드러먼드 대사 왈: “대영제국은……”
―p. 478~480
이사벨레가 갈레아초 치아노와 손을 잡은 이유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복잡하다. 타락한 사회가 그 최종적 파멸에 다가가는 시기에, 역사, 정치, 사회적 정통성이 더 이상 맥을 못 추는 나라에서, 사회를 지속적으로 지탱해가는 계급들이 그 특권을 모두 잃은 나라에서, 이사벨레는 쉬르속 가문의 후예 특유의 본능으로 이탈리아가 곧 지중해 동부 연안 서유럽 국가 중 가장 큰 나라가 될 것이란 사실을 감지했다. 정치적 도덕성의 기준으로 보면 당시 로마는 나폴리와 마찬가지로 “유럽적 기준에 안 어울리는 유일한 도시”라는 로즈버리 경의 지적이 어울렸다. 그런 이탈리아에서는 이제 정통성이 사라진 체제만이 끔찍한 사회적 위기를 평화롭게 극복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전쟁으로 이기가 확산되는 심각한 사회 격변기에, 그런 체제만이, 구할 수 있는 것이나마 구해야 한다는 보수 계급의 간절한 열망을 이룰 수 있었다.
―p. 488~489
민초들이 그렇게 살갑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나폴리에 오면 늘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다. 군중이 그렇게 살갑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군중은 나와 너무도 다른 낯선 존재였다. 나는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고 군복은 너덜너덜했다. 면도도 오래 못한 상태였고 손과 얼굴에는 기름때가 꼬질꼬질했다. 내가 감옥에서 나온 것은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그 군중 속에서 나는 인간의 온기, 인간의 정, 인간의 동료애, 나와 똑 같은 고뇌, 나와 똑 같은 인간적 고통을 발견했다. 다만 그들의 고통이 나보다 더 크고 깊고, 더 생생하고, 더 오래됐다. 그들의 고통은 그 오랜 세월을 버텨온 힘과 체념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느낌을 주었다. 그에 비하면 나의 고통은 그저 인간적인 것이었다. 아직 오래되지도 않고 깊이 뿌리내리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들의 고통에는 깊은 절망 같은 것은 없고 크고 아름다운 희망의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의 초라하고 작은 절망은 그저 나약한 감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창피했다.
―p. 539~540
사 년 동안 전쟁을 겪으면서 처음으로, 살육과 기아와 황폐해진 도시들을 누빈 그 잔인한 여정의 끝에서 처음으로, 나는 신성하고도 거룩한 외경심이 담긴 ‘피’라는 말을 들었다. 유럽 곳곳에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폴란드, 러시아, 핀란드에서 그 단어는 증오와 두려움과 멸시와 짜릿함과 공포와 잔인하고 야만적인 오만과 감각적인 쾌락을 의미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공포와 혐오에 몸을 떨었다. 내게 ‘피’라는 단어는 피 자체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나는 피를 직접 만질 때보다. 유럽 곳곳에서 뿌려진 그 가엾은 피에 두 손을 흠뻑 적실 때보다 ‘피’라는 말을 들을 때 더 오싹했다. 그런데 나폴리에서, 다름 아닌 이 나폴리에서, 유럽에서도 가장 불행하고 가장 기아에 시달리고, 초라하고, 버려진, 고문당한 도시에서, 나는 종교적 외경심이 담긴 ‘피’라는 단어를 들었다. 거룩한 존경과 깊은 자비가 나폴리 사람들 특유의 높고 순수하고 여리고 천진한 목소리를 통해 느껴졌다. 엄마, 아기, 하늘, 성모, 빵, 예수라고 말할 때의 바로 그 천진함과 순수함과 솝가함이었다. 그 이빨 빠진 입에서, 그 창백하고 피곤한 입술에서 “오, 상궤! 오, 상궤!”하는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호소 같기도 하고 신성한 이름을 부른 소리 같기도 했다. 기아와 굴종을 강요당하던, 야만이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왕 노릇 하던 오랜 시간도, 궁핍과 전염병과 부패가 판치던 그 오랜 세월도, 저 초라하고 고귀한 민초들의 피에 대한 종교적 외경심을 완전히 끊어놓지 못했다……
―p.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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