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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포스팅하는 <에반게리온>은 애니메이션 연작물이라서 영화로 보기 어렵지만 일단 <film> 카테고리에 실어본다. 영화는 많이 보는 편이지만 같은 영상물인데도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잘 보지 않는 편이다. 머리 식힐 거리가 필요했던 하루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정주행할 만한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이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에반게리온>이 떠올랐다. <에반게리온>은 넷플릭스에서만 스트리밍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어서 이걸 보려고 처음으로 넷플릭스도 결제했다. 오래 전부터 <에반게리온>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이게 벌써 ’95년도 작품, 그러니까 20년도 더 된 작품이다보니 선뜻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지만 봐서는 미래적인 느낌인데 만들어진 지도 벌써 20년을 훌쩍 넘었다보니 지금에 와서 봐야 흥미를 끌 만한 게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시사할 만한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6화짜리 연작물을 다 보는데 일주일 남짓 걸렸으니 결론적으로는 재미있게 보았다. 아마 좀 더 일찍 봤으면 훨씬 흥미롭게 보지 않았을까. 시간이 흐를 수록 예전에 쉽게 느꼈을 법한 감흥을 느끼는 게 쉽지 않다. 사실 스토리나 인물들만 보자면 명확하게 짚지 않고 넘어가거나 빠르게 휙휙 전개되는 대목들도 있어서 매끄럽지 않다고 느껴지는 부분들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런 스토리를 차치하고 이 작품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문제의식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관계맺기, 타자성, 고독, 불안, 합리성과 같은 실존적인 문제를 다룸으로써 <에반게리온>은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차원을 펼쳐보인 것 같다.
작품에는 크게 세 명의 아이들이 핵심을 이룬다. 이카리 신지(碇シンジ), 소류 랑그레이 아스카(惣流・アスカ・ラングレー), 아야나미 레이(綾波レイ)가 그들이다. 이 ‘칠드런’들의 존재는 이 애니메이션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아이들 각자는 모두 어른들에게 상처를 입거나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 칠드런들은 아물지 않은 흉터를 안고 자신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에바와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 그것이다. 에바와 얼마나 호응하느냐는 각 칠드런이 얼마나 자신을 정직하게 마주하느냐에 달려 있다. 때문에 칠드런과 에바를 연결하는 데 있어서 ‘마음’이라는 개념은 커다란 구심점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유아-성인의 이분법적 구조는 단지 신구의 대결로써뿐만 아니라 선악의 대결로도 나타난다.
이 선악의 대결은 에바-사도의 대결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칠드런들이 호흡을 맞추는 에바라는 존재는 세컨드 임팩트를 초래했던 아담이라는 존재로부터 본따온 것이다. 그리고 이 아담이라는 존재는 실상 사도(使徒)이다. ‘사도(使徒)’의 본래 사전적 의미는 ‘거룩한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열셋의 사도들은 본뜻과 모순되는 역할들을 수행한다. 즉 사도들은 ‘이 세계를 파괴’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것이 에바다. 하지만 아담이라는 매개물로 에바와 사도가 또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마치 동면의 앞뒷면처럼 선과 악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암시한다. 마치 음양의 조화를 나타내는 태극 문양처럼 에바-사도, 선-악은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서로를 파고드는 궤적을 그린다.
세 명의 칠드런들을 개별적으로 들여다보면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먼저 이카리 신지의 경우 관계맺기에 매우 서투른 아이이다.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것이 없고 매사에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다음으로 소류 랑그레이 아스카는 인정욕구와 성취욕이 매우 강하다. 겉보기에는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주도적인 성격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역량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순간 극심한 자괴감에 빠진다. 끝으로 가장 요주 인물이라 할 아야나미 레이는 생래적으로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다. 때문에 필요하다면 자기파괴도 서슴지 않는다. 아야나미 레이는 인간의 합리성이 지닌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아야나미 레이는 과학자들의 야심과 합리성에 대한 과신 속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합리성은 잘 계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랐던 결실을 쉽게 맺지 못한다. 아야나미 레이를 실전에 투입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는데, 여기에 윤리적이고도 실존적인 문제들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언급하였다시피 이 세 인물의 뿌리는 어쩌면 동일하다. 상실. 공허. 부재. 소멸. 삭제. 이러한 ‘공(空)’이 가지를 뻗어나가면 외로움이 되고, 고독이 되고, 불안이 되고, 슬픔이 되고, 우울감이 된다. 이 세 명의 칠드런을 통해 <에반게리온>은 인간이 생래적으로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마음 속 텅빈 공간과 여기서 파생되는 고뇌를 잘 묘사하고 있다. 텅빈 공간의 심연은 너무나 깊고 까마득해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숨쉬면서 살아간다는 것, 누군가와 머리를 맞대며 눈을 마주한다는 것은 필시 그 심연을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내향적인 이카리 신지는 곧잘 현실도피적인 선택에 빠져들지만, 결국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 온다. 바로 그 시커면 심연이 까마득하더라도 여기서 도망치는 것은 해답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심연을 직시할 때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마치 우주 속 블랙홀처럼.
작품 속에서 에바가 싸우는 시대적 배경이 2015년 전후로 나오니 꽤 오래된 작품이다. 그리고 20년 앞선 ’95년에 만들어진 수작이기도 하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을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 속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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