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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우리를 구해줄 수 있지만, 서로는 우리를 구해줄 수 없다는 거야?" —모니카
얼마전 <파친코>라는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서점에서 돌아다니다가 얼핏 본 것 같기도 한데, 제목만 봐서는 영 내용이 별로일 것 같아 시선을 두지 않았던 책이다. 책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파친코>의 이야기를 조금 뜬금없는 상황에서 꺼냈는데, 다소 자극적인 소설제목과 달리 2세대에 걸친 재일교포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뜸 "오늘날 한국인들에게는 일종의 부채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영끌'이다 뭐다 해서 부채가 흔한 세상에 무슨 말인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데,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야 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이야기가 뭔지 이해가 되었다. 요지는 해외로 건너간 한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사들인 독립공채가 한국의 독립을 쓰였던 만큼, 해외 교포들이나 외국에 남아 있는 독립가들의 후손에게 대우는 해주지 못할지라도, 그들이 겪었던 애환에 대해서는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외국—특히 미국—으로 건너간 동양인들은 자수성가를 하면 대개 현지에서 재산을 축적했지만, 당시 식민통치하에 있었던 한국 이주노동자만큼은 재산을 모으는 대로 공채를 사들였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해박하지는 않지만 그동안 왜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미나리> 역시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시대는 지금과 좀 더 가까운 시기로 옮겨오기 때문에 핍박받는 민족의 정서 같은 건 없지만, 아직 미국 내에 한인 사회가 지금만큼 자리잡기 이전의 이야기다. 고단한 한국에서의 삶을 등지고 미국으로 건너온 이들 가족 앞에 놓인 것은 여전히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와 시련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흙탕물에서도 깨끗하게 자라나고 가난한 이든 부유한 이든 누구나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미나리처럼 꿋꿋한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민'이라는 측면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훌륭한 가족 영화이다. 생존을 위해 건너온 낯선 공간에서 자식들에게 뿌리내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제이콥의 마음과, 언제나 하나의 가족으로 남아 있고 싶은 모니카의 마음 모두 공감한다. 다만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이 녹록지 않을 뿐이다. 미나리는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이면서도 사실은 누구에게나 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이콥-모니카 가족의 이야기를 닮았다.
영화에는 아시안에 대해 편견 어린 아칸소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묘사되는 한편, 인종에 대한 색안경을 거두고 기꺼이 동업자로 나서는 폴과 같은 긍정적인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코로나로 인해 요 근래 새로운 유형의 아시안 증오범죄가 발생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미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인들이 무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해본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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