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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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상처일상/book 2022. 9. 18. 11:06
수평선은 인간의 목측이 자진(自盡)하는 한계선이다. 인간의 시선이 공간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죽어갈 뿐, 하늘과 땅이 닿을 리는 없는 것이다. —p. 39 나는 교회의 첨탑이나 사찰의 석탑이 견딜 수 없이 답답하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곳이 자유나 초월적 가치라 하더라도 그 자유를 그토록 간절히 지향해야 하는 긴장과 자기 학대를 나는 견디어내지 못한다. 내 고향의 수직구조물들은 이제 신성이나 초월적 가치를 모두 버렸다. 그것들은 신석기의 선돌이나 중세의 첨탑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제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p. 106 그 정신주의는 행려와 표랑, 세상으로부터의 겉돌기와 헤매기, 외로움과 막막함, 눈물과 고통과 그리움에 의해 매우 잘 절여진 것이어서, 정신주의는 승천하지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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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일상/book 2022. 8. 27. 17:40
프랑스에서 돌아온 뒤 독서량도 영화를 보는 횟수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새로운 활자들, 새로운 구문들과의 사투 아닌 사투를 벌이면서, 유희로써 텍스트를 접하는 일마저 거추장스럽게 느끼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다행히 반대급부에서 순기능적인 측면이라면, 드문드문이나마 글을 찾아 읽을 때는 우리 문학을 찾아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받아들이고 소화하기에 편한 글을 찾게 된 것이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에는 박경리 작가의 소설이 재밌어서, 비싼 국제운송료를 감수하면서까지 박경리 작가의 책을 추가로 주문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국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찾아보고 있는데, 수필을 읽는 건 국내작품과 해외작품을 막론하고 실로 오랜만이다. 독서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독서를 하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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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사랑이 없다일상/book 2021. 3. 4. 05:50
......이 세상은 사랑과 이별이 멸종된 이후의 세계 같았다. 사랑 없는 세대의 연애와 이별 없는 세대의 무감만이 횡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연애에 대해 무감한 청춘들에게서 다른 면모에서의 삶의 방식을 정비하는 듯한 모습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커다래진 시대. 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 시대. 쉽게 변질되는 사랑과 쉽게 인성을 망가뜨리는 이별을 겪는 일을 이 시대의 청춘들은 굳이 하려 하지 않는다. 연민도 시혜도 자기 자신에게 우선권을 주고, 물질적・정서적 풍요도 자기 자신에게 가장 우선권을 준다. 배려도 스스로에게 하고, 돌봄과 아낌도 희생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행한다. 식당에서 물만 셀프로 따라 먹는 게 아니라, 주유소에서 주유만 셀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