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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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일상/book 2021. 2. 12. 18:11
이 무렵 그녀가 산보하는 시간은 어둠이 깔린 다음이었다. 이런 시간에 숲으로 들어가면 그녀는 조금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빛과 어둠이 너무나 고르게 평형을 이루어, 낮의 압박과 밤의 긴장이 서로 중화되고 그래서 절대적 정신의 자유가 허용되는 정확한 저녁 순간을 그녀는 간발의 차이로 알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불운이 최소한의 차원으로 축소되는 순간이 바로 이런 시각이었다. 그녀에게 어둠은 무서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오직 한 가지 생각은 인간을—집단으로 뭉치면 그렇게 무서우면서도 하나의 단위 속에서는 그렇게 보잘것없고 불쌍하기까지 한, 세상이라 불리는 냉랭한 집합체를—어떻게 피하는가 하는 것 같았다. 이 고독한 언덕과 골짜기에서 그녀의 조용한 발걸음은 그녀가 움직여 가는 자연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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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기는 독서일상/book 2020. 11. 22. 23:39
내가 호주 사람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던가 싶다. 클라이브 제임스는 거의 평생 동안 영국에서 살기는 했지만, 고향인 호주에 대해 깊은 애착을 갖고 있고 근래에 들어 조금씩 명성을 넓혀 나가고 있는 호주 작가들을 이 글을 통해 소개하기도 한다. 불치병을 선고받고 죽음을 예감하면서 작가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유머러스하고 관조적인 글들이 많아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스를 수 없는 시간 안에서 탐독하고 의미를 곱씹고, 더 나아가 읽는 이가 어렵지 않고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글을 쓰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아쉬운 부분(?)이라면 그가 언급한 책들 가운데 올리비아 매닝의 소설에 호기심이 많이 갔는데,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된 책은 없다는 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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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일상/book 2020. 9. 7. 23:33
두 권의 책 사이에서 손끝이 허공을 맴돌았다. 『절망』과 『창백한 불꽃』. 모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책이다. 『롤리타』를 읽은 뒤로 사놓은 책들인데, 처음에는 『절망』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결국 『창백한 불꽃』을 집어들었다. 『절망』은 정말 절망스러울 때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그런 절망은 찾아오지 않았다. 또는 그런 절망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창백한 불꽃』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독서를 요구했던 책이다. 머리말에서부터 킨보트라는 인물이 편집과 출판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갸우뚱하기도 했고, 나보코프의 장난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은 크게 두 개의 구성으로 나뉜다. 하나는 킨보트의 절친한 벗인 셰이드가 쓴 총 네 편 1000행 짜리 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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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일상/book 2019. 12. 14. 00:22
요새 너무 다기망양(多岐亡羊)하게 독서를 한다고 느껴 찾은 책이다. 만성적인 야근에 시달리면서도—요새는 일상패턴이 정돈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차마 이 얇은 책 한 권은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절반 가량은 희극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기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활자를 '본' 것 같은 느낌마저 들지만 말이다. 몇 주만에 칼퇴를 기대했던 이번 금요일도 여지 없이 계획에 없던 업무들이 쏟아졌고, 업무를 서둘러 마무리한다고 했는데도 지하철역에서 내리니 이미 10시가 되어 있었다. 건조하다 못해 감쪽같이 증발해버릴 것 같은 일상에 어떻게 해서든 숨통을 틔어야 할 것 같았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씨에 카페에 들어갔지만 이미 카페인은 충분한 상태였기에 와인을 한잔 주문했다. 은 이미 일전에 읽었던 책이다. 사느냐 죽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