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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충분히 가까이에 있는 것일상/film 2021. 4. 17. 00:35
샤이아 라보프는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가장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작품이 <아메리칸 허니>. <트랜스포머>는 두말할 것도 없고 <님포매니악>에서도 그를 인상깊게 보았다. <아메리칸 허니>에서는 반항적이고 음침하고 드문드문 순진한 모습이 드러나는 선한 역할을 맡는데, 샤이아 라보프가 맡는 역할들이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사실 요 근래 어떤 영화가 새로 나왔는지 아예 신경을 쓰지 못하고 지냈는데, 아카데미 시상식 시즌이라 그런지 시선을 잡아끄는 영화가 적지 않았다. <더 파더>, <친절한 타인>과의 경합 끝에 <피넛 버터 팔콘>으로 낙점:P
너무 오랜만에 영화를 봐서 그냥 좋았다. 노스 캐롤라이나가 배경인 영화에는 늪이나 수풀, 바닷가가 번갈아 나오는데 어릴 적 읽었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떠올리게 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무대가 되었던 미주리주가 그러했듯이 노스 캐롤라이나 역시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에서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남부에 속했던 지역들이다. 그래서 영화에 간간이 등장하는 흑인 캐릭터들 역시 대도시의 흑인들과 달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든가 보수적인 성향을 보인다는가 하는 측면이 있다. 어쨌든 목가적인 자연경관과 개성있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타일러와 잭이 올라탄 돛뗏목은 유유히 물길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이런 무대장치 안에서 타일러(샤이아 라보프)와 잭(잭 고츠아전), 엘레너(다코타 존슨)는 서로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어 간다. 사실 이들은 너무나도 다른 캐릭터라서 보는 사람으로선 조금 섣부른 스토리 전개가 아닌가 싶기도 할 정도다. 타일러와 잭은 나이가 다르고 지능이 다르고, 타일러와 엘레너는 학력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 그러나 이들을 엮어내는 것은 '상실(喪失)'이라고 하는 교집합이다. 이들 캐릭터는 저마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타일러는 자신의 과오로 인해 상실을 겪었고, 엘레너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상실을 겪었다. 그리고 잭은 선천적으로 상실을 겪은 아이다. 지적인 능력의 결여와 가족의 결핍. 이런 상실들을 서로 보듬고 메워나가는 캐릭터들을 보며 자연히 마음이 따듯해졌다.
잭을 기관으로 되돌려보내는 문제와 관련하여 타일러와 엘레너가 언쟁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뜬금없게도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떠올랐다. 사회가 쌓아올린 판옵티콘은 견고해서 무엇이 광기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작의적이지만 치밀하게 결정한다. 그렇게 광기에 대한 정의가 내려진 다음에는 광기를 수용할 시설을 세우고 제도를 갖춘다. 잭은 법적인 관점에서 책임있는 행위를 할 능력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폐쇄된 공간에 갇혀 지내고 강제적으로 교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곧장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잭은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뒤떨어진 아이라고 낙인찍힌 상징적인 캐릭터이지만, 꿈이 있고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친구. 꼭 대단하고 내세울 것이 있고 그래서 같이 어울렸을 때 폼나는 사람만이 친구는 아닐 것이다. 힘들 때 손을 내밀어주고 아픈 마음을 들여다봐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친구일 것이다. 얼마전 우연히 들은 심리학 강의에서 사람—특히 친구—과의 관계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말을 들었다. 여러 축적된 연구결과로 보면 외향적인 사람들이 삶 속에서 기쁨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에, 외톨이인 사람은 잠재적으로 신체적인 질병을 앓을 확률까지 높다는 이야기였다. 혼자인 시간이 긴 사람은 아픔의 시그널이나 고통을 공유해줄 상대가 없기 때문이란다. 무엇이 참이든지 간에, 인생에서 공명(共鳴)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일 것이다. 비단 영화 속 인물들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며 크고 작은 상실을 겪고, 헤어짐을 메워줄 수 있는 건 만남을 통해서이기에.
이 영화 본 지가 좀 되었다. 코로나 시국을 뚫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년)>을 제치고 일본 영화 사상 신기록을 경신했다고 하기에 어떤 작품인지 궁금했다. 마침 기한이 임박한 쿠폰이 있어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상영시간표를 보니 마침 그 주에 스크린을 내리는 모양이었다. (요즘 같은 시즌에 쿠폰 기한이 임박한다는 게 영화를 많이 안 보고 지낸다는 의미인 것 같아 아쉽다. 예전에 갖고 있던 vip 자격도 어찌 됐는지 모름;)
개인적으로는 익숙하지 않은 그림체여서 처음에 몰입하는 데 약간 어려움이 있었다=_=;; 무한열차는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된 데 반해서 인물표현이 좀 아쉽다 싶었는데 이 부분은 아무래도 내 취향의 차이일 수 있다. 꿈의 변방에 자아의 핵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모티브나 죽기를 각오해야 최면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모티브도 신선했고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보기는 했는데, 이 작품이 코로나 시국에 신기록을 갈아치울 만큼 어마어마한지는 좀 갸웃했다.
그래서 영화관을 나선 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그 동안 일본 대중문화가 오랜 침체기를 겪다가 억눌렸던 수요가 폭발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이 연달아 흥행을 거뒀던 것과 달리 요새 극장판 일본애니메이션 중에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작품이 뭐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드라마의 경우 <한자와 나오키(半沢直樹)(2013)>처럼 일본 내에서도 크게 흥행을 거두고 한국에서도 종종 회자되는 작품들이 있기는 있었지만, 확실히 요새 한국 사회에서 외교나 경제가 아닌 문화를 두고 일본내 이슈를 거론하는 일은 2000년대 초반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극도로 정(靜)적인 자아에서 아주 격렬히 분출되는 동(動)적 자아라는 전형적인 구성 또한 다른 일본 작품들에서 보이는 익숙함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손에 입이 달렸다든가, 눈동자에 한자를 박는다는가 하는 일본인들의 창의력은 여전히 대단해서 나름 보는 재미가 있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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