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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같은 죽음의 무게일상/film 2021. 5. 22. 11:25
And then that star has died,
and it becomes really, really bright
and it shoots out all of this stuff,
and all that stuff travels through space
over years, and years, and years,
and years, and years, and years,
and years, and years, and years,
and years, and years,
and eventually,
it’s what makes us.<트립 투 잉글랜드> 이후로 영국의 풍경이 이렇게 실컷 담긴 영화는 참 오랜만인 것 같다. 스토리 자체는 밋밋했지만 영화에 나오는 영국의 전원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 지방은 팬데믹이 가신다면 언젠가 여행을 해보고 싶은 곳들이다. 과연 코로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여행을 실컷 다닐지는 미지수이지만. 코로나 와중에도 여행을 멈추지 않은 J는 세 달간의 멕시코 여행을 마치고 유럽으로 건너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의 여정은 벌써 5년차로 접어든 것 같은데, 종종 연락을 주고받을 때마다 대리만족을 느낀다.
각설하고 올해 초에 읽었던 스페인 작가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사랑에 빠지기」와 비슷한 모티브를 담고 있는 영화다.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작품에서 한 명의 남편이자 가장이었던 남자 주인공 미겔 데스베른은 우연적인 죽음—우연을 가장한 죽음—을 택한다.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이 최대한 우연적인 상황에서 죽음에 이를 수 있도록 주위 환경의 크고 작은 변수를 조작해 간다. 그리고 그의 오래된 벗 디아스 바렐라는 그가 고통 없이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이 ‘우연적인 죽음’에 조력한다. 바로 ‘옳은 죽음’을 스스로 택할 권리. 늘 ‘삶’에 뒤따르는 기쁨, 즐거움, 슬픔, 괴로움만을 이야기하는 현세에서 ‘죽음’을 재정의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사랑에 빠지기」는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 작품에서 터스커도 미겔 데스베른과 비슷한 계획을 짠다. 하지만 왜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또한 「사랑에 빠지기」에서는 마리아 돌스라는 화자를 통해서 사랑과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이 이루어지는 반면에, <슈퍼노바>에서는 그러한 것이 부족하다. 터스커의 연인인 샘이 사랑과 죽음을 둘러싸고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제시하는 것 역시 아니다. 그래서 연인인 터스커와 샘이 놓인 상황이 매우 극적이고 애틋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겠지만서도, 그들이 마주해야 할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서 ‘공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전반적으로 싱거운 느낌이 드는 영화다. 다만 초신성(supernova)라는 비유를 통해 우리가 모두 별의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것, 따라서 하나의 티끌로 되돌아가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 둘의 만남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주라는 광막한 공간에서 티끌 하나와 또 다른 티끌 하나가 가볍게 엇갈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어딘가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
꾸준히 활동을 해오고 있기는 하지만 막상 콜린 퍼스의 최근작을 떠올리면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 <1917>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아주 짧은 장면만을 수행했고, <킹스맨>은 내가 아직 보지를 않았다. 그렇다보니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최근에 접한 것이 <매직 인 더 문라이트>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정도가 될 것 같은데 이들 모두 2014년 이전 작품들이다. <슈퍼노바>를 보게 된 건 아무래도 콜린 퍼스라는 배우의 후광이 컸는데, 어쩐지 시간은 모두를 공평하게 짓누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마지막 장면에서 총구를 정면으로 응시하던 빌 헤이든(콜린 퍼스 役)의 처연한 눈길이 떠올랐다.
