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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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일상/book 2020. 4. 30. 21:58
이븐 할둔의 두꺼운 아랍 역사서를 읽는 틈틈이 쏜살문고에서 나온 책을 읽고 있다. 책이 가볍고 얇아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앞서 를 재미있게 읽어서, 여러 권의 문고본을 주문해 두었었는데, 은 그 가운데 처음으로 읽은 책이다. 낚시를 통해 사유(思惟)를 건져 올린다는 도입부의 문장이 낯익은 걸 보면, 책을 읽기 전에 다른 글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접한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서문을 읽으면서 이 책이 페미니즘의 입문서 또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바이블쯤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사실 처음 책을 집어들 때에는 이라는 제목에서 자전적인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이 책은 그런 성격의 이야기와 거리가 멀다. 자기만의 방과 연간 오백 파운드의 수입. 여성이 자신의 생각을 훼손당하지 않은 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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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일상/book 2019. 12. 14. 00:22
요새 너무 다기망양(多岐亡羊)하게 독서를 한다고 느껴 찾은 책이다. 만성적인 야근에 시달리면서도—요새는 일상패턴이 정돈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차마 이 얇은 책 한 권은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절반 가량은 희극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기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활자를 '본' 것 같은 느낌마저 들지만 말이다. 몇 주만에 칼퇴를 기대했던 이번 금요일도 여지 없이 계획에 없던 업무들이 쏟아졌고, 업무를 서둘러 마무리한다고 했는데도 지하철역에서 내리니 이미 10시가 되어 있었다. 건조하다 못해 감쪽같이 증발해버릴 것 같은 일상에 어떻게 해서든 숨통을 틔어야 할 것 같았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씨에 카페에 들어갔지만 이미 카페인은 충분한 상태였기에 와인을 한잔 주문했다. 은 이미 일전에 읽었던 책이다. 사느냐 죽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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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마치일상/book 2016. 12. 11. 11:25
오늘날에도 수많은 테레사가 태어나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명성을 드높일 서사적 삶을 찾아내지 못한다. 고귀한 정신은 있지만 그런 정신을 발휘할 기회가 없어서 실수투성이 삶을 살 것이다. 그들의 실패가 아무리 비극적이라 해도 그 실패를 읊어줄 훌륭한 시인이 없으며, 죽어서 잊혀도 그들을 위해 읊어줄 사람이 없다. 그들은 캄캄한 미로 속에서도 희미한 등불에 의지해 고상하게 사상과 행동을 일치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결국 보통 사람들 눈에는 그런 노력도 다만 추상적인 모순으로만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 뒤늦게 태어난 테레사들에게는 그 열렬히 자발적인 영혼에게 지식의 역할을 해줄 일관된 사회적 신념이나 사회적 질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의 열정은 막연한 이상과 평범한 여성의 동경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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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일상/book 2016. 9. 9. 01:50
밀물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야자수가 자라나고 있는 고대(高臺) 언저리의 희고 휘청거리는 모래와 바닷물 사이로는 굳건한 모래사장이라고는 겨우 한 가닥이 좁다랗게 나 있을 뿐이었다. 랠프는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한 가닥의 굳건한 모래사장을 골라잡고 걸어갔다. 발길을 지켜보지 않고서도 걸어갈 수 있는 곳은 거기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가를 걸어가다가 홀연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그는 놀랐다. 이승의 따분함을 깨우친 것 같았다. 이승에서의 모든 도정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며, 세상살이의 태반은 발걸음을 조심하는 데 보내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그 외가닥의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흡사 즐거웠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열을 올렸던 최초의 탐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