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쥘 베른의 「녹색광선」일상/book 2021. 1. 16. 01:55
<오, 우리 조상들의 방패처럼 둥근 그대는 우리 머리 위에서 빛나는구나, 오 신성한 태양이여, 그 빛이 어디서 왔는지 우리에게 말해다오! 그대의 영원한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대는 당당한 아름다움 속에서 나아간다! 별들은 창공에서 사라졌다! 창백하고 차가운 달은 서쪽의 파도 속에 모습을 감춘다! 그대만이 사라지는구나, 오 태양이여!>
<그대가 가는 길에 동반자는 누가 될까? 달은 하늘에서 모습을 감춘다. 그대만이 여전히 그곳에 있구나! 그대는 눈부신 길에서 끝없이 기뻐한다!>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칠 때, 구름 속에서 등장하는 그대는 절정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폭풍우를 비웃는다!>
—p. 267
쥘 베른의 「녹색광선Le rayon vert」은 에릭 로메르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에서 모티브가 된 책이다. 먼저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봤기에 쥘 베른의 책을 알 수 있었다. 책에는 레옹 베넷(Léon Benett)이 그린 삽화들이 들어가 있는데, 에칭 판화의 느낌이 나는 옛스런 그림들로, 그리 길지 않은 글을 읽는 데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모험소설의 대가 쥘 베른답게 스코틀랜드의 지리가 아주 상세히 다뤄지고, 해양과 지질에 대한 과학적 지식들도 어우러져 있다. 때문에 「녹색광선」은 젊은 두 남녀가 사랑을 발견해가는 이야기이면서도, 실제 바다 위를 옮겨다니는 듯한 모험소설의 느낌도 듬뿍 담고 있다. 이에 덧붙여, 오시안의 시를 비롯해 게일어가 풍부하게 감겨 있어서 스코틀랜드 고유의 정취까지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사실 에릭 로메르의 영화 속 여주인공(델핀)과 쥘 베른의 소설 속 여주인공(헬레나 켐벨) 사이에는 공통점이랄 게 보이지 않는다. 델핀은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우유부단한 인물인 반면에, 헬레나는 자신의 생각이 분명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는 동안, 에릭 로메르의 영화보다는 차라리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전망 좋은 방> 속 여주인공(루시 호니처치)이 떠올랐다. 집안에서 이미 점찍어둔 정혼자—「녹색광선」의 아리스토불러스 어시클로스와 <전망 좋은 방>의 세실 비스—가 있지만 이들 남성은 대개 자신만의 생각과 확신에 빠져 있으며, 여주인공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반면 우연한 만남으로 알게 된 쾌활한 청년—「녹색광선」의 올리비에 싱클레어와 <전망 좋은 방>의 조지 에머슨—에게는 여주인공이 서서히 호감을 품게 된다.
이처럼 「녹색광선」과 <전망 좋은 방>의 이야기는 맞닿아 있다. 공통점은 더 있다. 사랑에 빠지는 데 어떤 ‘사건’이 촉매제가 된다는 것까지도 그렇다. 「녹색광선」에서 켐벨은 오번으로 향하는 범선 위에서 거의 난파 당할 뻔한 구조된 보트에서 싱클레어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한편 <전망 좋은 방>에서 루시는 시뇨리아 광장의 난투극 광경을 본 뒤 혼절하는데 이를 에머슨이라는 청년이 구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깨닫기 시작한다. 두 작품 모두 귀족적인 느낌의 영국인들을 무대 위에 올린다는 점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내용면에서 보자면 「녹색광선」의 이야기 구조는 꽤 단조로운 편이고 다음 이야기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도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인물들의 심리 묘사도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피상적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소설이 매력적인 건, 동심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인간의 모험심을 자극한다는 점이다.
녹색광선을 찾아나선다는 착상은 일면 감상적이기도 하고 어린아이의 상상 같기도 하다. 헬레나가 왜 그토록 녹색광선을 확인하고자 하는지 소설에서 구체적인 이유가 밝혀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순진한 집념을 이루기 위해, 운하를 건너고 섬과 섬 사이의 거센 물길을 가로지르고 어두운 동굴을 탐사하는 장면을 함께 하는 동안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스코틀랜드의 어느 지방을 여행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지리적・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렇게 생생하게 여정을 묘사하는 것은 쥘 베른의 뛰어난 능력이라 할 것이다.어릴 적 만화로 읽었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회상하며 천진난만한 등장인물들과 짧은 시간이나마 바닷가를 거니는 듯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또한 싱클레어가 용기 있게 켐벨을 구출해 내는 '핑갈의 동굴'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스라엘 여행 당시 로쉬 하니크라의 해식동굴에서 들었던 크고 작은 파도들의 메아리를 떠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녹색광선」은 어른을 위한 동화책이다:) [fin]
'일상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을 걸으며(Chemin faisant) (0) 2021.01.27 자유의 발명 1700~1789 / 1789 이성의 상징 (0) 2021.01.26 몸젠의 로마사 III : 이탈리아 통일에서 카르타고 복속까지 (0) 2021.01.13 나무 위의 남작 (0) 2021.01.09 부족의 시대(Le temps des tribus) (0) 2021.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