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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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5일상/book 2022. 2. 28. 06:31
객줏집을 나선 길상은 아무도 없는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든다. 역시 강아지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길, 사람도 시가도 모두 피곤한 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불타버린 폐허 옆을 지나간다. 군데군데 쳐놓은 이재민의 막들이 보채다 잠이 든 아기같이 적막 속에 엎드려 있다. 구릉진 곳을 휘청휘청 올라간다. 자작나무 몇 그루를 지나서 바위 옆에까지 간 길상은 바위에 등을 기대고 가물거리는 별들을 오랫동안 올려다본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별들은 저렇게 가물거리고 있었더란 말인가. 시가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방금 지나온 그 자리가 희미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무너지고 재가 되고 폐허로 변한 곳, 저 잿더미는 죽음일까? 저 사물의 변화는 과연 죽음일까? 끝이 없는 세월과 가이 없는 하늘은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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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일상/book 2022. 2. 6. 06:58
‘짐승이나 사램이나 버려지라 카더라도 이 세상에 한분 태어났이믄 다 같이 살다 죽어얄 긴데 사램은 짐승을 부리묵고 또 잡아묵고, 호랭이는 어진 노루 사슴을 잡아묵고 날짐승은 또 버러지를 잡아묵고 우째 모두 목심이 목심을 직이가믄서 사는 것일까? 사램이 벵드는 것도 그렇지마는 짐승들은 와 벵이 드까. 사람은 약도 지어묵고 침도 맞고 무당이 와서 굿도 하지마는 말 못하고 쫓기만 댕기는 짐승들은 누가 그래 주꼬. 늘 혼자 사는데, 벵이 들믄 짐승들은 산속이나 굴속에서 혼자 죽겄지. 혼자 울믄서 죽겄지. 아아 불쌍한 짐승들아! 사람같이 나쁜 거는 없다.’ —p. 95~96 사철이 음산한 바람과 빛깔에 덮여 있는 것 같았고 두텁고 무거운 외투자락과 털모자와 썰매의 북국(北國)에서 이동진은 그네들의 문물제도를 착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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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일상/book 2022. 1. 30. 06:15
“요새는 와 그런지 그 생각이 문뜩문뜩 나누마요. 그때 나는 고라니 한 마리를 잡았는데 말입니다. 그기이 암놈이었소. 거참, 희한한 일이었소. 다음 날 고라니를 잡은 자리를 지나갔다 말입니다. 그랬는데 암놈 피가 흐른 자리에 수놈 한 마리가 나자빠져서 죽어 있더란 말입니다. 총 맞은 자리도 없고 멀쩡한 놈인데……. 그, 그기이 다, 허 참 그기이 다 음양의 이치 아니겄소?” —p. 39 그는 백성을 우중(愚衆)으로 보았었고 배우기를 잘못한 권력자들이 배부른 돼지라면 우매한 백성들은 배고픈 이리라 하였다. 체모 잃은 욕심, 권력을 휘두르며 권태로운 삶을 즐기려는 수탈자에게 우중들은 쓰기 좋은 도구요, 우중이 만일 깨쳤다고 보면 무지스런 파괴의 독소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 계기가 와서 이 상호간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