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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지중해 영화일상/film 2021. 7. 9. 23:22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소재로 한 영화다. 사실 나는 이 영화가 완전한 실화 기반인 줄 알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다 보고 났을 때 이게 실화가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본 뒤 이게 정말 모두 사실인지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더니, 에두아르드 스포크라는 극중인물이 다니엘 바렌보임이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다는 점 이외에는 모두 픽션인 것으로 보인다. 이 다니엘 바렌보임이라는 실존 인물은 베를린 슈타츠카펠레(Staatskapelle)의 지휘자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 아랍 청소년들로 구성된 서동시집 관현악단(West-Eastern Divan Orchestra)을 이끌기도 했었다.
다만 에두아르드 스포크는 나치 출신의 부모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다니엘 바렌보임은 정작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대인이다. 또 스포크가 나치의 과오를 반성하는 독일인으로써 중립적이면서도 동정적인 캐릭터로 나오는 것과 달리, 실제 바렌보임은 자신이 유대인임에도 팔레스타인인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한 독특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지휘자 역할을 맡는 스포크라는 캐릭터부터도 여러 면에서 각색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영화에는 주제의식과 눈에 띄게 설정해 놓은 컨셉이나 장치가 많다. 예를 들어 '남티롤(Südtirol)'이라는 무대배경이 그렇다. 남티롤은 이탈리아 안에서도 오스트리아적인 색채가 짙게 남아 있는 곳이고, 구성원들 다수가 이탈리아어가 아닌 독일어를 쓴다. 그런 남티롤은 지휘자인 스포크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2차 대전에서 나치의 패색이 짙어지자 나치를 위해 활동했던 스포크의 부모는 남미로 도항을 시도하지만 그들을 숨겨주었던 지역민들에 의해 사살되고 만다. 자신의 부모가 수용소에 유대인들을 가두고 화학적인 대량학살에 가담했다는 사실, 자신들을 돌봐주던 이들에 의해 목숨을 빼앗겼다는 사실들을 이야기하면서 스포크는 "인생이란 게 본디 모욕하고 그것을 견디는 것 아니겠냐"고 학생들에게 담담하게 반문한다.
영화에는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인이 서로에게 쌓인 적개심과 증오감을 분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대목은 약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에게 전승되어 온 내러티브에 대해 이야기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의 내러티브를 늘어놓는다. 후자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살던 땅을 빼앗겼던 것에 대해 느끼는 상실감과 분노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아랍인들의 만행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불안감을 토로하는 것은 조금 분노의 방향이 다른 것 같다. 유대인은 2차 세계대전 직후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영국과의 공조를 통해 시오니즘이 완전히 구현한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갖추게 된다. 이른바 벨푸어 선언으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탄생이 탄력을 받기 시작하고, 아랍국가들 한복판에 유대국가가 들어서면서 분란의 소지가 생길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 논리에서 볼 때, 2차 세계대전에서 커다란 희생을 치른 유대인들이 책임의 소재를 따지고 싶다면 나치나 승전국에 되물을 일로 아랍인들의 잘못으로 풀이할 일은 아닐 것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옛말이 떠오르는 대목.
물론 하마스나 헤즈볼라를 비롯한 주변국의 아랍 정권들이 원수 같은 유대인에게 비인간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고, 때로는 무능함과 부패함까지 보이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원인을 제공했던 사람들이 파생된 문제를 오히려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것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영화 속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극명한 빈부격차, 문화격차는 두 지역을 모두 여행할 당시에도 느꼈던 사실이다. 예루살렘에서 서안지구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낙후된 건물들이나 폐가가 급속하게 늘어난다. 다만 여행할 당시에는 영화에 소개되는 것처럼 서안지구를 왕래하기 위한 검문이 까다롭지는 않았었는데, 근래 유대인 마을이 대규모로 조성되고 분리장벽이 늘어나면서 분위기가 더욱 삼엄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반면 가자지구는 원래부터도 보안검색이 철저했다.) 반면 이스라엘의 실질적 수도인 텔아비브로 넘어가면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시원한 고층빌딩과 쾌적한 거리, 각종 문화시설까지. 사로나 지역 일대의 고층 빌딩숲과 바우하우스의 기하학적인 주택들이 어우러진 이 도시는 지중해 권역에서 바로셀로나보다도 더욱 다채롭고 현대적인 곳이다.
