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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왓챠피디아 취향분석을 보면 {완성도, 명작, OST}가 가장 큰 키워드로 뜬다. 그 다음으로 묶어볼 수 있는 한 그룹이 {연기력, 미장센, 영상미}가 있다. 또 다른 그룹으로는 {인생, 관계, 잔잔한}을 묶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꽁지에 달려 있는 외딴 키워드가 하나 있으니 이게 {블록버스터}다.
Block-buster. 말 그대로 구역(block)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만한 파괴력을 지닌 폭탄(buster)이라는 뜻이다. 1940년대 미국 영화계에서 처음 등장한 이 비유적 표현은 흥행몰이에 성공한 영화 또는 이를 목적으로 기획된 영화를 가리키는 영화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여하튼 나는 이런 블로버스터물들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이들 대부분은 액션물이다. 다만 기왕에 영화를 보는 김에 오래된 명작이나 숨겨진 영화들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다보니 <킹스맨> 같은 영화를 등한시할 뿐.
영양가 없는 넷플릭스에는 예상대로 <킹스맨>이 없었고, 영화를 볼 수 있는 루트를 찾기 위해 이것저것 검색해 보다 알게 된 것이 아마도 올해 <킹스맨>의 또 다른 후속편이 국내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블록버스터를 겨냥한 <킹스맨>의 배급사는 팬데믹 상황에서 수익을 많이 낼 수 있는 시점을 고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주연이 콜린 퍼스나 태런 에저튼도 아닌 랄프 파인즈이고 부제도 '퍼스트 에이전트(first agent)'로 달린 것을 보니 시점을 거슬러 올라간 지금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다루는 게 아닌가 싶다.
<킹스맨>의 첫 편, 그러니까 <킹스맨: 시크릿 서비스>가 국내 개봉한 것이 2015년. 영화를 챙겨보는 편인데도 이때 이런 영화도 안 보고 뭘하고 있었나 생각을 해보니 아마도 전역을 앞두고 있던 무렵이어서 놓쳤던 모양이다. 그리고 2017년에 속편 <킹스맨: 골든서클>이 나왔을 때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첫 편부터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같은 영어를 사용하고 같은 액션물이지만 영국을 배경으로 하면 느낌이 많이 달라진다. 결과적으로 재미있게 보았다. 다만 한때 <킹스맨>의 인기와 함께 회자되곤 했던 'Manner maketh man'이라는 말에 비해, '매너'라는 소재가 불필요하게 또는 피상적으로 쓰이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은 있다. 엄연히 왕족이 존재하는 영국이란 나라에서 한 편의 영화 안에 '매너' 개념을 쉽게 다루기는 어렵겠지만, 블록버스터로부터 이런 기대까지 충족하길 바라는 건 아무래도 욕심이다.
그렇지만 궁금증은 또 쓸데없는 방향으로 뻗어나가서 'manner'라는 말이 'man'에서 나온 것일까 찾아보기 시작. 'manly(남자다운)'이라는 형용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manner maketh man'이라는 문장의 두운이 잘 맞아서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지 않을까 또 다른 검색을 시작했다. 어원을 찾아본 바, 수단과 방법을 뜻하는 프랑스어 'manière'에서 왔으니 결국은 '손(手)'을 가리키는 라틴어에서 갈라져나온 말이라는 싱거운 결말로 끝이 났다. 글을 쓰다보니 킬링타임을 제대로 했음...
모름지기 여러 편의 시리즈를 한꺼번에 보아야 킬링타임이라 할 수 있는 법. 사실 속편 <킹스맨: 골든서클>은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약간 식상함이 느껴졌다. 일부는 갤러해드와 관련된 스토리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일부는 흔히 접해왔던 선악 대결에 대한 기시감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또 영화에 영국적인 색채는 줄어들고 그만큼 미국적인 색채가 가미되었다. 영국적인 느낌이야말로 <킹스맨>의 차별화되는 요소였는데 테킬라의 영입을 보면 앞으로도 컨셉 변화는 쭉 이어지려는 모양이다. (Stateman이라는 표현도 무슨 함의가 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평소 좋아하는 줄리앤 무어의 출연과 그밖의 좋은 출연진에 비해 스토리가 빈약한 느낌이 있어서 더 아쉬움이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좋았던 것은 앨튼 존의 우스꽝스런 연기 덕분이다. 서정적인 노래를 부르던 앨튼 존이 이런 캐릭터도 있었던가 하면서@_@(앨튼 존이 등장하는 씬마다 벙찌고 웃겼다)
보통 액션 영화에서 악인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인류 파괴를 목적으로 삼는 경우가 많기는 한데, <킹스맨> 속 악인들의 계획은 좀 더 섬뜩하다. 무차별적인 인간살상이 아니라 선별적인 인간살상을 구상하기 때문이다. 첫 편 속 악인(발렌타인)은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엘리트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두 번째 편 속 악인(포피)은 정상인만 지구에 남으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정상의 기준은 무엇일까?!) 어느 쪽이든 소수를 부양하고 보전할 수 있다면 다수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1798년 맬서스의 인구론에서도 이미 다뤄졌던 내용이고 그리 낯설지가 않다. 오히려 섬뜩했던 대목은 사이버 판옵티콘을 통해 이를 실행하는 것이 현실에 가능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기술 발전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기도 했지만, 개인에 대한 정보 통제를 아주 손쉽게 만들기도 했다. 또 이런 변화가 단지 '기술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별다른 비판이나 거부감 없이 점점 더 각종 테크놀로지에 의존한다. 이런 생각은, 마치 인간이 연장을 쓰게 되면서 농경이 시작되었고, 농경과 함께 정주생활이 본격화되면서 유목 시대에 경험하지 못했던 역병이 창궐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만큼이나 진부한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양복 안에 온갖 최첨단 무기를 두르고 있는 킹스맨 요원들을 보면 당연히 영화의 비현실성을 감안하면서 보면서도, 어떤 대목들에 있어서는 매우 현실에 존재할 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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