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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분노(une société en colère)일상/film 2021. 4. 22. 16:35
“Mes amis, retenez bien ceci,
il n’y a ni mauvaises herbes, ni mauvais hommes,
il n’y a que de mauvais cultivateurs.” —Victor Hugo
"개가 짖기 위해서는 물고 있는 걸 내려놔야겠지요." —극중 살라
프랑스 영화를 보고 싶은지가 오래되었다. 비루한 사람들, Les misérables. <레 미제라블>은 워낙 많이 인용되는 작품이기도 하고 2012년 군 복무중에 봤던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이 생각나기도 해서, 2019년도 버전으로 <레 미제라블>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이번 영화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궁금했다. 나한테만 좋은 일이지만(;;) 영화관에 나 혼자뿐이어서 맘 편히 영화를 봤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흠뻑 빠져서 영화를 봤다.
영화에서 빅토르 위고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빅토르 위고가 실제로 <레 미제라블>을 집필했던 몽페흐메이(Montfermeil)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반드시 <레 미제라블>의 플롯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장발장(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자베르(이들을 몰아넣는 인물)는 아주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회개한 인물로서의 팡틴이나 선한 코제트는 영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외지에서 온 경찰 스테판만이 이 비루한 지옥에 남아 있는 양심의 그림자만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나라도 이미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는 거주 공간에 따라 삶의 양식에 있어 격차가 매우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몽페흐메이라는 곳은 아프리카에서 이주해 온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곳이지만, 그들이 떠나오려고 했던 바닥에서 사실은 또 다른 바닥으로 옮겨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의 삶은 열악하고 아주 간단히 멸시되고 도외시된다. 서커스 유랑단으로 돌아다니는 집시, 시장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조직폭력배, 유력자를 후원한다는 허울로 권력을 유지하는 포주들.
이곳에 나오는 아이들은 때묻지 않은 아이들이 아니다. 세상의 때가 묻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지만 이 아이들에게서 점점 꽃피는 것은 때묻지 않은 형태의 분노다. 깨끗하고 선명한 분노. 분노는 어른들의 마음 깊은 곳에도 자리한다. 무력을 쥔 자(경찰대원)들에게도, 그런 그들에게 수도 없이 시달렸던 나이든 이민자들에게도. 이곳은 분노가 경쟁하는 사회다. 표출된 분노는 어딜 향해야 좋을지 모른다. 물론 ‘이사’라는 소년을 과잉진압했던 것이 이 분노의 촉매제가 되기는 한다. 하지만 분노의 씨앗은 이미 오래전부터 싹을 틔어 자라왔다. 영화 말미에 빅토르 위고가 말하듯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소. 다만 나쁜 농부가 있을 뿐이오.”라고 한다면, 분노가 날뛰는 이 곳에서 그러한 농부는 누구였을까.
최근 프랑스에서는 경찰보안법 발의로 인해 논란이 많았다. 하원의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이 법안에 따르면 경찰의 신원이 확인될 만한 이미지나 영상을 온라인에 악의적으로 유포할 경우 처벌을 받게 된다. 이 문제는 표현의 자유 보호라는 측면에서도 다뤄질 수 있지만, 국가 공권력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보호받을 수 있는가라는 측면에서도 다뤄질 수 있다. 국가의 치안을 위해 공권력은 반드시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기존의 법에서 잘 유지되던 치안이 지금에 와서 또 다른 법을 통해야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흔히 프랑스를 똘레랑스의 나라라 하고 자기주장이 강해도 극단적인 의견은 따르지는 않는 게 프랑스인이라고 하지만, 끊임없이 형태를 바꿔나가는 이들 사회의 분노를 보며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 퍼져나가는 분노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축구경기를 응원하러 거리에 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삼색 프랑스 국기를 하나씩 두른 채로 라 마르세예즈를 제창한다. 이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관용과 오래된 공화주의적 전통인가, 아니면 분노인가? 무엇이 이들과 우리의 정체성을 바꿔왔는가? 분노로 물들여 왔는가? 가축우리 같은 아파트소굴, 두꺼운 검정 방탄조끼, 그리고 멍든 꼬마의 눈과 손 안의 수제탄약은 간명하지만 마음을 흔드는 메시지를 남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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