심지어 영화에는 오디션을 보러온 이스라엘 젊은이들과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의 음악적인 실력차를 드러내보임으로써, 공정함과 실질적 평등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까지 던지려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팔레스타인은 그 비좁은 땅에 450만 명을 웃도는 인구가 살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교육을 잘 받은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영화 속 라일라처럼 야망 있고 젊은이다운 포부를 가진 청년들도 있다. 팔레스타인의 수도인 라말라에서 만났던 두 젊은이들이 그러한 케이스다. 히브리어인 '예루살렘' 대신 아랍어 표현으로 '알쿠드스'라는 표현을 써달라고, 일본어인 '다케시마' 대신 한국 표기 '독도'를 써달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 이 두 젊은 여성들은 비록 히잡을 두르고 있었지만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남성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무슬림 여성상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영화에 잘 묘사되어 있다시피, 이 우수한 젊은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오랜 시간을 거쳐 켜켜이 쌓여온 적개심, 분노, 증오와 같은 감정들이다. 이들의 뛰어난 음악적 역량이나 지식도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오히려 기성세대가 아닌 젊은이들조차 증오를 당연시하고 정당화한다. 이들을 매개해주기 위해 스포크가 제시하는 것이 오케스트라라고 하는 비언어적 수단이지만, 선율과 박자로도 혐오와 분노는 지워지지 않는다. 마치 흡수력이 강한 스펀지처럼 모든 환경을 흠뻑 빨아들인 뒤, 이를 분노로 단단히 응축시키는 사람들 같다. 이런 혐오와 분노는 그러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이-팔의 현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까닭은, 이것이 이-팔 바깥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중해의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눈길을 약간 서쪽으로 돌려 서양 문명의 발상지 그리스와 로마 일대를 들여다보자. 근래 <트립 투 그리스>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이 <트립 투~> 시리즈는 반응이 괜찮았는지 벌써 네 번째 작품이다. 순서대로 보면 잉글랜드-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로 속편이 이어진다.
<트립 투 이탈리아>를 먼저 보고 <트립 투 그리스>를 보면 꽤 괜찮은 조합이지 않을까 해서 우선 <트립 투 이탈리아>를 보기 시작했는데, 결론적으로 <트립 투 그리스>까지 넘어가지는 못했다. <트립 투 이탈리아>, 재미는 있다. 그런데 이 두 재담가(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의 입답이 너무 쎄서 보다보면 두 편을 연달아 보는 건 좀 부담스러워진다.
첫 번째 작품이었던 <트립 투 잉글랜드>를 봤을 때는 낚였다고 생각했다. 잉글랜드에서의 고메 투어를 그린 영화인 줄 알고 봤더니, 음식은 그저 장식물로만 나오고 이 두 사람의 수다와 꽁트로 빈틈없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그마저도 개그 코드를 어디에 맞춰야 하나, 이게 뭔가 싶었다. <옵서버> 지의 요청으로 일주일 남짓 미식 여행을 한다는 컨셉은 갖고 있지만, 이들이 음식에 대해서 내리는 평이라고는 '어때?', '맛있어' 정도가 전부다. 음식을 조리하는 장면은 드문드문 등장하고 음식에 대한 자세한 소개도 없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영화는 그저 코미디로 볼 때 재미있게 볼 수 있다.
그런 교육효과(?) 덕분에 <트립 투 이탈리아>는 <트립 투 잉글랜드>보다 더 편안하게 감상했다.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밑도 끝도 없이 얼토당토 않은 농담을 버무려내는 게 이 두 남자가 완수해야 할 미션인 동시에 이 영화의 묘미이다. 그리고 이 둘의 호흡은 가히 환상적이다. 높은(?) 기대치를 내려놓고 보면 생각보다 즐길거리가 많은 영화라는 점은 이미 밝혀 두었는데,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다가 웃었던 여러 지점들 중에서 첫째 롭 브라이든이 마피아 회계사 역을 따내기 위해 오디션을 준비하는 장면과 둘째 폼페이 유적지에서 마찬가지로 롭 브라이든이 독백하는 장면이 가장 웃겼던 것 같다. 아무리 웃기다고는 하나, 개그를 위해 카프리섬과 아말피 해변, 친퀘테레, 피에몬테, 폼페이의 수려한 풍광이 동원된다는 게 웬말인가'a'(ㅋㅋ)
이들이 성대모사 하는 인물들만 해도, 톰 하디, 크리스천 베일, 알 파치노, 말론 브란도, 휴 그랜트, 앤소니 홉킨슨, 심지어 마이클 부블레 등등 셀 수 없이 많다. 다른 한편으로 알차다고 느끼는 부분은 영화의 OST다. 이 영화에서 캐나다의 여가수 앨러니스 모리세트를 건질 수 있었다. 에이브릴 라빈의 올드 버전이라고 소개되는 이 가수의 노래 중에 몇몇 들을 만한 곡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조지 고든 바이런 경과 퍼시 비시 셸리의 교우 관계에 대한 부분다. 체제의 반항아였던 두 시인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스티브 쿠건-롭 브라이든과 늘 함께 따라다닌다. 스티브 쿠건이 잠들기 전마다 바이런의 시집을 들춰보지만 시집은 영화의 초반부터 후반부까지 계속 초반부에 머물러 있고, 그마저도 쿠건은 책을 펼쳐든 채 곧 수면상태에 빠진다는 것, 바이런의 일탈과 사생활을 두고 뜬금없이 돈 후안을 찾는 다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 영화 안에서는 이런 파괴적인 태도들이 하나의 유머로 승화된다. 이 영화에서는 유머로 승화되지 않는 게 단 1도 없다. 죽음도 불행까지도.
어쨌든 바이런과 셸리의 작품 모두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이 영화 안에서 잠시 마주쳤으니 언젠가 두 시인의 작품을 읽는다면 적어도 까마득하게 생소한 느낌은 없지 않을까. 그나저나 다시 팬데믹이 확산세로 돌아서면서 매해 여름에 진행되었던 아랍영화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각설하고 지중해 연안의 서로 다른 두 국가의 서로 다른 풍광을 담은 영화에 대한 중구난방 포스팅은 여기서 마무리한다.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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