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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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Chemin faisant)일상/book 2021. 1. 27. 21:59
나는 음울한 날에 울타리 하나 없이 벌거벗은 경작지의 지평선을 바라본다. 이따금 걷다 보면 불쑥 권태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육체적인 피로가 아니라, 혼란, 권태, 거의 절망에 가까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다. 갈아엎은 밭 앞에서 잡아 뽑힌 식물들의 무질서, 울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땅의 부스러기들을 쪼아 먹는 슬픈 새들을 보면서 돌연한 좌절감에 사로잡힌다. 고독, 끝없는 도로, 너무도 짧고 지극히 피상적인 만남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느껴보지 못했던 온갖 절망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나는 쓸모없고 비생산적인 여행에 화가 나서 배낭을 옆으로 내던진다. 걷기, 방랑자처럼 살기, 매일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는 본능적인 불신을 극복하느라 시간의 일부를 허비하기, 관심 혹은 가능하다면 연민 일으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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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 가벼운 여행(Resa med lätt bagage)일상/book 2020. 8. 3. 00:09
배가 드디어 잔교를 빠져나갈 때 나의 마음에 밀려오는 안도감을 묘사할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그때다. 아니 불러도 소용없을 만큼 배가 부두에서 멀리 떨어진 다음에…… 아무도 내 주소를 물어볼 수도, 무슨 끔직한 일이 벌어졌다고 소리를 칠 수도 없을 때……. 사실 여러분은 내가 느끼는 어지러울 정도의 해방감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외투의 단추를 풀고 담배 파이프를 꺼냈지만, 손이 떨려서 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어쨌건 나는 파이프를 잇새에 물었다. 파이프는 주변 환경과 나 사이에 나름의 거리를 만들어 준다. 나는 이물 앞으로 나아갔고, 도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둘도 없이 최고로 마음 편한 관광객처럼 난간에 기대어 섰다. 맑은 하늘의 작은 구름들은 장난스럽고 기분 좋게 무질서해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