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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사사기・룻기일상/book 2021. 8. 19. 11:46
앞서 읽었던 『오래된 질문』에는 불교의 가르침에 관한 원로 생물학자와 고승들의 대담이 다루어졌는데, 곧바로 성경으로 건너오니 이야기의 맥락이 확 바뀌는 느낌이 있다. 불교에서는 피아를 가르지 말라는 불이(不二)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반면, 성경에는 피아—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나누는 시도가 아주 선명하게 부각된다. 특히 이번에 읽은 <여호수아>에는 그러한 기독교의 종교적 특성이 잘 드러난다. 모세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게 된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 일대에서 척척 정복전쟁을 전개해 나간다.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겠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규모의 살육전이 전개됐던 것 같고 이스라엘 민족과 주변 민족의 호전성이 잘 나타난다. 때문에 살생에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는 불교적 관점과는 거리가 있다.
『오래된 질문』과 성경 텍스트 사이에 발견할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차이점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에 대한 인식의 차이다. 불교에서는 개인의 참선을 통해 깨달음(열반)에 이를 것을 강조하는 반면, 성경에서는 메시아의 강림을 강조한다. 이는 특히 <사사기>에서 뚜렷이 확인된다.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소홀히 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민족이 주변국가로부터 약탈 당할 때마다 사사, 즉 일종의 구원자가 등장한다. 기드온, 삼손, 야엘 같은 인물을 모두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룻기>에서 예고하는 다윗의 탄생은 또 다른 메시아의 등장을 암시한다.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는 아마도 세계종교간 탄생하던 당시의 지리적・문화적 환경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당시 가나안 지역은 유목을 중심으로 하는 곳이었던 반면, 석가모니가 활동하던 갠지스강 유역은 어떤 물자도 모자라지 않던 비옥한 지역이었다. 또 성경은 핍박받던 민족이 '출애굽'하는 사건이 내러티브의 출발점이 되는 반면, 불교에서는 번민과 고뇌로 괴로워하던 개인이 '출가'하는 것이 내러티브의 단초가 된다.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믿는 사람의 '정당성'이 문제가 되는 반면, 불교에서는 '중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해진다.
어쨌든 그렇게 본다면 어떤 종교 또는 종교적 세계관이 옳고 그르다, 맞다 아니다 따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요즘 들어 내게 더 필요한 가르침은 불교의 '중도'가 아닌가 싶다. 시스템 생물학을 전세계적으로 알린 『오래된 질문』의 데니스 노블은, 인간의 모든 특성이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해결되고 DNA를 통해 모든 질병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역설하는 리처드 도킨스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 체계라는 것은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해도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뇌영상 촬영을 통해 특정 실험에서 특정 뇌부위가 활성화되는 것을 근거로 '인식'을 분석하려고 하지만, 눈으로 드러나는 사실만 보자면 뇌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뇌 속의 혈류 변화뿐이라는 것이다.
생물학 분야는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이다보니, 어느 정도까지가 비유이고 어디까지가 엄밀한 팩트인지는 구별하기 어렵다. 다만 DNA만을 통해 인간의 형질이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인간의 총체적인 육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감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인간 존재를 오롯이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 데니스 노블이 이야기하는 바다. 그렇게 볼 때, 좋은 형질의 DNA를 선별하고 조작하여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론은 어쩐지 기독교적인 관점에 가까워 보이는 반면, 우주 속 인간 존재를 총체적으로 통찰해야 한다는 데니스 노블의 이론은 불교적 관점에 가까워 보인다. 데니스 노블 그 자신 역시 생물학을 연구하면서 불교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고 소회하기도 하고 말이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와, 불교는 피아를 분명히 가르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 이성과 감성, 기쁨과 슬픔과 같이 사람들이 이원적으로 나눠보기 쉬운 개념들이 사실은 얇은 종이 낱장 하나를 사이에 둔 모호한 것들이며, 모든 사물과 사건에는 양가적인 특성이 있다고 말한다. 다만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말'을 사용하기에 불가피하게 기쁨은 기쁨이라고 슬픔은 슬픔이라고 명명할 뿐이다. 하지만 기쁨과 슬픔 사이에, 또는 그 바깥에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감정이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불교는 어떤 면에서 본다면 정답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안하기도 하다. 정답이 눈앞에 보여야만 안심이 되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교의 가르침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나는 행복해야 한다고, 나는 더 뛰어나야 한다고 하는 정답주의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fin]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여라. 내가 모세를 통해 너희에게 지시한 대로 도피성을 지정하여, 누구든지 실수로—뜻하지 않게—사람을 죽인 자가 피의 보복자를 피하여 안전한 피난처인 그곳으로 피신할 수 있게 하여라. [수 20:1]
우리 사이의 증거물. 하나님 한분만이 하나님이시다. [수 22:34]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그들은 바알 신들을 섬겼고,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 그들 조상의 하나님을 버렸다. 그들은 다른 신들, 주변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과 어울렸고, 실제로 그 신들을 섬겼다! 바알 신과 아스다롯 여신을 섬기는 것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노하시게 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불같이 진노하셨다. 그래서 그들을 약탈자들의 손에 넘겨 약탈당하게 하셨고, 사방의 적들에게 헐값에 팔아넘기셨다. 그들은 적들 앞에서 무력했다. 그들이 문밖으로 나갈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셨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또 맹세하신 대로, 그들을 벌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상황이 몹시 위태했다. [삿 2:11-15]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사람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이니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도다. /시스라가 물을 달라 할 때 /야엘은 우유를 내오되 /멋들어진 대접에 /크림을 담아서 주었다. /그녀는 왼손에 장막 말뚝을 들고 /오른손으로 망치를 잡았다. /망치를 내리쳐 시스라의 머리를 깨고 /관자놀이에 구멍을 뚫었다. /그는 그녀의 발아래 고꾸라졌다. 쓰러져 뻗었다. /그녀의 발아래 고꾸라져, 쓰러졌다. /고꾸라지고, 쓰러져 죽었다. [삿 5:24-27]
먹는 자에게서 먹을 것이 나오고, 힘센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 [삿 14:14]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행했다. [삿 21:25]
베레스의 족보는 이러하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룻 4: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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