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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Chemin faisant)일상/book 2021. 1. 27. 21:59
나는 음울한 날에 울타리 하나 없이 벌거벗은 경작지의 지평선을 바라본다. 이따금 걷다 보면 불쑥 권태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육체적인 피로가 아니라, 혼란, 권태, 거의 절망에 가까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다. 갈아엎은 밭 앞에서 잡아 뽑힌 식물들의 무질서, 울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땅의 부스러기들을 쪼아 먹는 슬픈 새들을 보면서 돌연한 좌절감에 사로잡힌다. 고독, 끝없는 도로, 너무도 짧고 지극히 피상적인 만남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느껴보지 못했던 온갖 절망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나는 쓸모없고 비생산적인 여행에 화가 나서 배낭을 옆으로 내던진다. 걷기, 방랑자처럼 살기, 매일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는 본능적인 불신을 극복하느라 시간의 일부를 허비하기, 관심 혹은 가능하다면 연민 일으키기, 손님 대접을 구걸하기, 설득하기, 애원하기, 카페 식당의 안주인들과 쌀쌀맞은 문지기들의 마음 흔들기, 그리고 매일 밤 똑같은 시나리오를 다시 시작하기, 나는 그저 스쳐 보내기만 했다. 언제나 보냈다. 나는 프랑스의 이런 삶을 마치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얼음의 수정체를 통해 해초와 다른 세상의 살아 있는 광채를 어렴풋이 느끼는 듯하다.
—p. 199
정말 오랜만에 읽는 에세이다!! 그런데 요즘 같이 활동에 제약이 많은 시기에 ‘걷는 것’에 대한 에세이라니!........ㅠ 나 역시 걷는 것을 좋아하기에 이 책을 선뜻 집었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정말 어디든 걷고 싶었다. 이 책이 나왔던 게 1977년이니까 반 세기 전쯤에 쓰인 책이다. 프랑스의 인구밀도가 우리나라보다 낮다보니 자크 라카리에르와 같은 한적한 ‘걷기’가 가능했던 것도 있겠지만,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아니고서야 글과 같은 전개가 어려웠을 것이다. 자크 라카리에르는 걷는 동안 지나친 풍경들을 결코 미화하지 않는데—그러니까 아름다운 풍경을 유유자적으로 구경하고, 산뜻한 바람을 쐬며 감상에 빠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이미 1970년대에도 도로에서 벌어지는 무자비한 로드킬, 농촌 지역을 잠식하는 대규모 농업과 젊은이들의 농촌 이탈, 목가적인 농경지를 비집고 들어온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그가 걸었던 길 위에는 흔쾌히 호의를 베푸는 상냥하고 호쾌한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된 노정에 오아시스처럼 찾아오는 시원한 만남 속에서 자크 라카리에르는 4개월의 시간을 버텨낸다, 또는 즐긴다.
단순한 여행 문학이라기에는, 길 위에서 마주한 풍경이 매우 차분하게 그려질 뿐만 아니라 여기에 갈리아 족의 신화와 로망스어의 언어학적 전통이 덧붙여져 토속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이 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나라에서 무전 여행 비슷한 것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인간이 가장 유해한 동물이라고 딱 두 번 언급하는 그의 말대로, 70년대에 비해 지금이야말로 이방인에 대한 몰이해가 더 심해지고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하지 않을까 싶다. 도로 위에서 횡사한 동물들이 화석이 되어 아스팔트 위에 박혔다는 묘사나, 젊은이들이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외면하고 도시로 향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묘사, 누군가 몰래 와 버리고 간 폐차 사이로 자라나는 끈질긴 초목들에 대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이런 장면들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연민과 반성, 동시에 낙천성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권할 만한 에세이다! [fin]'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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