요새는 이런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고 시의성이 있는 영화들 말이다. <레 미제라블> 이후로 굉장히 인상깊게 본 영화다. 유고연방이 해체되기 이전의 보스니아 내전을 다루는데, 책으로는 로버트 D. 카플란의 「유럽의 그림자」나 마크 마조워의 「발칸의 역사」가 떠오르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종종 주류 역사가 아닌 주변적 국가들의 역사를 찾아보곤 하는데, 동유럽이나 발칸반도의 역사에도 관심이 있는 편이다. 세상의 모든 역사가 주인공(강대국)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면 얼마나 단조로운가?!’o’ 한편 최근에 읽었던 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에 대하여」에서는 유고 연방의 기업 형태—자치적인 기업 체제—가 서구 법인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물론 이는 80년대 이야기이다.) 여하간 모자이크처럼 종교와 인종이 좁은 지역 안에 얼기설기 얽혀 있는 이 발칸 반도는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지역이기도 했고 오랫동안 분쟁과 반목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비록 ‘연방’의 형태로 뭉치기는 했지만 이 연방 아래에는 여섯 개의 이질적인 공동체—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코소보—가 있었으니, 이 영화 안에서는 그 가운데에서도 세르비아에 의한 보스니아 학살이 다뤄진다. 특히 종교적인 갈등이 두드러지는데, 세르비아는 기독교 국가인 반면 학살의 희생양이 되는 스레브레니차는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지역이다. 「유럽의 그림자」나 「발칸의 역사」를 읽어보면, 발칸반도는 험준한 산지가 대다수인 지역이어서 오래전부터 ‘산적’들의 활동이 중앙집권적인 국가 형성을 막아왔다.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동남아시아사 책을 보면, 문명의 경계가 통념상 생각하는 강이나 산맥과 같은 자연적 경계가 아니라 산지의 ‘고도’에 따라서 형성되는 부족들의 사례들이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산지가 복잡하게 뻗어 있는 발칸 일대도 이와 비슷해서 문화지리적인 경계가 매우 복잡해고 '우리'와 '그들'의 구별이 어렵다.
영화에 나오는 스레브레니차는 오늘날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포함되는 지역이다.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종교 구성은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각각 절반 정도를 점하고 있고, 민족적 구성도 다양하다. 실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에워싸고 경계를 두고 있는 스릅스카 지역 일대에는 세르비아인들이 다수 살기도 하고, 영화에 묘사되다시피 보스니아 지역(스레브레니차)과 세르비아가 통역 없이 의사소통이 될 정도로 언어가 유사하다. 심지어 영화의 주인공인 ‘아이다’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지역의 영어 교사로 활동했던 인물로, 한 때 본인들이 가르쳤던 제자들이 한쪽은 이슬람을 믿고 다른 한쪽은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이는 비극을 목격하기도 한다.
마치 빵과 물을 동원해 유화책을 쓰는 듯하면서 무차별적 학살을 자행하는 세르비아의 군사작전을 보다보면 어쩐지 한국전쟁이 생각난다. 여기서는 종교가 피아를 나누는 기준이 되지만, 한국전쟁에서는 이념이 피아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 추상적인 관념이 진영을 가르고 이토록 맹렬하게 적대감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것이 섬뜩하다. 이미 말한 것처럼 세르비아나 보스니아나 언어든 삶의 방식이든 비슷한 면이 매우 많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역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언어로 보나 생활양식으로 보나 매우 동질적인 집단이었다. 이를 순식간에 가른 것은 종교와 이념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이념적 노선이 가시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 20세기 이후인 반면에,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종교 갈등은 그 역사가 훨씬 앞선다는 점은 차이 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공통적인 것은 동질적인 집단에서 차이의 단초가 싹틀 때 그 갈등은 더욱 잔인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곤 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나라의 역사가 동시에 떠올랐다.
<슈퍼노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죽음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똑같이 ‘티끌 같은 죽음’이다. <슈퍼노바>의 죽음이 개인사적인 것이라면, <쿠오 바디스, 아이다>에서의 죽음은 역사적인 것이다.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앞에서 맥없이 스러져간 8천 여명의 무고한 시민들은, 오늘날에는 국제사회에서 거의 기억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당시 중립지대를 보호하려고 했던 UN의 방위활동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분출구를 찾으려고 난동을 부리는 인간의 폭력성 앞에서 제도적이고 조직적인 노력조차 얼마나 쉽사리 무력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점차 일상을 되찾아가는 스레브레니차의 한 학교에서 무대를 꾸민 티없이 맑은 아이들의 율동이 등장한다. 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얼굴 가운데에는 가족이 몰살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이다도 있는 반면, 학살이 휩쓰는 와중에도 무사히 불운을 비껴간 이도 있고, 그런가 하면 학살을 주도했던 가해자의 얼굴도 섞여 있다. 대규모 학살이 아니었다면 이름이 알려질 일조차 없었을 이 자그마한 마을에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회색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섞여 사는 모습. 마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프리모 레비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 공동체 안에는 가해자와 조력자, 피해자, 방관자, 은둔자가 섞여 있어 그 성격의 모호함이 섬뜩함을 자아낸다. 앞으로 어떤 스레브레니차를 만들어나갈지는 이러한 기성 세대의 뒤를 이어갈 무대 위의 해맑은 아이들의 몫이다. 어디로 가는가(quo vadis), 스레브레니차?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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